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칠동삼





ꡒ춘칠동삼!ꡓ

오늘도 마트에서 가장 먼저 진열대 앞을 오가며 물건 나르기 바쁜 나는, 바로 옆 사내를 힐끗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춘칠동삼. 이 말은 엄마가 궁할 때마다 끌어다 붙이는 말이다. 나는 엄마가 이 말을 처음 입에 붙이고 다닐 때는 코웃음을 치며 비웃었다. 저게 무슨 말이야, 하며 궁금해하다가도 그저 시덥지 않은 인생 한탄사려니, 하며 모른 척 돌아서곤 했었다. 엄마는 무슨 말만 나오면 ꡒ그래서 인생은 춘칠동삼인거야!ꡓ혹은 ꡒ에고, 인생은 동칠춘삼이라잖어.ꡓ라며 자신이 지어낸 말을 남이 꾸며낸 말인 냥 떠들어대곤 했다. 엄마가 춘칠동삼! 외칠 때마다 저 말이 저렇게 뿌듯한가 비웃음 치던 자신이 오늘에 와 이 말을 스스로 사용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저절로 나오는 그 말에 그저 웃기만 할 뿐이다. 엄마의 한탄사가 어느새 나한테로 옮겨져 왔는지 땀흘린 이마를 연신 닦아내면서도 춘칠동삼 중얼거리게 된다. 서늘한 가을인데도 움직이는 몸 덕분에 땀이 난다. 남들보다 더 많이 움직이고, 더 빠르게 손을 놀려야 하는 위치에 있는데다가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달라는 과장의 말 때문에 쉴 틈이 없다.

ꡒ하이고마, 요롱소리 들린다! 만대 그카나?ꡓ

나는 영천여자의 말을 듣고도 모른 척 했다. 오늘은 그냥 말이 하기 싫다. 말 없이 일하다 보면 퇴근시간이 다가온다. 이렇게까지 안 해도 된다는 것을 알지만 그 누구에게도 쉴 틈을 보여 주고 싶지가 않다. 시끄러운 음악소리와 많은 사람들의 말소리가 내 귀를 막아 놓은 것 같다. 목장갑 낀 손으로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닦아 냈다. 먼지 뭍은 옥시크린을 닦아내느라 시커메진 장갑에 진한 파우더 자국이 뭍은 채 나왔다.ꡐ이래서 화장하는 거 싫었는데. 땀나고 더워. 짜증나.ꡑ나는 힘껏 인상을 찌푸리며 몸을 놀렸다. 겉으로는 낼 수 없는 불평을 뱃속에 가득 차도록 해댔다. 

박스에 가득 담긴 옥시크린 세 개를 양손에 쥐고 허리를 들어올렸다. 뻣뻣해진 허리가 나이에 걸맞지 않은 요사스러움으로 걸리적거렸다. 고작해야 6개월 일하다 보니 아픈 곳도 많아지고 삐그덕 거리는 곳도 많아졌다. 이제 이 짓도 끝이다. 실물 나게 닦아댔던 옥시크린도 화장하는 일도 아침마다 지겨운 연설을 듣는 일도 오늘이 마지막이었다. 춘칠동삼이라더니. 내 인생의 칠 할이 봄처럼 화사할 거라는 엄마 말이 맞아 들어가는 것일까.

나는 삼일 전의 일을 기억해 냈다. 수습기간 6개월이 얼마 남지 않는 날이었다. 고작해야 삼 일 남은 날, 당연히 재 계약할 수 있을 거라 믿었던 나에게 과장은 계약해지란 말을 건넸다. 나는 과장의 얼굴을 유심히 살폈었다. 과장의 허연 얼굴은 여자들의 시선을 받을 만큼 괜찮은 모습이었다. 늘 깔끔하고 단정하고 예의 바른 듯한 얼굴은 정직을 자신의 신념으로 삼고 사는 사람 마냥 흐트러짐이 없어 보였다. 그 날도 과장의 얼굴은 단정했다. 사회생활에 회사 생활에 쪄들다 보면 어느덧 얼굴빛은 거무스름하게 변하기 마련인데, 유난히 뽀얗게 보이는 과장의 얼굴은 세월의 흐름을 비켜 나간 듯 보였다. 그에 반해 나의 낯빛은 거무스름했다. 이제 막 20대 중반으로 들어선 나의 얼굴에는 온갖 것들이 다 거쳐간 듯한 세월의 흔적이 겹겹이 쌓여 있는 것 같았다.

ꡒ이번에는 어찌 해볼 수가 없네요. 회사에서 대대적으로 신규채용을 하기로 해서, 뭐, 우리 회사뿐만이 아니라...에...뉴스를 보셔서 아시겠지만 유통계 전체가 이번에 신규채용을 한다고 합니다. 우리 영업팀에는 큰 이변이 없을 거라 생각했지만 고객들 반응이 별로 안 좋아요. 더러 항의 전화도 오는 것 같고. 음..어찌 되었든 이번에는 이렇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우선은 이번 달까지 일해주시고 다음에 다시 연락 드릴게요. 아, 이거, 여러분들이랑 정들었는데 이렇게 되니 아쉽습니다. 그려.ꡓ

과장의 요점은 이러했다. 신규채용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나가야 한다, 고객의 평가가 좋지 않으므로 어쩔 수 없다, 란 것이었다. 하기야 친절과 미소를 앞세워 이웃 같은 언니가 되어 물건을 팔아야 하는 우리들인데 친절하지 않다니, 그건 과장 말처럼 어쩔 수 없는 일이 맞았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일이라 해도 마음은 편하지가 않았다.

ꡒ아, 진짜 웃기다아~야. 우리만큼 잘 웃고 친절한 여자들이 어디 있다고! 안 그러냐?ꡓ

나와 같이 계약해지 된 뚱뚱한 여자가 껌을 질겅 씹으며 입술을 비틀거렸다.

ꡒ언니! 혜자언니! 우리 짤렸어. 이번에는 꽤 많어. 과장이 신규채용 어쩌고 하더니 그냥 가라네. 아. 짜증나.ꡓ

ꡒ점드록 일했는데 우짜고. 가들 참말로 엄청시리 불앙타! 가뜨가나 생똥 싸게 했는데 그카나?ꡓ

영천여자는 일을 하다 말고 과장을 만나고 나온 우리들을 쳐다보았다. 영천여자의 얼굴에는 정 많은 여자의 성격만큼 안쓰러움이 가득 차 보였다.

ꡒ언니! 무슨 말이야. 내가 못 알아듣는 다고 사투리 쓰지 말랬잖아! 여기 온지 5년이 다 되어가면서 아직도 사투리냐. 짜증나. 1년 넘게 일했는데...뭐야, 정말!ꡓ

뚱뚱한 여자는 1년 넘게 이곳에서만 일했다. 사업에 실패한 남편 덕에 어린애 둘을 떼어놓고 매일 아침 출근하는 거 못해먹겠다 노래를 불렀지만 이곳을 나가고 나면 가장 아쉬운 사람은 뚱뚱한 여자였다. 이제야 조금씩 자리 잡아 가기 시작했다고 일주일 전 회식자리에서 가장 크게 웃던 여자였다. 나는 여자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여자의 얼굴에 비춰진 세월의 흔적은 까맣게 내려앉은 기미로 촘촘히 짜여져 여자의 살집을 터지게 만드는 것 같았다. 나 역시 그만두게 되었다. 뚱뚱한 여자만큼은 아니더라도 돈을 벌어야 하는 위치에 있는지라 짜증이 나기는 마찬가지였다.

고작해야 삼일 전이었지만 그땐 그래도 당장 막막한 생각은 들지 않았다. 옆에 있던 여자들과 장난도 치고 웃기도 하고 꾀도 부리고 했었지만 막상 마지막날이 되니 눈앞이 아득해 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ꡒ니, 괘안나? ꡓ

나는 영천여자의 얼굴을 돌아보며 미소지었다. 꼭 엄마처럼 자상한 말투에 가슴이 뭉클해졌다. 가만 보니 오늘 아침만 해도 엄마는 여전히 춘칠동삼이란 말을 외치고 또 외쳤다. 자신이나 아이들이 기술과 능력을 키워서 그 덕을 백 퍼센트 봐야 평등하다고 하면서도 그러기 위해서는 많은 돈이 들어간다며 집이 무너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게다가 재능만으로는 해결 될 수 없는 그 무언가가 자식들 인생을 꽉 막히게 하는 것 같다고 했다. 그러니 엄마에게 가장 좋은 말과 나쁜 말은 춘칠동삼이 되어버릴밖에. 인생의 칠 할은 춘(春)이요, 나머지 삼 할이 동(冬)이란 말로 이것이 가장 잘 지켜지면 좋으련만 어디 인생이 말처럼 되나, 라는 것이 엄마 한탄사의 줄거리였다. 그러니 인생은 춘칠동삼이 되었다가 동칠춘삼이 된다라는 것인데 지금 나의 인생은 어떻게 되어 가고 있는 것일까.

시간을 보니 11시 40분이다. 마트에서 물건을 고르는 사람들 대부분이 빠져나간 한산한 시간이다. 이제 마지막으로 할 일은 내일 팔아야 할 수만큼을 체크해 놓고 창고에서 물건만 가져다 놓으면 되는 것이다. 손님들이 빠져나간 마트 안에는 오랜 시간 쌓인 먼지로 매캐한 냄새가 차 있다. 나는 휑하니 바람을 몰고 가 비상구의 창문을 열어 놓았다. 그리고 파우더를 꺼내 얼굴에 덕지덕지 발랐다. 여기서 일하는 여자라 해도 24살 아가씨였으니 집에 가기 전에 다시 화장을 고치는 것을 잊지는 않았다. 비록 파우더만 한 엉성하기 그지없는 화장이긴 해도 말이다. 그래도 당분간은 이 짓을 안 해도 되겠지, 란 생각에 속이 시원했다. 물론 다시 이력서를 쓰려면 열심히 발라야 하지만.


처음 이 곳에 취직되었을 때 끗발 날리게 죽여주던 기분이 떠올랐다. 일확천금을 노리고 고스톱 판에 끼어 든 것 마냥 내 양손엔 흑싸리껍질이 놓여 있었다. 한들한들 봄이 다가와 코끝에서 살랑살랑 짙은 향기를 뿜어내며 엉덩이를 흔들더니 기어이 시들시들 가버리고 말았나. 하늘 높이 치켜 든 흑사리껍질은 이제 어디 갔는지 보이지도 않는다. 매화와 바꿔들고 6개월을 지냈더니 어느새 싸늘한 추위가 찾아왔다.


ꡒ엄마, 내 인생 정말로 춘칠동삼인 거 맞아?ꡓ 내 인생의 봄날은 어찌 되었을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