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14>

아침을 간단히 쿠키로 때우고, 10여 분 거리에 위치한 향일암으로 갔다. 그리고 주차장에 차를 대고 슬슬 걸어 들어가는데, 이거 뭔가 좀 이상하다. 여전히 차도는 쭉 이어져 있고, 주변에는 식당들을 비롯한 상점들과, 심지어 모텔도 여럿 있는데 대체 왜 차를 저 멀리 대고 이렇게 걸어야만 한단 말인가. 이건 일반적으로 사찰을 갈 때, 주차장에 차를 댄 후 걸어 들어가는 길들과는 사뭇 다르다. 그냥 멀쩡한 일반국도를 중간에 턱 하니 가로막고, 여기서부터는 주차비를 내고 반드시 걸어야 된다고 우기는 격이랄까(아마도 아침 일찍과 저녁 늦게는 자유로운 통행이 가능한 듯하다).

그런데, 마침 그때 주차장 쪽에서 버스 한대가 유유히 지나가기에 쳐다보니, 거기에는 우리보다 조금 늦게 온 사람들이 타고 있는 게 눈에 띈다. 그러잖아도 이 뜨거운 여름날 걷는 일이 도무지 납득하기 어려운데, 이건 또 무슨 시츄에이션이란 말인가. 그래서 돌아오는 버스를 세워 기사 아저씨에게 물어 보니, 다행히 친절한 기사 아저씨는 이 버스가 주차장에서 도로 끝까지 왕복을 한다는 것, 그러나 그 거리도 고작 700m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돌아올 때는 도로 끝에 있는 정류장에서 버스 시간을 확인해서 버스를 이용할 수 있다는 것 등을 알려주신다. 그러니까, 걷지 않아도 되었다는 말씀. 아저씨의 말씀대로, 그리 많이 걷지 않아서 도로는 곧 끝이 났다. 그리고 급격한 경사를 따라서 오르니 곧 향일암이다.

향일암은 '해를 향한 암자'라는 근사한 이름에 걸맞게, 망망대해를 바로 밑에 두고 수평선에서 떠오를 해를 바라보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곳이다. 금산 보리암과 비교하자면, 보리암은 산 위 높은 곳에서 바다를 굽어 살피는 형국인 반면, 향일암은 좀 더 적극적으로 바다와 교감하며 자리하고 있는 셈이랄까. 어쨌든 한 번 상상해보라. 저 멀리 푸른 바다 끝에서 붉은 해가 넘실거리며 솟아오르는 것을 부처님과 함께 바라보는 과분한 호사를. 그러나 불행히도, 오늘 날씨는 흐린 채 덥기만 해서, 바다 색깔은 흐리멍덩하고 해는 보이지도 않는다.

그런데, 대웅전 조금 밑쪽 널찍한 바위 위에는 '원효스님 좌선대'라는 팻말이 눈에 띈다. 과연 유명한 스님의 좌선대는 범상치 않아서, 그 자리가 바다를 망막 가득 채울 수 있는 환상적인 좌선대라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다. 다만 한 가지 문제라면, 해가 이글거리는 한낮에 거기에 앉았다가는 아마도 불에 쪼그라드는 오징어 신세가 되지 않을까 싶기도 한데, 뭐, 원효대사야 당연히 범인은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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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말해서, 어제 있었던 이탈리아와의 올림픽 축구경기에서 나는 어차피 질거라면 내심 통쾌하게 지기를 바랐다. 그것은 이번 올림픽 축구 대표팀을 두고 "사상 최초로 메달권에 도전하는 올림픽 축구대표팀"이라고 말하는 게 나는 내내 불만이었고, 어제 MBC 축구 중계진의 편파적 멘트가 심히 불편했으며, 무엇보다도 어제 한국팀이 보여준 축구란 게 정말이지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상, 이번 올림픽 축구 대표팀으로 말할 것 같으면, 소위 말하는 '드림팀'이 아니거니와, '역대 최강의 팀'과도 거리가 멀며, 더욱이 예선전을 통해 대단한 전력을 보여준 바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히 "메달권" 운운하는 유일한 이유는, 지금껏 한국 올림픽 축구 대표팀이 올림픽에서 메달을 딴 역사가 단 한 번도 없기 때문일 뿐이다. 그러니까 딴은 틀린 말이 아닌 건 분명하지만, 그건 8강 토너먼트 진출도 버거운 현실에서 실로 섣부른 전망이자, 근거 없는 낙관이 아닐 수 없다.

이런 기본적인 성급함에 더해, 어제 MBC 중계진의 중계 역시 꽤나 불만이었다. 개인적으로 싫어하는 MBC의 강모 해설위원은 틈만 나면 상대선수를 깎아 내리는 악취미가 있는데, 공교롭게도 내가 본 대부분의 경우 그의 발언은 '화'를 불러왔다. 어제도 그는 비야레알 소속의 로시를 두고 "그리 빠르지 않아서 충분히 막을 수 있는 선수"라고 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로시는 한 발 빠른 움직임으로 이탈리아의 선제골을 넣었다. 게다가 비교적 공정해야 할 캐스터도 거들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가령, 상대선수가 우리선수의 공을 뺏어서 우리선수가 넘어지면, "아, 반칙을 불지는 않습니다. 살짝 발을 건 것도 같은데요."라며 은근히 편파판정을 불러일으키는 발언을 했는데, 이런 건 정말이지 비겁하고 치사한 중계일 뿐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어제 보여 준 한국 선수들의 거친 플레이는 그게 이탈리아의 기술적인 우위에 맞설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인가 싶어 자못 씁쓸하기조차 했다. 이탈리아의 명문 클럽인 유벤투스에 적을 둔 지오빈코를 맞아 한국선수들은 시종일관 거친 태클로 그를 자극하려 했는데, 이 뛰어난 재능을 보이는(그러나 164cm에 불과한 작은 키의) 선수가 거푸 쓰러지고 흥분해 하는 모습을 보니, 아무래도 한국팀이 악당처럼 보이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특히, 주장인 김진규가 그를 팔로 세게 밀쳐서 넘어뜨리는 장면이 압권이었는데, 그때조차 중계진은 김진규가 말려들면 안된다며 두둔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그런데, 그런 김진규가 나중에 쥐가 난 상대선수의 다리를 풀어주려고 하자, 그게 올림픽 정신이라고 칭찬하는 모습에는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

결국, 모든 면에서 뒤진 한국은 이탈리아에 0대3으로 완패했다. 하지만 낙관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아서, 이탈리아 감독이 브라질을 피하기 위해 카메룬을 이기겠다는 발언을 한 것이 한국팀의 8강 진출에 '청신호'가 켜진 것으로 보는 기사도 있었다. 그리고 박성화 감독도 "온두라스를 상대로 다득점을 노리겠다."는 말로 화답했으며, 주장 김진규도 "아직 모든 것이 결정나지 않았다."며 8강 진출에 대한 의욕을 꺾지 않고 있다. 물론, 이탈리아가 카메룬을 잡는다고 가정하면, 우리가 온두라스에 몇 점차로 승리하느냐에 따라 8강 진출이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다. 그러나, 이건 어디까지나 이탈리아의 승리와 한국의 승리를 가장 기본적 전제로 하는 것이고, 그 기본 전제조차도 쉬운 것이 아님은 당연하다. 그럼에도, 막연한 낙관은 대체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인가?

이러한 막연한 낙관과 비교해볼 만한 좋은 예가 프랑스에 있다. 1998년 프랑스 월드컵을 앞두고, 프랑스의 유력 일간지 <레퀴엠>은 프랑스 대표팀에 대한 비판을 서슴지 않았다고 한다(<포포투> 8월호 참조). 특히, <레퀴엠>의 편집장은 "프랑스가 우승하면, 내 손가락을 자르겠다."는 극언을 하기도 했는데, 결과는 모두가 아는 바대로 프랑스의 우승으로 귀결되었다. 그리고 다음 날, <레퀴엠>은 1면 전체에 사과문을 게재했다고 한다. 물론 결과적으로 보면, <레퀴엠>은 틀렸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것은 당시 프랑스 국가 대표팀의 위태로운 행보에 대한 거침 없고 냉정한 평가이기도 했다. 그런 의미에서, 전망이란 건 당연히 틀릴 수 있지만, 적어도 손가락 하나 정도는 걸 수 있을 만큼의 무게와 확신이 <레퀴엠>에게는 있었다고 볼 수 있지는 않을까?

까놓고 말해서, 내가 감히 내 손가락 하나를 걸고 한국 올림픽 대표팀의 성적에 대해 전망한다면, 나는 이전이라면 한국 올림픽 축구 대표팀의 '메달권 탈락', 그리고 지금이라면 '8강 진출 실패'를 선택하겠다. 그건 물론 틀릴 수 있고, 한편으로는 진심으로 틀리기를 바라지만, 적어도 내가 생각하기에는 그게 내 손가락이 잘리지 않을 확률이 더 높아 보이기 때문이다. 애초에 "메달에 도전하겠다."고 말한 박성화 감독이 전적으로 잘못이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그의 도전적인 발언의 진의와, "메달 도전"이 당연한 듯 그것을 확대, 재생산시킨 일부 언론의 무책임한 태도에는 거기에 과연 '손가락 하나' 정도의 무게는 지닌 것인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몇 가지 마음에 들지 않는 점들이 있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한국이 굳이 8강 진출에 실패하기를 바라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다만, 한국팀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일련의 전망과 분석이 좀 더 현실에 기반하여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이루어졌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꿈'과 '희망'을 품는 것은 좋고 또 필요한 일이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보다 객관적으로 우리의 전력을 재평가하는 일과, 그로부터 냉정하고 장기적인 앞으로의 전망과 비전을 끌어내는 일이 아닐까? 그렇지 않고 여전히 낙관적인, 근거 없는 장미빛 전망에만 의존한다면, 감히 내 손가락 하나를 걸고 말하건대(이건, 그러니까 손가락을 자르겠다는 무시무시한 발언은 아니다) 한국축구는 언제나 "사상 최초의 메달"만을 노려야 할 가능성이 훨씬 높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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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에 엄마와 누나가 계획한 '모녀의 1박2일 여행'에 내 자리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모녀'라는 단어 속에는 묘하게도 남자나 혹은 아들이 감히 비집고 들어가기 어려운 어떤 단단한 막 같은 게 있어서, 멋모르고 "나두, 나두!"하고 방정을 떨어대다가는 금세 싸늘한 시선이 돌아오기 일쑤임을, 나는 지난 오랜 경험으로 이미 알고 있던 터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하다못해 이름만 하더라도, 내가 끼어버리면 '모녀 여행'이라는 어쩐지 그럴듯한 이름이 '모녀자 여행'이라는 요상한 이름이 되어 버리니, "우리 그러지 말고 함께 '모녀자 여행'을 떠나자."라고 말하는 건 아무래도 차마 할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물론, 이름 따위야 어떻게든 여행에 끼고나서 '가족 여행'이라고 에둘러 말하는 수가 있긴 하지만, 그건 나보다 더 빨리, 그리고 철저히 이 여행에서 배제된 아빠에게 도저히 인간적으로 할 짓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감히 두 모녀의 여행에 낄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기름 값이 너무 올랐기 때문이었다. 말만 무성하던 '모녀 여행'을 엄마와 누나가 공식적으로 내게 확인시켜주었을 때 나는 대뜸, "이런 고유가 시대에 달랑 둘이서 차를 끌고 가겠다고?"라며 꽤나 어이없다는 투로 말했고, 아마도 이후 며칠간 은근히 계산에 집착하는 엄마와 누나의 머릿속에는 '고유가'라는 단어가 사라지지 않았음에 틀림없다. 고유가야 개인이 달리 어찌할 방법이 없고, 여전히 여행을 포기할 수도 없다면 남은 건 하나, 바로 1인당 여행경비를 줄이는 것이다. 그리고 그건, 이왕 움직이는 차에 한 사람쯤 더 태우면 자연스레 해결된다. 뭐, 총 여행경비야 조금 더 늘기야 하겠지만 말이다.

아니나 다를까. 여행을 떠나기 전날, 엄마는 자못 진지한 얼굴로 내게 이렇게 물어왔다.
"너도 같이 갔으면 좋겠니?"
그야 두말하면 잔소리지만, 여기서 오로지 사실대로만 대답하는 건 그리 현명하지 않다는 걸, 나는 역시 경험으로 잘 알고 있다. 이쯤 되면 내가 여행에 합류한다는 건 거의 확정적이고, 어차피 가는 여행이라면 최대한 좀 더 유리한 입장에서 떠나는 편이 낫다. 하여 나는 역시 자못 진지한 얼굴로, 절반의 진심과 그만큼의 거짓을 섞어 대답했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정말로 별로 가고 싶지 않아. 근데 어차피 엄마는 차만 타면 무조건 잘 테고, 그럼 누나 혼자 낯선 길을 헤매고 다녀야 되는데, 이게 상당히 걱정스럽지."

그리하여 결국, 우리는 지난 7월 13일, 전라도 쪽으로 그 이름도 이상한 '모녀자의 1박2일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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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기현의 소속팀인 풀럼이 어제 울산을 찾아왔다. 사실 설기현은 지난 시즌 풀럼의 팀 운영에서 거의 배제되었다시피 했고, 풀럼도 지난 시즌 막판까지 가는 치열한 강등경쟁에서 간신히 살아남았을 뿐인 팀이지만, 그렇거나 말거나 설기현이라는 '이름'과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팀이라는 '간판'은 결코 간단히 무시해버릴 만한 게 아닐 터였다. 게다가 지난 시즌 막판에 특히 빛을 발했던 지미 불라드의 플레이를 나는 꼭 두 눈으로 직접 보고 싶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프리미어리그 경기를 보러 영국에 직접 가지는 못할지언정, 그 프리미어리그 팀이 이곳 울산까지 와주었는데 보지 않는다는 건 두고두고 후회할 일이 될 게 명백했다. 그래서 결국, 나는 어제 울산 문수월드컵경기장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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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사전 1
허영만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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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강부자 내각이 여론의 도마 위에 올랐을 때 혹자는 이렇게 항변했다. "단지 부자라는 한 가지 이유로 그 사람을 매도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확실히, 딴은 그럴 듯한 말이다. 비록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과 같다.'고는 하지만, 최소한 현실에서는 '무전유죄, 유전무죄'의 원칙이 좀 더 들어맞게 마련이니, 일단 부자라면 있는 죄도 오히려 없다고 해야 할 판이니까 말이다. 뭐, 죽은 뒤에야 바늘구멍에 들어가든 쥐구멍에 들어가든, 내가 아는 한 그걸 알 수 있는 방법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으니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런데 솔직히 말해서, 부자에 대한 이러한 냉소적이고 부정적인 인식 한편에는 부러움과 시기심 또한 자리하고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오로지 정당하고 깨끗한 방법으로 한 평생 자족하며 살 수 있다면 그보다 좋은 것도 없겠지만, 돈에 대한, 부에 관한, 부자를 향한 욕망은 언제나 가슴 속 깊은 곳에서 꿈틀대며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다. 하여 욕망이라는 놈은 틈만 나면 이렇게 유혹한다. '폼 나게 살아보자', '돈 걱정 없이 살아보자', '죄 안 짓고(있는 죄도 없는 죄로 만들며) 살아보자' 이건 정말, 꽤나 혹하는 말이 아닌가. 그리고 적어도 내가 보기에, 그렇게 살기 위해서는 분명 부자가 되는 편이 좀 더 유리하다.

<한국의 부자들>이라는 책을 바탕으로 하되, 허영만 화백의 경험을 보탠 이 책 <부자사전>은 사람들이 부자에 대해 가지는 두 가지 감정을 정확히 꿰뚫으며 시작한다. 즉, "부자들에게 흠잡을 데만 있는 것은 아니다."라며 부자에 대해 품기 쉬운 일방적인 증오와 편견에 관한 주의를 환기시키는 한편, "누구나 부자가 될 수 있다. 그러나 누구나 부자가 되지 않는다."라며 부자를 향한 욕망을 슬그머니 부채질 한다. 그러니까 이 책은, 부자에 대해 가지는 사람들의 이중적 잣대 위에서 적절한 균형을 유지하며 사람들의 심리를 자극하는 멋진 시도를 보여주는 셈이다.

그러나, 그러한 멋진 시도가 끝내 성공적이었냐고 묻는다면, 유감스럽게도 내게는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 우선, 100인의 부자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와 취재를 통해 드러나는 부자들의 방식은 전혀 매력적이지 않다. 물론, 애초에 부자들이 매력적인 방식으로 부를 쌓았으리라고 기대한 것은 아니지만,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부자들의 인간적 고뇌나 어려움을 이해하게 되기는커녕 오히려 부자에 대한 불신과 증오만 깊어질 뿐이다. 가령, 인건비를 줄이기 위해 불만 없이 적은 보수를 받고도 일하는 사람을 고용한다든지, '초(秒) 관리 운동'이랍시고 담배 피고, 커피 마시고, 전화 한 통화하는 모든 시간을 금액으로 환산한다든지, 심지어 '무자비함을 배우라'든지 하는 것들은 지나치게 비인간적으로 보인다. 이렇게 해야만 부자가 될 수 있다면? 글쎄, 어쩐지 박지원의 <양반전> 한 대목을 들려주고 싶어진다. "그만 두시오, 그만 두오. 맹랑하구먼. 나를 장차 도둑놈으로 만들 작정인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내뱉고 돌아설 수 없는 게 바로 욕망의 무서운 점이다. 부자가 되면 도둑놈도 도둑놈이 아니게 되고, 더욱이 일단 부자가 된 뒤에 착하게 살면 그만이라는 자기기만적 유혹은 결코 간단히 물리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런데, 이렇게까지 욕망에 두손 두발 다 들고 항복하더라도, 실상 이 책에서 무슨 대단한 비법을 얻고자 한다면 또한 실망하기 딱 알맞다. 한 예로, '부자가 되는 최선의 방법은 돈을 쓰지 않는 것이다.'라는데, 그야 물론 맞는 말이지만 조금 허탈해진다. 또 다른 예로, 100명의 부자들 중 다수가 A라는 방법으로 돈을 벌었다고 치자. 그럼 A라는 방법이 돈을 버는 최고의 수단인가? 결코 아니다. A라는 방법으로 돈을 날린 수많은 사람들도 있다. 그렇다면 성공과 실패의 잣대는 무엇일까? 바로 부자들에게는 '안목'이란 게 있기 때문이란다. 결국 부자는 부자로서의 안목이 있기 때문에 A가 유용한 방법이고, 안부자는 부자로서의 안목이 없기 때문에 A가 유용한 방법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결론에 다다른다. 그러면 '당신은 부자인가, 안부자인가?'라는 원초적 질문 외에 무엇이 더 남는단 말인가.

부자에 대한 증오와 편견을 전혀 불식시키지 못하고, 부자를 향한 욕망도 전혀 채워주지 못했다면 도대체 이 책이 무슨 소용인가 싶지만, 사실 이 책이 그렇게까지 나쁘지는 않다. 앞에서 조금 극단적인 예를 들기는 했지만, 본래 부자가 되는 방법이란 것은 대개 아주 사소하고 당연해 보이는 원칙들을 실천하는 데에서 비롯되는 법이고,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것도 바로 그런 것일 게다. 그러나, "허영만 선생님께서 비로소 부자들에게 '인간의 얼굴'을 그려주셨다."는, <한국의 부자들>의 저자인 한상복의 말 자체에는 동의하더라도, 그 말이 품고 있는 그 이상의 의미까지는 아무래도 공감하기 어렵다. 다시 말해, 만화를 통해서 좀 더 쉽고 재미있게 부자들의 세계를 접할 수는 있었지만, 거기에 '인간의 삶'까지 기대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는 말이다. 마치 '사전'에는 '이야기'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사전'의 속성이 본래 그러하듯, <부자사전>도 이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활용하느냐에 따라서 누군가에게는 매우 유용할 수도 있음은 분명하다. 그리고 실제로 나 역시 종종 자극이 될 수 있는 원칙들을 여럿 접할 수 있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허영만 화백의 '그림'이 '글'에 비해 많이 아까워 보이는 건 어쩔 수 없다. 100명의 부자들을 분석한 것은 나름 괜찮은 시도로도 보이지만, 한 개인으로서의 부자가 지닌 인간적 고뇌와 삶의 무게를 좀 더 가깝게 느끼는 데에는 오히려 100이라는 숫자가 걸림돌이 된 것은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아무래도 나는, 별 '사연(이야기)' 없는 100명의 부자들의 '얼굴'은 어쩐지 '가면'처럼 무감각해 보이기 때문이다. 이왕에 '그림'이라는 '얼굴'을 달기로 했다면, 그 '얼굴'에 얽힌 사연에 좀 더 집중하는 것도 괜찮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 것도 바로 그래서이다. 그야 물론, 그랬다면 이미 '사전'은 아니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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