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초에 엄마와 누나가 계획한 '모녀의 1박2일 여행'에 내 자리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모녀'라는 단어 속에는 묘하게도 남자나 혹은 아들이 감히 비집고 들어가기 어려운 어떤 단단한 막 같은 게 있어서, 멋모르고 "나두, 나두!"하고 방정을 떨어대다가는 금세 싸늘한 시선이 돌아오기 일쑤임을, 나는 지난 오랜 경험으로 이미 알고 있던 터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하다못해 이름만 하더라도, 내가 끼어버리면 '모녀 여행'이라는 어쩐지 그럴듯한 이름이 '모녀자 여행'이라는 요상한 이름이 되어 버리니, "우리 그러지 말고 함께 '모녀자 여행'을 떠나자."라고 말하는 건 아무래도 차마 할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물론, 이름 따위야 어떻게든 여행에 끼고나서 '가족 여행'이라고 에둘러 말하는 수가 있긴 하지만, 그건 나보다 더 빨리, 그리고 철저히 이 여행에서 배제된 아빠에게 도저히 인간적으로 할 짓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감히 두 모녀의 여행에 낄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기름 값이 너무 올랐기 때문이었다. 말만 무성하던 '모녀 여행'을 엄마와 누나가 공식적으로 내게 확인시켜주었을 때 나는 대뜸, "이런 고유가 시대에 달랑 둘이서 차를 끌고 가겠다고?"라며 꽤나 어이없다는 투로 말했고, 아마도 이후 며칠간 은근히 계산에 집착하는 엄마와 누나의 머릿속에는 '고유가'라는 단어가 사라지지 않았음에 틀림없다. 고유가야 개인이 달리 어찌할 방법이 없고, 여전히 여행을 포기할 수도 없다면 남은 건 하나, 바로 1인당 여행경비를 줄이는 것이다. 그리고 그건, 이왕 움직이는 차에 한 사람쯤 더 태우면 자연스레 해결된다. 뭐, 총 여행경비야 조금 더 늘기야 하겠지만 말이다.
아니나 다를까. 여행을 떠나기 전날, 엄마는 자못 진지한 얼굴로 내게 이렇게 물어왔다.
"너도 같이 갔으면 좋겠니?"
그야 두말하면 잔소리지만, 여기서 오로지 사실대로만 대답하는 건 그리 현명하지 않다는 걸, 나는 역시 경험으로 잘 알고 있다. 이쯤 되면 내가 여행에 합류한다는 건 거의 확정적이고, 어차피 가는 여행이라면 최대한 좀 더 유리한 입장에서 떠나는 편이 낫다. 하여 나는 역시 자못 진지한 얼굴로, 절반의 진심과 그만큼의 거짓을 섞어 대답했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정말로 별로 가고 싶지 않아. 근데 어차피 엄마는 차만 타면 무조건 잘 테고, 그럼 누나 혼자 낯선 길을 헤매고 다녀야 되는데, 이게 상당히 걱정스럽지."
그리하여 결국, 우리는 지난 7월 13일, 전라도 쪽으로 그 이름도 이상한 '모녀자의 1박2일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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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13>
오전 10시쯤 집을 나서면서 나는 내 의도가 성공한 데 대해 혼자 신나서는, 최근 가장 즐겨보는 프로그램인 '1박2일'에서 하는 것처럼 손가락 하나와 두개를 번갈아 허공에 내지르며 "1박2일"하고 연신 외쳐댔다. 그러나, 역시 그 프로그램을 즐겨보는 누나는 내 재롱(?)에 화답하기보다는 내 눈 앞에 차 키를 들이 밀었는데, 그건 세상이 과연 그리 호락호락하지는 않다는 증거였기에 나는 얼굴을 급격히 찌푸려야 했다. 사실 원래라면, 내가 조수석에 앉아 두 다리를 쭉 뻗고 유유자적하면서 가끔 팻말도 제대로 봐주지 않는다는 핀잔을 여흥삼아 듣는다는 게 내 야심찬 계획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래도 뭐, 이정도면 아주 밑지는 건 아니다.
이번 여행의 첫 번째 목적지는 전라도 진안에 위치한 마이산 탑사였다. 점심을 차에서 해결하면서 고속도로를 3시간을 좀 넘게 달렸는데, 경상도에서 전라도로 넘어갈 즈음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하늘이 잔뜩 흐려있어서 혹 이번 여행도 지난 남해여행 때와 마찬가지로 내내 비와 함께 해야 하나, 하고 걱정했으나, 어느새 다시 해가 고개를 내민다. 그런데 미처 안도하기도 전에, 마치 해를 우롱하기라도 하듯 비가 내렸고, 그러다가 또 그쳤다가 내렸다가를 반복했다.
드디어 진안에 도착할 즈음, 이미 소심한 해는 기분이 상했는지 어디론가 가버렸고, 흐린 하늘에서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런데, 저 멀리 우뚝 솟은 두 개의 바위산이 빗속에 살짝 흐려진 채 신비스런 자태를 자랑하고 있는 게 보였다. 그게 그저 안개인지 진짜 산인지 분별하기 어려웠는데, 마이산 탑사에 도착하고 나서 안 사실이지만, 그 두개의 바위산이 바로 말의 귀처럼 생겼다하여 마이산이고(그닥 동의하기는 어렵지만), 탑사는 그 양쪽 귀의 사이에 자리하고 있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니 탑사는 곧 말의 머리 위에 자리한 셈이었다.
톨게이트에서 길을 물어 북쪽 주차장으로 찾아간 뒤, 차를 대고 탑사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살짝 내리는 비와, 말의 귀를 닮았다는 두 바위산 사이로 불어오는 한 줄기 바람 덕택에 여름치고는 꽤나 서늘하다. 양 옆으로 호위 마냥 듬직이 선 바위산 사이로 잘 꾸며진 기나긴 계단을 지나, 평지를 약간 더 걸으니 조금씩 탑사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한쪽에는 병풍처럼 바위산의 깎아지른 면이 위압적으로 서있고, 그 와중에 때로는 치열하게, 또 때로는 조화롭게 바위산과의 공존을 모색한 탑사의 모습은 실로 장관이다. 그 바위산 틈새 사이사이에는 도대체 어떻게 거기까지 올라가서 쌓을 수 있었을까 싶은 작은 탑들이 자리하고 있고, 경내에도 탑사라는 이름에 걸맞게 돌무더기로 쌓은 탑들이 도처에 솟아 있어서 자못 진기한 모습을 연출하기도 한다. 더욱이 그 탑들은 호리호리하고 다소 엉성해 보이는 모습과 달리 태풍에도 결코 무너지지 않고, 그렇다고 어떤 접착제를 사용한 것도 아니라니 실로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탑사 가장 위쪽의 대웅전에 들렀다가 내려오다 보니, 주변에 있는 여러 탑들을 건드리면 힘의 균형이 깨어져서 탑이 무너질 수도 있다는 경고와 함께, "탑에는 절대로 손을 대지 마십시오. 간곡히 엎드려 부탁드립니다."라는 절절한 당부가 적혀 있었다. 그러니까, 하늘에 맹세하건대 그건 내가 내려오는 길에 이미 손을 아주 살짝(!) 대어보고 나서 뒤늦게 발견한 것이었다! 그래서 변명을 좀 하자면, 내가 손, 아니 손가락을 댄 힘은 거의 한 개미가 앞에 가는 다른 개미를 스치듯이 건들인 정도여서, 어쩌면 앞에 가던 개미는 '어라, 방금 집먼지 진드기(0.2mm-0.4mm 크기)라도 지나갔나?'라고 느낄 정도였다고 하면 역시 거짓말이겠지만, 최소한 내가 건드린 것 때문에 두 개미 사이에 서로 '쳤니, 안 쳤니' 따위로 싸울 일은 없는 그런 정도였다(라고 나는 강력히 주장하는 바이다).
하지만 그래도 역시, 그런 절실한 호소문을 보니 지은 죄가 자못 죄송스러웠는데, 그것과는 별개로 영어와 중국어로 번역된 문장은 솔직히 조금 재미있었다. 대체 저 간곡한 당부를 어떻게 번역할 것인가 하고 봤더니(물론, 본다고 언제나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영어로는 그저 "Don't touch it", 중국어로는 "觸手禁止"(이건 정확하지 않다)라고 간단하게 적혀 있다. 한국어로도 그냥 "손대지 마시오."라고만 적혀 있었다면 나도 그렇게 잘못한 것 같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조금 억울한 마음이 들기도 하는데, 어쨌거나 스님들이 외국어에 능통하시지는 않다거나, 혹은 스님들이 한국인을 가장 믿지 못하시는 것, 둘 중의 하나는 아마도 사실이 아닐까(아니, 어쩌면 둘 다 일려나).
탑사를 둘러보고 난 뒤에는 다시 내려와, 주차장 인근의 식당에서 이른 저녁을 먹고 여수로 차를 돌렸다. 20번 고속도로와 35번 고속도로를 잇달아 달렸는데, 차량 통행이 그리 많지 않고 도로 주변을 둘러싼 산세의 푸르름이 상당히 편안한 시야를 제공해주어서 운전하기가 편하다. 물론, 그 대가로 산 입장에서는 허리를 완전히 베인 형국이라는 게 문제라면 문제겠지만.
저녁 7시가 넘어 여수에 도착해서는 곧바로 오동도에 들렀다. 여수에서 오동도로 연결된 '길'에는 '한국의 아름다운 길'이라는 팻말이 자랑스레 적혀 있었는데, 실상 '길' 자체는 별로 특별할 게 없다. 그저 그 길은, 본래는 아주 작은 섬에 불과했을 오동도를 여수와 방파제로 연결한 길일 뿐인데, 그 바다 건너편에 위치한 여수의 모습이 꽤나 근사하다. 특히 오동도를 한 바퀴 휘 돌아 나올 때쯤 날이 점차 어두워지자, 마치 바다 위에 반딧불 수백 마리가 날아다니는 것처럼 불빛들이 아름답게 비쳐졌고, 그제야 이 '길'이 '아름다운 길'이라는 데 완전히 동의할 수 있었다. 다만 한 가지 흠이라면, 아름다움의 이면은 대체로 추악한 것처럼, 아름다운 불빛과 선선한 해풍 그리고 근사한 밤바다를 즐기는 와중에 모기에게 물어뜯기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대가라고나 할까.
이제 완전히 어둠이 여수를 덮은 밤, 우리는 내일 좀 더 편하게 움직이기 위해 최대한 향일암 근처로 이동한 후, 그 부근에서 방을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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