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36』 3-1 밤의 밑바닥에 나의 눈꺼풀이



-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 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1)



탁. 읽고 있던 책을 덮고 일어났다. 나른한 몸을 가볍게 흔들어 주고, 식은 커피를 두 번에 나누어 마셔버렸다. 책상 위에는 『설국』이 나뒹굴고 있었다. 9시, 사람들이 몰려 올 시간이 다가오자 불순한 물질이 고개를 내밀고 내 가슴을 헤치며 돌아다니고 있었다.

콕콕, 찔러대고. 톡톡, 두드리고. 살짝, 갸웃, 뻐근하게.


의식하지 않아도 문 쪽으로 향하는 고개가 아팠다. 양 끝으로 나 있는 두 개의 문을 번갈아 쳐다보다가 문소리가 나는 것 같으면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리곤 했다. 반복되었다. 보려하지 않아도 보게 되는 짓과 돌리려 하지 않아도 돌리게 되는 짓이 수없이 반복되었다. 출근시간의 이곳은 한산하다. 찾아오는 사람도, 걸려오는 전화도 드문 시간이기에 한낮의 열기는 전혀 찾아볼 수 없이 싸늘했다.

- 어? 오늘도 일찍 왔네? 도대체 집에서 몇 시에 나오는 거야?

제일 먼저 출근하는 김이 오른 손을 흔들며 들어왔다. 안녕, 오늘도 여전히 졸린 것 같은 얼굴로 대충 인사를 건네받았다. 아침마다 인사하는 건 너무 귀찮아. 책상 위에 올라 와 있는 『설국』을 쓰다듬으며 머리를 흔들었다. 김이 들어 온 이후로 사무실은 조금 분주해졌다. 점벙점벙, 그는 사무실 이곳저곳을 걸어 다녔다. 김에게서는 걸을 때마다 소리가 났다. 물길을 걷는 것 마냥 점벙대는 소리는 그의 큰 팔다리에서부터 흘러나왔다. 오른팔과 왼다리에서 점벙, 왼팔과 오른쪽다리에서 또다시 점벙. 흡사 씩씩함 같은, 김의 점벙점벙은 자신의 열정을 알리는 씩씩함이었다. 여전히 점벙거리며 분주한 김이 어색하게 서있는 내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 커피한잔 할까?

그의 말에 나는 웃으며 따라나섰다.

- 집에서 몇 시에 나온 거야?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으며 김이 말했다.

- 음, 아홉시까지 출근하는 날은 보통 첫차타고 나와요.

그가 커피를 내밀었다. 따뜻한 기운이 손바닥에 느껴지자 기분 좋은 숨이 살짝 나왔다. 

- 대단해. 나 같으면 그렇게 못하는데. 어제는 몇 시에 들어갔어? 우리 마지막에 헤어진 게 열두시 넘은 시간 아니었나?

- 맞아요. 서울역에서 막차타고 갔어요. 집에 가니까 두시쯤 된 것 같았어요.

어제는 새벽까지 술을 마신 뒤 들어갔다. 정신없는 상태로 집에 도착하니 두시였다. 몸에서 나는 술 냄새와 담배 냄새에 피곤한 상태에서도 샤워를 했었다.

- 그래서인지 너무 졸려요. 자고 싶어요. 회의 빨리 끝내고 자면 안될까?

김과 나는 창가에 앉아 커피를 홀짝대고 있었다. 금요일 오전에 하는 회의는 10시에 시작한다. 물론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제대로 된 시간에 시작된 적은 없었다. 늘 한두 시간 씩 미뤄지는 것은 기본이고, 심지어는 하루가 통째로 미뤄져 토요일 오후에 한 적도 많았었다. 10시가 다 되어 가는데도 사람들이 나타나질 않는 것을 보면 오늘도 미뤄질 터. 심지어는 괜히 일찍 나왔다는 생각마저 들게 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 모야, 아직도 다 안왔네. 어찌 된 겨?

강당 문을 열고 들어오는 최의 손에는 담배가 들려 있었다. 담배를 쥔 손이 분주해 보였다. 어쩌면 그는 오늘도 하루 종일 분주하게 지낼지도 모른다. 담배를 쥐었다가 핸드폰을 쥐었다가 연필을 쥐었다가 키보드를 끼고 반나절을 끙끙거리다 가방을 휙 집어 들고 훌쩍 나갈 것이다. 그렇게 훌쩍 나가버릴 최의 손에는 분주함이 들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최가 나가버린 자리엔 쥐다 만 분주함이 스무 개 정도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최가 왔다. 여전히 분주하게.

- 안녕.

최와 김은 서로 반갑게 담배를 나눠가졌다. 양쪽에서 불어오는 담배 연기가 싫지만은 않았다. 그러고 보면 저들의 담배는 늘 기분 좋게 만들었다. 살짝 베인 담배 냄새가 내 코까지 타고 들어오는 그 알싸함이, 내가 가질 수 없는 것들을 갖고 있는 그들에게 다가갈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인 것 같기만 했다.


나른했다. 그들과 함께 한 오전은 몽롱한 담배 연기 속으로 빠져드는 것 같았다. 불순한 물질은 여전히 톡톡, 나불거렸다. 불순한 물질이 박힌 것처럼 예기치 않게 요동치던 마음이 또 어느 순간 툭, 터져버릴 것 같았다.


예기치 못한 순간에 불가해한 방법으로 툭툭. 삶이 나를 두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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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36』- 그날, 나에게 일어난 일




그 날, 나에게 일어난 일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시작은 여느 날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오전 8시. 나는 아직 졸음이 떨어지지 않은 눈을 부비면서 사무실 문 쪽을 바라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문이 휙 열리면서 낯익은 그들의 모습이 보였다.

- 어? 일찍 왔네요.

키가 큰 그가 똑바로 선 자세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란 척 말을 걸었다.

- 뭐야, 새벽별 보기 운동하는 거야? 왜 이리 일찍 와.

- 안녕하세요.

나는 대충 인사를 건네받았다. 책상 바로 옆 거울 위 시계가 막 8시 10분을 지나려던 참이었다.

거기까지는 어제도 그제도 똑같았다. 늘 똑같은 시간에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자리에 앉아 있으면, 똑같은 그들이 동시에 나타났다. 그렇지만 8시경, 그들이 가방을 들고 문 앞에 섰을 때, 나는 어제와도 다르고 당연히 그제와도 다른 감정을 맞이해야만 했다. 내일을 미리 볼 수 있다면 내일과도 물론 다를 어떤 것. 나는 먹다 만 커피를 한꺼번에 쏟아 부은 뒤, 생각했다.

뭔가 이상한 것이 내 안에서 생겨날 것만 같아.

그 뿐이었다. 밑도 끝도 보태고 빼고도 없는 그 뿐. 36의 그들이 오전 8시 경 나타나자 내 마음이 술렁거리기 시작했고, 그들을 바라보는 내 눈이 요동치기 시작했고. 뭐라 말하든 어찌 되었든 8시경에 만난 그들이 자기 자리로 가 앉았고. 다시 우르르 일어나 담배 한대 피러 빠져나갔고. 바로 그 뿐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술렁거리고 요동치는 내 상태의 원인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다. 그래서 여느 날과 다름없이 그들을 따라 강당 쪽으로 걸음을 옮기다가, 문득, 예전의 감정을 기억해 냈다. 너무너무 닮고 싶었던 그들의 모습과 나의 감정을 기억해냈다. 쿵쿵쿵 튀어 올랐던 가슴과 콩콩거렸던 내 발걸음을 기억해 냈다. 순간, 아찔했다.

나는 강당으로 가려던 발길을 다시 돌렸다. 저 문만 지나면 그들이 내뿜는 담배연기와 웃음과 허탈함과 열정과 그 모든 것들과 함께 할 수 있을 테지만 거기까지 갈 수가 없었다. 술렁이는 눈과 마음이 나를 다시 자리에 가 앉게 했다. 예기치 못한 감정이었다. 요동친다는 것이 이런 것이라고 다짐이라도 받듯. 크고도 단호한 그 감정은 내 것이 아닌 것 같았다. 낯설고 돌연한 어떤 이물질이 내 몸에 박힌 것이다. 불순한 물질이 박힌 내 마음은 어색했고, 뭔가 봐서는 안 될 것을 목격한 것처럼 스스로 죄스런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문득, 내가 왜 이러고 있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나는 그 마음을 멈추기가 힘들었다. 아침 바람은 서늘했고, 빛은 적당히 밝은 기운으로 유리창을 두드리고 있었다.


-흠, 따뜻해. 오늘은 별로 안 춥네.

옆자리로 다가오며 그들이 말을 건넸다.

-오늘 추운데요? 난 얼어 죽는 줄 알았어요.

창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따뜻하기는 무슨, 나는 이렇게나 서늘한데. 그러고 보니 벌써 겨울이 시작되려 한다. 봄에 이곳에 와서 여름과 가을을 버티는 동안 36을 달기 위해 무던히 애를 쓰다가 26의 겨울까지 다다랐다. 애 쓴 보람도 없이 날은 서늘했다. 날이 차가워지자 창  밖의 나무들이 따뜻한 기운을 뿌리 끝부터 끌어올리려 흔들리고 있었다. 그리고 손바닥보다 더 큰 잎사귀들은 누렇게 탈색되어 가고 있었다. 잎을 털어낼 수록 나무들은 제 안의 열기를 뽑아 올려 겨울을 날 것이다. 그렇다면 나도 발끝에서부터 열기를 끌어올려 겨울을 나야 하는 걸까. 나는 왼손으로 만지작거렸던 핸드폰을 책상위에 살며시 올려놓고 바쁜 척 파일 하나를 꺼내 들었다. 일 없이 뒤적이는 손길이 영 어색했다. 이 공간은 온통 자판 소리로 넘쳐 났고, 몇몇 사람들은 빠르게 담배를 피기 위해 들락날락 했으며, 16개 책상 위에 올라와 있는 전화기들은 쉼 없이 깜빡거리고 있었다. 나는 팔목에 감긴 시계를 내려다 봤다. 9시. 시계에서 눈을 거둬 뒤를 돌아보았다. 등을 돌리고 앉아 있는 세 명의 사람이 똑같은 포즈로 꼿꼿하게 앉아 모니터를 노려보고 있었다. 분명 양 손은 날카롭게 자판을 쥐고 있을 터,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그들의 앞모습에 헛웃음이 나왔다. 세 개의 크고 작은 등이 동시에 숨을 쉬고 있었다.

-뭐해?

뒤 돌아 멍하니 있던 몸을 돌리는데, 턱, 하고 누군가가 내 어깨를 건드렸다.

-에? 

나는 옆을 쳐다보았다. 장난기 가득한 모습의 그들이 손을 흔들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냐고.

나는 그들의 흔들리는 손을 보며 온 몸의 감각이 일어나는 것을 느꼈다. 왜 이러지? 술렁이는 눈과 떨리는 손가락과 요동치는 마음을 또다시 느낀 순간, 눈앞에 섬광이 번쩍였다. 짧은 폭발이 내부에서 일어난 것 같았다. 이야말로 내가 알지 못하는 것. 나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내부에서 일어난 작은 폭발에 온 신경을 집중시켰다.

-또, 또! 무슨 일 있어? 얼굴이 안 좋아.

걱정스런 그들의 표정을 바라보았다. 비교적 온순하고 평탄하게, 소심하고 성실하게 살아온 내가, 내부에 숨은 작은 불꽃을 그렇게 강하게 터뜨리게 될 줄이야 어떻게 알았겠는가. 나는 갸웃거렸다. 그런데 왜 하필 이 곳, 이 시간일까. 문득 아직도 손바닥에 미열로 남은 아까의 뜨거운 열기가 두려워졌다. 여전히 아침 햇살은 기분 좋게 비쳐들고 있었고, 책상 옆 시계는 10시를 향해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10시, 책상위에 가지런히 놓여있던 핸드폰이 드르륵거렸다. 나는 양손을 가지런히 비비며 핸드폰에 오른손을 갖다 댔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자 온 몸을 감싸고 있던 공기가 싸늘해지는 것 같았다. 조용히 슬라이드를 밀어 올리고, 문자 버튼을 꾹 눌렀다.

『......그렇다고 대답할거야. 넌 어때?』

이것이다! 나는 요동치는 마음을 또다시 느끼며 문자 메시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메뉴버튼을 눌러 영원히 지워지지 않도록 했다. 설령 핸드폰을 버리게 되더라도 이것만은 지워지지 않도록.


......

자, 정리를 해보자. 불순한 물질이 박힌 가슴을 따로 떼어 내 구석구석 살펴봐야 할 일이다. 그 날, 내게 박힌 불순한 물질이 무엇인지, 그리고 왜 그리 요동치고 있었는지 세밀하게 조사해 봐야 한다.


그 날, 오전 7시 40분이었던가. 횡단보도 옆에서 살짝 몸을 틀면 사방에서 불어오는 파란 물줄기가 가로로 긴 대형 빌딩 꼭대기 위 더 높은, 회색 빛 하늘로 스카이 스크린처럼 떠올랐다. 허공을 질주하듯 거리에서도 하늘거렸던 나의 마음은 무거운 발을 이끌고 더 높은 곳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는 차오르는 숨을 내 쉬고 사면체 커다란 상자 곽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깨끗하게 닦여진 도로 위에는 각양각색의 차들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건물 앞에 도착했을 때 온 거리는 차가운 푸른빛으로 바뀌고 있었다. 어찌 보면 흡사 날카로운 칼 같은 빛이 두 눈을 강하게 찌르고 있었다. 천천히 두 발을 건물 안으로 들이밀었다. 두 눈을 쳐대던 시퍼런 빛이 발끝을 휘감고 따라들어 오려는 묵직함이 느껴졌다. 나는 정문 앞에 서서 퍼런 빛줄기를 탁탁 털어 냈다. 발끝을 감고 있던 빛줄기를 걷어 내고 문안으로 들어갔다.

지워지지 않는 문자로만 채워진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심호흡을 했다. 혹시라도 또 올지 모르는 그것을 위해 핸드폰을 가지런히 주머니에 넣었다. 하나, 둘, 셋. 천천히 숨을 내쉬고 들이쉬며, 한 발 한 발 내딛었다. 살포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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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36』- 공간이 내게 주는 짧은 단상


- 윤진영


시작. 


- 너 지금 뭐하고 싶어?

그녀가 물었다. 새초롬한 표정으로 하얀 손가락을 살며시 들어 귀 뒤로 머리를 쓸어 넘기며 두 눈을 반짝였다. 콩. 콩. 콩. 반짝이는 그녀의 두 눈이 새빨간 광채를 내며 툭, 튕겨 올랐다.

- 지금?

나는 쌜쭉한 표정으로 뭉툭한 손가락을 살며시 들어 인중을 긁어 내렸다. 시커먼 먼지가 딸려 나오고, 먼지 속에 숨어있었던 찌든 냄새가 코끝을 재빠르게 스쳐지나갔다. 쿵. 쿵. 쿵. 찌든내가 지나간 자리마다 손가락이 저려왔다.

- 나......서른여섯 살이 될래.

엄지와 검지를 세게 비비자 돌돌 말려진 먼지가 뭉치 채 딸려 나왔다.

- 서른여섯? 왜?

툭, 튕겨 오른 새빨간 광채가 시커먼 손가락에 쿵, 박혔다. 그녀를 바라보며 손가락을 이마에 갖다 댔다.

- 응. 서른여섯 살. 내가 아는 멋진 사람들은 다 서른여섯 즈음이야. 나도 서른여섯 즈음엔 뽀대나게 살고 있을 걸?

서른여섯. 내가 꿈꾸는 세상이다. 시커먼 먼지가 딸려 나오지 않는 서른여섯 살, 찌든 내가 지나가도 저리지 않는 서른여섯 살의 손가락, 새빨간 광채 따윈 박히지 않는 서른여섯 살. 그 즈음엔 나도 내가 아는 누군가들처럼 서른여섯개의 세상에서 왁자지껄 떠들고 있을 것이다. 서른여섯의 세상을 꿈꾸니 찌든내 따윈 아무것도 아니다. 뭐, 그 땐 내 세상일걸? 그렇지 않아?


- 서른여섯......?......지랄한다.

탁. 나는 보고 있던 거울을 엎어버렸다. 새빨간 그녀의 눈동자가 탁, 엎어졌다.



요즘 나는 이상하다. 이상하다는 말을 하루에도 수십 번 내뱉을 정도로 이상하다. 왜 그럴까, 생각해 봐도 잘 모르겠다. 스물여섯이 된 후 처음으로 울어도 보고, 잘해주는 누군가에게 자꾸 어리광도 부리게 된다. 이렇게 이상해진 내가 요즘 들어 자꾸 서른여섯을 꿈꾼다. 열여덟에 스물을 꿈꾸고, 스무 살에 서른을 꿈꾼 것처럼. 스물여섯에 서른여섯의 세상을 꿈꾸게 된다. 아직 서른이 되어 보지 못한 내가 서른하고도 여섯을 더 꿈꾼다.

서른? 서른여섯? 서른이라는 경계가 무섭다. 서른이 뭐 별거라고, 생각해 봐도 아직 스물하고도 여섯밖에 안됐으니까. 서른이라는 줄 건너편 그 곳에는 뭐가 있을지 도통 알 수 없으니까. 아직 어리다고도 다 컸다고도 말하지 못하겠다. 아는 것도 무서운 것도 많은 것을 보니, 이것도 저것도 아니다. 스물여섯은.

어제 오랜만에 최영미의 시를 읽었다. 최영미의 시를 좋아하지 않지만 그녀의 대표작은 자주 읽게 된다. 오래 전에 서른을 넘겨버린 최영미의 시를 서른이 되려면 4년이나 더 살아야 하는 내가 읽었다. 10대에는 스무 살이 되고 싶었고, 20대에는 서른 살이 되고 싶은 내가 시를 읽고 어른을 생각했다. 아직 어른이 되기에는 삶의 찌든 경험은 해보지도 못했고, 그렇다고 아이로 남기에는 삶의 어두운 이면을 조금이라도 맛보았기에 아주 살짝 어른을 생각했다. “어른”이라는 것은 동시에 “서른을 넘긴다”라는 뜻 같다. 참 삶이 무섭다. 서른을 넘기자, 그간의 잔치는 쫑나버렸고, 옆에서 같이 울고 같이 웃던 사람들은 삶에 치여 고개 숙인 채 하나 둘 떠나버리고, 남은 것은 서른을 넘겨버린 나이뿐이다. 30이라는 숫자가 삶의 경계라도 되듯이 말이다.

내가 있는 공간에는 서른여섯 즈음의 사람들이 많다. 범접할 수 없는 위화감을 갖고 있는 이들이다. 그래서일까. 그들이 내게 보여 준 서른에서 서른여섯 즈음의 나이가 너무나 낯설다.

낯설고 낯설어서 갖고 싶을 만큼.


어쨌든 지금의 내게는 서른이라는 나이가 범접할 수 없는 그 무언가의 나이인 것 같다. 서른여섯이 되면 지금의 내가 아닌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을 것만 같다. 물론 서른여섯의 그들은 이런 내가 우습겠지만. 여전히 나는 10대 시절에 20대를 꿈꾸었던 것처럼 지금 서른여섯을 꿈꾼다. 대학을 떠나 사회로 나와 서른은 더 치열하고, 더 회색빛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리고 이제 그 글을 시작하려고 한다. 서른여섯 즈음의 사람들과 함께 살 부대끼며 살고 있는 이 공간의 하루하루를 낯 설은 문체에 담아 스물여섯의 내게 보내려 한다. 사랑하며 사랑하는 삶의 공간에 조그마한 관심을 표하며. 이제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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