힘 센 여자





ꡒ여기 하나 더.ꡓ 

여자는 맞은편 테이블을 닦고 있던 종업원에게 다 마신 소주병을 흔들며 말했다. 식당 벽에 걸린 둥근 벽시계 바늘은 밤 10시를 막 지나고 있었다. 20대 초반의 아르바이트생으로 보이는 가냘픈 여자아이 하나가 주방 출입문 근처에 있는 냉장고의 유리문을 열고 소주를 한 병 꺼내 그녀들이 앉은 테이블로 다가왔다. 

ꡒ더 필요하신 거라도.ꡓ  

ꡒ아니.ꡓ 

새 소주를 건네 받은 여자는 고개를 흔들며 말한 뒤 병 뚜껑을 테이블에 있는 재떨이에 던졌다. 사각 유리로 된 재떨이에 미쳐 들어가지 못한 뚜껑은 바닥에 떨어졌다. 종업원이 다가가 몸을 숙이고 뚜껑을 집었다. 짧은 반바지에 훤히 드러난 하얀 허벅지가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테이블에 앉아 있는 여자들은 떠들다 말고 일제히 그 종업원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종업원의 긴 다리에 머물고 있는 여자들의 시선에서 시기와 짜증이 스며있는 것 같았다.

ꡒ그래, 저런 년들이란 말이지. 쟤처럼, 잘빠진 것들 있잖아.ꡓ

ꡒ저런 년들? 저렇게 삐쩍 꼴아 가지고는 무슨 일을 한다고!ꡓ

여자들은 여전히 종업원에게서 시선을 거두지 못한 채 말을 이어 나갔다. 여자들의 수다를 들었는지 어땠는지 종업원은 말없이 맞은편 테이블로 돌아가 식탁을 닦기 시작했다. 그녀들은 한잔을 죽 들이키고 다시 채웠다. 시간이 지나 식기 시작하는 순대 국에서 돼지 혓바닥 하나를 찾아 내 새우젓에 살짝 찍어 입에 넣고 씹으며 두꺼운 통 유리로 된 벽을 통해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ꡒ이 딴 거 못 먹는 년들도 있더라.ꡓ

자신의 국밥 그릇에서 두툼하게 썰어진 순대를 찾아낸 한 여자가 깍두기 국물이 묻은 입술을 비틀며 말했다.

ꡒ왜, 그때 알지? 점심 때 식당에서 순대 국이 나오니까 그 년이 못 먹는다고 난리 치는데.  그런 난리도 없었어. 나이도 젊은 년이 얼른 일해서 돈 모을 생각은 안하고, 놀기 위해 마  트 다니는 것인지...ꡓ

ꡒ그래도 걔 예쁘잖아. 팀장이랑 조장이 좋아서 껌뻑 죽더라.ꡓ

여자들은 술을 마시다 말고 일제히 한숨을 내 쉬었다. 주말이 아닌데도 다 같이 모여 술을 마시는 이유는 나름대로 있기 마련이었다. 더군다나 결혼한 여자들 아니던가. 그런 여자들 다섯이 벌써 소주 네 병을 마시고 있었다. 여자들은 마음이 편치만은 않았다. 술 마시는 내내 벽에 걸린 시계를 쳐다보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는 노릇이었다.

ꡒ예쁜 게 좋은가, 뭐 좋기도 하겠지. 쳐다보면 즐겁잖아ꡓ

ꡒ언니, 그게 뭐가 좋아. 우리 하는 일이 얼굴 갖고 하는 일인가. 힘이 있어야지! 삐쩍 마른   년들은 힘없어서 매일 우리가 일 더 많이 하잖아. 팔뚝 힘 좋아서 물건 정리만 잘하면 됐   지. 거기에 잘 빠진 여자가 왜 필요한데!ꡓ

ꡒ그케 말이다. 미라야, 기억나재? 가가 일 하다 말고 후네낀다 카니 팀장이 눈이 벌개 가지   고설랑은......쯧. 그 가스나 얍삽하게 구는 거이 모르고 말이다. 마알라꼬 그케 사는지.ꡓ

영천에서 인천으로 온 지 4년밖에 안 되었다는 한 여자가 낮에 있었던 일을 말하기 시작했다. 다들 그 일 덕에 화가 나 있던 참이었다. 일만 열심히 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여자는 눈웃음도 칠 줄 알아야 하고, 사내 놈 가슴팍에 앵길 줄 알아야 하는 것이었다.

ꡒ맞아. 언니. 아까 진짜 팀장 그 자식 장난 아니더라고. 그 년이 힘들다고 그러면서 눈웃음   살살 치니까 껄걸 웃더라고. 기가 막혀서. 힘도 없는 년이 뭐 할라고 이런 일을 하는 건지.   그렇게 약하면 아예 집 안에 가만히 있던가.ꡓ

여자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자신들 팔뚝을 들여다보았다.

ꡒ나도 왕년엔 전지현 저리가라였어. 얼마나 날씬했는데! 개미허리였지. 남편이랑 연애할 때   말이야. 그 인간이 내 허리 감싸는 걸 얼마나 좋아했는데.ꡓ

ꡒ뭐? 너가? 정말?ꡓ

ꡒ설마, 언니 결혼한 지 십 오 년이라며. 십 오 년 동안 몸무게가 곱절이나 불칸디?ꡓ

소주잔을 부딪치는 여자들 중 가장 몸집이 큰 여자가 말을 하자 다들 웃기 시작했다.

ꡒ이것들이! 결혼한 지 십 오 년 동안 내가 곱게만 있었겠냐? 애새끼를 둘이나 퍼질러 놨    지. 남편이라고 하나 있는 것은 돈도 버는 둥 마는 둥 해서 마누라 일 시키지, 거 뭐냐. 시   댁이란 곳은 말이다. 이거 해달라, 저거 해달라. 뭐 며느리를 지들 봉으로 생각해요. 아주    그냥! 내가 정말 그 인간이랑 십 년 넘게 살면서 는 거라고는 이 살들이랑 욕밖에 없다.ꡓ

순대를 우적우적 씹으며 말하는 여자는 자신의 팔뚝을 높이 쳐들었다. 노란색 셔츠의 소매 사이로 여자의 늘어진 살과 다듬지 못한 겨드랑이 털이 보였다.

ꡒ내 니 맘 다 안다. 니만 고로콤 살았간디. 내도 마, 말 마라. 영천에서 이 십 년 가까이 살   다가 다 망해불꼬, 인천으로 와 가, 여적지 불알에 요롱소리 나게 산다 안카나.ꡓ

여자들은 소주잔에 영천언니의 말을 담가 들었다. 얼큰한 순대 국과 소주 몇 잔에 여자들 인생이 흔들리고 있는 것만 같았다. 사는 것이 다 그러해도, 여자들 팔자야 다 똑같다 해도, 돈 없는 여자들 팔자란 길가에 널린 개똥만도 못한 것 아니었는가. 열심히 모아도 모자란  것이 돈인데, 하물며 돈 없고 못 배운 여자들이 어디 가서 대접받고 산다는 소리는 아무도 들어보지 못했던 것이다.

ꡒ그런데, 언니. 아까 마트에서 팀장새끼 정말 한 대 패주고 싶더라. 젊은 놈이 꼴에 사내라   고 어깨에 힘 주는 것 보니까, 정말 속이 뒤집혔어. 에휴. 우리가 말이야. 몇 년씩 마트에서   물건만 나르다보니까 이 놈이 우릴 우습게 보나 봐. 사내라면 정말 지긋지긋해.ꡓ

ꡒ대가빠리 소똥도 안비끼진 것들이 붙어설랑, 눈 꼴 시리다.ꡓ

영천여자의 심드렁한 대꾸에 테이블에 앉아 있던 여자들이 깔깔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인생이란 평생 살아도 울다가 웃는 일이 전부라고 했다. 울 일이 생기면 웃는 일이 생기는 것이 인생사라고는 하지만 사는 일이 그다지 달콤하지만은 않은 것이 우리들 인생이었다. 가녀린 팔뚝 안에서 애들 키우고, 시집살이 하다보니 인생의 반이 훌쩍 지나가 버렸다. 힘 하나 의지해서 자식들 키워냈음에도 여전히 모자라고 모자란 것이 사랑인지라 다들 마트로 몰려나왔다. 어떻게든 버는 사람 하나라도 더 늘어야 한다는 것이 여자들의 공통 된 생각이기 때문이었다. 노상 움직이는 덕분에 알이 벤 팔뚝을 주무르다가도 집에 있을 애들 생각에 뒤돌아 웃을 수 있는 여자들이었다.

ꡒ에휴, 벌써 12시다......ꡓ

여자들은 일제히 벽에 걸린 시계를 바라보았다. 집에 있어야만 하는 시간이지만 아무도 일어나려 하지 않았다. 살다가 하루쯤 이런 날도 있어야지, 여자들은 다들 그렇게 생각했다.

몸집이 큰 여자가 빈 소주병을 들고 팔뚝을 들어 올렸다.

ꡒ여기 하나 더.ꡓ

그녀의 필요 이상으로 큰 소리에 놀란 듯 여자 종업원이 눈을 둥그렇게 떴다. 가느다란 팔뚝을 가진 종업원이 소주 한 병을 들고 왔다. 여자들은 하나같이 껄떡한 눈을 한 채 잔을 들었다. 힘깨나 써 보이지만 서글픈 팔뚝들이 서로 부딪쳐 왔다.

ꡒ아이고 돈도 기러분데...언제 한번 돈 안짜치게 살아보꼬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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