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현대문학」 정기구독 연장 혜택으로 받은 『침묵예찬』을 읽다가 밑줄 그어놓은 부분 가운데 하나를 옮겨본다. 

“내가 반 고흐의 그림을 처음으로 본 것이 제네바의 바젤에 있는 미술관에서였던가, 기억이 확실치 않지만 어쨌든 스위스 여행 중의 일이었다. 그때 나는 마치 문짝이 돌쩌귀 밖으로 이탈하듯이 제 정신이 아닌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열여덟 살 때였던가, 나는 귀가 잘린 그 사람의 작품들을 복사판 그림들과 그림엽서들을 통해서 알고 있었다. 내 방의 벽 한구석에 태양이 미친 듯이 빙글빙글 도는 그의 그림을 붙여둔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의 실제 그림을 내 눈으로 ‘본다’는 사실은 나를 산산 조각내 놓는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튜브를 꾹꾹 눌러 짜서 어찌나 두껍게 발라 놓았는지 층층으로 포개진 덩어리가 어떻게 떨어지지 않고 화폭에 제대로 붙어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 정도인 다량의 물감 무더기, 물감을 입혀서 선들을 어찌나 짓이겨 놓았는지 그림에서 30센티미터 정도 떨어진 거리에서는 오직 아우성치는 듯한 색조들 속에서 요동치는 요철들의 혼합밖에 알아볼 수 없고 화집에서 보았던 이미지를 대강이라도 찾아보려면 한두 걸음 물러서야 하는 그 독특한 화법, 그야말로 다른 어디에서도 본 적이 없는 놀라운 창조방식이 그날 나에게는 격렬한 충격 그 자체였던 것이다. 그때 나는 회화 작품에 눈을 뜨게 되면서 그림이 실제로 걸려 있는 곳에 가서 직접 눈으로 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달았다. 왜냐하면 인쇄된 복제품이란 형상의 막연한 유사점 외엔 실제 그림과 전혀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 『침묵예찬』, 마르크 드 스메트 지음, 김화영 옮김, 현대문학刊, 2007년, 164~16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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