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와 문화
하재근 지음, 최윤진 그림 / 자인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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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대한 중국의 역사와 문화를 책 한 권에 담아내려는 시도는 일견 무모해 보인다. 적정한 분량의 한 권으로 만들기 위해 지나치게 쳐내다 보면 가지는 물론이고 자칫 줄기마저 앙상하기 이를 데 없게 될 우려가 있고, 그렇다고 책 분량을 한정 없이 늘여 놓으면 그 한 권의 책은 아무도 읽지 않기 십상일 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러한 태생적인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만화'라는 형식의 도움을 받아 중국의 역사와 문화의 줄기를 소략하지만 비교적 명쾌하게 드러내는 한편, 종종 가지 끝에 매달린 열매의 풍성함을 맛보이는 데에도 결코 인색하게 굴지 않는다. 물론, 그로 인해 그저 '만화'라고 하기에는 컷과 글자가 적지 않은 편이지만(그렇다고 아주 많지도 않다), 중국의 역사가 본격적으로 기록된 삼황오제로부터 시작하여 쑨원의 신해혁명에 의해 멸망된 청나라까지를 아우르면서 그 도도한 역사 속에서 되풀이되는 일련의 법칙을 추출해내고, 아울러 중국의 문화 저변에 흐르는 지극히 동양적인 가치와 사상을 짚어내면서도, 이 책은 "무조건 쉽고 재미있을 것!"이라는 저자의 대원칙 아래서 시종일관 '만화' 특유의 유머와 재미를 잃지 않는다. 결론적으로, 이 책은 가볍게 읽을 수 있으면서도 의외로 상당히 유용한 내용과 지적 만족감을 제공하는, 재미있고 유익한 '만화책'이다. 

자신의 이익에만 마음을 쏟고 타인에 대한 해악에 무관심한 사람은 천리(天理)에 의해 관용될 수 없고 인류에 의해 일치되게 증오되어야 합니다. ...... 당신네 나라가 5~6만리나 먼 곳에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곳에서 이익을 목적으로 상인들이 오고 그들은 이익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무슨 도리로 다시 독물을 사용해 중국 국민을 해치는 것입니까? ...... 질문을 허락한다면 묻겠습니다. 당신의 양심은 어디에 있습니까?   ㅡ임칙서가 빅토리아 여왕에게 보내는 편지 中ㅡ (p2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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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은 왜 조선일보와 싸우는가
유시민 지음 / 개마고원 / 200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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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단지 거짓말쟁이가 숫자를 이용할 뿐이다." 어느 책에서 이런 격언이 인용되어 있는 것을 보고, 나는 곧 '조중동'을 떠올렸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특히 <중앙일보>가 노무현 대통령과 이명박 대통령의 당선 소식을 전했을 때, 거의 같은 수치의 득표율을 놓고 한쪽은 '과반수에도 못미치는 반쪽짜리 대통령'으로, 다른 한쪽은 '과반수에 육박한 진정 국민 모두의 대통령'으로 제목을 뽑았다던 이야기가 생각났다. 물론, 어느 쪽을 '반쪽짜리 대통령'으로 평가했는지는 말할 필요도 없다. 실제로 굳이 득표율을 따지자면 노무현 대통령 쪽이 0.2% 높았지만, 그런 것 따위는 <중앙일보>에게 중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중앙일보>가 원했던 것은 자명한 '숫자'가 아닌, 자명한 숫자를 '이용'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숫자'(혹은 사실)를 '이용'하는 일에 있어서 '조중동'의 왕초격인 <조선일보>가 빠지지 않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라고 생각한다).

일단 '숫자'를 이용하는 데 일가견이 있는 <조선일보>를 거짓말쟁이라고 놓고 보면,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노무현은 왜 조선일보와 싸우는가?'하는 질문의 답은 너무도 명백하고 간단해서 심지어 하품이라도 나올 지경이다. 거짓말쟁이가 좋은 의도로 거짓말을 할 리 만무하니 거짓말 때문에 피해를 보는 사람과의 싸움은 필연적이고, 양자의 시시비비 또한 자명하리라 생각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책은 언뜻 명명백백해보이는 듯하는 싸움을 큰 틀에서 통찰하면서도 동시에 구체적인 사례들을 인용,분석함으로써, 양자의 싸움이 내포한 복잡하고 미묘한 부분들을 일목요연하게 구성해 놓고 있다. 싸움의 단초를 제공했던 '노무현 프로필 사건'부터 노무현의 반격과 경과, 그리고 <조선일보>가 노무현을 공격한 이유와 노무현이 막강한 <조선일보>에 맞설 수 있었던 배경 등을 저자는 '공정하게 편파적으로'라는 기치 아래 사뭇 흥미진진하게 풀어낸다.

한 가지 특기할 만한 대목은, 여론을 주도하는 능력을 지닌 <조선일보>의 의제설정 능력에 <한겨레>마저 휘둘리기도 했다는 사실이다. 김대중의 햇볕정책을 두고 <조선일보>는 끈질기게 누무현에게 동조 혹은 반대를 강요했는데, 이러한 '친DJ 혹은 반DJ' 프레임에 <한겨레> 또한 가세했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상황에서는 노무현이 어느 쪽을 선택하든 비난을 감수할 수밖에 없게 된다고 분석하며, <조선일보>의 의제설정 능력의 막강함에 냉소어린 찬사를 보낸다. 그러나 반대로, <조선일보>의 프레임에 타 신문사들이 동조하지 않았던 사례 또한 제시하면서, 그러한 경우에는 <조선일보>의 '노무현 죽이기' 의도는 확연히 반감될 수 있다고 지적한다. 그리하여 결국 이 대목에 이르면, 이 책은 단순히 '<조선일보> 까기'를 넘어서, ''숫자(사실)'의 비판적 수용'으로 외연의 확장을 꾀할 수 있게 되는 셈이다.

저자가 서문에서 밝히듯이, 저자는 이 책에서 '객관적인 관찰자'로만 머무르지 않는다. 그래서 이 책의 모든 내용은 누군가에게는 오로지 '편파적'으로만 보일 수도 있다. 저자가 다름 아닌, 노무현의 적자라고도 불리는 유시민이고 보면 더더욱 그렇다. 그러나 저자는 "우리는 대단히 편파적이다. 하지만 편파적이 되는 과정은 대단히 공정하다."는 김어준 딴지 총수의 말을 인용하며, 이 책이 '공정하게 편파적'인 것임을 강조한다. 물론 여전히,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의 논조를 의심할 여지가 있을 수 있겠지만, 외려 중요한 것은 그러한 비판적인 태도를 <조선일보>(혹은 <한겨레>라 할지라도)에 대해서도 일관되게 지닐 수 있는 '공정함'이라는 것이, 바로 이 책의 가장 중요한 메시지인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맥락에서, 앞서 언급한 격언은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 이후에도 여전히 계속되는 "상식과 몰상식의 싸움"에서, '몰상식'의 거미줄에 빠지지 않기 위한 유용한 경구가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숫자(사실)'를 다루는 사람들에게는 물론이고, '숫자(사실)'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도 역시.

* ps. 노무현 대통령과 이명박 대통령의 득표율을 두고 <중앙일보>가 상반된 제목의 기사를 게재했다는 이야기는 '사실'이라고 확신할 수 없다. 인터넷을 통해 그런 내용을 접하고 당연한 '사실'로 믿었었는데, 검색을 하던 중 그것이 엄밀히 증명된 '사실'은 아닐 수도 있음을 알았다(http://www.minoci.net/349). 어쩌면 이 경우도 내가 그저 믿고 싶은 대로, '편파적으로' 믿은 결과인지도 모르겠다. 뭐, 물론 그렇다고 해도 여전히 <중앙일보>를 비롯한 '조중동'이 거짓말쟁이라고 생각하는 데는 털끝만큼의 동요도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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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먼 자들의 도시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 해냄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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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눈이 멀었을 때의 일을 상상하기란 꽤나 어렵지만, 나는 근본적으로 눈이 먼 내 삶이 지금과 완전히 다른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야 물론 눈이 보일 때 할 수 있었던 많은 일들을 상당 부분 포기할 수밖에 없겠지만, 가령 먹고 싸고 자고 씻고 듣고 걷는다거나, 혹은 웃고 울고 찡그리고 화내고 즐거워한다거나, 또는 세상에서 벌어지는 끔찍한 일들에 대해 분통을 터뜨리고 슬퍼하거나 하는 따위의 일들을 여전히 나는 하게 될 것이며, 이것은 현재 내가 '인간'이기에 향유하는 많은 것들을 불편하게나마 계속해서 누릴 수 있으리라는 뜻이다. 이유는 명백하다. 눈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내가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요컨대, 눈이 보이지 않아서 좀 더 불편해지더라도 빨간불일 때는 서고 파란불일 때 가는 것은 여전히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인간의 도덕과 가치와 양식은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나는, 우리는, 과연 정말로 그럴 수 있을까?

주제 사라마구가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 가정하는 상황은 위의 상상보다 좀 더 극단적이다. '백색질병'이 엄습하여 모든 사람들의 눈이 멀어 버리고 그중에 단 한사람, 의사의 아내만이 눈이 보인다. 당연히 세상은 결국 눈먼 사람들의 것이 되어 버리고, 눈먼 자들의 세계는 '누구도 볼 수 없다'라는 인식이 지배하면서 인간이 그간 마땅히 그리해야 된다고 믿어왔던 도덕과 가치와 양식들은 힘을 잃어버리고 만다. '인간'으로서 누려왔던 존엄은 이제 먼 과거의 일이 되었고, 그저 먹고 살아가기 위해 그들은 각 '개인'으로서 고립된 채 모였다가 흩어지기를 반복한다. 빛과 어둠이 명멸하는 세상에서 은밀히 자리하고 있던 인간의 어두운 측면이 오직 하얗게만 보이는 세상에서 더욱 적나라하게 드러나면서 이제 더 이상, 빨간불이 어쩌고 파란불이 저쩌고 따위는 누구도 신경 쓰지 않게 된 셈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모든 사람들이 눈이 멀었으며, 유독 의사의 아내만은 어떻게 그 백색질병을 피할 수 있었을까. 당연히 가질 법한 의문이지만, 이 책은 그 점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설명하지는 않는다. 다만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 비로소 남김없이 드러나는 인간의 어두운 면모에도 불구하고, 끝내 거기에 함몰되지 않고 인간의 존엄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의사의 아내의 의식과 행동을 통해 저자는 '눈이 먼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를 새롭게 환기시킬 뿐이다. 눈이 먼 자들을 무자비하게 격리시키는 당국의 비인도적 태도와, 격리된 곳에서 벌어지는 인간의 잔인하고 추악한 행태, 마침내 혼돈이 되어버리는 눈먼 자들의 도시의 참혹한 상황 속에서도 의사의 아내만은 여전히 눈먼 자들에 대한 인간적인 애정의 손길을 결코 놓으려 하지 않고, 그것은 물리적인 의미에서 '눈이 보인다'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는, 즉 인간적 가치를 여전히 '지닌다(본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한편, 의사의 아내가 시종일관 '보려 함'으로 인해 '보지 않는' 세상의 참상을 고발하는 관찰자라면, 검은 색안경을 쓴 여자는 '보지 않는' 세상을 경험하며 마침내 '눈을 뜨는' 흥미로운 존재다. 그녀는 남자를 상대로 몸을 파는, 도덕적으로 결함이 있는(적어도 책속에서는 그렇게 묘사된다) 여자이지만 그녀가 볼 수 없게 된 때부터, 엄마와 떨어지게 된 사팔뜨기 소년을 계속해서 돌봐준다거나, 소년에게 자신의 먹을 몫을 나누어준다거나, 자신의 부모님을 진심으로 걱정하는 등 눈이 보일 때의 그녀와 사뭇 다른 면모를 보여준다. 특히 검은 안대를 한 노인을 어떤 외적인 가치와는 상관없이, 단지 그 존재 자체로 사랑하는 모습은 그녀의 눈을 가리고 있던 안대를 비로소 벗게 되는(물리적인 의미가 아니라) 상징적인 장면처럼 보인다(또한 그 순간은 그녀의 외면만 보고 어떤 편견에 사로잡혔던 독자들의 눈을 뜨게 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그것은 일종의 '성장'의 순간이며, 그렇기에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 벌어지는 절망은 희망을 잉태하기 위한 필수불가결한 과정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역설적이게도, 보이는 세상에서는 끝내 우리가 눈을 뜰 수 없을 테니까. 

'인간'이라면 마땅히 지니어야 한다고 믿어지는 가치들의 나약함은 주제 사라마구의 대담한 상상력이 빚어낸 '하얀 세상'에서 거침없이 발가벗겨지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저자는 "자기 자신을 잃지 말라."는 격려와 함께 여전히 희망이 존재함을, 그러므로 그 희망의 손을 부여잡아야 함을 역설한다. 그리하여 절망과 희망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독자에게 되묻는다. 의사의 아내가 보여주는, 타인의 고통에 대해 손을 내밀어 줄 수 있는 따뜻하고 연민어린 시선이 없다면, 혹은 검은 색안경을 쓴 여자가 말하는 "우리 내부에 있는 이름이 없는 뭔가"를 제대로 볼 수 없다면, 과연 그러고도 우리가 눈을 뜨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인지를. 그 질문에 대답하기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눈먼 자들의 도시'는 환상이 아니라 실제에 다름 아니며, '만물의 영장'으로 대변되는 '인간'에 대한 막연하고 오만한 믿음이야말로 오직 환상으로 남을 뿐이다. 타인의 슬픔과 인간의 존엄을 위해 흘릴 '눈물'의 의미를 잃어버린 '눈먼 인간'을 더 이상 '눈물을 핥는 개'가 따를 이유는 없고, 그렇다면 다만 생존을 위해 경쟁할 뿐인 '눈먼 인간'과 '개'의 근본적인 차이란 그리 쉽게 정의될 수 없을 테니까. 

가장 심하게 눈이 먼 사람은 보이는 것을 보고 싶어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말은 위대한 진리예요. 나는 보고 싶어요, 검은 색안경을 썼던 여자가 말했다. (p419) 

나는 우리가 눈이 멀었다가 다시 보게 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나는 우리가 처음부터 눈이 멀었고, 지금도 눈이 멀었다고 생각해요. 눈은 멀었지만 본다는 건가. 볼 수는 있지만 보지 않는 눈먼 사람들이라는 거죠. (p4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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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 고도를 걷는 즐거움 - 이재호의 경주 문화 길잡이 33 걷는 즐거움
이재호 지음 / 한겨레출판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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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사람의 뇌도 컴퓨터처럼 '검색' 기능의 활용이 가능하다면, '경주'라는 키워드로 내 뇌를 검색해보면 제법 많은 기록들이 딸려나올 것임에 틀림없다. 몇 번의 수학여행 중 경주는 언제나 필수코스였고, 가끔은 경주와 인근한 지역에 사는 덕분에 소풍으로 경주에 가기도 했으며, 더러는 경주를 꽤 좋아했던 외삼촌의 손에 이끌려 일없이 따라가 보기도 했으며, 드물게는 가족과 함께 경주를 찾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그러한 많은 단편적인 기록들은 다만 '경주에 가 보았다'는 사실만을 되풀이해서 보여줄 뿐, 정작 경주에 가서 무엇을, 어떻게, 도대체 무슨 마음으로 본 것인지는 전혀 설명해주지 못한다. 그러니까 <천년고도를 걷는 즐거움>이라는 꽤 감상적인 제목의 이 책을 집어든 것은, 익숙한 듯하면서도 실은 낯설기만 한 '경주'의 진면목이 문득 궁금해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적어도 내가 생각하기에 이 책은 그다지 친절한 책은 아니었다. 천년고도였던 경주를 사랑하고, 우리 문화재를 아끼며, 우리 문화에 대한 자부심이 가득한 저자의 마음은 충분히 짐작이 가고도 남음이 있었지만, 정작 '천년고도를 걷는 즐거움'은 온전히 그의 것인 것처럼만 여겨졌다. 무례함을 무릅쓰고 좀 더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저자가 경주의 이곳저곳을 자신의 두발로 걸어 다니며 "아! 숨이 막힌다.(p36)"라거나, 혹은 "아! 달빛 부서지는 밤이여.(p41)"라거나, 또는 "아! 인생은 연극이고 사랑은 예술이라 했던가.(p50)"하고 감탄성을 발할 때, 나는 "아! 그렇구나."하고 동조를 표하기는커녕 저자의 신출귀몰한 감정선을 차마 따라잡지 못하고 이렇게 투덜거렸다. "아! 뭥미"

저자의 감정선을 따라잡기 어려웠던 데에는 내 무식함이 단단히 한몫을 했겠지만, (감히 말하자면) 저자의 글이 꽤 중구난방 식이고, 더욱이 비문(非文)이 더러 섞여 있어서 책을 읽어가기가 그리 용이하지 않았기 때문인 측면도 없지 않았다. 물론 주어가 생략되었다거나 혹은 주어와 서술어의 호응관계가 맞지 않는 등의 비문쯤이야 대수롭지 않게 여길 수도 있지만, 이 얘기를 하는 듯하다가 갑자기 저 얘기를 하고, 그러다가 어느 순간 또 이 얘기로 돌아와 "아!"하면서 감탄을 하면, 나는 한숨을 내쉬고 "아! 환장 하겠네"라고 말하는 것 외에는 달리 도리가 없었다. 그것은 말하자면, 천년고도를 홀로 즐기는 사람을 그저 바라만 보아야 하는 이의 당혹스러움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저자의 즐거움 속에는 내가 함께 즐길 여지가 결코 많지 않았다. 

그러나 책을 덮을 때가 다가올수록 사정은 좀 나아졌다. 저자의 문체에 익숙해진 탓도 있고, 정작 내 고장에 있으면서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반구대 암각화나, 혹은 비교적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양동마을과 옥산서원에 대해 새삼스런 흥미가 생긴 덕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차를 타고 후닥닥 백 번 보는 것보다 많은 시간을 들여 한 번 걸으면서 느끼는 게 낫다는 저자의 조언이 그의 진정어린 발걸음과 더불어 가슴에 조금씩 와 닿았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천년고도를 걷는 즐거움을 홀로 누리는 사람을 보는 당혹감으로 불만스러웠다면, 오히려 나중에는 아이러니하게도 천년고도의 즐거움은 오직 직접 천년고도를 걸은 그 사람만이 홀로 누려야 마땅하다는 단순명쾌한 사실이 뒤늦게 머리를 때린 것이다. 뭐, 물론 그렇다고 해도 저자의 글이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는 점에는 변함이 없었지만(이건 취향의 문제라고 해도 좋다).

어쨌거나 본래 의도라면, 언젠가 경주를 작심하고 찾게 된다면 이 책을 들고 갈 요량으로 이 책을 읽은 것인데, 이제는 경주에 가게 되더라도 굳이 이 책을 들고 갈 필요는 없을 듯하다. 앞서 말했듯, 이 책은 별로 친절한 책이라고는 생각되지 않기 때문에. 하지만 적어도, 다음과 같은 저자의 조언은 경주로 떠나기 전에 반드시 가슴 속에 새겨둘 필요가 있을 것이다. 저자가 누리는 '천년고도의 즐거움'이 어디에서 비롯되는지를 명확하게 알려주는 금언으로도 손색이 없을 뿐더러, 내가 경주에 꽤 자주 가보고도 그리 대단한 느낌을 받지 못한 이유가 또한 여기에 있을 테니까.

문화유적을 감상할 때도 많은 시간을 들여 걸으면서 느끼고 보면서 감동받기보다 차로 쏙 들어가서 빨리 후닥닥 보는 것을 선호한다. 이렇게 백 번 보아도 한 번 걸어서 간 것보다 못하다. 무수히 유적지를 다녀본 내 경험으로 볼 때, 같은 곳이라도 차를 타고 급히 본 것은 수십 번 갔다 와도 나중에 기억이 나지 않는데, 한 번 걸어서 갔던 곳은 10년이 지나고 20년이 지나도 어제의 일처럼 생생하게 느껴지고 가슴 찡한 그리움이 아련히 파고든다. (p281~2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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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란 무엇인가
레너드 코페트 지음, 이종남 옮김 / 민음인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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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 한국과 일본의 WBC 결승전 중계방송을 보기 위해 내가 느지막이 TV를 틀었을 때, 옆에서 한국이 경기 종반까지 1대3으로 지고 있는 것을 확인한 엄마는 이제 일본에 진거냐고 내게 물었다. 나는 '야구는 9회말 투아웃부터'라는 야구계의 격언을 그대로 읊어 주고 아직은 모르는 일이라고 덧붙였었지만, 엄마가 내 말을 이해하기를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잠시 후, 한국의 8회말 공격에서 선두타자가 2루타를 치고 나갔다. 나는 갑자기 흥이 올라 TV화면을 손으로 짚어가며 투수가 공을 던지면 타자는 그 공을 치고, 진루한 주자가 홈으로 돌아오면 점수가 나는 거야, 하는 둥의 설명을 엄마에게 하다가는, 이내 관두어 버리고 말았다. 이야기를 하면 할수록 이야기할 게 많아지는 '야구'에 대해서 나는 도저히 엄마에게 설명할 재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행히도, 반세기가 넘도록 야구에 대해 별 관심이 없었던 엄마 역시 더는 내게 묻지 않았다. 대체 '야구'를 무어라 설명해야 좋단 말인가.

내가 아는 한 야구에 대한 가장 짧은 정의는 '야구는 공놀이다.'라는 것인데, 이 간단명료해서 심지어 철학적으로 보이기도 하는 정의는, 그러나 오직 '야구'만이 지닌 특성에 대해서는 전혀 설명하지 못한다는 결정적 한계를 지니고 있다. 실상 '공'을 가지고 하는 거의 모든 스포츠가 '공놀이'라고 불려도 전혀 문제될 게 없기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야구의 특징을 좀 더 드러내 줄 수 있는 정의로는 '야구는 던지고 치고 달리는 스포츠다.'를 들 수도 있겠는데, 야구의 역동적인 면만을 특히 부각한 이러한 정의는 보다 '정적인' 스포츠인 야구를 설명하는 데 아무래도 무리가 있다. 잘은 몰라도, 야구는 던지기 직전, 치기 직전, 그리고 뛰기 직전이 훨씬 더 긴장되고 재미있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얼핏 들으면, '던지고 치고 달리는 스포츠다'라는 것은 흡사 미국 프로 레슬링을 연상케 하기도 한다.

이쯤에서 인정해야 할 것은, 야구가 결코 쉽게 설명하고 이해할 수 있는 스포츠는 아니라는 사실일 것이다. 야구는 단순하게 공을 빠르게 던져서 될 것도 아니고, 그저 힘차게 배트를 휘두른다고만 되는 것도 아니며, 무작정 바람같이 달린다고 되는 것도 아닌 스포츠다(물론, 기본적으로는 공을 빨리 던질 수 있고, 배트를 힘차게 휘두를 수 있으며, 빨리 달릴 수 있다면 나쁠 리 없다). 또한, 비록 '공'을 가지고 하는 스포츠이기는 해도 당연히 그저 '공놀이'일리도 만무하다(물론, 종종 어떤 상징적 의미로 그저 '공놀이'라고 부를 수는 있겠지만). 던지고 치고 뛰기 전에 헤아려야 하는 점들이 수없이 많고, 따라서 공이 없는 곳에도 항시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것이 바로 야구다. 요컨대, 야구란 결코 한 마디 말로 정의되거나 혹은 손쉽게 설명될 수 없는, 알아야 할 것이 꽤나 많은 복잡다단한 스포츠라는 것이다.

<야구란 무엇인가>는 이렇듯 간단치 않은 야구를 압도적인 스펙트럼으로 펼쳐 보이는 책이다. 잠깐 목차를 그대로 옮기자면, 타격, 피칭, 수비, 베이스러닝, 감독, 사인, 벤치, 지명타자, 심판원, 구장 등을 다룬 1부 '야구의 현장'부터 미디어, 원정 경기, 프런트, 스카우트, 통계, 기록, 구단주, 선수노조, 커미셔너, 에이전트 등을 다룬 2부 '막후에서 벌어지는 일', 그리고 동계 훈련, 포스트 시즌, 타격 실종, 가장 위대한 투수, 명예의 전당, 구단 증설, 공과 배트, 규칙의 변천, 장래의 야구상 등을 다룬 3부 '위대한 야구'까지, 이 책은 '야구'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요소들을 총망라해서 언급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위에서 나열한 어떤 요소도 허투루 다루는 법이 없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말해서, 이 책은 '야구의 모든 것(이때의 '야구'는 물론 '미국야구'를 가리킨다)'을 거의 '완벽하게' 다루고 있다고 해도 그리 과언이 아닌 셈이다.

그러나 이 책이 다루는 '야구'는 단순한 역사적인 사실이나 맹목적인 설명과는 거리가 있다. 수십 년 동안 야구 현장을 누빈 야구기자 출신의 저자는 야구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들 속에서 '실상'과 '허상'을 밝혀내는 데 주력하고, 이를 통해 궁극적으로는 야구팬들이 '야구'를 보다 폭넓고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다. 가령, 타격에서 마주하는 두려움이나 인조잔디 구장의 효과 그리고 구단 증설에 따른 변화 등이 야구팬들이 간과하는 '실상'이라면, 감독의 역할이나 커미셔너의 절대적 권력 그리고 통계의 효능은 야구팬들이 맹신하는 '허상'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모든 것을 오직 '실상'과 '허상'이라는 극단적인 이분법으로 구분할 수는 없겠지만, 저자는 보통의 야구팬이 지나치거나 오해하기 쉬운 것들을 예리하게 파헤치는 한편, 깊은 통찰력과 풍부한 실제 사례를 통해 그 의미를 명료하게 해석해낸다. 그리고 이로써, 독자는 지금껏 알던 '야구'와는 다른, 전혀 '새로운' 야구와 맞닥뜨릴 수 있게 된다. 즉, 이전에는 무심코 넘겼을 야구의 구석구석이 비로소 시야에 가득 들어오게 된다는 의미다.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야구의 모든 것'을 다루는 방대한 분량에 걸맞게 유용하고 흥미로운 내용이 가득한 이 책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을 단 하나만 꼽으라면, 그것은 단연코 저자의 지극한 '야구사랑'이 아닐까 싶다. 야구에 관한 책을 쓰는 저자에게서 야구에 대한 애정이 느껴진다는 건 물론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지만, 야구에 대한 날카롭고 탁월한 분석과 통찰력을 자랑하는 저자가 한편으로는 그저 막연한 낙관만이 넘쳐흐르는 동계 훈련을 예찬하고, 야구의 화려한 역동성만을 특히 주목하는 텔레비전에 의해 "유유히 진행되면서 서서히 긴장이 고무되는 야구 특유의 리듬"이 가리어지는 것을 염려하며, 심지어 야구를 단순한 스포츠가 아닌 하나의 '예술'로 대하는 모습에는, 오랜 세월 동안 한결같이 함께 해온 야구에 대한 지극한 애정이 담뿍 담겨있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모르긴 몰라도, 복잡다단한 '야구'에 대해 이야기하는 이 책이 전혀 어렵지 않고, 그저 즐겁고 흥미로울 수 있는 근본적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으리라.

그러고 보면 내가 엄마에게 야구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금세 그만둔 건, 내게 야구에 대한 애정이 부족했기 때문이라는 게 유일한 이유인지도 모르겠다. 야구의 매력 중의 하나가 바로 풍부한 이야깃거리로 가득하다는 것이고, 그러므로 야구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건 결국 야구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야구를 즐기는 일임을 인정한다면 말이다. 자, 그러니까 당신이 만약 야구팬이라면, 야구에 대한 해박한 식견과 인생에 대한 풍부한 은유로 가득한, 그러나 무엇보다도 야구를 사랑하는 한 야구팬의 "가장 완벽한 야구 예찬서"인 이 책을 읽고, 당장 야구 이야기를 시작해 보기로 하자. 이 모든 게, 다만 야구를 사랑하고 즐기는 일에 다름없으니까(아, 근데 난 축구팬이었지 참!).

다음은 필자가 지금까지 한 말 중에서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다. 빌 스턴이 라디오 토크쇼에서 부린 익살 한 토막.
임종 직전의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이 애브너 더블데이 장군을 불렀다.
"여보게, 야구를 꼭 살리게. 이 나라에선 언젠가 그게 필요하게 될 거야."
필자는 누군가가 야구 당국 관계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해 주었으면 싶다.
"야구 이야기가 끊이지 않게 하시게. 언젠가 필요하게 될 게 아니고 매일, 지금 당장 필요한 거니까."
자, 우리끼리도 지금 당장 야구 이야기를 시작해 보자. (p612-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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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0-02-19 1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프로야구 개막 카운트다운에 해가 뜨고 지는 2월입니다!
야구 관련 도서를 즐겨 읽으시는 분들을 찾아다니다 들어왔습니다.:)
찌질하고 부조리한 삶은 이제 모두 삼진 아웃! 국내최초의 문인야구단 구인회에서 우익수로 뛰고 있는 박상 작가가 야구장편소설 <말이 되냐>로 야구무한애정선언을 시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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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시작되겠죠. 야구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