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황사에서 나오자마자 우리는 다시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와 현실과 마주했다. 돌아갈 길은 막막했고, 달마산의 공기가 아무리 맑은들 주린 배를 채워주지는 못했다. 허나, 자비롭디 자비로우신 부처님께서는 미욱한 중생들에게조차 자비를 아끼지 않으셨다. 아마도 미황사의 공사를 담당하시는 분으로 보이는 어느 아저씨는 내가 버스시간을 여쭤보자, 뜻밖에도 버스 정류장까지 태워주시겠다고 하시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가까운 정류장은 버스가 거의 오지 않는다고 덧붙이시고는, 아저씨는 우리가 어제 택시를 탔던 산정까지 데려다주시기까지 했다.
아저씨가 산정에 내려주셨을 때에는 마침 버스가 막 당도했는지라, 우리는 황급히 아저씨께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버스를 바로 탈 수 있었다. 하여 손쉽게 해남 버스 터미널로 돌아올 수 있었던 행운에 기뻐했던 것도 잠시, 약간의 문제가 생겼음을 곧 알았다. K가 핸드폰을 잃어버린 것이다. 아마도 미황사에서 산정까지 데려다 주신 아저씨의 포터에 떨어뜨린 모양인데, 내가 K의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어도 받는 사람은 없었다. 그래서 내가 "다시 미황사로 가볼까?"하고 K에게 물었더니, K는 B형 남자 특유의 무심함으로 "됐다. 뭐, 할 수 없지."라고 답했고, 하기에 나 역시 B형 남자 특유의 무심함으로 "뭐, 그러든지."라고 응하며, 우리는 K의 핸드폰과 너무도 손쉽게, 기꺼이 안녕을 고했다. 만일 이제 막 새로 산 핸드폰이라면 얘기가 조금 달라지겠지만, 아마도 내가 핸드폰을 잃어버렸더라도 우리는 똑같은 대화를 나누었을 게 분명하다.
한참 늦어진 아침밥은, 버스를 타고 녹우당 1.4km 지점에 내린 후 걸어 들어가면서 초코바로 해결했다. 이 초코바로 말할 것 같으면, 멜라민이 듬뿍 함유되어 있을 가능성이 농후해 아마도 몸에 그닥 좋지 않을 것임은 물론이고, 어쩌면 로또에 당첨되어 당첨금을 타서 나오는 길에 번개에 맞아 죽을 확률보다도 꽤 높은 확률로 죽음을 선사할지도 모르지만, 알 수 없는 공포보다는 아무래도 확실한 배고픔 쪽이 좀 더 무서웠다. 그래서 우리의 여행 중 초코바는 중요한 비상식량이기도 했다는 후문.
녹우당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단연 유물관이었다. 나는 해남을 찾는 계기가 되었던 공재 윤두서의 그림을 볼 수 있었다는 점에서ㅡ하지만 그것이 진품인지는 모르겠다ㅡ좋았고, K는 의외로 고산 윤선도의 저작들에 꽤나 관심을 보였다. 내 멋대로 데려온 것이라 그의 관심이 반갑기는 한데, "나도 훌륭한 저술을 남겨서 후세에 보관하도록 해야겠다."는 녀석의 헛소리는 못 들은 척 넘어가면 그만이지만, 자꾸 '고산' 윤선도를 '도산' 윤선도라거나 혹은 '다산' 윤선도라고 하는 데에는 감히 '고산' 윤선도를 대신해서 한 마디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냥, 제발 그 터무니없는 관심 좀 꺼라."
유물관의 전시물을 빼면, 사실 녹우당은 조금 아쉬웠다. 책에서만 보았던 '녹우당'의 현판을 실제로 보게 되어 나름 감흥이 있기는 했지만, 정작 '녹우당'이라는 현판이 걸린 사랑채 이외에는 본가 안채 관람이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안채에는 해남 윤씨의 종손이 실제로 살고 있어서인데, 그들의 사생활은 마땅히 보호받아야함에 틀림없지만 관람객 입장에서는 아무래도 조금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녹우당을 나와서는 대흥사까지 택시로 이동했다. 그리고 대흥사 부근에서 오늘 처음으로 밥을 먹을 수 있었다. 우리가 들른 식당은 '한 이백년 식당'인데(*실제 상호명과는 아주 조금 다름), 겉보기에는 한 이십년쯤 되어 보이는, 고풍스럽기보다는 그저 낡은 건물이었지만, 그래도 안에는 몇몇 그림들을 걸어 놓아 미관에 조금은 애를 쓴 흔적이 보였다. 그러나 이 식당이 '한 이백년'이라는 내력 있어 보이는 이름과 걸맞지 않는 중대한 이유는, 우리가 주문한 낙지볶음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낙지볶음에는 낙지와 야채는 물론이고, 조그마한 스프링 하나와 구슬과 비슷한 정체불명의 구체(球體) 하나가 양념에 버무려져있었는데, 내가 알기로 스프링을 이백년 전쯤에 요리에 첨가한 예는 단언컨대 없다.
그러나 스프링으로 입맛을 잃기에는 너무나 배가 고팠기에, 우리는 스프링이 든 낙지볶음을 반납하는 대신 밥 한공기를 추가로 주문했다. 그리고 아주머니가 밥 한 공기를 가져오시기에 내가 건져낸 스프링과 구체를 보여 드렸더니, 뜻밖에도 아주머니는 반색을 하시고 이렇게 말씀하신다.
"아이고, 이게 거기에 있었구나! 수도꼭지에서 이게 떨어져 나가서는 거기에 들어갔나 보네. 하하하!"(물론, 아주머니는 구수한ㅡ그러나 옮겨 적기에는 까다로운 전라도 사투리를 구사하셨다)
아주머니가 하도 흥겨워하시기에, "아, 바로 그런 거였군요. 그 녀석도 낙지볶음의 맛을 아나 보네요. 하하하!"하고 하마 트면 맞장구를 칠 뻔했으나, 가까스로 참고 아주머니의 웃음소리가 멀어질 즈음에야 K에게 조용히 물어 보았을 뿐이다.
"이게 그다지 웃으실 상황은 아니지 않냐?"
K는 조용히 웃기만 했는데, 이건 내가 K를 잘 알아서 장담하는 것이지만, K의 웃음은 내 생각에 대한 완벽한 동의를 의미한다.
결국 스프링은 아주머니가 챙겨 가셨고, 우리가 가끔 요상한 구체를 흘끔거리며 식사를 마쳤을 때, 아주머니가 스프링이 빠졌다는 문제의 수도꼭지 잔해를 가지고 우리에게 다시 오셨다. 그러고는 내게 이걸 좀 맞춰줄 수 있는지 물어보셨는데, 내가 모르겠다고 하자 아주머니는 한참을 옆에 서서는 혼자서 이렇게 저렇게 맞춰보시면서 "음, 이렇게 인가보다."라고 하시며 돌아갔다. 그런데, 아주머니는 끝내 정체불명의 구체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으셨는데, 그건 실로 퍽이나 다행스런 일이었다. 혹시라도 그게 아주머니가 출처를 아는 구슬이었다면, 아주머니는 아마도 "아이고, 이게 거기에 있었구나! 내 손주 녀석이 가지고 놀던 구슬이 거기에 들어갔나 보네. 하하하!"라고 호탕하게 말씀하시고는, 잠시 후에 손주 녀석을 데려와서는 손주 녀석에게 구슬치기 방법을 알려줄 수 있는지 내게 물어보셨을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말이다.
어쨌거나 그럭저럭 배를 채우고, 우리는 대흥사로 향했다. 대흥사 매표소에서 대흥사 경내까지는 걸어서 약 30분 정도가 소요되었다. 그런데, 경내에 도착하자 주변에 십수 대의 차들이 늘어선 꼴을 보니 여간 불만스러운 게 아니다. 21세기의 절 부근에서 차를 보지 않는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모르지 않거니와, 분명 굳이 차가 주차장이 아닌 절 코앞에까지 올라오는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을 수도 있다는 점을 힘들게 이해한다손 치더라도, 절의 첫모습이 난립해 있는 차들이라는 건 실로 실망스러운 일이다. 더욱이, 대흥사는 이러한 실망감을 상회할 그 어떤 감흥도 남기지 못했다.
기본적으로 대흥사는 두륜산의 산세를 두르고 자리한 큰 절인데, 이상하게도 대웅전은 무척이나 갑갑했다. 대웅전 바로 앞에는 북을 치는 곳이 자리한 건물이 있어서, 그 건물과 대웅전과의 거리가 지나치게 가까워서이기도 했고, 게다가 대웅전이 비교적 아래쪽 측면에 위치해서이기도 했다. 그런데, 대웅전을 나와서 바로 옆을 보니 추련사(확실하지는 않지만) 등의 건물이 있어서, 도대체 대흥사는 이곳에 무리를 이룬 절 중의 하나일 뿐인지, 아니면 추련사가 절 이름이 아니라 그저 건물 이름일 뿐인지를 확인해 보려는 찰나, 내 핸드폰으로 전화가 걸려왔다.
예상했던 대로, K의 핸드폰은 미황사에서 친절을 베풀어주신 아저씨의 포터에 떨어져 있었다. 그 사실은 해남 터미널에서 녹우당으로 가던 중 아저씨의 전화로 알게 되었는데, 아저씨는 버스 편에 해남 터미널로 핸드폰을 보내주시겠다고 했었다. 그런데 지금 다시 전화를 하셔서는 우리가 대흥사에 있다고 하자 이곳까지 직접 갖다 주겠다고 하시는 것이었다. 그러실 필요까지는 없다고 했지만, 아저씨는 아무래도 안심이 안 되셨던지 대흥사를 다 둘러봤으면 매표소 쪽으로 나오라고 하셨고, 우리는 사실 대흥사를 이제 막 본격적으로 둘러볼 참이었지만 황급히 절을 나서야만 했다. 그래서 우리가 안녕을 고했던 K의 핸드폰과는 재회를 할 수 있게 된 셈이지만, 대흥사의 본모습을 채 절반도 못 보게 되었으니 대흥사로서도, 우리로서도 조금 유감스러운 일이다.
매표소 입구에서 아저씨와 만나 K의 핸드폰을 받고, 감사함과 죄송스러움에 기름값이라도 하시라고 적으나마 사례를 드렸다. 아저씨는 극구 사양하시다가 받으시고는, 우리의 행선지가 버스 터미널인 것을 아시고 거기까지 또 태워주셨다. '녹색의 땅' 위에, 더하여 바다를 끼고 있는 해남은 아름다웠고, 해남에 터 잡은 미황사와 녹우당은 빼어난 자태를 자랑했지만, 그래도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해남의 인심이었다. 비단 핸드폰을 찾아준 아저씨뿐만이 아니라, 당신 일처럼 여기저기 물어서 가르쳐준 어느 할아버지와 내릴 곳을 알려주겠다던 버스기사 아저씨, 그리고 바쁘신 손을 부지런히 놀리던 와중에도 미소를 머금고 길을 가르쳐 주신 튀김집 아주머니 모두 한결같이 친절하고 자상했다. 아마도 다시 해남을 찾게 된다면, 그건 더 이상 '땅 끝'의 상징성에 집착해서도, 미황사와 녹우당의 아름다움을 사랑해서도 아닌, 해남의 친절이 문득 그리워서일지도.
해남 버스 터미널에 도착해서 강진으로 가는 차편을 알아보니 가장 빠른 것이 4시20분 차다. 현실적으로 6시에 문을 닫는 다산초당을 둘러보기란 불가능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이런 건 나중에 연인과 함께 타는 거야."라고 말하며 외면했던 두륜산 케이블카라도 타는 것이 나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지만 이제 어쩔 수 없다. 결국, 조금 이르긴 해도 완도로 가는 차표를 사는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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