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떠나는가? 좋은 질문이다. 그리고 또 다른 질문. 왜 안 떠나는가?

 

점심을 먹고 서둘러 사무실을 나섰다. 간단히 - 라고 하지만 그 과정은 엄청난 걸 하는 것처럼 보이는 도시락아닌도시락을 먹고 단 몇분이라도 운동삼아 걷기를 해 보기 위해서다. 시간적 여유가 많지 않아 겨우 동네 한바퀴를 멀리멀리멀리 돌아서 십여분에서 길게는 달랑 이십분을 채우고 들어오면 이미 점심시간을 지나쳐 항상 조금씩 늦게 들어올때가 많기는 하지만. 그래도 어쩔건가. 이마저도 하지 않으면 정말 하루하루가 견디기 힘들어질 것 같다. 언젠가부터 움직이지 않고 자리에 가만히 앉아서 일을 하고 있고. 먹는 양은 비슷... 아니, 열량으로 따지자면 더 많아지고 있는데 운동량은 줄어들기만 하고 소화도 잘 안되니 생활의 변화가 있어야 할 수밖에.

 

 

"제목부터 설렌다. 나는 걷는다, 라니. 그런데 벌써 아쉽다. '끝'이라는 단어와 함께 마침표가 단호하게 박혀있다. 제목 하나로 사람 마음을 달뜨게 했다 애달프게 만드는 베르나르 올리비에의 신작이 돌아왔다. 기자 출신인 그는 예순두 살에 실크로드 1만2천키로미터를 혼자 걸어 다녔다. 그런 다음 [나는 걷는다] 3부작을 펴냈다. 이번에는 연인과 함께였다. 일흔다섯살에 프랑스 리옹에서 터키 이스탄불까지 3천킬로미터를 걷고 쓴 책이다. 책상 앞에서 책을 읽기만 하는 이에게는 묘한 질투심까지 준다. 길 위에서 본 세상, 곁의 길동무, 그리고 걷기 그 자체가 다 부럽다. 중간에 책장을 덮고 몇 차례 서성이게 된다. '나도 걷겠다!' 속으로 외치며.

 

그러니까 말이다. 내가 사는 곳은 걷기에 최적화된 도시가 아닌가. 그런데 나는 얼마나 걷고 있을까. 출퇴근과 점심시간에 걷는 것을 겨우 다 합해봐야 한시간이 될까말까한다. 그마저도 다 걷지는 않는다. 꼴랑 이십분의 거리를 버스타고 다닐때가 많다. 매연과 담배연기 가득한 대도로가 아니라 골목골목의 뒷길을 걸어 한적하게 걸을 수 있다. 숲속을 거니는 효과를 볼수는 없지만 그래도 나름 나무와 꽃이 가득한 골목길도 많다. 그런데 왜 걷지 않고 있는 걸까......

 

 

 

 

 

 

 

 

 

 

 

 

 

 

 

"인간은 신의 장례식 중에 그들 자신을 재창조할 기회를 포착하는데 실패하고 말았다"

 

무신론이라는 단어가 유럽 언어에 등장한 16세기 이래, 수많은 서구 지식인들이 종교에 맞서왔다. 하지만 종교는 약화될지언정 완전히 없어지지 않았다. 20세기 들어 냉전이 끝나고 '역사의 죽음'이란 서사가 유포되면서, 신 또한 불필요해 보였다. 그러던 어느 날 비행기 두 대가 세계무역센터 빌딩에 충돌했고, 종교는 또다시 거대한 화두가 됐다.

신을 옹호하다,를 쓴 테리 이글턴은 서구사회 무신론의 실패를 되짚는다. 이를 통해 '세속적 서구'와 '종교적 동양', '온건한 기독교'와 위험한 이슬람'이라는 현실 인식을 비판한다. 테러와의 전쟁을 읽는 흥미로운 참고서다. 덤으로 근현대 철학사까지 익힐 수 있다.

 

신의 죽음 그리고 문화,는 읽어보고 싶다. 다른 책도 그렇기는 하지만.

 

 

 

 

 

 

 

 

 

 

 

 

 

 

 

 

 

 

 

 

 

 

 

 

 

 

 

 

 

 

 

게이트웨이 미술사, 가 출간되면 사야겠다 라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아직 책정리를 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잠시 망설이고 있다. 재미있기는 한데 지금 당장 읽을 수 있는 것은 아니라서 또 망설이고 있다. 도대체 신간은 왜 들여다보고 있는지 모르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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