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로 들어가는 듯하던 길은 이윽고 말미오름의 완만한 경사로 이어졌다. 아마도 마을의 산책 코스인 듯한 잘 정비된 오르막을 오르다 문득 뒤를 돌아보니, 정말이지 '와-'하는 탄성이 절로 나왔다. 거기에는, 실로 아름다운 광경이 망막 가득 펼쳐져 있었다. <제주걷기여행>에 소개된 한비야의 표현을 빌자면, 그것은 가히 '만만한 아름다움'의 극치였다. 장엄한 것도, 오묘한 것도, 경이로운 것도 없이, 과거를 증명하는 오래된 그 무엇도, 미래를 지향하는 최첨단의 그 무엇도 없이, 거기에는 그저 꼭 있어야만 할 것들ㅡ태양과 구름과 바다, 산과 논밭과 나무, 그리고 묵묵히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터전만이 자리하고 있었을 뿐이었건만, 그럼에도 그 광경은 장엄하고 오묘하고 경이롭게도 아름다웠다. 그것은 감히 말하건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완전한 아름다움이었다.
제주올레가 초반부터 보여주는 이 절정의 아름다움에 감격해하며 열심히, 그러나 느긋하게 주위를 둘러보다가, 이내 필연일 수밖에 없는 내리막길로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결코 그렇게 아쉽지만은 않았던 것은, 이 '길'은 여기가 끝이 아니라 여전히 다른 곳으로 이어져있음을 잘 알고 있는 까닭이었고, 아닌 게 아니라 과연 말미오름의 정상을 지나서도 올레 길은 여전히 아름답기만 했다. 큰 눈을 끔벅거리는 소들을 지나, 나무들 사이로 난 조그마한 소로를 통과하고, 호젓한 흙길을 따라 올레 길은 이어졌다. 그러다가 또 시선을 돌리면, 다른 쪽 오름 정상에 서너 마리의 말들이 한가롭게 서있는 모습이 그림처럼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올레 길은 행복하게도, 바로 말들이 노니는 바로 그곳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알오름으로 오르는 길에 있는, 조금은 엉성한 말 목장의 울타리 문을 통과하자, 푸른 초지가 마치 하늘과 닿을 것처럼 완만한 경사를 이루며 환상적으로 눈앞에 드러났다. 천국의 동산이 있다면 아마도 이와 조금은 비슷하지 않을까. 게다가 이곳에 존재하는 사람은 K와 나 둘뿐이었고, 특히나 이 정상에서는 실제로 살아있는, 자유로운 말들이 맞아줄 터였다. 그러니 두 팔을 벌리고 하늘을 향해 마구 달려가고 싶은 충동이 이는 것은, 결코 갑자기 미쳐서가 아니다. 그러나 이쯤에서 사실을 말하자면, 행여나 그랬다가는 발밑에 무수히 깔린 말의 배설물을 밟을 확률이, 가히 로또에 당첨되지 않을 확률에도 전혀 꿀리지 않을 정도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 아름다운 풍경을 말의 배설물이 망쳐놓았느냐 하면, 전혀 아니다. 이곳은 어디까지나 말들이 주인인 셈이니 말의 배설물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고, 더욱이 자연과 교감하는 제주올레의 특성상 배설물을 밟는 것쯤은 차라리 영예라고 할 법도 하다. 허나, 불행히도 결국엔 이 '길'도 끝이 있을 터이고, 그리하여 다시 보통의 '길'로 되돌아가는 것을 피할 수 없는 한, 그때에는 '영예'가 '민폐'가 될 가능성이 농후한 점을 감안해야만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무래도 '신상' 배설물을 최초로 밟는 영예만큼은 가급적 사양하는 것이 겸손의 미덕일 게 분명했다.
그런 이유로, 아름다움에 취해서도 한 줄기 날카로운 감각만은 잃지 않은 채 조심조심 걸어, 마침내 우리는 말들과 조우하게 되었다. 사실 1코스를 선택한 데에는 제주올레가 시작된 최초의 코스라는 점 외에도 말 목장을 지나치게 되어 있다는 점이 고려되었기에, 말들과의 접촉은 무척이나 설레는 일이었다. 더군다나 마음만 먹으면 말에게 다가가 말을 쓰다듬는 것도 가능할 만큼, 말들과의 사이에는 어떤 장애물도 존재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불행히도, 그러나 말들은 우리와 생각이 다른 게 분명했다. 우리가 다가서자 서너 마리의 말들이 일제히 몸을 돌려 우리를 쳐다보는 순간, 나는 그것을 직감했다. 그들의 표정을 보고 심리상태를 알기는 꽤나 어려운 일이었지만, 적어도 그것은 반가움은 아니었다. 그들이 보이는 의외의(?) 반응에 멈칫하며 잠시 서서 말들과 대치하기를 수십 초, 척 보기에도 성질 더러워 보이는 줄무늬의 말 한 마리가 다른 말들 뒤에서 나타나더니, 갑자기 '푸르르' 소리를 내고는 앞발로 지면을 한 번 '쿵' 내리쳤다. 마치 그대로 치달려 내려오려는 위압감을 잔뜩 풍기면서. 그래서 우리는 황급히 몸을 돌려 다시 조금 후퇴했다. 뭐, 물론, 내가 먼저 무례하게 카메라를 들이대며 다가가서는 "여- 마(馬)형! 거 길 좀 물읍시다."라며 깝죽거렸다는 점을 밝혀야겠지만, 어쨌든 여기에 있는 것이 한가로이 풀을 뜯는, 마냥 유순한 말이 아닌 것은 확실했다.
말들과의 만남이 기대와는 조금 다른 것이 유감이긴 해도 그건 그냥 그러려니 할 수도 있지만, 정작 큰 문제는 말들은 정상에 있고 우리는 그곳을 지나가야만 한다는 사실이었다. 과연 말들이 순순히 길을 비켜 줄 것인지, 혹시라도 달려들면 무작정 도망쳐야 되는지, 아니면 단호한 태도로 그들과 맞서야 되는지를 한참 고민하다가, 우리는 정상을 좌회하여 가기로 했다. 슬금슬금 옆으로 몸을 돌려 왼쪽으로 돌다보니 그쪽에도 말들이 드문드문 있었고, 무심한 듯 우리를 쳐다보았다. 우리는 그럴 때마다 몸을 움찔거리며 반가운 표지를 찾아 무사히 말들을 지나쳐 안도하려는데, 알고 보니 이 길은 우리가 올라온 길이었다! 그러니까 우리는, 차마 정상을 넘지 못하고 정상을 중심으로 돌다가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 셈이었다. 하여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말들과의 시선을 피한 채 열심으로 표지를 찾으니, 천만다행으로 '길'은 정상을 넘는 것이 아니라 옆으로 방향을 틀어 내려가게 되어 있었다. K와 나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길을 내려갔다.
그 다음부터는 일사천리. 이제껏 계속해서 하나의 배경으로만 존재하던 일출봉을 목적지로 삼아ㅡ1코스는 일출봉 주차장 부근을 지난다ㅡ아름다운 바다를 바라보며 길을 걸었다. 와중에 나는 바닷물의 색깔이 군데군데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고, 새들이 '새대가리'를 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름다움을 본능적으로 사랑하는 동물이라고 단정 짓게 되었다. 우리가 걷는 길의 왼편에 자리한 바다는 몇몇 색깔이 조합되어 실로 아름답기 그지없었고, 그 아름다움을 새들은 결코 외면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중간에는 '시흥해녀의 집'에서 '숨은 전복 찾기' 따위를 전혀 할 필요가 없는, 푸짐하고 맛있는 전복죽을 점심으로 먹었다. 피로해진 신경을 회복시키는 데에 탁월한 효능이 있다고 알려진 전복의 그 명성 그대로, 명백히 피로해진 신경이 회복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아무튼 든든해진 배를 두드리며 우리는 계속해서 아름다운 바다를 끼고 일출봉을 향해 걸었다.
드디어 일출봉 입구 매표소에 이르러 우리는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이미 10km 이상을 걸어온 터라 지칠 때로 지쳤지만, 눈앞에는 그 이름도 찬란한 '유네스코 지정 세계 자연문화유산'인 '성산 일출봉'이 매혹적인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게다가 실로 수많은 사람들ㅡ남녀노소, 내외국인 할 것 없이 모두가 일출봉을 오르내리고 있었다. 그 많은 무리의 하나가 기꺼이 되고 싶은 마음은 물론 없었지만, 그 많은 무리가 기꺼이 찾아온 일출봉을 눈앞에 두고 외면하기란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결국, 왕복 40-50분이 소요된다는 친절한 문구가 기어코 우리를 움직였다. 이미 충분히 힘들기는 해도, 올라가는 데 20분여가 걸리는 것까지 감당하지 못할 바는 아니었다. 적어도 그 대상이 '유네스코 지정 세계 자연문화유산'쯤 된다면.
사람들 틈에 끼어 오른 일출봉은 명불허전, 과연 자연의 경이로움에 새삼 감탄할 만했다. 일출봉 정상의 분화구 자리에 무성한 녹색의 초목들은 신기함과 더불어 포근함 느낌을 주었고, 일출봉에서 바라다보는 풍광도 결코 예사는 아니었다. 그러나 일출봉에 오르며 더욱 분명해진 것은, 오히려 '제주올레'의 아름다움에 대한 확신이었다. 특히나 정상에서조차 약간의 느긋함도 허락지 않는 일출봉의 번잡함과 대비되는, 제주올레의 여유롭고 한적하며 느긋하기만 한 '만만한 아름다움'이 얼마나 행복한 것인지를 깨달았다. 그래서 숨을 헐떡거리면서도 바삐 오르내리는 사람들ㅡ특히 외국인들을 보니, "이곳에서 내려가는 즉시 시흥초등학교 앞까지 택시를 타고 가. 그리고 거기서부터 파란색 화살표를 좇아 느긋하게 걸으라고. 그래야 정말 멀리서 제주도를 찾은 보람이 있을 거야"라고 친절하게 일러주고 싶은 마음이 솟구치기도 했다.
그러나, 말할 필요도 없이 실제로 그런 일은 당연히 가능하지 않아서, 나는 내가 입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유니폼을 보며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어쩌고저쩌고 하는 어느 외국인에게 그저 "하이!"라는, 3살짜리 아기라도 할 법한 단어 한 마디를, 어색하게 웃으며 내뱉었을 뿐이다. 실은 그는, 어쩌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유니폼 따위를 입다니, 이런 얼간이 자식!"이라고 말했는지도 모르는데 말이다(이게 전혀 비약만은 아닌 것이, 그의 일행 중에는 맨유의 영원한 라이벌인 리버풀의 유니폼을 입은 녀석도 있었다). 하지만 만의 하나라도 그가 그와 비슷하게 말한 것이었다고 하더라도, 나는 결국 '제주올레'에 대해 녀석에게 말해주지 않았으니(사실 못한 거지만), 굳이 따지자면 나의 승리라고나 할까.
"얼간이 자식! 너는 일출봉이나 죽어라고 오르내려라."
뭐, 그것도 물론 나쁘진 않겠지만.
일출봉에서 내려와서 우리는 오늘의 일정을 마무리하기로 했다. 아직 1코스를 완주한 것은 아니었지만, 어차피 일출봉 주차장 부근에서 올레 표시를 놓치기도 했고, 이미 충분히 지쳐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올레 표시는 버스를 타러 가는 길에 다시 발견할 수 있었는데, 그때쯤에는 또 다시 길을 나설 마음이 완전히 사라지고 난 뒤였다. 결국, 우리는 내일 걸을 6코스가 있는 화순으로 이동하여 민박집에서 지친 몸을 쉬게 할 수 있었다.
* ps. 화순으로 이동하는 와중에 있었던 몇 가지 일에 대해 간략히 말하자면, 파출소에 들어가 길을 물은 것은 결과적으로 나쁜 선택이었고, 길을 가르쳐준 경찰의 말을 끝내 믿지 않고 어느 친절해 보이는 아주머니에게 다시 물은 것은 현명한 판단이었으며, 서귀포 터미널에서 버스 시간 탓에 바로 옆에 위치한 서귀포 월드컵 경기장 주변을 배회하지 못한 것은 꽤나 가혹한 운명이었으며, 화순의 어느 모텔에서 단돈 5000원을 아끼려고 단호히 되돌아서서는 민박집을 찾아 1시간 가량을 하염없이 걸은 일은 의심의 여지없이 멍청한 행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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