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몫
파리누쉬 사니이 지음, 허지은 옮김 / 북레시피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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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 소설을 처음 접했다. 지리적인 위치보다는 심적으로 더 멀게 느껴지는 곳, 까만 히잡을 쓰고 다니는 여성들의 비밀스럽고 신비로운 분위기가 가득한 곳, 이런 나라의 여성 작가는 과연 어떤 내용을 책을 썼을까? 나의 몫 은 이란 정부에 의해 두번이나 출판을 금지당했지만 독자들의 큰 호응을 얻어 이란 역사상 최고의 베스트셀러 자리에 오른 소설이다. 뿐만 아니라 전 세계 26개 언어로 번역되었고, 2010년에는 이탈리아의 '보카치오 문학상'도 수상했다. 

이 책을 읽기 전에는 이란의 여성이 겪은 수난과 고통에 대한 내용이 주를 이룰 거라고 짐작했었다. 이 책을 읽기 바로 전 <82년생 김지영>을 읽고 답답함에 가슴을 쳤던 기억이 있어 연달아서 소설 속에서 학대받고 힘들어하는 여성을 보고 싶지 않았다. 700페이지에 달하는 책 두께에도 겁을 먹었기에 마치 하기 싫은 숙제를 하는 기분으로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막상 책을 다 읽고 난 느낌은 '너무 잼있다!' 그리고 '어째 우리나라랑 돌아가는 환경이 좀 비슷하다?' 였다. 소극적으로 남성에게 학대받는 여성의 모습을 보게 될까봐 은근히 겁먹었던 내게 이 소설은 주인공 '마수메'가 자신에게 주어진 수난과 역경을 어떻게 이겨내고 지혜롭게 성장하는지 보여준다. 우리나라 보다 훨씬 여성차별이 심한 나라에서 오히려 걸크러쉬를 불러일으키는 슈퍼우먼과 같은 한 여성의 일대기를 보니 감동이 밀려오면서도 한편 책장을 덮고 나서는 '여성의 삶은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가' 하는 생각도 든다. 

<나의 몫> 은 주인공 '마수메'의 10대 시절부터 50대에 이르기까지 삶의 모든 행적과 그 사이에 일어난 이란의 정치적 변화모습까지 고스란히 담아낸 소설이다. 매우 보수적인 집안에서 태어난 마수메는 망나니같은 작은 오빠 '아흐매드', 종교에 광적으로 집착하는 첫째오빠 '마흐무드', 누나를 쫓아다니며 사사건건 형들에게 일러바치는 얄미운 동생 '알리', 여성은 남성을 위해 무조건 희생해야 한다고 믿는 어머니 밑에서 갖은 수난을 받으며 자란다. 여성은 배울 필요도 없고, 오로지 시집가서 남편만 잘 부양하면 된다고 믿는 어머니 때문에 학교도 못갈 뻔 하지만 다행히 가족들 중 마수메를 가장 예뻐해주는 아버지를 겨우 설득해 학교에 다니게 된다. 마수메의 친오빠들은 마수메가 차도르를 안걸치고 거리를 돌아다니거나, 외갓 남자와 같은 공간에 있기만 해도 집안의 명예를 더럽힌다며 마수메에게 폭력을 행사하지만, 아들을 중시하는 어머니는 그들의 행동이 맞다는 듯 딸이 오빠에게 폭행을 당해도 가만히 보고만 있는 인물이다. 

그러던 마수메에게 마법처럼 첫사랑이 찾아온다. 단짝친구 파르바네와 함께 늘 지나다니는 길에 위치한 약국에서 일하는 '사이드', 그들은 첫눈에 서로 반하지만 눈길만 주고 받을 뿐이다. 어느 날 눈길에 미끄러져 다리를 다치는 바람에 학교에 갈 수 없게 된 마수메는 몇일동안 집에 머물게 되는데, 항상 보이던 그녀가 보이지 않자 걱정이 된 사이드는 파르바네를 통해 마수메에게 처음으로 편지를 통해 마음을 전하게 된다. 전기에 감전된 듯 찌릿한 사랑의 감정을 느끼게 된 마수메는 그 감정조차 정숙한 여자는 가져서는 안될 불온한 감정이 아닐까 불안해하지만 사랑은 식을 줄 모른다. 사이드를 보고 싶은 마음에 마수메는 다리가 덜 나았는데도 학교에 갈 수 있다고 우겨 학교에 가다가 갑자기 다리통증이 심해져 넘어지게 되는데 약국에 있던 사이드가 뛰어나와 다리상태를 봐주고 진통제를 지어준다. 하지만 그것이 불행의 시작일 줄이야. 얄미운 동생 알리가 그 모습을 보고는 형들에게 뛰어가 누나가 외갓 남자와 시시덕 거렸고, 그 남자가 마수메의 다리를 주물렀다고 이른 것이다. 기회를 잡은 친오빠들은 마수메가 집안의 명예와 자기들의 명예를 실추시켜 고개를 들 수 없게 했다며 마수메를 엄청나게 두들겨 패서 몇일동안 사경을 헤매게 만들고, 사이드에게도 칼을 들고 찾아가 난동을 부리고 다치게 만든다. 

"아버지, 아버지의 딸이 아버지의 명예를 땅에 떨어뜨렸단 말입니다. 아버지는 그래도 상관없을지 모르겠지만, 전 아니에요. 저는 아직 사람들 사이에서 좋은 평판을 듣고 있거든요. 알리가 오면 물어보세요. 그 아이가 뭘 봤는지. 사람들이 다 보는데서 저 숙녀인 척 하는 계집애가 약국의 하인놈과 놀아났다고요!" 
< 나의 몫 p.79 >


마수메의 가족들이 그녀에게 가하는 차별이 소설 전체에 걸쳐 가장 심하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다쳐서 약국에서 상처를 치료한 것이 가족의 평판을 떨어뜨리는 일이라니, 그것보다 여동생이 마치 자기의 소유물이라도 된 양 말하는 것이 역겨웠다. 이 소설에서 가장 비호감으로 나오는 마수메의 둘째 오빠 아흐매드는 끝까지 망나니 짓을 못버리고 평생을 방황하다 마약에 찌들어 어느 날 길거리에서 객사하게 된다. 아무도 그가 죽었다고 슬퍼하거나 안타까워하지 않는다.  

열렬히 사랑했던 첫사랑 사이드와 그렇게 헤어지고 마수메는 가족들의 성화에 못이겨 얼굴도 한 번 못본 남자 '하미드'와 17살의 나이로 강제 결혼을 하게 된다. 첫사랑을 잊지 못한 상태에서 낯선 남자의 아내가 된다는 것이 끔찍했던 마수메는 자살을 시도하지만 어설프게 실패하고선 어쩔 수 없이 하미드의 아내로서의 몫을 다 하기 시작한다. 이 때부터 마수메는 행복과 불행이 롤러 코스터를 타듯 반복되는 파란 만장한 삶을 살게 된다. 세상이 바뀌길 원했던 혁명주의자 남편 '하미드'는 집에 거의 들어오지 않고, 가정에 전혀 관심이 없는 나쁜 남편이었지만 다행히 생각은 깨어있어서 여자도 교육을 많이 받고 똑똑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덕분에 마수메는 남편이 자기를 혼자 남겨두는 동안 닥치는데로 책을 읽고 공부를 했으며 검정고시를 통해 고등학교도 졸업하고, 대학교 공부도 한다. 그렇게 점점 자신만의 신념과 지성을 갖추게 되는 마수메는 소설에 나오는 전체 인물 중에서 누구보다 지혜롭고 독립적이며 똑똑하다. 

내가 일자리를 구했다는 뉴스를 듣고 다들 폭탄이 터진 것 같은 반응을 보였다. 어머니는 눈이 곧 튀어나올 것 같이 놀랐다. 
"사무실에 나간다는 말이냐? 남자들처럼?" 
"네, 이제 남자와 여자는 다르지 않아요." 
"신이시여, 제 목숨을 거두어주소서! 별소릴 다 하는구나! 말세가 왔어! 네 아버지와 오빠들이 그걸 허락할지, 난 모르겠구나." 
"아버지나 오빠들과는 상관없는 일이에요. " 나는 딱 잘라 말했다. " 그 누구에게도 내 인생과 내 아이들의 인생에 간섭할 권리가 없어요. 저는 이제 결혼한 여자에요. 남편이 죽은 것도 아니고요. 우리 인생은 우리가 알아서 살아요. 그러니까, 허튼 소리들은 하지 않는게 좋을거에요." 
이 짧은 최후통첩에 친정 식구들은 모두 입을 다물었다. 
<p.350~351>


어머니의 구시대적인 발언에 대한 이 얼마나 사이다 같은 발언인가. 마수메는 남편 없이도 독립적으로 자신의 삶을 영위해 갈 줄 아는 여자였고, 직장에서는 일로 인정받고, 살림과 일때문에 바쁜 와중에도 공부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 

"그럼 당신들 편에 서지 않는 사람들은 어떻게 할 건데요? 신념이 다른 사람들은 어쩔거냐고요? 지금 이 나라에는 수백개의 정당과 분파가 있고 그들은 모두 자신들이 옳다고 믿고 있어요. 당신 스타일의 정부를 받아들이지는 않을거라고요. 그 사람들을 다 어떻게 할래요?" 
"민중의 행복에 관심이 없는 악인들이고 반역자들의 집단일 뿐이야. 제거되어야 하는 자들이라고." 
"그럼, 그들을 처형할거에요?" 
"그래, 필요하다면." 
"샤가 바로 그런 방식을 택했었죠. 그런데 그것을 압제라고 외쳤던 이유는 뭐에요? 당신이 엄청나게 고결한 사람인 줄 알았던 내가 바보였어요. 당신에게 그렇게 큰 기대를 한 내가 멍청했었다고요! 민중을 위해 투쟁하고 나라를 사랑하고 인권에 대해 설교를 하던 고결한 분이 결국 되고 싶었던 것이 사형집행인 인줄은 정말 몰랐네요! 지금 정권을 잡은 사람들이 당신 세력이 권력을 잡고 또 다른 대량학살을 시작할 때까지 조용히 앉아서 기다릴 것 같아요? 그건 당신의 환상이에요! 허무맹랑한 꿈이라고요! 그들이 당신을 죽일거에요! 그들은 샤의 실수를 되풀이 하지 않을 거에요. 그리고 당신이 정말 그런 식으로 생각한다면, 그들이 오히려 옳은 거에요." 
<p. 449>


남편이 그토록 원하던 혁명이 일어났지만 남편은 거기에 만족하지 않고 한걸음 더 나아가 자신이 원하는 나라를 세우고 싶다는 꿈을 꾼다. 마수메는 남편이 잘못된 길로 가려하자 올바른 길이 무엇인지 설득할 줄 아는 여자였다. 물론 남편은 자기 생각에 빠져 받아들이지 않았다. 감옥에서 나와 또다른 자기식의 혁명을 꿈꾸던 남편은 아내의 말을 무시하고 사람들을 선동하다 결국에는 공산주의자로 잡혀들어가 처형당하고 만다. 

'나의 몫'에는 한 여자의 전투적인 삶, 1979년을 전후로 일어난 이란 혁명, 그로 인해 발발한 이란-이라크 전쟁등 정치적으로도 중요한 이슈가 맞물려 돌아가기 때문에 어쩌면 역사소설이라고도 볼 수 있을 듯 하다. 그런데 문득 낯선 나라의 이야기에서 어디서 본 듯한 기시감이 드는건 왜일까.

남녀 칠세 부동석이라며 유교주의에 젖어있었던 우리나라와, 이란의 종교교리로 인한 여성차별은 사실 별로 달라보이지 않는다.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순리라는 이유로 많은 여성이 고통받아 왔고, 지금도 그런 전통이 우리 사회 곳곳에 남아있다. 이란 혁명의 모습도 어쩐지 예전 우리나라 국민들이 독재정치에 대해 반기를 들었던 그때가 생각났다. 그렇지만 현재 이란과 우리나라의 모습은 완전 다른 길을 가고 있는 듯하다. 인터넷을 찾아보니 이란은 오히려 샤를 몰아내고 호메이니가 집권하는 이란 혁명을 진행하면서 극종교주의를 선언해 그때부터 여성들을 더 옭아매기 시작했다고 한다. 1979년 전에는 자유롭게 미니스커트에 세련된 스타일을 즐겼던 여성들이 혁명이후로 운전금지, 일금지, 무조건 차도르 착용으로 바껴서 지금처럼 모든 여성이 온몸을 둘둘 싸고 다니도록 바꼈다고 한다. 어쩌면 혁명으로 인해 가장 큰 희생을 당한 계급은 여성이었던 셈이다. 이란의 정치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아직 자세히 잘 모르겠지만, 이 책으로 인해 호기심이 생겨 더 알아보고 싶은 마음이 든다. 

읽으면서 다양한 극적인 요소로 재미도 있었고, 마수메의 지혜와 용기에 감탄하기도 했으며, 남보다 못한 친오빠들의 만행에 분개하기도 했다. 그녀가 행복하기를 진심으로 빌며 정말 시간 가는줄 몰랐던 즐거운 독서였다. 하지만 결국은 그녀가 이루지 못한 '오로지 그녀 자신만의 행복'에 대해 안타까운 마음을 이루 말할 수 없다. 

"우리 어머니가 늘 하시던 말씀이 있어. '각자의 운명은 태어나는 날 이마에 새겨지는 것이다. 각자의 몫은 따로 정해져 있어서 하늘과 땅이 뒤집힌대도 바뀌지 않는다.' 가끔 나는 이런 생각을 했지. 이 생에서 나에게 마련해놓은 운명은 무엇일까? 나에게도 나만의 운명이라는게 있을까? 아니면 난 내 인생의 남자들, 나를 자신들의 신념과 목적의 제물로 삼은 남자들의 삶을 지배하는 운명의 일부인 걸까? 아버지와 오빠들, 남동생은 자신들의 명예를 위해, 남편은 자기의 이념과 목표를 위해 나를 재물로 바쳤어. 그리고 아들들의 영웅적인 행동과 애국심에 다시 희생양이 되었지. 결국, 나는 누구일까? 반역자의 아내? 아니면 자유를 위해 투쟁한 영웅의 아내? 반체제를 꿈꾸는 아들의 어머니? 자유를 사랑하는 투쟁가의 희생정신 투철한 부모? 그들이 나를 꼭대기에 올려놨다가 끌어내린 게 대체 몇 번이지? 아무 자격이 없는 나를. 그들은 나의 능력이나 업적 때문에 나를 추앙한 것도 아니었고 내 실수 때문에 나를 내 던진 것도 아니었어. 마치 나라는 존재는 있지도 않은 것 같아. 나에게는 아무 권리도 없어. 내가 나를 위해 살아본 적이 있나? 나를 위해 일을 한 적이 있어? 선택을 하거나 결정을 할 권리가 있은 적이 있었어? 누군가가 나에게 뭘 원하느냐고 물은 적이 있었냐고?" 
< 나의 몫 p.674>


평생 최선을 다해 살아온 그녀의 마지막이 이런 슬픈 독백이라니, 안타깝다. 그녀의 빛나는 지혜와 능력을 자신만을 위해서는 한번도 쓰지 못했다는 것, 그것이 그녀가 태어난 이유는 아니었을 텐데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평생에 걸쳐 충분히 빛나고 아름다웠으며 책 속에 나오는 어떤 남자보다 지혜롭고 용감했다.  어떤 상황이 오더라도 나도 그녀처럼 올바른 신념을 가지고, 매 순간 최선을 다해 슬기롭게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은 남자든 여자든 무조건 일독 하기를 권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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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9-07 15:5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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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9-07 17:10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