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9>

마침내 고대했던 '제주올레'의 날이다. 택시를 타고 다시 시흥초등학교 앞에서 내리니 어젯밤에는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돌담벽에 표시된 파란색 화살표가 제주올레 1코스의 시작을 알려주고 있었다. 하여 화살표를 따라 기대에 부푼 첫걸음을 내딛은 제주올레 '길'은, 처음부터 기대를 배반하지 않았다. 마을로 들어가는 길의 양쪽에 자리한 논밭의 경계를 가르는 것은 소담스럽되 아름다운 거무스름한 돌담이었고, 그 경계 안에는 정체는 모르지만 좌우간 싱그럽기 그지없는 푸른 잎의 식물들이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게다가 하늘은 청명하고 날씨는 쾌청해서, 파란색과 초록색과 검은색이 마치 경쟁하듯 서로 제 색깔의 아름다움을 마음껏 발산하고 있었다. 그러니 기분 또한 상쾌해지리라는 건 불문가지의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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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8>

제주도가 전라남도 밑에 있다는 것을, 나는 이번에 여행을 계획하면서 펼쳐든 지도를 통해 비로소 알게 되었다. 그저 막연히 중간 밑에 있는 줄로만 알았건만, 의외로 제주도는 왼쪽으로 완전히 치우쳐서 위치해 있었다. 그래서 제주도는 완도와 무척이나 가까웠고, 알아보니 완도에서 제주도까지는 배로 약 3시간 정도면 족했다. 그리고 그걸로 이번 여행의 밑그림이 가볍게 완성되었다. 해남에서의 이틀 째 완도로 이동하여 자고, 다음날 아침 배를 타고 제주도로 가겠다는 것이 바로 그것.

제주도를 찾는 목적은 단 하나, '제주올레' 길을 걷기 위해서다. 걷는 것을 그리 즐기지 않는 나로서는 의외의 결심이지만, 이래저래 접한 '제주올레'에 대한 열망은 갈수록 깊어지기만 했다. 과연 '길' 위에서 무엇을 얻을지는 알 수 없거니와, 또 무언가를 꼭 얻어야만 하는 것도 아니지만, 나는 혼자서 혹은 누군가와 함께 그 '길'을 마냥 걸어보고 싶은 욕구에 한참을 들떠 있었다. 그리고 이런 내 계획에, 함께 과거를 회고할 수 있고, 현재를 이야기할 수 있으며, 미래를 꿈꿀 수 있는 K는 더할 나위 없이 알맞은 동행이었다.

급작스러웠던 출발 탓에 혹시라도 배편을 쉽게 구하지 못하면 어쩌나 조금 걱정했으나 그야말로 기우. 오전 10시 40분에 제주도로 향하는 배편은 아무 어려움 없이 구할 수 있었고, 수십 명이 함께 누워갈 수 있게 되어 있는 자리는 널널했다. 하늘은 맑았고, 바다는 조용했다. 내가 앉은 자리 바로 옆에 위치한 큰 창을 통해서는 물결이 배에 부딪혀 반짝이는 모습이 보였고, 잔잔하지만 틀림없는 물결의 파동은 거대한 배의 선실에서도 미약하게나마 느낄 수 있었다. 와중에 책 한권과, 어느 마음 좋은 아저씨가 건네주신 따뜻한 커피 한 잔이 내 손에 들려 있었으니, 이보다 근사한 낭만이 또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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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7>

어제 저녁에 결의했던 대로, 우리는 새벽예불을 드리는 다른 분들의 불경소리를 어렴풋이 들으며 계속해서 잠을 잤다(무엄하게도!). 그리고 결의했던 바와는 다르게, 다른 분들이 모두 아침식사를 하시는 시간에도 계속해서 잠을 잤는데, 이건 어차피 예불을 빼먹은 이상 마땅한 일이었다. 그런데 예불과 아침을 모두 거른 두 가련한 중생은, 여기에 더해 가증을 부렸다. 우리는 대충 씻은 후에 모든 짐을 챙겨서 우리가 묵은 '향적당(香積堂)'을 나와서는, 마치 이른 아침부터(비록 우리가 늦잠을 자기는 했지만, 여전히 8시가 조금 넘었을 뿐이다) 미황사에 들른 부지런하고 단정한 여행객인 양 미황사를 휘 둘러보았고, 가끔은 '음, 아침의 미황사는 과연 아름답군.'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곤 한 것이다. 그러고서야 우리는 달마산의 맑은 공기를 마음껏 들이키며 천천히 미황사를 빠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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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르바 2008-10-20 08: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너무해! 당장 나도 가고 싶잖아! ㅠ 월요일 아침부터 교무실에서 정신 없이 웃었어. ㅋㅋ 원래 몰래 보고 가곤 했는데 오늘은 댓글을 남겨야겠더라. B형 남자의 무심함이 뭐니! ㅎ

Fenomeno 2008-10-20 2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야, 느닷없이 뭐냐? 여기서 니 댓글을 보니까 좀 낯선데. 차라리 조스바라고 했으면, 좀 더 친숙했을 텐데... ㅎㅎ

B형 남자의 무심함은, 겪어봐서 조금은 알지 않냐, 그러니까 그 '매력' 말이야. ㅎㅎ
 

10월쯤에 여행을 떠나겠다고 마음 먹은 것은 진즉의 일이었지만, 여행의 출발은 꽤나 급작스러웠다. 여행에 동행하기로 했던 친구 K에게 이미 예정되어 있던, 그러나 그가 깜박하고 있던 어떤 사정이 여행을 일주일 앞두고 불현듯 떠올려지면서 여행은 한참 뒤로 미뤄질 판이었는데, 그러자 K는 "그럼 차라리 내일 떠나자."라는 사뭇 호기로운 제안을 했다. 여행 일정을 모두 일임받은 처지에서 나는 좀 더 완벽한 계획을 세우고 떠나고 싶어했으나, 한편으로는 그런 충동적인 출발 역시 나쁘지 않다는 생각도 들었다. 어차피 완벽한 계획 따위는 있을 수 없거니와, 무엇보다도 이번 여행 최대의 모토는 바로 '자유'였으므로.

그리하여 이래저래 고심을 거듭한 끝에, 우리는 출발 전날 밤에 긴급히, 다음날 새벽에 떠나기로 하였다. 그것은 말하자면, 완벽하지만 불확실한 출발을 기다리기보다는, 불확실하지만 완벽한 출발을, 바로 지금 선택한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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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14>

아침을 간단히 쿠키로 때우고, 10여 분 거리에 위치한 향일암으로 갔다. 그리고 주차장에 차를 대고 슬슬 걸어 들어가는데, 이거 뭔가 좀 이상하다. 여전히 차도는 쭉 이어져 있고, 주변에는 식당들을 비롯한 상점들과, 심지어 모텔도 여럿 있는데 대체 왜 차를 저 멀리 대고 이렇게 걸어야만 한단 말인가. 이건 일반적으로 사찰을 갈 때, 주차장에 차를 댄 후 걸어 들어가는 길들과는 사뭇 다르다. 그냥 멀쩡한 일반국도를 중간에 턱 하니 가로막고, 여기서부터는 주차비를 내고 반드시 걸어야 된다고 우기는 격이랄까(아마도 아침 일찍과 저녁 늦게는 자유로운 통행이 가능한 듯하다).

그런데, 마침 그때 주차장 쪽에서 버스 한대가 유유히 지나가기에 쳐다보니, 거기에는 우리보다 조금 늦게 온 사람들이 타고 있는 게 눈에 띈다. 그러잖아도 이 뜨거운 여름날 걷는 일이 도무지 납득하기 어려운데, 이건 또 무슨 시츄에이션이란 말인가. 그래서 돌아오는 버스를 세워 기사 아저씨에게 물어 보니, 다행히 친절한 기사 아저씨는 이 버스가 주차장에서 도로 끝까지 왕복을 한다는 것, 그러나 그 거리도 고작 700m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돌아올 때는 도로 끝에 있는 정류장에서 버스 시간을 확인해서 버스를 이용할 수 있다는 것 등을 알려주신다. 그러니까, 걷지 않아도 되었다는 말씀. 아저씨의 말씀대로, 그리 많이 걷지 않아서 도로는 곧 끝이 났다. 그리고 급격한 경사를 따라서 오르니 곧 향일암이다.

향일암은 '해를 향한 암자'라는 근사한 이름에 걸맞게, 망망대해를 바로 밑에 두고 수평선에서 떠오를 해를 바라보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곳이다. 금산 보리암과 비교하자면, 보리암은 산 위 높은 곳에서 바다를 굽어 살피는 형국인 반면, 향일암은 좀 더 적극적으로 바다와 교감하며 자리하고 있는 셈이랄까. 어쨌든 한 번 상상해보라. 저 멀리 푸른 바다 끝에서 붉은 해가 넘실거리며 솟아오르는 것을 부처님과 함께 바라보는 과분한 호사를. 그러나 불행히도, 오늘 날씨는 흐린 채 덥기만 해서, 바다 색깔은 흐리멍덩하고 해는 보이지도 않는다.

그런데, 대웅전 조금 밑쪽 널찍한 바위 위에는 '원효스님 좌선대'라는 팻말이 눈에 띈다. 과연 유명한 스님의 좌선대는 범상치 않아서, 그 자리가 바다를 망막 가득 채울 수 있는 환상적인 좌선대라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다. 다만 한 가지 문제라면, 해가 이글거리는 한낮에 거기에 앉았다가는 아마도 불에 쪼그라드는 오징어 신세가 되지 않을까 싶기도 한데, 뭐, 원효대사야 당연히 범인은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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