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천한 역사 속에 살고 있어요. 소집영장을 받고 차라리 도망가버릴까 망설일 때 절감했습니다. 친형제들은 남들처럼 군대에 가지 않으면 체면이 서지 않는다고 했지만, 나는 도저히 그럴 수 없다. 다른 일은 뭐든 하겠지만 천황의 병사만은 절대로 될 수 없다고 했어요. 그랬더니 어머니는 정 이런다면 헌병을 부르겠다 하고, 아버지는 동네 사람들 앞에서 죽음으로 사죄하겠다 하고, 친척들은 죽창을 들고 소리소리 지르며 달려오더군요. 그 모습을 보고 대체 우리는 얼마나 비천한 족속인가 생각했습니다. 이런 시절에 높으신 분들을 위해 총칼을 들지 않으면 인간도 아니라고 말하는 건 그저 더 모진 따돌림이 무서워서가 아닌지요. 다들 겁에 질린 개처럼 미친듯이 짖어대며 물어뜯기 바쁩니다. 허구한 날 일하고 먹고 자는 것밖에 모르는 생활 속에서 굴뭊린 기억이 골수에 사무치니 천해질 수밖에요. 냉정하게 생각하질 못하니 천할 수밖에. 그렇게 보면 이 나라 전체가 천하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도망치면 부모 형제가 따돌림을 당하고 굶어죽을 테니 결국 전장에 나가기는 했지만, 천하다 천하다 해도 가난한 놈이 가난한 나라를 침략하는 것만큼 천한 게 없어요. 그걸 잘 아는 내가 먼저 죽이지 않으면 죽는다는 이유로 살육을 저질렀으니, 인간이라 참으로 가련한 존재가 아닙니까. 오카무라 씨 생각은 다를지 몰라도, 전쟁텅서 살아 돌아온 우리는 모두 천한 죄업을 지고 살아가도록 하늘의 명을 받은 자들이라고 봅니다.

그러나 지금은 천한 역사 속에 살면서 처음으로 희미한 빛이 비쳐드는 시대를 지켜보는 기분입니다. 솔직히 말해 희미하게나마 희망이 솟는 것을 막을 수 없어요. 안개처럼 희미한 빛이지만, 이런 느낌은 난생처음입니다. 새로운 시대는 넋 놓고 기다리는 게 아니라 우리가 만들어나가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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