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7월 22일, 대한민국 교육부 정책기획관 나향욱이 파면징계됐다. '개돼지'에 관한 철학적 담론을 '민중'에게 기념비적으로 제기하고, 얼떨결에 '살신성인'한 셈이다. 사실 이 이슈에 관한 논쟁은 아주 까마득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나향욱이 '기여'한 게 있다면 이 이슈를 '민중적'으로 이해하기 쉽게 부각시켰다는 것뿐이다. 나는 이 '개돼지론'의 역사가 철학 그 자체의 역사라고 확신한다.

 

이 세상은 어쩌다 인간/개돼지로 나뉘었을까? 인간의 일일까, 신의 뜻일까? 신의 뜻이 아니라 인간의 일이라고 설파한 사람이 있다. 헤라클레이토스다.

 

전쟁은 모든 것의 아버지이고, 모든 것의 왕이다. 그것이 어떤 이들은 신으로 또 어떤 이들은 인간으로 드러내며, 어떤 이들은 노예로 또 어떤 이들은 자유인으로 만든다. (249쪽.)

 

전쟁은 상호대립하는 두 인간집단이 상호의존하며 일체가 돼 적대적 모순을 극단적으로 폭발시키는 현상이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인간/개돼지를 만들어내는 원리가 인간 외부에서 작동하는 신의 뜻이 아니라 인간간의 문제임을 설파한 것이다.

 

반면 소크라테스의 생각은 달랐다. 그의 관심은 개인의 영혼으로 향한다. 그것은 인간을 지배하는 지혜와 이성이며, 궁극적으로는 신으로 향한다. 그의 가장 유명한 경구가 모든 것을 말해준다.

 

 

 

소크라테스: (...) 속 편한 친구, 부디 나의 말과 델피에 있는 글귀를 받아들여 자네 자신을 알도록 하게. (...) 자신을 알라고 명하는 자는 우리에게 혼을 알라고 시키는 걸세. (124b. 87~88쪽, 130e. 106쪽.)

 

위작논란이 있지만 소크라테스 주장의 일관성에 정확히 부합한다. 그런데 혼을 아는 것은 또 무엇인가? 현실적으로 개인의 처지에 따른 지혜와 이성을 초월하여 상상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런 관점에서 계급을 바라보는 소크라테스 다음과 같은 시선이 이어진다.

 

 

그러니까, 트라시마코스 선생, 그 밖의 다른 어떤 통솔(다스림: archē)을 맡은 사람이든, 그가 통솔자(다스리는 자)인 한은, 자신에게 편익이 되는 걸 생각하거나 지시하지 않고, 통솔(다스림)을 받는 쪽 그리고 자신이 일해 주게 되는 쪽에 편익이 되는 걸 생각하거나 지시하오. 또한 그가 말하는 모든 것도, 그가 행하는 모든 것도 그 쪽을 염두에 두고서 그 쪽에 편익이 되고 적절한 것을 염두에 두고서 말하고 행하오. (342e. 92~93쪽.)

 

소크라테스는 계급체제의 현실과 이상을 구분하지 못하고 있다. 1%가 99%를 위하고 있다는 논리다. 그러니 플라톤(이 전하는 소크라테스)의 다음과 같은 논리가 이어지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보인다.

 

그건 성향에 있어서 제화공인 사람은 구두 만드는 일을 하되 다른 일은 결코 하지 않는 것이 옳고, 목공은 목공의 일을 하는 것이, 그리고 그 밖의 경우에도 그렇게 하는 것이 옳다고 하는 것이었네. (…) 그러니까 다시, ‘올바름을 생기게 함은 곧 혼에 있어서 여러 부분이 서로 지배하며 지배받는 관계를 성향에 따라확립함이요, 반면에 올바르지 못함을 생기게 함은 곧 서로 다스리며 다스림을 받는 관계를 성향에 어긋나게확립함이 아니겠는가? (443c. 307~308쪽, 444d. 310~311쪽.)

 

플라톤(이 전하는 소크라테스)식 지배/피지배체제의 핵심은 자신의 처지를 잘 아는 것이다. 1%는 1%의, 99%는 99%의 처지=이성=혼을. 하지만 이런 생각이 이상이 아니라 현실에 대한 분석으로 어떤 의미가 있을까? 제화공의 성향을 타고 태어난 왕, 왕의 성향을 타고난 제화공을 어떻게 할 것이며, 누군가 그런 성향을 타고 태어났다고 누가 판단할 것인가?

 

이상국가를 향한 이런 식의 대책없는 발언이야말로 현실을 합리화하는 지름길을 아주 쉽게 터준다. 그것이 현실 속에서 합리화될 때, 성향에 따른 1%의 지배인간이 99%의 피지배인간을 이성에 따라 먹여살려주겠다며, 1%의 인간이 99%의 인간을 개돼지 취급하며 착취하는 사회가 합리화될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그러므로 강단 있게 '이것 말고 뭣이 중헌디?'라고 끊임없이 물어야 한다.

1. 지배/피지배는 왜 일어나는가? 신의 뜻? 인간의 일?

2. 지배/피지배를 가르는 사유는 무엇인가? 인간적 성향? 사회구조?

3. 지배자는 피지배자를 위한 지배를 하는가 아니면 자신들을 위한 지배를 하는가? 양을 위한 목자? 목자를 위한 양?

4. 지배/피지배의 해결책은 무엇인가? 신분제강화? 계층이동과 세속적 지배통제 혹은 혁명?

 

삼척동자도 어렴풋이 답할 수 있을 것 같은가? 철학사가  이런 손쉬운 문제를 둘러싸고 현학적으로 싸워온 역사라는 걸 알면 누구라도 철학에 대한 경외심이 웬만큼은 사라질 것이다. 바로 그때가 철학을 공부하기 가장 좋은 때일 것이다.

 

김욱, http://blog.aladin.co.kr/kimwook, 2016. 7.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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