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리스 먼로를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다. 그러니까 카버를 좋아하던 시절에는. 몇 년이 흘렀고 나의 일상이 나의 장소가 달라진 만큼 나도 달라졌겠지. 이제는 앨리스 먼로를 읽을 수 있게 되었다.


루이스 문제가 불거졌을 때 마거릿은 이미 은퇴한 후였다. 마거릿은 스코틀랜드에서부터 그를 지지하는 편지를 보내왔지만 사실 워낙 이해심 많고 열린 사람인데다 교우 관계도 넓은 것으로 유명했기 때문에 루이스를 지지하는 그녀의 태도에 개인적인 친절 이상의 무게가 실린 것은 아니었다.


소설가들은 필연적으로 사람을 재단한다. 어쩌면 그래야 소설이라는 것을 쓸 수 있는 건지도 모른다. 그것이 삶 혹은 인간에 대한 통찰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어지기도 하니까. 어떤 소설이 이해되고 공감된다는 것은 내 자와 그 소설의 자가 갖는 눈금이 어느 정도 일치하거나 그 측량 방식에 내가 동의한다는 의미. 예전에 내 자가 카버 식이었다면 지금의 나는 먼로 식이겠다.



니나가 밖에 있는 동안 루이스는 죽어가고 있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자기 자신을 살해하고 있었다. 작은 캡슐 네 팩이 뒷면 은박지가 벗겨진 채 침대 옆에 놓여 있었다. 그 옆에는 아직 건드리지 않은 또 다른 캡슐 두 팩이 더 있었다. 속에 든 흰 알약이 아직 눌리지 않은 플라스틱 껍데기 속에 버젓이 자리잡고 있었다. 한참 후에 니나는 그중 하나의 은박지에 마치 껍데기를 벗기려다가 포기한 것처럼 보이는 손톱자국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미 먹은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해서였는지, 아니면 바로 그때 의식을 잃기 시작했던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물 컵은 비어 있었다.    


그들은 이 일에 대해 이미 이야기를 나누었고 또 동의했다. 그러나 니나는 그 계획이 나중에, 미래의 언젠가에 일어날 일이라고만 생각했다. 자신 역시 그 자리에 함께할 거라고 생각했고 뭔가 의식 같은 것이 있어야 한다고도 생각했다. 머리맡에 베개를 놓고 의자를 당겨 앉아 그의 손을 잡아줄 것이다. 어쩌면 음악도 함께. 니나가 미처 생각지 못한 것이 두 가지 있었다. 하나는 그가 그런 종류의 의식을 끔찍이도 싫어한다는 점이었고 다른 하나는 자신이 그 자리에 함께할 경우 짊어지게 될 사회적 부담이었다. 경찰의 질문을 받게 될 테고, 말들이 무성하게 오갈 것이다. 그 자리에 함께 있었다는 사실 때문에 그녀는 분명 곤경에 처할 수도 있었다.



이런 식으로 계획을 실행함으로써 루이스는 숨길 만한 그 무엇도 그녀에게 남기지 않았다.


니나는 루이스가 남긴 메모를 찾았다. 대체 무엇이 쓰여 있을 거라고 생각한 걸까? 변명은 말할 것도 없고 이후 상황에 대한 어떤 지시나 설명도 전혀 필요하지 않았다. 그 모든 것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따로 메모로 남겨 둘 만한 사항은 전혀 없었다. 심지어 '왜 이렇게 일찍?'이라는 질문에 대해서조차 그녀는 이미 답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루이스는 견딜 수 없는 고통이나 자기혐오, 더 이상 어쩔 수 없는 상황이 다가왔을 때 정말 중요한 것은 그 순간을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그 순간이 왔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거라고 그녀에게 이미 말했던 것이다. 아마 조만간 그 순간이 오리라는 암시와 함께.


그러나 여전히, 그가 니나에게 아무 말도 남기지 않았다고는 믿을 수 없었다. 물 컵을 마지막으로 내려놓을 때 잠옷 소매로 침대 옆 협탁에 둔 메모지를 떨어뜨렸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며 그녀는 먼저 바닥을 살펴보았다. 아니면 그런 실수를 하지 않으려고 좀 더 주의 깊게 전등 밑에 그것을 끼워 두었을지도 모른다. 니나는 침대 옆 전등의 받침대 밑도 살펴보았다. 협탁 서랍을 열어보고 슬리퍼 속이며 밑창 아래도 들여다보았다. 최근 그가 읽었던 책을 들어 흔들어 보기도 했다. 캄브리아기의  다세포 생물체의 폭발적 증가에 대한 고생물학 책이었다. 


그러나 메모는 없었다.


언젠가 달* 님이 힘든 시간을 견디며 책을 읽었다는 말이 기억에 남아 있다. 기도처럼. 묵묵히. 필사적으로(라고는 말씀하지 않으셨는데 나는 내 멋대로 그렇게 해석했다) 읽었다고 그리고 그때 책이 옆에 있어서 참 다행이었고 고마웠다고. 그때 나는 그 말이 정확히 무슨 뜻인지 잘 실감되지 않았다. 무슨 말인지는 알겠는데 그 문장들이 지니고 있는 심정이랄까 그게 아무리 해도 절실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신경성일까 봐 걱정했어." 루이스의 말에 그들은 함께 웃음을 터뜨렸다.


"신경과민일까 봐 걱정했더니 고작 루게릭이군." 플러시 천이 깔린 고요한 복도를 휘청이는 걸음으로 지나가며 그들은 웃었다. 엘리베이터 안의 사람들이 놀라 그들을 쳐다보았다. 그런 곳에서는 소리 내어 웃는 사람이 통 없었던 것이다.


이제는 조금 알 것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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