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을 위한 30분





오전 9시 30분, 단정하게 조끼를 갖춰 입은 사람들이 하나 둘 씩 자기 자리 앞으로 갔다. 머리를 매만지고 조끼에 묻은 먼지를 탁탁 털며 일제히 웃는 연습을 하기 시작했다. ꡐ안녕하십니까, 어서 오세요.ꡑ속으로 수 십 번 되 뇌이며 입술을 양쪽으로 둥글게 말아 올렸다. 흡사 두꺼비 주둥이 같은 두툼한 것들이 마흔 살 먹은 여자의 얼굴에도 스무 살 먹은 여자의 얼굴에도 투박하게 붙어 있었다. 더러 하품하는 사람들도 보였지만 검은 정장을 입고 직원들의 용모단정을 체크하며 돌아다니는 팀장 덕분에 이내 사라지고 만다. 사람들은 모두 이 시간을 지겨워했다. 손님들을 맞이하기까지 남은 30분 동안 ꡒ믿음직하고 든든한 이웃 같은 마트ꡓ를 위해 오늘 하루도 열심히 뛰어야만 한다는 것을 수 십 번 들어야하기 때문이었다.

ꡒ하이고 마, 디게 지업다.ꡓ

늘어지게 하품을 하던 영천여자가 귀를 후비며 한 마디 했다. 팀 내의 인기스타답게 툭툭 내뱉는 사투리는 우리가 하고 싶은 말을 속속들이 알아서 해주고 있었다. 역시나 오늘도 영천여자는 틈을 보이지 않는다. 사람들은 일제히 큭큭거렸다.

ꡒ마할라꼬 웃노! 마안노무자식들..ꡓ

사람들은 영천여자의 말을 시작으로 팀장의 눈치를 보면서도 각자 하고 싶은 말을 하기 시작했다. 지겨웠던 참에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ꡒ졸리다, 그치?ꡓ

ꡒ메친년, 밤에 뭐하고 이제사 졸립다냐~간밤에 근질거렸던 일이 있었구만, 큭큭ꡓ

입에서 나오는 말의 반 이상이 욕으로 되어있다는 서른 살 여자가 내 허리를 쿡쿡 찌르며 말했다.

ꡒ언니도, 참. 간밤에 뭔 일이 있다고! 있었으면 좋겠다. 허구한 날 12시에 끝나는데 근질거릴 일이 뭐가 생겨..하아흠ꡓ

나는 간밤에 있었을 것만 같았던 일을 상상하며 길게 하품을 했다. 정말이지 마음 같아선 아무데서나 드러누워 자고 싶었다. 12시에 끝나 택시 타고 집에 오면 돌아오기가 무섭게 자버리고 마는 요즘 생활이었다.

ꡒ삐가리같은 아들이 꼬대긴다. 쯧, 가아 눈깔 돌아가는기 봐라. 하이고 마, 불앙타!ꡓ

여기저기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듣기 싫었던지 팀장은 한쪽 손에 들고 있던 서류철을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족쇄가 머리 위로 올라왔다. 사람들 두 눈에 깎인 월급명세서가 왔다 갔다 했다. 저 서류철은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는 족쇄였다. 저것에는 팀 전체 인원의 신상명세와 팀장의 눈으로 바라본 사람들의 평가가 적혀있었다. 서류철의 행방을 우리 같은 아랫것들이 알 길은 없지만 틀림없이 사원관리팀으로 넘어갈 것이다. 우리는 저 서류철을 두려워했다. 팀장의 찢어진 두 눈보다 검은 정장보다 무서운 것이 서류철임을 잘 알고 있었다.

시간은 10시를 향해 가고 있다. 30분 동안 지겹도록 듣는 ꡒ믿음직하고 든든한 이웃 같은 마트ꡓ에 대한 연설은 끝날 줄을 모르고 계속 되고 있었다. 나는 머리가 울퉁불퉁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개점 시작 30분 전, 폐점 후의 30분은 우리에게 지옥 같은 시간임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다. 왔다 갔다 하는 팀장의 눈과 손은 먹이를 낚아채는 독수리의 날카로운 발톱 같았다. 그는 단 한치의 오점도 남기지 않기 위해 사람들의 겉모양을 훑고 또 훑었다. 때로는 치마 입고 온 여자들의 다리를 훑는가 하면, 화장하는 것을 빼먹고 온 여자의 얼굴을 한심하게 쳐다보곤 했다. 오늘 그는 한심한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화장 없이 맨 얼굴로 나타난 저 여자가 우습다는 표정이었다. 나를 한참이나 쳐다보고 있던 그가 서류철에 뭔가를 적기 시작했다. 아마도 용모가 단정하지 않음, 정도가 적혀 있을 것이다. 날카로운 그의 손은 진흙길을 달려가는 트럭처럼 출렁거렸다. 저 서류철 속에 얼마나 많은 내가 엑스표가 되어 있을지 문득 궁금해졌다. 팀장은 다시 연설을 시작했다.

ꡒ사람을 상대하는 직업을 가진 여자들이 화장을 하는 것은 기본 아닌가, 저런 맨 얼굴로 사람 상대하면 불쾌해 한다는 것도 모릅니까?ꡓ

나는 그때까지 들고 있던 고개를 푹 숙였다. 깨끗하게 닦여 있는 하얀 바닥은 비가 오는 하늘처럼 부옇다. 에어컨 바람을 타고 젖은 고무 타이어 나는 냄새가 내 눈가에 달라붙었다. 고개를 주억거리며 뚝뚝 떨어지는 하얀 비를 보았다. 가을비가 두 눈에 달라붙어 떨어 질 줄을 몰랐다. 아마도 스팀으로 물기를 말려야 할 것 같았다. 그때, 옆에 서있던 영천 여자가 손을 뻗어 내 허리를 쓰다듬었다. 검붉은 손금이 그려 있는 여자의 손은 꺾인 나뭇잎처럼 생명이 느껴지지 않는다. 남자의 손이 날카로운 면도칼처럼 사각사각 거린다면 영천여자의 손은 푹신한 솜덩이 같은 살결이 느껴졌다. 친절하고 따스한 여자의 마음을 그대로 표현하듯 꺾인 나뭇잎 같은 영천여자의 손에는 거짓이 없는 것 같았다.

ꡒ괘안타, 니도 깐지게 구루라. 뿔땅굴 나두 참아야지. 우야던둥 전디야지, 아암. 전디야 살지. 그라도 니 노박 애뭇는거 보믄 차마타.ꡓ

영천여자의 말은 섬유질처럼 푸석거리는 내 마음 속에 흡수되었다.

오전 10시, 건물 전체에 경쾌한 음악소리가 울려 퍼졌다. 사람들은 양손을 가지런히 포개서 아랫배에 갖다 댔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자 사방으로 둘러 쌓여 있는 커다란 문이 일제히 열리기 시작했다. 어서오십시오. 믿음직하고 든든한 이웃 같은 ○○마트입니다. 즐거운 시간 보내시기 바랍니다. 고운 목소리가 건물 전체를 가득 매었다. 우산을 든 손님들이 하나둘씩 들어오기 시작했다. 우리는 일제히 허리를 숙였다. ꡒ안녕하십니까. 어서 오세요.ꡓ90도까지 숙여진 허리 위로 묵직한 이물감이 느껴졌다. 또각또각, 제각기 다른 소리를 내며 수 십 개의 신발들이 지나갔다. 오늘 하루, 우리가 봐야만 할 신발들이 얼마나 많을지 속으로 가늠해보자 헛웃음만 나왔다. 이런 거 따져 봤자 피곤하기만 하지, 뭐. 우리들은 무거운 허리만큼 체념이 빨라서 금방 일어나곤 했다.

ꡒ안녕하십니까. 어서 오세요.ꡓ



오전 8시 40분이었던가. 횡단보도 옆에서 살짝 몸을 틀면 사방에서 불어오는 검은 물줄기가 가로로 긴 대형 빌딩 꼭대기 위 더 높은, 회색 빛 하늘로 스카이 스크린처럼 떠올랐다. 허공을 질주하듯 거리에서도 자유롭게 끗발 날리던 나의 마음은 무거운 발을 이끌고 더 높은 곳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는 차 오르는 숨을 내 쉬고 사면체 커다란 상자 곽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깨끗하게 닦여진 도로 위에는 각양각색의 차들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건물 앞에 도착했을 때 온 거리는 회색 빛으로 바뀌어 있었다. 어찌 보면 흡사 검은 색 같은 빗줄기가 무섭게 내려치고 있었다. 두 발을 건물 안으로 들이밀었다. 머리를 쳐대던 빗줄기가 발끝을 휘감고 따라들어 오려는 묵직함이 느껴졌다. 나는 정문 앞에 서서 머리에 묻은 빗줄기를 탁탁 털어 냈다. 화장기 없는 맨 얼굴이 걱정돼 주머니에 넣고 다니던 선크림을 살짝 찍어 발랐다. 거추장스런 얼굴은 오늘도 여전히 텁텁했다. 발끝을 감고 있던 빗줄기를 걷어 내고 문안으로 들어갔다. 믿음직하고 든든한 이웃이 되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 비장한 표정으로 왔다갔다하고 있다. 이제 막 이웃을 위한 30분이 시작되려는 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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