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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기 없는 에세이 - 지적 쓰레기들의 간략한 계보
버트런드 러셀 지음, 장성주 옮김 / 함께읽는책 / 2013년 8월
평점 :
절판



1.


러셀의 여러 저작들 가운데, 금번에 이야기 하고자 하는 <인기 없는 에세이>를 제외하고서 내가 접한 책은 행복의 정복이 유일하다. 그나마도 책을 완독하지는 못했는데, 첫 번째는 잘 시간도 부족한 군에서 처음으로 접했다는 이유고, 두 번째는 그래서 사색할만한 여유도 없는 판에 철학적인 배경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이 책을 접했다는 이유도 한 몫 거들었다. 어쨌든 몇 장 읽어보지 않고 책은 다시 도서관의 한 편으로 밀려 들어갔는데, 아마 그 이후로 그 책은 군 도서관에서 빛을 다시 보지 못했지 않았을까 싶다.


그래서인지 이번에 러셀의 책을 읽게 되면서도 그 때의 악몽(?)이 다시금 살아나는 것 같아서 주저할 수 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애석하게도, 러셀의 책을 처음 접할때와 마찬가지로 이 책 역시도 읽을 시간이 없었다. 혹자는 책은 짬짬이 읽는게 아니라 시간을 내서 읽는거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책을 읽을 시간이 없다는 것은 아마 누구나 공감할 수 있지 않을까. 아마 수능이 한 자리로 다가왔는데 책을 읽으라고 독촉하는 듯한 느낌을 상상하면 될 것 같다. 여차여차 해서 주변이 조금 정리되고 러셀의 <인기 없는 에세이>를 읽기 시작했는데, 1장 '이 모든게 정치와 무슨 상관인가?'를 읽으면서 그 옛날 행복의 정복을 읽으면서 느꼈던 감정들이 과거의 기억 깊숙한 곳에서 스멀스멀 올라오고야 말았다. 헤겔의 철학과 교조주의에 대하여 신랄한 비판을 하며 그에 대한 대안으로써 경험론적 자유주의를 제시하고 있다는 것 정도야 이해할 수 있었지만 어떤 흐름을 따라서 그런 결론을 내리는지는 사람에 따라 다소 어렵게 다가올 수도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너무 쫓겨가며 읽어서 그런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러나 그 이후로 책은 읽어 나가는 데에 어려움이 없다. 2장 '초보자를 위한 철학' 이후로 다뤄지는 다른 에세이들은 1장에 비해 비교적으로 쉽게 기술되어 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상대적으로 보편적인 주제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는 점도 한 몫 한다. 어쨌건 1장을 빼면 책은 서문에서 언급했던바와 같이 '쉽다'


다만 책이 쉽게 씌여졌다는 이유로 평가절하를 당할수도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대개의 철학서라는 것이 일반인들이 쉽게 읽기에는 난해한 문장과 단락으로 이뤄져 있는 경우가 많고, 또한 비평가의 눈과 일반 대중의 눈은 전혀 다른 별개의 시선이라서, 의도적으로 대중의 시선에만 맞췄다가는 수준이 낮다는 이유로 비판받을 여지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런 시선을 러셀도 의식했는지 책의 제목을 '인기 없는 에세이'라고 뽑지 않았던가. 그렇지만 러셀 스스로가 인기 없을 것이라고 평하던 그의 에세이들은 단순히 쉬운 것으로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2.


책은 러셀이 그 당시에 출판하지 못하고 가지고만 있던 여러 에세이들을 묶어서 담고있다. 그래서 각각의 챕터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기 보다는 각각의 별개의 내용을 다루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9장과 10장처럼 인류의 도움이 / 해가 된 관념들을 제외하면) 그러나 책 '인기 없는 에세이'속 에세이들이 담고 있는 내용들은 결국 하나의 특이점으로 수렴하고 있는 것을 관찰할 수 있다. 이는 책의 여는 글 속에 담겨져 있다. '그 목표는 이제껏 우리의 비극적인 세기를 특징지었던 교조주의가 좌파에서도 우파에서도 성정하지 못하도록 어떻게든 막는 것이었다'


러셀은 여러 이유들을 언급해가며 이를 계속하여 보여주고 있지만, 사실 어떤 이유에선 간에 교조주의가 비극적인 결론으로 수렴하는 것은 분명하다. 러셀은 책 속에서 '불분명한 미래의 선을 위해 명확한 현재의 악을 감내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라고 언급하고 있는데, 교조주의적인 성향을 띄는, 예컨데 종교라거나 공산주의, 파시즘, 나치즘 등의 모든 것들이 모두 이러한 행동을 강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부 극성 종교의 경우 내세의 구원을 위해 현세에서의 무리한 행동을 요구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나치즘의 경우에는 유대인을 몰살시키는 것이 미래의 선을 매우 확실하게 보장해주는 것이 아님에도 이를 실천으로 옮기는 등이 바로 그것이다. 이들은 현실속에서 경험을 통해 자신이 먼저 세운 가설을 수정하는 과정을 거치지 않으며, 자신들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만이 유일한 진리라고 생각한채 세상을 만들어 나간다. 이러한 극단적인 태도가 인류를 어떻게 파멸로 몰아넣을지는 확인하지 않아도 자명하다.


이는 우파와 좌파를 막론하고서 어느 곳에서든지 있어 왔던 것도 사실이다. 우파는 굳이 언급하지 않고, 좌파만을 살펴보자. 우리가 흔히 좌파라고 생각되는 사상을 나라의 핵심 사상으로 삼았던 소련을 살펴보면 된다. 러셀은 책속에서 '러시아와 비슷한 기후를 갖는 캐나다에서는 밀의 품종 개량을 위해서 실험을 하지만, 소련에서는 밀의 품종 개량을 위해 마르크스의 사상을 뒤적여 본다'라며 극단적으로 표현해놨는데, 실제로 그렇다. 애초에 교조주의적 성격을 띄는 그 어떤 곳이던지 간에 이러한 모습을 보일 수 밖에 없으니 말이다. 예컨데 이런것이다. 몸에서 열이 나고 너무 아파 이야기 했던이 병원에 데려가기는 커녕 기도를 해주는 것. 보다 극적인 사례들은 그것이 알고싶다 에서도 여러번 방영되기도 했다.


3.


이러한 교조주의가 판치는 세상속에서 유일한 해답은 명확하다. 러셀의 표현을 빌리자면 '경험적 자유주의'라고 할 수 있겠다. 하나의 가설을 설정하였다면, 이를 금과옥조처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일상적인 경험을 토대로 이러한 가설을 수정해 나가는 것. 물론 그렇다고 해서 무조건 '오늘을 위해 살아라'는 것은 아니다. 다가오는 겨울과 봄을 대비하기 위해 식량을 비축하고, 기계를 손보는 것과 같은 일들은 현재의 시선에서 바라보면 귀찮고, 또 힘든 일이기도 하지만 다가오는 미래의 안녕을 비교적 '분명하게' 보장해준다. 이러한 경우라면 현재에서의 고통을 다소 감내할 수 있을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음에도 무조건적으로 어떠한 사상을 쫓고 추종한다면 이는 비극적인 결론에 도달할 수 밖에 없다. 러셀의 이러한 이야기는 반 세기도 더 된 이야기이지만,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이는 우리나라의 좌파나 우파 모두가 가지고 있는 한계이기도 하다. 러셀의 이러한 주장을 단순하게 넘어가버린다면, 인류의 역사에 발전이라는 것은 아마 없을것이다. 오늘날의 과학이 옛날의 뉴턴 역학만을 쫓고, 무조건 그것만이 진리라고 생각했다면 상대성 이론이나 양자 역학과 같은 새로운 과학은 등장할 수 없을 것 처럼 말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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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불평등을 감수하는가]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왜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하는가? - 가진 것마저 빼앗기는 나에게 던지는 질문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안규남 옮김 / 동녘 / 2013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책 '왜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하는가?'가 전달해주는 가장 주된 내용은, 오늘날의 경제체제는 근본적으로 소득의 불평등을 가져 올 수 밖에 없다는 것으로 보인다. 시장경제가 기대하던 '낙수 효과(trickle down)'가 사실상 커다란 효과를 가져다 주지도 못할 뿐더러, 이런 그럴듯한 이유로 하여금 소득과 계급의 고착화를 더욱 심화시키고 있다는 이야기가 책 전반에 깔려있는 내용이다. 오늘날 시장경제체제에 대한 비판이야 지금까지 쭉 있어왔던 부분이고, 그 내용이 낙수 효과에 포커스가 맞춰져 있다는 것 역시도 지속되어 온 부분이기 때문에 새로운 점은 없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 논의가 불필요 하다고는 할 수 없다. 실제로 이러한 효과를 기대하며 이뤄진 정책들 중 상당수가 대다수 시민들의 구매력을 향상시키는데에 긍정적으로 작용하지 못한 사실들이 많은 곳에서 관찰되어 왔기 때문이다. 다만 <불평등의 대가>에 대한 답이라는 책의 거창한 소개문에 비한다면 이는 추레하기 그지없다.


더군다나 이 책이 포커스를 맞추고 있는 불평등의 개념 역시도 현재의 나를 기준으로 했을 때의 상류층에게만 국한되어 있을 뿐, 자신의 위치에서 아래를 본 시선으로 나타나고 있지는 못하다. 우리가 살고있는 국가 뿐만이 아니라 더 큰 범위에서 전세계를 놓고 이야기한다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 역시도 누군가에게는 불평등이다. 물론 책이 보여주고 있는 부유와 빈곤의 차이는 전세계적 범주에서 논하고 있다는 반론이 있을 수는 있다. 하지만 글을 읽고 난 후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보다 아래, 그리고 전세계적인 범위에서 이 논의를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위치에서 위로만의 불평등에 국한하여 이 논의를 이해한다는 것은, 읽는 이의 문제라기 보다는 책 자체의 문제라고 할 수 밖에 없다. 1명의 부자를 만들기 위해 500명의 '평범한' 사람이 희생되어야 한다면, 그 1명의 평범한 사람을 만들기 위해서는 다시 500명의 '극빈곤층'의 목숨을 담보로 할 수 밖에 없다. 이는 재화가 한정되어 있는 이상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일 수 밖에 없다. 엄청난 재난이 발생하여 지구가 새롭게 출발하지 않는 이상은.


당장 내 주머니에서, 내 통장에서 돈을 빼어 극빈곤층의 삶을 위해 지원하는 것을 꺼려하는 이들이 이 책을 읽고서 '불평등을 향한 투쟁'을 외친다는 것은 넌센스다. 물론 일부의 소수 계층이 다수의 재화를 독점하고, 그리고 여남은 것만을 대다수의 사람들이 향유한다는 것은 상당히 불합리한 일이며, 수정되어야 할 부분이기도 하다. 하지만 온전히 자신의 노력으로 그 자리에 디딘 사람을 우리는 비난할 자격이 있을까?


예전에 한동안은 이런 이야기가 돌아다녔던 적이 있었다. 학벌을 우선시 하는 국내 기업 인사문화를 비판하는 사람들이 많아지자, 기업에서는 이력서란에서 학력란을 없앴고, 학벌을 전혀 배제한채 신입사원들을 뽑아봤는데, 우습게도 절반 이상의 학생들이 우리가 소위 명문대라고 불리우는 학생들이였다는 이야기다. 다만 명문대를 들어간 사람들의 상당수가 상류층의 자제들이고, 또한 그런식으로 보다 질 좋은 교육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충분한 실력을 쌓을 수 있었다는 반론이 있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는 현재의 사회제도 내에서 충분히 그 간격을 좁혀나가기 위해 논의할 수 있는 부분이며, 때문에 경제체제를 엎어버리자는 논의를 뒷받침할 근거는 되지 못한다. 또한 이러한 반론은 그런 상류층의 자제임에도 명문대에 진학하지 못한 다른 경우, 그리고 힘든 집안 사정에도 명문대에 진학한 많은 사례나 훌륭하게 사회생활을 하고 있는 경우에 의해 충분히 반박될 수 있는 근거다. 결국 명문대, 그리고 우수한 졸업이 온전히 돈으로만 이뤄진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이다. 때문에 명문대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곳을 위해, 그리고 그곳에서 열심히 공부하고 준비한 이들에게 지역 균형 선발이라는 공기업의 입사제도는 오히려 그들에게 또 다른 차별로 다가올 수도 있을테다.


이는 우리에게 불평등이라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새롭게 던진다. 단순하게 재화의 풍족함과 부족함으로만 불평등을 따지면 명문대라는 간판과 지방대학이라는 간판 그 자체는 불평등이다. 하지만 그들이 노력하여 명문대에 진학했지만 그러한 불평등을 없애기 위해 지역 균형 선발 제도를 만들었다면, 이는 명문대생들에게는 또 다른 불평등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앞서 언급했듯이, 가난한 집의 자녀들도 충분한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하자는 주장을 할 수 있을것이다. 이러한 제도의 보정을 통해 불평등을 해소하자는 이야기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주장속에 불평등의 진정한 의미가 숨어있다. 불평등은 재화의 풍족함이나 부족함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주어지는 기회와 여러 환경들에서 온다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경제 체제하에서 이러한 기회의 불평등 양상이 조금씩 엿보이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이전에 있었던 영훈국제중입시비리사건등이 바로 하나의 예가 될 것이다. 그나마 국내의 경우는 미국과 같은 국가에 비해 낫다. 우리나라는 예전부터 교육의 가치를 높게 평가해오던 관습이 남아 있어서, 3불정책(본고사, 고교등급제, 기여입학제 불가)이 여전히 유효하게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교육의 차원에서만 바라본 것이지, 보다 넓은 안목으로 바라본다면 이런 기회의 불평등이 사회 곳곳에 남이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오랜 시간동안 사회적 논의를 거쳐 다른 대안을 토대로 분명 수정해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지금의 체제를 엎고 다른 체제를 만들것인가? 과연 만든다면 무엇을 어떻게 만들것인가? 시장경제가 태생적인 한계를 갖고 있지만, 그에 대한 대안으로 제시된 여러 정책들에 비해 가장 온전하게 작동하고 있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더군다나 시장경제가 가지고 있는 한계 역시도 '인간이 충분히 이성적이고 도덕적일 경우'라는 가정 하에서는 발생할 수 없는 작동들이다. 애초에 애덤 스미스도 국부론에서 '인간의 이기심은 사회의 도덕적인 한계 내에서만 수용된다'라고 주장하며 도덕적인 가치의 중요성을 언급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애덤 스미스는 애초에 도덕 철학자였다.) 때문에 사회를 이상적으로 그려냈던 그의 머리속에서는 아마 시장경제의 이러한 역기능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맑스가 사회주의의 처참한 결말을 예상하지 못했을 것 처럼 말이다. 그리고 이는 달리 말하면, 애초에 이런 모든 것들은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 밖에 없는 부분이라는 생각도 해볼 수 있다. 바람직하지는 않지만.


설령 그렇다고 해서 불평등에 대한 논의가, 그리고 이러한 불평등을 어떻게 하면 줄여 나갈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무가치하지는 않다. 불평등이 심화된 사회에 밝은 미래를 기대한다는 것은 사실상 어렵기 때문이다. 때문에 책 '왜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하는가'가 주장하는 바에 모두 동의할 수는 없지만, 최소한 불평등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는 이야기에는 공감할 수 있을것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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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자신을 속이도록 진화했을까]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우리는 왜 자신을 속이도록 진화했을까? - 진화생물학의 눈으로 본 속임수와 자기기만의 메커니즘
로버트 트리버스 지음, 이한음 옮김 / 살림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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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친구들 가운데 고등학교 시절 공부를 그렇게 잘했음에도 어쩔 수 없는 이유로 조금 낮은 대학을 가게 된 친구가 있었다. 물론 대학을 서열화 짓는다는 것, 그리고 대학이라는 간판 하나만으로 한 개인을 판단한다는 것 자체는 매우 시대착오적인 발상이지만, 어쨌거나 그 친구는 주변에서도 많은 기대를 했던 친구이기 때문에 그 친구가 진학한 대학에 대해서 주위에서는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 이였다. 몰론 그 친구 역시도 자신이 진학한 대학에 만족하지 못했었는데, 오랜 시간이 지나 다시금 만나게 되니 다소 의아한 상황이 생겼다. 자신이 진학한 대학을 그렇게도 부정하던 친구가 어느새 부턴가 자신의 대학에 만족감을 느끼기 시작했다고나 해야 할까. 그 친구가 만족감을 느끼게 된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문득 책 '우리는 왜 자신을 속이도록 진화했을까?'를 읽다보니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 친구가 지금 자기기만에 빠진 것은 아닐까?

 

자기기만은 다소 생소한 개념이지만, 우리 주변에서 이처럼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것도 사실은 드물다. 굳이 어려운 예를 찾을 것도 없다. 당신이 언젠가 한 번 시험을 망쳐놓고서, '배우지 않은 내용들이 나왔네'라며 핑계를 댄 적이 있다면, 이 것 역시도 자기기만의 좋은 예가 될 수 있다. 사실 곰곰이 떠올려보면 배우지 않았을 리 만무하다. 어떤 출제위원이 학습하지도 않은 문제를 시험에 출제하겠는가? 그저 스스로가 시험을 망쳤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기에 그럴듯한 핑계를 찾아 스스로를 속인 것이라고 보는 것이 더 옳다. 따라서 이는 자기기만의 좋은 예가 될 수 있다. 자기기만과 비슷한 말은 아마도 자기합리화, 오만, 오기억 등이 될 수 있겠다.

 

하지만 이러한 자기기만을 진화생물학자 입장에서 바라본다면, 납득하기 쉽지 않다. 진화가 항상 생물이 생존을 이롭게 하는 방향으로 진행된다고 생각하면 이는 더더욱 그렇다. 오늘날 현대사회의 모습 속에서 살펴보자. 미국뿐만이 아니라 여러 나라에서는 간혹 간호사에 의해 잘못된 약물을 주사하는 경우가 발생하는데, 이는 환자의 생명과도 직결될 수 있다는 측면에서 매우 위험한 사고라고 할 수 있겠다. 좀 더 넓게 본다면, 종을 유지하는 차원에서 바라본다면 이만큼 비합리적이며 손실이 되는 행위도 없다. 더군다나 이러한 사고도 결국은 자기기만에서 발생한다. 간호사는 의사의 처방을 받아 그대로 주사하고는 하는데, 의사가 만약 처방을 잘못할 경우, 간호사는 그 사실을 알면서도 '이 약을 처방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라며 그저 넘어가버리곤 한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라는 것. 자기합리화와 현실회피에 의한 자기기만이다.

 

과도한 자신감, 미국의 이라크 전, 종교 등도 결국은 자기기만과 연결되어 있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인간은 자기기만에 빠져살까? 왜 알면서도 스스로를 속이면서 살아갈까? 답은 의외로 간단했다. 그러면 '기분'이 좋으니까. 자신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대학을 진학했음에도 그곳에 만족하면서 살아가던 나의 친구나, 시험을 망쳐놓고서 핑계를 찾고 그리고는 그것이 진짜인 마냥 믿어버린 것이나, 결국은 '그러면 기분이 좋으니까'였다. 자기기만은 그런 원초적인 이유로 시작됐다. 물론 책 '우리는 왜 자신을 속이도록 진화했을까?'의 저자는 그보다 더 앞서나간 자기기만을 상정한다.

 

예컨대 당신이 의도했던, 의도하지 않았던 간에 누군가를 속였다는 상황을 가정해보자. 그리고 상대방은 자신이 당신에 의해 기만당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그리고 상대방은 당신에게 그 책임을 강요한다. 일반적인 상황에서 이런 경우는 특별한 사건 없이 말로 좋게 넘어가고는 하겠지만, 이번의 경우는 상황이 좀 다르다고 해보자. 만약 당신의 기만이 들통 났을 경우 당신은 이 상황을 수습하지 못할 것이라고. 그렇다면 이제 당신은 이 위기상황에서 도피하기 위해, 그리고 생존해내기 위해 '자기기만'을 선택한다. 이제부터 당신은 상대방을 속인 것이 아니라, 당신도 누군가에게 속은 피해자가 되는 것이다. 이런 자기기만은 단순히 기분이 좋아지기 위해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생존하기 위해 공격적으로 자기기만이라는 도구를 사용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물론 이는 단순하게 인간에게만 한정되는 현상은 아니고, 여러 동물들에게서도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저자는 이야기한다. 예컨대 외부 침입자로 인식되지 않기 위해 위장하여 침투하는 바이러스나 세균, 그리고 천적 앞에서는 몸집을 부풀리는 동물들까지. 실제로 자기기만이라는 현상은 자연계 곳곳에서 살펴볼 수 있는 현상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기만술은 세월이 지나면서 상대방에 의해 간파 당하고는 하는데, 이렇게 되면 생물체는 다시 다른 기만술을 만들어내고, 그렇게 계속 진화해나간다. 그렇다고 해도 자기기만을 이해하기는 어렵다. 자기기만을 통해 얻는 이익과, 미래에 다가 올 손해를 계산해보면 후자가 압도적으로 더 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간호사의 경우처럼 말이다.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자기기만이라는 용어를 우리가 쉽게 접하는 것은 어렵다. 하지만 자기기만은 주변에서 쉽게 찾아볼 수 현상이며, 때문에 어려운 학문적 내용을 굳이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단순히 읽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흥미롭게 접할 수 있다. 더군다나 우리가 자기기만의 실체를 정확하게 알고 있을 때야 비로소 자기기만에 의해 당하는 불행한 일이 없을 것이다. 마냥 재밌는 이야기라고만 생각해서 넘겨버리기에는 아까운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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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의 자유]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폭력의 자유 - 해직기자 김종철의 젊은이를 위한 한국 현대언론사
김종철 지음 / 시사IN북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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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에는 블로그로 대표되는 대안언론들이 많아지면서, 기존의 신문사나 방송사 등 대형 언론사들의 영향력이 많이 축소된 것이 사실이다. 물론 정치, 사회학과 같은 내용을 전공하지 않은 비전공자들이 그와 관련한 내용들을 무차별적으로 쏟아내는것은 한편으로는 우려할 만한 일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언론 엘리트주의에 빠져서 이러한 대안언론들을 마냥 무시하는 것 또한 바람직 하지는 않다고 볼 수 있겠다. 그러나 아무리 기존의 언론사를 대체할만한 새로운 매체들이 나온다고 하여도 기존의 언론사들이 가지고 있는 그 영향력을 무시하기는 어렵다. 발품팔아 기사를 쓰는 블로거라고 한들, 오랜 기간동안 취재만을 해오며 쌓은 내공을 따라잡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고, 더군다나 비전공자가 쓰는 글의 수준에서도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다. 그래서인지 실제로 오늘날 대안언론들은 주류언론들이 취재해 온 내용들을 토대로 자신의 생각을 덧붙이는 정도에만 그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어느 사회든지 간에 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 또는 조직에게는 수준높은 도덕성을 요구하게 되기 마련이다. 마오쩌뚱의 아들 이야기는 6.25 전쟁사에서 익히 알려져 있는 이야기이며, 2차 세계대전 당시 명문가 자제들만 다니던 이튼칼리지 출신의 학생들 중 2천여명이 전쟁에서 사망한것 역시도 우리에게 익숙한 이야기다. 흔히 노블레스 오블리주라고 불리우는 이러한 것들은 고위층의 인사들에게 높은 수준의 도덕성을 요구함으로써 계급간의 갈등을 줄이기 위한 수단으로써 이해되는 경우가 많은데, 그도 그럴것이 고위층의 언행들은 결국 사회의 모범이 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예컨데 자녀는 부모의 거울이라는 말이 있는것처럼, 그 사회의 고위층들이 어떤 태도로 사회를 살아가느냐는 결국 그 사회의 모습으로 바로 직결되기 때문이다. 언론이라고 해서 이러한 기준에서 벗어날리 만무하다.


사실 언론은 그러한 기준에서 벗어날리 만무한 수준이 아니라, 우리가 일반적으로 고위층들에게 요구하는 도덕보다 더 높은 수준의 가치가 요구되어진다. 소위 '총보다 펜이 더 무섭다'라는 말은, 총은 총부리를 겨누고 있는 한 사람만을 조종할 수 있는 반면에 펜은 불특정 다수의 여론을 순식간에 조장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이다. 마찬가지로 언론은 자신들의 펜을 통해서 그들이 속해있는 사회의 여론을 한 방향으로 몰고갈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결국은 사회속에서 진정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는 세력은 어떻게 보면 언론이라는 결론을 내려볼 수 있다. 수 년 전 노무현 전 대통령의 탄핵을 막아낸것도 결국은 여론의 힘이였다는 점을 상기시켜본다면, 대중의 힘이라는 것은 그들이 하나의 의견으로 단결할 경우 그 누구도 무시하지 못할 수준이라는 것을 의미하며, 이는 곧 언론이 가지고 있는 힘이 무시무시하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언론에는 왜 그렇게 강한 힘이 있는것일까. 이는 언론이 존재하지 않던 시절의 사회를 상상해보면 간단하다.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그 옛날에도 지배층과 피지배층간의 갈등이야 꾸준히 있어왔던 일이지만, 대개 그 옛날의 경우 지배층에 의한 힘의 논리로 인해 피지배층의 일방적인 패배로 귀결되는 경우가 많았다. 대중은 하나의 의견으로 뭉친다면 강력한 힘을 발휘하겠지만, 그렇지 못한 대중은 그저 각개격파를 통해 무너뜨릴 수 있는 나약한 존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 언론이라는 것이 등장하게 되었고, 이는 지배층으로 부터 학대당하던 피지배층을 그와 비슷한 수준까지로 높혀줄 수 있는 '신의 한 수'였다. 즉, 이전의 사회 구성원들은 지배층의 도덕성에 전적으로 자신의 운명을 맡길 수 밖에 없었던것에 반해, 언론이 등장하고 나서부터는 지배층을 견제할 수 있는 도구가 생겼다는 의미다. 결국 언론은 대중들을 하나로 묶어낼 수 있는 능력을 보유함으로써 지배층을 견제할 수 있었고, 이는 언론이 가지고 있는 힘의 근원은 대중이라는 의미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언론이 지배층의 영향력 아래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정확하게 진단한다면 언론 스스로가 지배층의 발 아래로 기어 들어간것이라는 표현이 적절할수도 있겠다. 말이야 언론이 지배층을 통제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는 하지만 실제로 그들이 체감할 수 있는 힘은 없었기 때문에 권력욕에 가득찬 그들이 지배층의 기대에 영합하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일테고, 이는 지배층으로써도 손해볼것은 없는 장사였다. 눈에 가시같은 언론만 통제할 수 있다면 문제될것이 없을테니 말이다. 이러한 사례는 오늘날의 이탈리아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일이지만, 그 옛날 우리 역사의 암흑기인 일제강점기 시절에도 횡행했다. 다만 후자의 경우 우리가 느끼는 그 충격은 아마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더군다나 우리가 자랑스럽게 여기는 언론의 역사 가운데 하나인 '손기정 선수의 일장기 말소 사건'의 전말을 접하고 나면, 그 누구라도 충격을 받을 수 밖에 없을것이다.


물론 시장의 기대에 영합하는 언론시장주의는 이제 거스를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이라고도 진단할 수 있을 것이다. 뭐든지 간에 돈이 있어야 풀칠이라도 할 수 있지 않겠는가? '현명한 군주가 시민들을 결속시키고 계속적으로 충성을 바치게 할 수 있다면, 잔인하다는 평판을 듣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지나친 자비를 베풀어 무질서를 낳아 살인과 약탈이 자행되도록 하는 군주 보다 소수의 몇 사람에게 가혹 행위를 함으로써 기강을 바로잡는 군주가 사실상 훨씬 더 자비롭기 때문이다.'라고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에서 말했던 것처럼, 일단은 돈이 있어야지 사람들을 모으고, 그리고 지배층을 견제하던지 말던지 할 수 있다는 반박은 충분히 가능하다. 우리도 학생들에게 항상 이야기 하지 않는가? 억울하면 공부해서 성공하고, 그 다음 세상을 바꿔보라고.


문제는 기본적으로 권력이나 돈은 마약과 같다는 것이다. 설령 그 위험성을 인지한다고 한들 이미 끊기에는 너무 많은 걸음을 와버린 경우가 많다. 그래도 그나마 그 사실을 자각한 경우는 낫다. 최소한의 희망이라도 그 곳에는 존재할 수 있을 것이다. 아마 책 '폭력의 자유'가 그런 역할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다만 대개의 이런 형태의 서적들이 그러하듯이, 대체적으로 보수 주류 언론들을 비판하는 구도로만 쓰여지고, 또한 진보 주류 언론들을 그 해답으로 제시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이 책도 피해가지는 못했다. 물론 보수 주류 언론들이 권력층과 영합하는 모습을 더 보여왔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현재의 대한민국에서 진보 주류 언론들도 이러한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그래서일까. 책에서는 '진보 언론의 보수 언론 따라하기'라는 내용을 언급은 하고 있다. 그렇지만 큰 비중은 없다.


책 폭력의 자유는 바람직한 언론의 모습을 '가난하고 소외단 자들의 벗'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꼭 그것을 목적으로 추구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애초에 언론이 이러한 목적을 갖게 되면 여기에서 또 다른 권력으로의 영합이 이뤄질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가령 소위 진보 주류 언론이라고 불리는 한겨례나 경항 신문만 보더라도 이러한 현상은 분명하게 나타난다. 물론 그들이 추구하는 '민중의 벗'이라는 가치에 대해서 비난하고 싶은 생각은 없으나, 그러한 이유로 인해 특정 정당의 입맛에 맞는 기사들이 많음은 분명하다. (이는 조중동으로 대표되는 보수 주류 언론에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애초에 언론은 사실을 있는 그대로 전달하겠다는 태도를 견지해야지, 그곳에 언론인으로써의 개인적이 감상이 덧붙여져서는 안된다고 본다. 그렇게 있는 사실을, 그리고 다양한 계층의 모습들을 보이는 그대로만 전달할 수 있다면, 자연스레 가난하고 소외된 민중의 벗이 될 수 있을것이다. 굳이 그런 가치를 추구하지 않더라도 말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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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일 인문학 - 흔들리는 직장인을 위한
이호건 지음 / 21세기북스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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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면 갈수록 힘들어 지는 현실, 그리고 변하는 것이 없는 오늘과 지체되어 있다는 느낌만 자꾸 드는 자신의 모습 속에서 우리는 좌절하고 희망을 잃어간다. 그러는 동안에 우리는 자신의 삶이 불쌍하다며 후회와 한탄으로, 하루가 어떻게 흘러가는지도 모른다며 불평을 하면서 하루하루를 보낸다. 이럴 때쯤 누군가 나의 어깨를 투닥거려주면 좋겠지만, 모두가 그러니 마땅히 자신을 위로해 줄 사람도 주변에서 찾기 힘들다.

 

그래서일까, 위로를 받고 싶지만 자신에게 위로를 건넬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여 다른 곳에서나마 찾아보고자 해서인지 요근래 많은 분야에서 힐링 열풍이 거세지고 있다. '아프니까 청춘이다', '천 번을 흔들려야 어른이 된다', '방황해도 괜찮아', 그리고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등 출판 분야에서 특히 더 힐링 열풍이 불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사실 우리는 이런 책이 아니라도 평소에 주변인으로 부터 많은 힐링을 받고 있다. 가족에게 털어놓거나, 자신의 친구나 동료들과 함께 술 한 잔 기울이면서 말이다.

 

그럼에도 우리들은 힐링을 받고자 이곳저곳을 기웃거리곤 한다. 이미 주변에서 충분한 힐링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있고, 또 그렇게 하고 있음에도 우리가 계속하여 이를 구하는 것은 힐링이 본질적인 해결방법이 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목이 마를 때에 바닷물을 아무리 마신다고 한들, 당장의 목마름은 가실지 몰라도 앞으로 더 목이 마를 수밖에 없을 테니 말이다. 그럼 오늘날 우리들에게 힐링이 아닌, 진정으로 필요로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 해답을 바로 '30일 인문학'에서 찾아볼 수 있다.

 

힐링은 잠시일 뿐

 

힐링을 주변에서 많이 받고 있음에도 또 다른 힐링을 찾는 것은, 그 만큼 힐링이 필요하기 때문이라고 볼 수는 없다.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책을 읽은 한 대학생이 있다고 했을 때, 그가 나중에 또 다른, 힐링과 관련된 책을 바로 읽는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 시간을 두고 잊힐 법 하면 다시 읽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만큼의 힐링이 더 필요하다면 바로 그 책을 읽었을 테지만 말이다. 우리가 힐링을 계속해서 찾는 것은, 힐링이 부족하기 때문이 아니라, 힐링을 통해 잠시나마 위로를 받을지언정 그것 자체가 진정한 해결 방법이 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힐링이 아닌 우리가 진정 필요로 하는 것은 무엇일까? 30일 인문학에서는 '우리가 대체 왜 살아가는지'에 대한 답을 구하는 것이라고 이야기 하고 있다. '우리가 왜 살아가는 것인가'라는 질문은 숱하게 들어온 질문 가운데 하나이지만서도, 어느 누구도 명확하게 답을 내리지 못하는 질문 중 하나이기도 하다. 질문이 어렵다면 나보다 더 오랜 시간을 살아온 사람, 또는 그 분야의 전문가에게 답을 구하는 것이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다. 그 답을 바로 오랜 시간동안 살아남아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인문고전에서 찾아볼 수 있다.

 

빈민들에게 인문학 교육을, '클레멘트 코스'

 

내용을 진행하기에 앞서서 왜 그에 대한 해결책이 바로 '인문학'이 되는지에 대해서 짚어보고 가는 편이 좋을 것 같다. 현재 서점가에는 힐링 열풍과 더불어 인문학 열풍이 불고 있다. 인문학 열풍의 선두주자격인 책도 있을 테고, 그 열풍을 주도해가는 책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이 인문학이라는 소재가 주목을 받게 된 것은 희망의 인문학의 저자이기도 한 얼 쇼리스가 노숙자를 대상으로 한 인문학 수업인 '클레멘트 코스'를 시작함에 있었다고 봐야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사실 하루하루 벌어먹기 급급한 노숙자와 같은 빈민들에게 인문학 교육을 한다는 것은 시간 낭비이자 효과적이지도 못하다. 차라리 그 시간과 그 돈으로 노숙자에게 밥 한 끼를, 보다 먼 미래를 내다보고 있다면 그들에게 효율적인 직업교육을 병행함으로써 그들이 사회의 바운더리 밖에 위치하는 것이 아니라 내부로 되도록이면 끌고 오는 편이 더 나을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사회의 경계 안으로 들어온 그들의 처우는 여전히 빈민에 그치고, 매사에 무기력한 모습을 보이며 끝내는 다시 노숙자의 삶으로 돌아오는 경우도 많다. 가난 구제는 나라님도 못한다는 말이 있듯이, 국가의 복지정책으로 이들을 끌어가기에는 어느 정도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해결책은 바로 그들 스스로를 변화시키는 것일 테다. 그 변화의 열쇠가 바로 '인문학'이다.

 

한 개인이 사회의 경계 밖에 위치하며 빈민의 삶을 살아가는 데에는 다양한 이유가 있을 수 있다. 본래 중산층의 삶을 영위하고 있었지만 부득이한 이유로 하여 빈민의 삶으로 추락한 경우도 있을 테고, 태어날 때부터 빈민의 가정에서 태어나 그러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전자의 경우 재기할 기회를 마련해주면 다시 일어서는 경우도 있지만, 후자의 경우에는 그러한 변화를 살펴보기 힘들다. 이는 바로 빈민의 가정에서 태어난 이들은 '시내 중심가 사람들의 정신적인 삶'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빈민들을 대상으로 하는 '인문학' 교육은 특히 이러한 계층에게 특히 더욱 효과적일 수 있다.

 

우리들도 마찬가지로

 

기존의 복지정책이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던 것은, 복지 혜택을 제공받는 수혜자 자신의 내면이라는 기반을 다지지 못한 채 그 위에 직업교육과 같은 기둥을 세우려고 했기 때문이라는 추론을 해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빈민들에게 인문학이 유효한 역할을 했던 것은 특별한 목적의식 없이 살아가던 그들에게 인문학을 가르침으로써 그들 삶의 이유와 자신을 한번쯤 뒤돌아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인문학을 통해 그들 내면의 기반을 튼튼하게 다짐으로써 그 위에 쓰러지지 않는 기둥과 지붕을 올릴 수 있었다고 보는 것이다.

 

비단 이는 빈민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에게도 이러한 인문학 교육은 주효하게 작용할 수 있다. 특히 자신을 한번쯤 뒤돌아보지 않은 채 그저 물 흘러가듯이 살아갔던 사람들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그렇게 살아온 자신이라는 땅 위에 세워진 건물이, 직장 생활에서 맞닥뜨리게 되는 숱한 바람과 폭풍을 견뎌내지 못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힐링'을 찾지만, 이는 지반은 다지지 않은 채 폭풍으로 쓰러진 건물을 그저 다시 보수하는 것에 불과하다. 언제라도 다시 바람을 만나게 되면 쓰러지고 마는 것이다.

 

흔들리는 직장인을 위한 30일 인문학

 

인문학의 중요성이 날로 강조되고 있는 요즈음에 누구든지 '나도 한번' 이라는 생각으로 인문고전을 읽어보려고 시도하지만 말처럼 쉽지는 않다. 더군다나 마음잡고 읽기에 시간이 넉넉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면 오늘 소개하려 하는 이 30일 인문학이라는 책이 하나의 답이 될 수 있다. 30일 인문학에서는 주요 타겟층을 직장인으로 잡고, 실제 직장에서 벌어질법한 일들을 토대로 인문학이 어떻게 사용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상사와의 트러블, 자신이 남들에 비해 뒤쳐져 보일 때 등, 그러한 실제 사례들은 한번쯤은 꼭 고민했을법한 것들이다.

 

과중한 업무와 불확실한 미래, 아래에서는 치고 올라오는 후배들과 나를 잡아먹지 못해 안달인 상사들까지. 오늘날 직장인들의 하루하루는 절대로 녹록치 않다. 그 누구보다 많은 스트레스를 당연한 것처럼 보듬고 살며, 때문에 보이지는 않지만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상처를 안고 산다. 그들에게는 지금의 이 상처를 낫게 해주는 힐링도 중요할 테지만, 앞으로는 더 다치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는 것이 더 중요할 것이다. 퇴근 후 술집을 찾아 한잔을 기울이는 것도 좋지만, 이 책을 읽음으로써 술잔을 기울일 일이 없게끔 해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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