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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을 체포하라 - 14인 사건을 통해 보는 18세기 파리의 의사소통망
로버트 단턴 지음, 김지혜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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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흔히 다수가 믿고 따르는 의견, 즉 '여론'이 곧 모든 문제 해결의 열쇠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많은 것 같다. 그렇지만 결론부터 내리고 보면 이는 '틀렸다'. 과거에 빈번하게 자행되었던 마녀사냥이 이를 보여주는 단편적인 예이며, 불과 수년전 국내에서 벌어졌던 광우병 사태 역시도 이것과 맥을 함께한다. 물론 꼭 수입할 필요도 없는, 또한 큰 위험은 없지만 장기적으로 위협 요인이 될 수도 있는 미국산 쇠고기를 30개월 이상, 그리고 특정위험물질(SRM)까지 수입하려는 것은 충분히 지적받고 시정 돼야 할 부분이지만, 대부분의 과학자들이 언급했듯이 당시의 광우병 논란은 필요 이상으로 확대되어 있었다. 또한 이는 실질적으로 30개월 이상 연령, 그리고 SRM 수입을 금지하기로 한 추가협상 이후에도 계속되었고, 당시의 시위는 폭력적으로, 그리고 반체제 성향을 띄어가기 시작했다.


무죄 추정 원칙은 본질적으로 '10명의 범인을 잡는 것 보다 1명의 무고한 사람이 피해를 입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내용으로, 결국 이는 기본적으로 사회는 위험을 최소화 시키는 방향의 정책을 펴는 것이 옳다는 또 다른 예이기도 하다. 즉, 이전의 마녀사냥이나 수년전의 광우병 사태만 보더라도 다수의 의견을 정답이라 결정짓는 것은 매우 위험한 발상이며, 따라서 의견을 종합하고 결정을 내리는 과정에서는 반드시 충분한 논의가 필요하다. 이 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바로 일반 국민이 관련된 사안에 대해서 충분한 정보를 접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선거에서는 유권자가 후보에 대한 정보를 충분히 접할 수 있어야 합리적인 후보를 선출할 수 있을 것이 당연한 것처럼 말이다. 이는 다시 이야기하자면 민주주의 사회에서 기본 되어야 할 것은 바로 '의사소통 망이 잘 꾸려져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책 '시인을 체포하라'는 18세기 당시 파리의 의사소통 망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책이다. 현학적인 표현을 떠나 간단하게 이를 살펴보면 '시'를 통해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는 내용이다. 오늘날 의사소통을 혁신적으로 바꿔냈다는 SNS도 이와 크게 차이는 없다. 결국 누군가의 트윗에서 다른 이의 트윗으로, 누군가의 담벼락에서 다른 이의 담벼락으로 옮겨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혹자는 몇 명의 식자층이 다수의 대중을 향해 뿌리는 과거의 '시'와, 오늘날 일반 대중들이 다른 대중들을 향해 뿌리는 트윗은 분명 차이가 있지 않느냐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오늘날의 SNS도 결국은 몇 몇의 일반 식자층, 즉 수많은 팔로워를 거느리고 있는 소수의 트위터리안들에 의해 내용이 퍼져나가고 있는 사실은 자명하다. 트윗의 출발이 설령 식자층이 아니라고 하여도, 그 내용을 잘 뜯어보면 결국 식자층의 특정한 트윗의 변형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과연 이렇게 퍼져나간 여론을 우리는 수용해 나가야 하는가? 이렇게 여론이 퍼져나가는 동안, 이 내용을 접한 다수의 대중들은 그 이전에 해당 사안에 대한 충분한 정보를 접할 수 있었는가?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다. 근본적으로 정확한 판단을 위해서는 반대 측 정보 역시도 종합할 수 있어야 하지만 입에서 입으로 옮겨가는 과거의 '시', 그리고 오늘날 몇 자 되지 않는 '트윗'을 통해서 애초에 이런 다양한 정보를 옮길 수 있다는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이야기다. 결국 이런 형태의 의사소통은 특정한 정보를 아래로 흘려보내거나 또는, 특정한 사안에 대한 결론을 다수에게 퍼뜨리는 역할밖에 하지 못한다. 이러한 형태의 의사소통은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아무런 쓸모도 없다. 기본적으로 민주주의는 사회를 구성하는 시민들이 어떤 사안에 대해서 자체적으로 합리적인 의사결정을 할 수 있어야만 '그나마'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사회이다. 그러나 정보를 접하지 못하는 사회에서 민주주의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단순히 자신들을 대표할 다른 사람을 뽑아주는 것에 그칠 뿐이다.


결국 이렇게 의사소통 망이 확립되지 않은, 또는 불완전한 사회에서는 몇 몇의 계층이 다수의 대중을 손쉽게 조종하며 움직일 수 있게 된다. 특히 불완전한 의사소통 망이 사회의 정답처럼 굳어지게 되면 이러한 부작용은 더더욱 커지게 된다. 자신도 그러한 의사소통망의 위력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루이 15세가 자신을 비방하는 시에 열을 내며 그들을 잡아들이려고 했던 것 아니겠는가. 누군가는 이를 SNS의 긍정적인 면으로 보는 경향이 있는데, 사실 이는 엄연한 부작용이다. 왜냐면, 반대로 루이 15세가 파리의 의사소통 망을 잘 이용했다면 당시에 14인 사건과 같은 일이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이를 이용할 때 장점이 되고, 그 반대의 경우에는 단점이 된다면 이는 엄연한 '부작용'이다. 결국 다시 다수의 의견이 항상 정답이 아니라는 말로 돌아가게 되지만, 어쨌거나 의사소통망은 그래서 중요하고, 또 올바른 의사소통 망이 확립되는 것은 그렇기 때문에 '더욱' 중요하다. 어떤 것이든지 간에 애매한 것은 하지 않느니만 못하다. 단테는 '지옥의 가장 암울한 자리는 도덕적 위기의 순간에 중립을 지킨 자들을 위해 마련되어 있다'라고도 하지 않았던가.


그렇지만 사실 이러한 결론에는 약간의 어폐가 있다. 누가 봐도 정의로 보이는 것들이 세상에는 있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독재 정권에 항거하여 몸을 던진 과거 대한민국의 민주화 역사 등이 그것이지 않겠는가. 그러나 설령 그것이 진정한 정의이고 정답이라고 할지라도, 다수의 대중들에게 충분한 설명을 하지 않은 채, 그리고 충분한 정보를 제공하지 않은 채 단편적인 사안들만을 대중들에게 전했다면 이는 엄연한 '선동'이다. 그들이 깃발 높여 싸우고자 하던 정의롭지 못한 대상들과 그들이 근본적으로 전혀 다를 것이 없다는 이야기다. 책 '시인을 체포하라'에서 보이고 있는 의사소통 망이나, 오늘날 '혁신'이라고 불리우는 정보사회에서의 의사소통 방식이 예나 지금이나 본질적으로 같다는 것은 분명 문제가 있는 일이다. 의사소통망은 식자층이 누군가를 선동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다수의 대중이 여러 정보를 쉽게 접할 수 있기 위해 존재해야만 한다. 이를 위해서는 본인들이 정의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남들도 정의라고 생각할 것이라는 오만한 생각에서 먼저 벗어나는 것이 급선무이지 않을까.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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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아케이드 프로젝트]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서울 아케이드 프로젝트 - 문학과 예술로 읽는 서울의 일상
류신 지음 / 민음사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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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핏 보면 젊은이들의 얼굴에서 자신의 일에 몰두하는 진지함과, 시간을 효율적으로 경영하는 자신감과, 커피를 마시며 편한 자세로 앉아 있는 행복감이 묻어 나오는 것 같았지만, 그 표정의 이면에는 고달픈 삶이 분비하는 우울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구보는 이 현상의 원인을, 불가능은 없다’고 훈육하는 자본주의 무한 경쟁 사회에서 ‘무엇인가를 해야만 한다’는 당위에 포섭되어 몸과 정신이 점점 마모되어 가다가, 결국 ‘가능한 것은 없다’며 탈진하는 ‘성과 주체’의 피로감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조심스럽게 추측해 보았다. 구보는 이곳 카페의 젊은이들이 적어도 탈진 상태로 가는 위의 과정 중 어느 한 단계를 통과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p. 180)

 

어떤 체제이건 간에 집권층의 이익을 위해서는 일반적으로 사회가 미래를 낙관하는 분위기일수록 좋다. 하지만 그 이유가 무엇인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권력에 의해 의도적으로 조장된 낙관주의이든, 그렇지 않다면 권력의 선정(善政)으로 만들어진 낙관주의건간에, '불가능은 없다'라고 꾸준히 사회에 주입시켜나가는 것은 그것 자체로 유의미한 일이다. 오늘날 국내의 서점시장만 보더라도 이러한 현상은 눈에띄게 나타나고 있다. 항상 베스트셀러 순위의 상위권을 차지하는 자기개발 서적들이 바로 그것인데, 이 책들이 주장하고자 하는 바는 방법론적인 측면에서는 다양하나 결과적으로 지향하는 바는 똑같다. '할 수 있다'는 이야기. 물론 그 말이 꼭 집권층을 위한 이야기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으며, 포기하지 않는 태도는 삶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부분 가운데 하나다. 그렇지만 그 말을 조금만 비틀어보면, 이렇게도 이해할 수 있다. '당신의 실패 원인은 당신에게 있으니 다른곳에서 찾지마라'


그러나 대중들의 심리를 살펴보면 또 그렇지 않다. 자기개발 서적을 읽어나가는 사람들이 부의 차이에 따라 대학이 갈릴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는 것, 또는 자신의 취업 실패를 정부의 정책 실패로 연결짓는 것 등이 바로 그 예다. 자기개발 서적에 따르면, 어디까지나 이는 결국 '당신이 노력을 하지 않아서' 이기 때문이다. 특히 이러한 시각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철저한 성과 사회인 현재에서 성과가 좋다면 그에 상응하는 충분한 대우를 보장하는데에 반해 반대로 성과를 내지 못하면 철저히 소외당할 수밖에 없고, 이로 인한 상대적 박탈감은 두드러진다. 이 경우 전자의 사람들은 노력의 가치를 믿는 반면 후자의 사람은 그렇지 못하다. 그러나, 김연아 선수가 안타깝게 소치 동계올림픽에서 은메달에 그쳤다고 해서 우리가 김연아를 향해 '노력하지 않아서 그렇다'라고 주장할 수 있을것인가? 절대 그럴수 없다. 사실 노력에 경중을 메긴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이야기다.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는 자신이 아닌 타자를 향해 노력하라고 줄창 외쳐대며 그들의 실패를 노력하지 않은데서 찾는다. 하지만 과연 그렇게 비난하는 자들이 상대방의 노력여부를 정확히 알 수 있을것인가? 기본적으로는 이를 알 수 없으며, 때문에 타자를 비난할 수가 없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누군가는 타자의 성공을 우연함, 또는 사회적 차별에서 그 이유를 찾지만 그들이 비난하는 자가 자신의 온전한 노력을 통해 성공을 거뒀는지는 알 턱이 없다. 결국 우리 사회는 필연적으로 '노력하면 모든것을 가질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을 때도 있다'라는 모순속에 쌓여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이런 사회적 모순이 우리나라의 현실이라면, 우리나라의 수도인 서울에도 이 모순이 녹아있지 않을까? 류신의 「서울 아케이드 프로젝트에 이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있다.


아케이드(Arcade)라는 것은 무엇일까?


이야기를 진행하기에 앞서 아케이드라는 것의 의미를 분명히 짚고 가는것이 좋을 것 같다. 책 「서울 아케이드 프로젝트」 에서는 기술적인 의미에서의 아케이드를 다음과 같이 정의해놓고 있다.


아케이드는 유리 지붕이 덮인 상점가를 위시해 유리 돔이 설치된 홀, 상점이 늘어선 지하도, 건물과 건물을 연결하는 지하 통로나 공중 가교, 투명한 차양이 설치된 노상 시설, 유리와 철골로 이루어진 건축물을 총칭하는 광의의 개념으로 사용됐다. 대형 쇼핑몰, 종합 전시장, 전통 시장, 지하상가, 버스 정류장과 지하철 캐노피 등을 아케이드의 변형으로 간주했다. 형태와 용도의 차이는 있어도 모두 실외를 실내화하고 외부를 내부로 통합한 공간이라는 측면에서 아케이드의 특성을 공유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벤야민은 아케이드의 본질을 이렇게 적시했다. '유리 아케이드는 꿈과 같이 외계를 갖지 않은 건축물이나 보행 공간을 말한다' (p. 11)


발터 벤야민의 책 아케이드 프로젝트에서 사용되었던 아케이드의 개념보다는 다소 포괄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도 그럴것이 현재에는 더이상 과거의 아케이드와 같은 형태가 국내에 남아있는 경우가 많지 않기 때문이다. 오늘날 길을따라 케노피가 쳐져 있는 전통 시장의 형태가 과거의 아케이드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이는 형태의 유사성일 뿐 본질적인 측면에서는 그 차이가 있다. 또한 지하상가의 경우 과거의 아케이드와 본질적인 측면에서는 유사한 모습을 보이고 있지만 형태의 측면에서는 다소 거리가 있다. 그러나 저자가 이야기한 '실외를 실내화하고 외부를 내부로 통합한 공간'이라는 정의로 아케이드를 본다면 모두 하나의 것으로 볼 수 있다. 결국 오늘날 서울의 모습을 아케이드 프로젝트라는 거창한 이름으로 바라보기 위해서는 이렇듯 아케이드의 의미를 다시금 정립하는 과정이 필요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기술적으로 아케이드를 정의내린 것은 우리가 보고자 하는 서울의 모습과는 크게 연관이 없다. 그렇기에 우리는 저자가 아케이드라는 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알 필요가 있다. 책 전체에서 아케이드라는 것에 대해서, 그리고 서울에 대해서 저자가 갖는 생각은 꾸준히 변해가고, 최종적으로는 글의 끝에서 발터 벤야민에게 보내는 편지를 통해 자신의 생각을 완결짓는다. 그 결론을 먼저 확인하는 것 보다는, 먼저 이 글로 생각을 이어나가면 좋을 것으로 보인다.


아케이드는 도취의 공간이자 우울의 공간이다. 아케이드는 지상의 빡빡하고 누추한 현실을 잠시나마 망각시켜 주는 판타스마고리, 즉 요술 환등의 성전이지만, 갖고 싶은 상품을 향한 리비도가 이 상품을 결코 소유할 수 없다는 각성과 꼼짝없이 독대하면 우울이 생성되는 '이상한 슬픔의 원더랜드'다. 소설 속 여인은 갈구한다. "저걸 가질 수 있다면, 황실의 여인들이 선택할 만한 저걸 가질 수 있다면, 나도 항성처럼 스스로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을 것만 같다." 환상과 현실, 매혹과 각성이 진자처럼 오가는 곳이 아케이드인 것이다. 아케이드의 쇼윈도는 '거리'의 일부이면서 동시에 투명한 유리 뒤에서 명품의 특권적 지위와 행인 사이의 '거리(距離)'를 유지시킨다. (p. 101)


노력하면 '가질 수 있다'라는 것의 환등


과거의 사회가 '관'에 의해 모든것이 운영되었다면, 오늘은 원칙적으로 '민'에 의해서 대부분의 것이 운영된다. '자본주의의 보이지 않는 손은 정부라는 보이는 주먹에 의해 운영된다'라고 보는 시각도 있지만, 원칙적으로는 그렇다. 때문에 옛날에는 자신에게 피해가 오면 나랏님탓을 할 수 있었고, 어느 사회나 책임자를 요구하기 마련이니, 왕권이 약하던 과거에는 정 안되겠으면 나랏님의 목을 따는 일도 심심치않게 벌어졌었다. 그러나 현재에는 왠만한 일이 아니고서는 대부분의 문제를 지도자의 탓이 아닌 자신의 탓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다. 서두에서도 설명했었지만, 이는 '노력만 하면 모든것을 가질 수 있다'는 대원칙이기도 하다. 어쨌거나 이 원칙은 자본주의 사회가 생존할 수 있었던 가장 강력한 이유 가운데 하나였다. 과거의 공산주의 사회가 몰락의 길로 접어들게 된 이유가 바로 노력에 따른 보상을 제공하지 않아서가 아니였겠는가.


이런 원칙하에서 꽃피운 놀라운 생산성은 차치하고서, 사람들의 머리속에는 원하는 것은 '가질 수 있다'라는 생각이 조금씩 자리잡기 시작했다. 물론 실제로는 가질 수 있는것이 그렇게 많지는 않았지만, 과거에는 아예 가지려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것들도 이제는 '돈'만 있다면 모두 가질 수 있게 변했으니 말이다. 더군다나 산업의 발전을 통해 새로운 물건들도 하나둘씩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물건들의 일부는 자신들만의 '브랜드'를 구축하기에 이르렀고, 그들은 어느새 '명품'이라는 이름을 갖고서는 사람들의 선망이 대상이 되어갔다.


이 패션의 작동 원리에서 인간은 좀처럼 벗어날 수 없다. 물론 이 페티시즘은 천의 촉감에서 비롯하지 않는다. 구매자의 신경계를 자극 하는 건 원단의 질감만이 아니다. 중요한 건 상표의 짜릿한 촉감이다. 물론 고가 브랜드일수록 쾌감을 더 많이 느낀다.(p. 118)


또한 사람들은 이 상표와 자신을 동일시 한다는 것이다. 


햄버거 하우스 버거킹에서는

누구나 공주가 된다

버거킹 마니아, 그녀는

버거킹과의 거리를 가늠하며

이미지의 왕국, 버거킹으로 간다


- 조동범, 버거킹을 먹는 여자 (p. 170)


결국 제품을 소비하는 것을 넘어서서 제품 자체나 상표, 브랜드명에 담겨있는 그 기호와 이미지를 구입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애초에 이런 제품을 구입하지 않는다면 그런 이미지를 가질 수 없다고 생각하게 만드는데서 문제는 시작된다. 그러면서 사회는 우리들에게 '이런 이미지를 구매하고 싶다면 일하라, 노력하라'라며 강제로 밀어낸다. 그러나 노력한다고 하여 모든것을 가질 수 있을것인가? 이에 대한 해답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제품을 구입한다고 해서, 시의 표현을 빌린다면 '시의 대상이 버거킹을 간다고 하여' 공주가 될 수 없는것은 자명하다. 이는 근본적으로 물신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는것이겠지만, 조금만 더 들여다보면 이 물신주의가 자본주의의 '모든것을 가질 수 있다'라는 환상에 그 기반을 두고 있을것이라는 점을 예측해볼 수 있다.


서울, '소비 자본주의'의 환등상


작품의 표제 또한 기가 막혔다. '신성한 심장'. 종교적으로 해석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 즉 그리스도의 사랑과 속죄를 상징하는 오브제였다. 역설적인 이름이었다. 구보는 그제야 트리티니 가든, 즉 삼위일체 정원에 놓인 거대한 초콜릿 봉지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간파했다. 이곳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숭고한 삼위일체가 역사하는 성소가 아니었다. 물신과 상품(물신의 아들)과 욕망(물신과 상품의 영혼)이라는 '소비 자본주의 삼위일체'가 역사하는 '신성한 심장'이었다. 서울의 아케이드를 다스리는 상품 물신의 심장은 바로 신세계백화점 트리티니 가든이라는 신전 위에서 아주 '키치적'으로 뛰고 있었던 것이다. (p. 113)


손만 뻗으면 닿을 곳에, 대한민국에 있는 모든 물건들을 전시해놓았지만 실상 현실은 유리벽으로 가로막혀 손이 닿기 전에도 막혀버리는 곳. 지금을 살아가는 사람들도 조금만 더 손을 뻗으면 원하는 무언가를 가질 수 있을것 같지만 뻗다보면 어느새 벽에 막혀 결국은 주저앉는 경우들이 종종 엿보인다. 가질 수 있는 듯 하면서 가질 수 없는 이 자본주의의 모순을 서울은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었다. 그러나 이는 자본주의의 문제를 단순히 '소비'의 측면에서만 바라본것일 뿐, 그 외의 다른 부분으로까지 이야기가 확대되지는 않는다. 때문에 책은 우리 사회의 다른 문제점을 소비 자본주의하의 문제로써 다뤄내고 있다. 예컨데 소녀시대를 필두로한 현대 아이돌 문화를 '신체는 관음적 시선에 나포된 욕망의 포로이자 소비자의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언제나 새롭게 가공되어 쇼윈도에 진열되는 상품(p.190)'으로 본 것이나, 또는 빈부의 갈등을 '부르주아는 우뚝 솟은 성채 같은 고급 아파트 안에서 대중과의 접촉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동시에 게토안에 스스로를 유폐하는 것(p. 291)'으로 본것들이 그것이다.


오히려 단순히 소비 자본주의의 문제를 바라봤다기 보다는 '계산할 수 있는 숫자 안에 모든 것을 용해하는 자본주의 원리(p.45)'에 대해서 비판하고 있는것일지도 모르겠다. 그것이 아니라면 공리주의 자체에 대해 일갈을 날리는 것일수도 있겠지만, 그 정도 까지 논의를 확장하지는 않는다. 책은 '구보'라는 산책자가 서울을 '산책'하면서 느끼는 여러 감정들, 그리고 소설, 시, 수필속에서 보여지고 있는 서울의 모습을을 그곳에 연관시키면서 이야기를 그려내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단순히 하루동안 산책하는 거리에서 받는 감정들만 가지고서는 그런 큰 주제에 대해서 논의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까. 그렇지만 보고있는 것이 어떤것을 목적으로 했건간에 책은 그 일을 충분히 잘 수행해내고 있었다.


보행에서 느끼는 서울의 단편들


프랑스의 문화 사회학자 미셸 드 세르토의 개념을 차용하자면, 구보는 높은 곳에서 관망함으로써 하나의 총체적 이미지로 인식되는 개념 도시(city as concept)보다는 직접 도시의 거리를 걸으며 도시 일상의 세목을 체험함으로써 인식되는 보행 도시(city as pedestrian)의 초안을 작성하고 싶었다. (p. 135)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큰 그림에서 서울을 바라본것이다. 물론 높은 곳에서 관망함으로써 얻어낸 이미지가 아니라 단편 단편을 모아 소비 자본주의라는 큰 그림을 만들어 낸 것이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를 단편으로 받아들이기에는 약간의 거부감이 생긴다. 그렇다면 책은 이 외의 다른 도시 일상을 놓친것인가? 그렇지는 않다. 예컨데 스마트폰 중독을 '그곳에 전시된 사람들은 외박을 마치고 자대로 복귀하는 군인들 같았다. 스마트폰이 유일한 위안인 듯 고개를 숙이고 기도하고 있었다(p. 283)'라고 꼬집어낸 부분이나, 길가에 흔히 서있는 가로등을 '가로등이 켜지면 어둠 속을 걷던 행인들이 안전함을 느끼듯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꿋꿋하게 서 있는 가로등 불빛은 생채기 난 사람들의 내면을 따뜻하게 보듬어 안는다(p. 295)'라고 해석해낸 것들이 그것이다.


그리고 유부남이었던 벤야민이 한 여성에게 자신의 사랑을 고백하기 위해 모스크바까지 떠난 일화를 소개함과 동시에, 횡단보도에서 만난 작중 화자 구보의 이상형에 대한 이야기도 함께 풀어내고 있다. '갑자기 나타났다가 순식간에 사라진 그녀의 얼굴을 구보는 똑똑히 보았다. 고개를 돌려 점점 시야에서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인도에 이르러서도 구보의 시선은 긴 여운을 남기며 사라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계속 쫓았다. 구보에게 이 짧은 횡단보도는 콰이 강의 다리와 마찬가지였다. (p. 254)'


서울 아케이드 프로젝트 : 서울은 자본주의 환등상에 불과할까?


과거 아케이드는 근본적으로 소비 자본주의에 그 기반을 두고 있다. 애초에 아케이드라는 것이 길을 따라 상점을 쭉 나열시키고, 그리고 그 위에 유리돔과 같은 형태의 천장을 만들어 놓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케이드로 들어온 소비자들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구매할 수 있었고, 비오는 날 은신처 역할을 하기도 했다. 아케이드의 그러한 지위는 백화점이라는 새로운 괴물이 나타나면서 그 힘을 펼쳐보지 못한 채 역사의 뒤안길로 들어가 지금은 그저 흔적만이 남아있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러한 해석을 책 '서울 아케이드 프로젝트'에서 다뤄지고 있는 내용으로까지 확대하는 것은 무리다. 글의 처음에서도 언급했듯이 책에서의 아케이드 정의는 다소 포괄적인 개념이라서, 버스 정류장과 같은 일상적인 공간도 아케이드로써 해석되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대형 쇼핑몰이나 종합 전시장은 과거의 전형적인 아케이드의 일종이겠지만, 전통 시장이나 지하철 캐노피를 과거의 아케이드로 이해하기는 어렵지 않을까.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일상적인 공간까지 아케이드로 정의한 책 '서울 아케이드 프로젝트'에서, 단순히 아케이드를 소비 자본주의의 폐해나 그 실상을 담아내고 있는 환등상으로만 그려내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아마 다음과 같은 말로 아케이드를 마지막으로 정의내린것이 아닐까.


요컨대 아케이드는 평범한 사람들의 삶의 무늬가 매일매일 새롭게 그려지는 현장입니다. 동시대 문화가 생생하게 공연되는 역동적인 무대입니다. 제가 서울의 아케이드를 산책한 까닭은 여기에 있습니다. 아케이드를 싫어하면서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p.313)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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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의 정복자 -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사이언스 클래식 23
에드워드 오스본 윌슨 지음, 이한음 옮김, 최재천 감수 / 사이언스북스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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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섭의 시대라며 자연과학, 또는 공학을 전공한 이들에게 인문학적 소양을 요구하는것이 어느덧 당연한 일이 되고있고, 삼성의 행보를 보고 있자면 그와 정 반대로의 방향으로도 통섭이 요구되어 지는 모습도 보인다. 그러나 대개 후자보다는 전자의 경우에서 인문학적 소양을 요구받는 경우가 많은데, 특히 공학에서 요구되는 정도가 더 크다. 그리고 전자의 경우를 뒷받침 하는 예시로는 전자출석의 공학적 의미와 인문학적 의미를 비교하는 이야기가 자주 언급된다. 요악하자면 「전자출석은 출석에 필요한 시간을 단축함으로써 불필요한 시간이 축소되어 교수와 학생의 관계가 더 가까워 질 것으로, 또는 수업의 만족도가 향상될 것으로 기대되었으나 실제로 그렇지 못했고, 결국 오늘날 전자출석을 이용하는 대학교는 극히 드물다.」정도의 이야기이다.


그런데 이런 피상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실제로 공학을 전공하고 있는 사람으로서 공학하는 사람들끼리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과정을 돌아보면 많은 경우 제시하는 개선방안들이 단순히 「얼마나 편리해지는가.」에 국한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조금만 꼬아서 생각해본다면, 예컨대 ATM 기계나 승차권 자동 발매기만 보더라도 공학자들이 보기에는 편리해지는 기계이며, 때문에 만들어진 것이 분명하지만 사실 이전에 사람과 마주하며 일을 처리하던 그 시절보다 손님의 입장에서는 더욱 불편하다. 더불어 창구 직원과 간단하게 말을 건네던 여유마저 없어진 것을 보면, 과연 공학자가 쫓는 편리함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인가에 대해서 한번쯤은 생각해보게 된다. 


다시 전자출석의 이야기로 돌아와보자. 전자출석은 분명히 편리하지만, 학생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이전보다 더 불편해진 시스템이며, 또한 출석의 의미를 단순히 수업에 참여한 학생들의 머릿수를 세는 정도로만 이해했다는 것에서 더 큰 문제점이 출발한다. 예컨대 출석은 단순히 머릿수를 세는 것뿐만이 아니라 교수가 학생의 이름을 부르며 서로가 교감하며 확인하는 것일 수도 있는데 전자출석은 애초에 그러한 모든 것들을 무시한 채 만들어진 시스템이라는 것이다. 단순히 기계적으로 보았을 때 전자출석은 분명 효율적인 시스템이지만 그렇지 못했다는 것은 출석이라는 것에 대한 인문학적인 성찰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밖에 볼 수 없으며 따라서 여기서 결여된 것이 바로 인문학적 소양이다. 그래서 공학자들에게 더욱 인문학적 소양을 강조하는 경우가 많다.


편협적인 의미에서 통섭을 이야기 한 것이지만, 이런 편협적인 시각에서도 과학과 인문학을 합친다는 것은 어렵다. 책에서는 종교와 과학의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마찬가지로 인문학과 과학도 그 둘의 관계와 비슷한 성향을 띄고 있다. 애초에 합치려고 한다고 해서 합쳐지는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인문학은 「사람을 우선」해서 그 주변의 것들을 해석하려고 하지만 과학의 경우는 「자연의 일부로써의 사람」을 보려고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둘은 서로 전혀 다른 방향을 향해 나아가고 있기 때문에 합쳐지기 어려울 수밖에 없다.


단적인 예를 들기 위해서 책에서 언급되고 있는, 책의 중심 뼈대이기도 한 혈연 선택(포괄 적합도)과 집단 선택을 이야기해보자. 혈연 선택은 현재까지의 진화 생물학의 근간이 되고 있는 이론 중 하나인데, 간단히 다음과 같다. 「지금까지의 진화론은 한 개체가 다음 세대로의 유전 형질 전달을 목적으로 생존하는 것에만 중점을 뒀기 때문에 특정 개체가 다른 개체를 위해 이타적인 선택을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으며 설명할 수 없었다. 이에 대해 혈연 선택은 '개체뿐만 아니라 혈연의 번식 성공에 미치는 영향도 고려해야 한다.'라고 이야기 하고 있다. 즉, 한 개체의 희생을 통해 더 많은 혈연의 생존이 보장된다면, 즉 유전 형질의 전달이 용이하다면 어떤 개체는 혈연을 위해 자신을 희생할 수 있다.」


예컨대 이런 식이다. 혈연 선택은 해밀턴의 법칙으로 설명되는데, 이 해밀턴의 법칙은 rB > C로 주어진다. 이 때 C는 비용, r은 유전적 연관도, B는 이득이다. 예를 들어 어떤 특정한 개체군이 4명의 새끼를 낳을 수 있다고 하자. 만약 3명의 형제가 물에 빠졌을 때, 남은 1명의 형제는 이들을 구하러 물에 들어가는 이타적인 선택을 할까? 해밀턴의 법칙에 따르면 '하게 된다'. 형제는 평균적으로 50%의 유전자를 공유하기 때문에, 이를 해밀턴의 법칙에 의해 계산해보면 r = 0.5, C = 4, B = 4 * 3 이므로 6 > 4가 되어 남은 한명의 형제는 세 명의 형제를 구하기 위해 물속으로 뛰어들게 된다. 자신이 죽고 대신 세 명의 형제를 살릴 경우 유전 형질이 더 잘 보존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해석을, 동물에게 적용한다는 것도 조금 아이러니 하지만 인간에게 적용한다는 것은 더더욱 아이러니하다. 아무런 연고 없는 사람을 위해 지하철 선로에 뛰어들고, 물속에 뛰어들면서까지 구하는 그러한 이타적인 것을 설명하기에 혈연 선택은 너무나도 비인간적이다. 그리고 이러한 진화 생물학적 관점에서 인류의 문명을 설명한다는 것은, 책의 제목처럼 「지구의 정복자」 인간이 어디서 왔고, 무엇이고, 또 어디로 가는지를 설명하기란 턱없이 모자라다. 그래서 책의 저자인 에드워드 윌슨은 새로운 설명을 하게 된다. 바로 집단 선택이다.


집단 선택을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어떤 개체는 항상 집단 형질을 유지할 것인지, 아니면 개별 형질을 유지할 것인지에 대한 선택압을 외부로부터 받게 된다. 즉 개인과 집단의 가치를 놓고 항상 저울질하게 된다. 인류는 생존을 위해 경쟁해왔으며, 그 과정 속에서 다른 집단이 섞여나가는 과정을 꾸준히 거치며 이로써 집단의 조성이 불안해지는 결과를 낳았다. 달리 표현하면 집단이 곧 혈연이 될 수 없었다는 이야기다. 때문에 인간은 집단 선택의 산물인 명예, 미덕, 의무를 쫓을 것인지 아니면 개체 선택의 산물인 이기심, 소심함, 위선을 택할 것인지에 대한 압력을 계속하여 받아왔다. 그러나 지구의 역사에서 항상 개체 선택보다는 집단 선택이 승리했으며, 인간도 마찬가지로 생존을 위해서는 집단 선택의 산물의 선택압이 보다 크게 작용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다른 사회적 동물의 사례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책의 내용은 곧 이에 대한 근거라고 봐도 좋다. 책에서 다루고 있는 진사회성 곤충의 사례나, 집단주의적 성향이 인간의 동물적인 본성이라는 해석등도 결국은 이러한 집단 선택을 설명하기 위한 부가적인 요소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집단 선택은 한 편으로 생물학이라는 느낌이 들기 보다는 인문학적인 느낌, 즉 철학이라는 느낌이 오히려 더 강하다. 그 때문에 집단 선택설이 인문학을 품을 수 있는 것이지만, 또한 그렇기 때문에 진화 생물학계에서 지금까지 집단 선택에 대해서 반기를 가지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과학적인 논거를 살펴본다면, 개체 선택이 훨씬 더 매력적이며 설득적이다.」


그러나 에드워드 윌슨은, 이 불가능할 것만 같았던 일을 책 「지구의 정복자」에서 훌륭하게 성공해냈다. 물론 여전히 본질에 접근한 다기 보다는 피상적인 느낌을 지울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타주의의 유래를 해밀턴의 법칙에서 찾기에는 그 외에 진사회성 동물이 공유하는 것, 그리고 인간임을 식별할 수 있는 형질들을 모두 설명해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모든 것을 통섭적으로 설명해 낼 수 있는 유일한 해결방안은 집단 선택이 유일할 것이며, 에드워드 윌슨은 그 말을 책 전체에서 내내 열심히 강변하고 있다. 이 것 외에 다른 답은 있을 수 없다고 말이다.


「자연선택의 단위가 개체냐, 아니면 집단이냐」는 다윈 때부터 지금까지 끝나지 않고 이어져 오는 진화론의 가장 큰 논쟁거리 가운데 하나이다. 다윈도 그의 저서 「인간의 유래」에서 '한 부족 내에서 고결한 도덕적 가치를 지닌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 유리한 점이 별로 없을지 모르지만, 고결한 도덕적 가치를 지닌 사람이 많은 집단은 그렇지 못한 집단에 비해 훨씬 유리하다. 언제나 부족들 간에는 하나의 부족이 다른 부족을 대체해가는 과정이 진행되므로, 그리고 이 과정에서 도덕성이 중요한 요인이 될 것이므로 높은 도덕적 가치를 지닌 사람들이 차지하는 수적 비중이 점차 늘어나게 될 것이다.'고 이야기 했던 것이 이 논쟁의 출발이나 마찬가지니 말이다.


그래서 이 짧은 서평으로 이 장대한 이야기를 다룬다는 것도 불가능하며, 또한 책 「지구의 정복자」 단 한 권으로, 그리고 단 한 번의 독서로 이해한다는 것은 더더욱 어렵다. 그러나 집단 선택과 혈연 선택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그리고 오늘날 집단 선택설의 선봉장이기도 한 에드워드 윌슨이 이야기 하는 집단 선택이란 무엇인지에 대해서 알고 싶다면 이 책을 읽어보는 것은 그 자체로도 큰 의미가 있다. 그리고 앞서 설명했던 것처럼, 인문학과 과학의 통섭 측면에서도 이 책은 나름의 의의를 갖는다. 인문학을 포용하기 위한 가장 적합한 것이야 말로 집단 선택일 것이기 때문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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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작순례 - 옛 그림과 글씨를 보는 눈 유홍준의 미를 보는 눈 2
유홍준 지음 / 눌와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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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은 긴 호흡의 글을 단숨에 내뱉을 수 있도록 하고, 부제목은 한 번에 뱉은 호흡을 가다듬는데에 도움을 준다. 그래서 제목은 책의 전부이면서 가장 중요한 것이다.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로 유명한 유홍준 교수의 새로운 책 「명작순례 : 옛 그림과 글씨를 보는 눈」은 그런 면에서 책의 본문을 잘 보여주고 있는 제목을 갖고 있다. 책 제목처럼 「명작순례」는 과거의 명작으로 평가받는 마흔 아홉 가지의 서화에 대해서 저자만의 시각으로 풀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달리 다른 수식이 필요치 않을 것 같아 서평의 제목 역시도 책의 이름을 그대로 사용했다.

 

 

예술세계에서 독창성과 유일함이라는 것은 중요하다. 숱한 표절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한, 그래서 매번 창작의 고통에 시달려야만 하는 예술가들의 모습만 봐도 그렇다. 그들에게 있어서 새롭지 못하다는 것은 곧 죽음이다. 그러나 이와 더불어 그만한 명성을 갖는 것도 중요하다. 앤디 워홀은 「일단 유명해져라. 그렇다면 사람들은 당신이 똥을 싸도 박수쳐줄 것이다(Be famous, and they will give you tremendous applause even when you are actually pooping.)」라고 까지 말하지 않았던가.

 

 

이러한 것들이 뜻하는 바는 두 가지 정도가 되겠다. 하나로는, 대중들은 독창성의 가치를 높게 산다는 것과 또 다른 하나는, 대중들은 다른 이의 시선, 즉 사회에서 내리는 일반적인 평가에 많은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는 예술을 대하는 일반인들의 안목이 그 만큼 부족하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독창성이라는 것은 전문적인 지식이 없더라도 충분히 확인할 수 있는 것이며, 다른 사람들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가리키는 것은 자신의 모자람을 들키지 않기 위한 방법 중 하나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만의 안목을 기르는 것은 중요하다.

 

 

하지만 전문적인 교육을 받지 않은 사람이 자신만의 안목을 갖는다는 것은 어려우며, 결국 다른 사람의 안목에서 차근차근 모방해나가고 그 속에서 자신만의 빛깔을 찾아 나가야만 한다. 하지만 만약 자신이 접한 기존의 안목이 당신에게 그 해석만을 요구하고 강요한다면 이는 접하지 않는 것 보다 못하다. 따라서 객관적인 시선을 전달해 줄 수 있는 안목을 처음에 접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작품 속에 얽힌 이야기들을 알아보는 것이 흥미를 유발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 하나의 예를 들어보자.

 

 

몇 해 전 KBS는 “사극드라마를 방영하는 것은 공영방송으로써의 책무”라고 밝히며 비용문제를 떠나서 매 해 한편의 대하드라마를 방송하겠다고 공언한 바 있다. 그러한 공언 뒤에 처음으로 방영된 드라마 「정도전」은 정통 사극의 부활이라는 평가와는 반대로, 기존의 사극과는 전혀 다른 특별한 점이 있다. 매 주 일요일 방송분의 마지막에서 5분 내외의 미니 다큐멘터리를 편성하여 보여주고 있는 것인데, 이 때 다큐멘터리는 해당 주에 방영된 드라마의 내용과 관련된 실제 장소, 또는 유물을 보여주고 있다. 실제로 정도전의 유배 생활을 다룬 6화 끝에서는 정도전의 실제 유배지를 보여줬고, 공민왕의 죽음을 다룬 2화 끝에서는 공민왕의 무덤과, 마포구에 있는 공민왕의 사당을 보여줬다.

 

 

이와 같은 시도는 영화 「관상」을 실제 한국사 강사에게 의뢰해 영화의 역사적 내용을 다루는 등 이전에도 있었던 시도였기 때문에 새로울 것은 없지만, 한국사의 의미가 날로 강조되고 있는 오늘날 공영방송이 이러한 시도를 했다는 점은 큰 의의를 갖는다고 볼 수 있다. 갑자기 이런 이야기를 왜 하느냐 할 수도 있지만, 이러한 미니 다큐멘터리의 몰입도를 높이고 보는 이로 하여금 그 곳, 또는 그 유물을 보고 싶다고 느끼게 만드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그 것에 얽힌 이야기라는 점을 확인할 수 있는 좋은 예이기 때문이다. 이는 서화를 이해하는 데에도 앞서 언급했듯이 똑같이 적용된다.

 

 

이런 모든 조건을 만족하는 책으로는 「명작순례」만한 책이 없는 것 같다. 책은 저자인 유홍준 나름의 해석과 함께 그 서화에 얽힌 자세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데, 그 해석이 특별한 방향으로 치우쳤다고 보기는 어렵기 때문에 서화에 조예가 깊지 않은 사람이 최소한의 안목을 갖는 데에 큰 도움을 줄 것이다. 물론 나 역시도 그랬다. 그러나 어떤 작품을 해석하는 데에 있어서 그 시대적 맥락을 바탕으로 해석 할 수도 있겠지만, 단순한 표현기법과 같은 기술적인 측면에서만 평가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과거 없는 현재 없고 현재 없는 미래 없듯이 시대적, 역사적 맥락 없이 온전히 작품을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만약 이 주장에 동의할 수 있다면, 책 「명작순례 : 옛 그림과 글씨를 보는 눈」을 일독하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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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루토크라트 - 모든 것을 가진 사람과 그 나머지
크리스티아 프릴랜드 지음, 박세연 옮김 / 열린책들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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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때 모 커뮤니티에서 빈부 격차와 소득, 계급 고착화에 대해서 논쟁이 오갔던 적이 있다. 많은 학자들도 이에 대해서는 공감하고 있는바 사실 논쟁의 주제도 되지 못하는데, 때문에 당시 논쟁은 부익부빈익빈이라는 용어의 정의 자체에 대한 토의가 주를 이뤘다. 다수 계층의 삶의 질이 향상되고 있는 마당에 빈익빈이라는 용어는 부적절하다는 한 편의 주장과, 다른 한 편으로는 상대적인 부의 박탈감이 이전에 비해 커졌기 때문에 빈익빈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데에 문제가 없다는 주장이 계속 오갔는데, 서로 이해가 다른데서 출발한 논쟁의 끝이 개싸움과 진흙탕으로 귀결됨은 이미 예정된 결과이다 보니 그 논쟁이 어떻게 끝맺음이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무방할 것이라 본다.


그러나 당시 논쟁에서 오가던 두 가지의 주요한 내용, 1. 과거에 비해서 삶의 질이 향상되었으며 2. 소득 상위 계층과 하위 계층 간의 소득차가 과거에 비해 매우 커졌다는 것은 모두 분명한 사실이다. 과거 사치품으로 분류되었던 매체들은 더 이상 상위 계층만의 전유물이 아니며, 또한 1대 99로 불리는 월가 점령시위가 보여주듯이, 상위 계층이 한 사회의 부를 상당수 차지하고 있는 것 역시도 사실이다. 빌 게이츠와 워렌 버핏의 재산을 합친 금액보다 미국 하위 1억 2천만 명의 소득 총 합이 낮다는 통계 결과가 이를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면 부익부빈익빈이라는 말은 과연 오늘날에도 유효한 용어인가? 설령 빈익빈이라는 용어에 대해서는 반박이 있을 수 있겠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부익부'라는 사실에 관하여서는 반박의 여지가 없을 테다.


3분의 2에서 파레토로, 그리고 1대 99 사회로


가진 자가 더 많은 부를 창출하는 부익부 현상은 예전부터 있었던 일이지만, 최근에는 상위 20%가 전체 소득의 80%를 가져간다는 파레토의 법칙부터 이보다 더 나아간 1%의 소수 계층이 다수의 부를 차지한다는 1대 99사회까지로 그 격차가 심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살펴볼 수 있다. 물론 이는 다분히 좌파의 시선에서 바라본 결과이겠지만, 최근의 미국 통계에 따르면 상위 1%의 계층이 사회 전체 소득 가운데 20% 가까이를 가져간다는 사실을 보았을 때, 그리고 앞서 언급했던 빌 게이츠와 워렌 버핏의 사례만 보더라도 이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 가운데 하나다. 그 만큼 전 세계적으로 소득의 계층화는 더욱 심해지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이러한 결과가 나오게 된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산업혁명과 정보혁명에 따라 사회에서 필요로 하는 노동력은 점차 감소하는데 반해 인류의 숫자는 늘어나고 있는 역설적인 모습 속에 가장 큰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때문에 부가 소수에게 집중되는 것은 필연적인 현상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제레미 리프킨이 자신의 저서 노동의 종말에서도 '기술의 진보가 실업자를 양산할 것이다'라고 예측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그것만으로 오늘날의 소득 격차를 설명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실제 노동 현장에 종사하지 않는 사람들을 제외한 채 현재 근로중인 노동자의 평균 연봉과, CEO의 그것과 살펴보았을 때 과거의 수십 배에서 오늘날의 수백 배의 차이는 단순한 산업, 정보 혁명에 따른 결과라고는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이유에는 무엇이 있을까? 책 플루토크리트는 이에 대하여 베네치아의 사례를 제시한다.


유동성은 사회의 발전을 보장하지만 계급의 안정성을 보장하진 못한다


베네치아는 삶의 안정성을 담보 받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택한 불모지였지만, 그들은 그렇게 선택한 불모지를 당대 최고의 무역 국가로써 발돋움 시키게 된다. 그런 그들의 사회가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어느 누구나 원하기만 한다면 은행으로부터 자금을 지원받아 무역을 시작할 수 있는 제도가 충분히 준비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사회의 자본은 높은 유동성을 띄고 있었다고 볼 수 있는데, 이는 반대로 특정 계층의 계급 고착화를 막는 하나의 방편이기도 했다. 아무리 부를 쌓아 올렸다고 하여도 지속적인 개혁과 도전이 없다면 언제라도 그들의 부는 새롭게 시장에 뛰어든 이들로부터 뺏길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유동성은 그래서, 사회의 발전은 보장하지만 계급의 안정성을 보장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런 높은 유동성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승승장구 하는 사람은 있기 마련이다. 또한 이러한 그들이 세력화되어, 어느 정도 소리를 낼 수 있는 수준의 단체로 성장하게 되면, 그들은 이전처럼 계속적인 경쟁을 거부한다. 그리고서는 그들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해자'를 요구하게 된다. 새로운 사람들이 해당 분야로 들어오는 데에 일정 수준의 방어벽을 형성하는 것이다. 오늘날 전문직을 갖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자격시험의 합격 인원 감축을 요구하는 것 역시도 해자의 일환이라고 볼 수 있겠지만, 당대 베네치아의 그들이 요구하던 해자는 그보다 더욱 적극적 이여서, 그들은 이미 해당 분야에 종사하고 있는 사람들 의외에 다른 사람의 유입을 원천적으로 방지하기를 원했다. 그래서 그들은 이전에 그들 사회의 발전을 보장했던 그 제도 역시도, 더 이상은 시행하지 않기에 이른다.


독점적인 권한을 누릴 수 있었기에 그들은 이전보다 더 많은 수익을 창출할 수 있었지만, 반면에 그들 사회는 점점 병들어가기 시작했고, 한 때 유럽 전체의 무역을 담당하던 해상무역의 최고 국가에서 그들은 이제, 과거를 추억하며 사는 이들이 모여 만든 박물관, 그 이하의 것으로 격하되기에 이르렀다. 더 이상 그들에게 찬란했던 과거의 그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계급의 안정성을 보장받기 위해 마련한 유동성의 제한이 결국은 그들 사회의 발전을 억압하고 나아가 그들이 누리던 부 마저 뺏어가기게 이르렀던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들이 독점적인 권한을 누리기 시작한 이후 잠시 동안 더 많은 부를 창출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며, 또한 그 과정 속에서 빈부격차 역시 커져나가는 방향으로 계속되었다는 점이다. 오늘날 증가되는 빈부의 원인 역시도 바로 여기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을 보호하기 위한 해자


해자는 성벽을 방어하기 위해 사용되는 걸림돌이라고 보면 되는데, 경제적 해자에 대해서 자세히 살펴보기 위해서는 펫 도시의 '경제적 해자'라는 책을 읽어보면 좋다. 그런 내용은 차치하고, 책 플루토크라트에서도 해자라는 용어가 자주 언급되는데, 이 때 사용되는 해자는 상위계층이 자신들의 바운더리를 사수하기 위해 그들만의 세계를 사수하기 위해 사용하는 여러 방법들을 총칭한다고 보면 되겠다. 앞서 언급한 자격시험이 바로 이러한 해자의 전형적인 모습인데, 그렇다고 해서 단순히 해자를 그런 수준으로만 이해하는 것은 무리다. 책에서 언급되는 해자는 이러한 물리적인 방어벽뿐만 아니라 상위계층이 기존의 지역이나 직장에 따른 공동체를 구성했던 데에 반해 오늘날은 상위계층끼리만의 공동체를 구성하는 데에서 오는 벽 역시도 해자의 일종으로 그려내고 있다. 즉 물질적인 차이뿐만 아니라 심리적인 박탈 역시도 해자의 일부분이라는 이야기이다.


이러한 해자가 가져오는 사회 통합의 저해는 실로 상당하다. 그리고 이러한 해자는 앞서 언급한 베네치아와 같은 모습을 보여 오는데, 마찬가지로 그들만의 이너 서클을 지키기 위해서 그와 같은 방어벽을 만드는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 오늘날 우리는 더 이상 계급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지만, 상위계층들의 이러한 이너 서클을 통해 은연중에 계급의 전형이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이 역시도 다분히 좌파의 시각에서 바라본 평가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전보다 커져가는 빈부격차를 설명하기에 이보다 더 나은 해답은 없어 보인다. 또한 가끔씩 방송을 통해 흘러나오는 대기업 임원들의 만행들을 설명하기에 이보다 더 나은 것도 없을 것이다. 책 플루토크라트를 읽어본다면 이 주장에 대해서 충분히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플루토크라트 : 보호를 위한 해자, 고립시키는 해자


예전의 경우 역설적이게도 공산주의와 자본주의와의 이념 전쟁이 자본주의의 이러한 문제점을 보다 완화시키는 역할을 하면서 플루토크라트가 다수의 노동자 계층과 보다 가깝게 지낼 수 있었으나, 레이건과 대처 이후 불어온 신자유주의 열풍이 이러한 현실을 오늘날의 그것으로 변화시켜 왔고, 이러한 흐름 가운데에 오늘날 1대 99로 불리는 현상 역시도 태동한 것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해자가 결국 그들을 몰락시키는 전형이 될 것임은 베네치아의 사례에서 충분히 보이고 있다. 사회의 발전을 위해서 유동성은 분명히 필요하지만, 그들에게 있어서 이러한 유동성은 자신들의 안정적인 지위를 방해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들이 자신들의 지위를 유지하려고 하면 할수록 사회는 분명 몰락하게 되어 있고, 마찬가지로 그들 역시도 쇠퇴 일로에 서있을 수밖에 없음은 자명하다.


책에서는 이러한 현실을 <100가구가 사는 한 마을에, 99가구가 평범하거나 또는 그 보다 못한 삶을 살아가고 있을 때, 매우 잘 사는 한 가구가 그 마을 속에서 정상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인가?> 라는 말을 통해서 이러한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책은 이러한 현실에 대한 대안이나 해답을 제안하지는 못하고 단순히 이러한 현상들을 그려내는 데에 그치고 있다. 하지만 해답을 찾기 위해서 현실을 보다 자세히 아는 것은 중요 할 테고, 따라서 책 플루토크라트는 그런 측면에서 가치를 갖는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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