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우스프라우
질 알렉산더 에스바움 지음, 박현주 옮김 / 열린책들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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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는동안 안나가 되어 그녀의 심리를 따라가는 동안 처음에는 답답하고, 수치스러움을 느꼈다가 점점 안나와 같이 불안해하다가 갑자기 심장에 뭔가 훅! 바늘이 박힌듯한 아픔이 느껴졌다. 마치 나조차도 몰랐던 내 마음을 후벼파낸 듯한 느낌이었다. 오랜 시간을 들여 굳이 소설이란 것을 읽는 이유는 결국엔 전혀 다른 타인에게서 내 속에 꼭꼭 숨은 진실을 발견할 때의 소름과 쾌감 때문이 아니겠는가. 하우스프라우는 한 여자의, 한 인간의 마음 속을 깊숙히 포크레인으로 푹 파내서 보여주는 소설같다.  그래서 다 읽고 나서 마음이 아팠고, 나를 한번 돌아보게 됐고, 다시 한번 안나를 가만히 쓰다듬어 보게 됐다. 



믿을 사람이라곤 오로지 남편 뿐, 말도 제대로 통하지 않는 낯선 땅 스위스에 살고 있는 수동적이면서도 방탕하고, 고독한 미국 여인 안나가 있다. 남편 브루노와 결혼하면서 고향인 미국땅에서 일말의 미련도 없이 떠나와 정착했지만 그녀는 10년이 다되도록 이 곳 스위스가 낯설다. 아직 서툰 언어의 장벽과 무관심한 남편과 냉랭한 시어머니 사이에서 안나는 아직 어느 곳하나 마음 붙일 곳이 없다. 그 마음을 안나는 여러 남자들을 만나 관계를 맺으며 자신을 쓰다듬어주는 남자들의 손, 그들의 온기를 통해 채우고 있다. 남편이 있는 주부가 다른 남자를 만나 섹스를 벌이는 것은 엄연한 불륜이지만, 그녀는 계속 자기합리화를 하며 잘못을 잊으려 한다. 


그녀와 불륜 관계에 있는 남자들 아치, 카를, 스티븐 이들은 안나에게 위안을 주는 존재이자 동시에 엄청난 불안감의 근원이다. 자신의 불륜 사실을 남편이 안다면 어떻게 될지 안나는 알면서도 그 만남들을 쉬이 떨쳐낼 수 없다. 남편은 안나를 위해 스위스에서 쓰이는 언어인 독일어 어학 클래스를 수강해보라며 권해주었고, 메설리 박사와의 지속적인 정신상담을 주선해줌으로써 안나를 도우려고 애쓰고는 있지만 안나는 여전히 외롭고, 다른 손길을 원하며 시내를 떠돌아다닌다. 



우연이란 없어요, 안나. 모든 것이 관련되어 있죠. 모든게 연결되어 있어요. 모든 세세한 것에 필연성이 깃들어 있죠. 한 순간은 다음 순간을 낳아요. 그리고 또 다음 순간을. 그리고 다시 다음 순간을.<p.104>


안나는 독일어 클래스에서 만난 '아치'와 별다른 연애 감정 없이도 한치의 거절 없이 관계를 맺고, 심지어 남편 브루노의 친구인 '카를'과도 기회가 되자 망설이지 않고 관계를 맺는다. 분명 잘못된 행동임을 알면서도 처음에 한번은 괜찮겠지.. 에서 두번, 세번,네번 이어지며 그것은 단순한 실수가 아닌 어떠한 필연적인 결과의 원인이 되어간다. 우연히 시내에서 만난 스티븐과는 진짜 사랑이라고 생각하며 거의 매일 만나 사랑을 나누지만, 미국에서 잠시 연구차 와있던 스티븐은 얼마 후 연구기간이 끝나자 휑하니 안나만 남겨둔 채 떠나버렸는데, 안나는 스티븐의 아기를 가졌다. 남편 브루노에게는 그 사실을 숨긴채 스티븐의 딸 폴리 진을 낳아서 그들 부부의 아이인 양 어여쁘게 키운다.  안나가 평생 불안해 할 수 밖에 없는 사건의 시작, 만약 스티븐을 만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동시성은 종종 우연이라는 가면을 쓴다. 적절한 장소, 적절한 시간, 그리고 그때 일어나는 갑작스러운 종류의 사건. 이 경우에는 이 세가지가 모두 엮여서 공처럼 똘똘 뭉쳐졌고, 팔랑거리는 노란 나비 리본을 맨 고양이처럼 지나치게 달콤한 클리셰가 되었다. 그 사건의 진부한 예측 가능성은 안나가 그 후에 바닥짐처럼 붙들고 놓지 않았던 증거 중 하나 였다. <p.115>

 

안나도 모르는 사이 어느새 파멸의 씨앗이 하나 둘 심어졌다. 그게 언제 터질지 모를 뿐. 안나의 수동적인 자세와 어떤 힘이 더해진 우연이라는 것이 만나 기차의 종착역으로 힘차게 달려가고 있다. 마침내 파멸이 왔을 때, 그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겨낼 수도 있었다, 혹은 파멸이 오기전 좀 더 적극적으로 막아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지독한 수동성은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그대로 수동적으로 행해지도록 받아내기만 한다.       



그녀가 입을 열었을 때 굴러나온 것은 질문이었다. 

"운명 예정설을 믿으세요?" 

그녀가 의도한 말은 아니었지만, 생경한 말도 아니었다. 그녀는 어디에 가든 이런 불확실함을 안고 다녔다. (..중략)

신부는 잠깐 더 생각했다. 

"좋아요, 아가씨 (...) 어린 아이였을 때 도미노 놀이를 해보신 적이 있지요? 한 줄로 쭉 세운 후에 넘어뜨리는 것 말입니다. 쌓아보았겠죠? 밀어서 넘어뜨리기도 하고?"

"네"

"물론이겠죠. 그것을 제대로 세우려고, 그렇게 배열하려고 온 시간을 쓰지만 살짝 밀기만 해도 모든 것은 무너집니다." 

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의 삶을 길게 늘어선 도미노라고 생각해보십시오. 알겠죠? 여러 날 여러 해의 연속이지요. 모든 도미노는 선택입니다. 이건 어느 학교에 다니느냐지요. 이건 당신이 결혼한 남자입니다. 이건 이사한 집이죠. 이건 일요일 저녁 식사로 만든 통구이 요리 입니다. " 

사내는 손으로 도미노를 세우는 시늉을 했다. 

"우리의 삶은 원인과 결과지요. 아무리 작은 선택이라도 중요해요. 한 도미노가 다른 걸 치고, 그 다음 것을, 또 그 다음 것을 치지요."

신부는 맨 앞에 보이지 않는 도미노를 집게 손가락으로 툭 치는 척 했고, 그 결과 상상 속의 대형 전체가 앞으로 쓰러졌다. 안나에게는 대열이 무너지면서 뼈 색깔 플라스틱이 툭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도미노를 조금씩 나누어 주시는 이는 바로 주님입니다. 그걸 한 줄로 세우고 넘어뜨리는 것이 우리지요. 우리는 어떤 특정한 몫을 받을 수 있는지 결정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가진 걸 어떻게 배열할지는 선택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이 무너지고 망가졌을 때 다시 시작하는 선택을 할수도 있지요. 제가 운명 예정설을 믿으냐고요? 아닙니다. 미리 예정된 영원이 있다면 저는 일찌감치 이 직업을 그만두어야 했겠지요." 

<p.381~382>


안나는 신이 준 도미노를 너무나 위태롭게 세워놓고 그것이 쓰러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고, 언젠가 쓰러질 조짐이 보여도 그때가 오길 마냥 기다리기만 한 것이다. 안나는 분명 그 전에 충분히 다른 이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 도 있었고, 스스로의 의지로 운명을 거스를수도 있었으며, 파멸이 왔을때 조차 쓰러지는 것이 아니라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질수도 있었다. 하지만 안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런 부분이 슬펐다. 그녀의 그 지독한 수동성이 자신의 삶까지 스스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 행해지도록 내팽개쳐 버린 것이. 자신이 상처받기 싫어서 차라리 그 누구와도 접촉하지 않고 철저히 외톨이로 살아야겠다고 다짐했던 그녀의 마음이. 소설 말미에는 안나의 친구인 소심했던 메리가 조금씩 자기 힘으로 운전을 하고, 자원봉사를 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부족하지만 적극적으로 자신의 삶을 개척해나가고 있는 메리와 그렇지 않은 안나가 대비 되면서 안나의 삶이 더 씁쓸하게 느껴졌다. 이 소설에는 인간 본연의 이기적인 마음과 우월한 심리, 군중 속의 고독 등 다양한 감정이 잘 드러나 있어서 소설을 읽다 정말 흠칫 놀랐다. 작가가 사람의 내면을 깊이 파고들어 표현하는데 탁월하다는 것을 느꼈다. 


질 알렉산더 에스바움은 원래 저명한 시인으로 활동하다가 이 소설을 낸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소설 중간 부분에 나오는 문장이나 대화들이 짧지만 강하고 의미심장한 부분이 많았다. 시를 통해 쌓아온 언어의 단단함과 깊이가 느껴지는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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