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배 밖의 고요함과는 달리, 아니 배 밖의 고요함 때문에 사실 배 안은 적잖이 소란스러웠다. 여기저기서 동양화, 서양화 놀이가 펼쳐지며 간혹 목소리가 높아졌고, 산행을 결의하고 친목을 도모하는, 어느 단체의 회원들 또한 결코 목소리가 작을 리 없었다. 게다가, 배 안에는 파리 한 마리가 날고 있기도 했다. 나는 배 안을 질주하는 파리를 보며, 파리를 잡아다가 바다 한가운데 두면 과연 파리는 무사히 육지로 귀환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런 파리를 카메라에 담을 수만 있다면 그건 실로 대단한 자연 다큐멘터리ㅡ제목은 '파리 날다 : 바다를 횡단하는 파리의 대 분투기' 정도ㅡ가 되지 않을까, 하는 시답잖은 생각을 하다가 이내 책으로 다시 눈길을 돌렸다.
아침을 빵과 우유로 때운 터라 슬슬 배가 고프기 시작해서 컵라면을 사서 갑판 위로 나갔다. 꽤 따가운 햇살이 뒤통수를 사정없이 내리 쬐었지만 선선한 해풍 덕택에 전혀 덥지는 않았다. 주위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그저 망망대해. 탁자 하나를 차지한 채 드디어 한 입 가득 우겨넣은 컵라면의 맛은, 의외로 그리 각별하지는 않다. 실상 정말로 각별했던 것은, 바로 '가격' '희망소비자가격 1000원'이 명시되어있음에도 불구하고 배에서는 서슴없이 2000원을 받고 팔았는데, 이쯤 되면 가히 '희롱소비자가격'이라고 불러야 마땅하다. 내가 알기로, 배 위의 선장은 배 위의 범죄를 다스릴 수 있는, 이른바 개인적 공권을 부여받은 사람인데, '바가지 가격'을 처벌하는 것은 그의 권한 밖의 일인지 도무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뭐, 그런 중에도 라면 국물까지 싹 해치운 것은 결코 맛이 각별해서도, 배가 어지간히 고파서도 아닌, 그저 남은 국물을 버릴 곳을 찾지 못했기 때문.
선상 위의 '낭만'과 '만찬'을 즐기는 사이 3시간은 금세 지나갔다. 그리하여 마침내 도착한 제주도는, 실로 매력적이다. 제주도에 대한 기억은 초딩 무렵의 가족여행 중, 차가 저절로 올라가는 신기한 오르막 도로에 대한 것이 거의 전부인데, 지금 와보고서야 그런 기억이 얼마나 하잘 데 없는 것인지를 알겠다. 대체 차 따위가 산을 오르든 바다를 헤엄치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아, 물론 말하자면 그렇다는 것이고, 헤엄치는 자동차는, 혹시라도 있다면 당연히 상관있다)! 그저 제주도가 보여주는 이 따사롭고 평화로운 분위기(물론, 제주도라고 언제나 그렇지는 않겠지만)의 한 자락이라도 기억할 수 있었다면, 그것만으로도 제주도는 충분히 그리운 곳으로 남았을 터인데. 어쨌거나, 이러한 제주도의 속살을 확인할 수 있는 제주올레에 대한 기대가 더욱 커진다.
우리가 만났던 해남 사람들도 그랬지만, 제주도의 사람들도 무척 친절했다. 나는 다만 지금 내가 가는 방향이 올바른 방향인지만 확인하기 위해 간단히 물어보면, 그들은 매우 자세하게 일러주곤 했다. 아이스크림을 사먹으며 방향을 물었을 때 가게 아가씨는 약도를 그리며 길을 가르쳐 주었고, 늦은 점심으로 손칼국수를 먹으며 식당 아주머니에게 시흥에 가는 방법을 물었을 때 아주머니는 몇 번이나 거듭해서ㅡ덕분에 아주머니는 우리에게 김치와 깍두기를 내주는 것을 잠깐 깜박하셨고, 아주머니의 거듭된 말씀에 거듭해서 대답하느라 내 칼국수는 아주 조금 식게 놔두어야 했지만, 아주머니의 친절에는 그저 거듭 감사할 따름이다ㅡ단단히 일러 주셨다.
배를 채우고 오늘 가야할 곳에 이르는 방법을 모두 안 후에, 우리는 느긋한 마음으로 제주 민속자연사 박물관에 들렀다. 박물관은 배가 내린 곳에서 약 3km 거리로, 이미 열심히 걸은 뒤라 식당 맞은편에 위치하고 있었다. 박물관 안에는 단체관광을 온 중국인들과, 역시 단체로 수학여행을 온 학생들로 넘쳐났다. 이곳은 볼거리가 많아서 단체관광시 데려오기에 딱 알맞은 곳으로 보였는데, 사실 내게는 대체로 따분했다. 다만, 해양전시관으로 이동하는 중 본, 야외에 전시된 돌들의 이름이 약간 흥미로웠다. 가령, '구갑상암'이랄지, '석영반암'이랄지, '비현정질 현무암'이랄지, 심지어 '침상장석감람석현무암'ㅡ정말로 이건 내가 아무렇게나 지어낸 이름이 아니다ㅡ등의 이름을 과연 누가, 어떤 근거로, 대체 무슨 의도로 그렇게 지은 것인지 조금 희한하다고나 할까.
민속자연사 박물관의 번잡함과는 달리, 그 바로 옆에 자리한 삼성혈은 지나치게 썰렁했다. 사실 우리도 제법 비싼 입장료(2500원)에 멈칫했다가, 그래도 그만한 가치가 있으리라는 생각에ㅡ달리 할 일도 없었다ㅡ들어갔건만, 불행히도 삼성혈이 입장료 값을 충분히 했다고는 말하기 어렵다. 제주 탐라국의 세 시조를 모신 삼성혈은 그 엄숙하고 단정한 분위기가 꽤 마음에 들었지만, 볼거리는 매우 부족했다. 세 명의 신인(神人)들이 땅에서 솟은 곳이라는, 그 신성한 구덩이 주변을 둘러싼 나무들이 마치 경배하듯 그쪽으로 가지를 드리운 게 조금 신기했을 뿐(솔직히 어떻게 보면, 조작이 아닌가, 하는 의심도 든다), 전시실에 마련된 전시물들은 빈약했고, 특히나 14분짜리 애니메이션은 최악이었다.
5분도 채 안되어 전시실을 둘러보고 실망하여 나올 때, 전시실 입구에 있던 안내인은 전시실 옆에 위치한 상영관에서 곧 애니메이션 시청이 있을 것이고, 그것을 보아야만 삼성혈을 완전히 본 셈이 될 것이라고 덧붙였었다. 그래서 내심 애니메이션을 조금 기대했지만, 정말이지 애니메이션은 상영하지 않는 쪽이 관람객에게도, 삼성혈에게도, 무엇보다도 세 명의 신인에게도 다행스런 일이 될 게 분명했다. 애니메이션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조악했고, 대사는 가관이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이 부분이었다.
세 명의 신인이 사냥을 하던 중, 한 명이 먼 바다에서 무언가 다가오는 것을 발견한다. 그래서 세 명이 나란히 그것을 보다가 문득 한 명이 묻는다.
"대체 저것이 무엇일까요?"
그러자 그 중 한 명이 굉장히 진지하고도 근엄한 목소리로 답(?)한다.
"아니, 저것은............뭘까?"
웃기는 게 목적이었다면 나름 성공했다고 칭찬해주고 싶지만, 분명 애니메이션의 목적이 허무개그는 아니었을 터다. 차라리 이런 어설픈 애니메이션 따위는 치우고 입장료를 확 낮추었더라면, 오히려 삼성혈은 그 신비한 고요와 맑고 신선한 기운으로 인해 좀 더 사랑받을 수 있지 않을까.
제주도는 생각 이상으로 커서 제주 터미널에서 시흥초등학교까지는 한 시간이 훨씬 넘게 소요되었다. 와중에 해는 이미 저물어 어둠이 완연히 제주를 감쌌을 때, 우리는 "시흥초등학교 앞"이라는 안내방송을 듣고 허겁지겁 짐을 챙겨서 내렸다(제주의 버스는 안내방송이 달랑 한 번, 도착할 즈음에만 해주기 때문에ㅡ다음 내리는 곳에 대한 언급은 없다ㅡ제주의 이방인으로서는 그게 큰 불편이자 불만이었다). 그리고 버스가 무심히 가버린 후에야, 우리는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우리는, 황량한 곳에 버려져 있었다! 초등학교가 있으니 동네가 있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적어도 여기에 여행객을 위한 건물은 없었다. 드물게 도로에 면해있는 집들에 불이 켜진 곳도 있었지만 대체로 어두웠고, 사람들도 없었다. 다행히 우리를 경계하는 눈빛으로 총총히 걸음을 옮기시는 한 아주머니를 발견하고 잽싸게 달려가 물어보니, 숙박할 곳을 찾으려면 여기서 한 30분은 걸어 나가야 한단다. 30분 정도라면 걸을 수 있는 거리긴 하지만, 대체로 어르신들이 말씀하시는 30분은 종종 1시간이 될 수도 있다는 게 내 지론인지라, 우리는 조금 걷다가 마주친 택시를 타고 숙소를 찾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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