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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란 무엇인가
레너드 코페트 지음, 이종남 옮김 / 민음인 / 2009년 2월
평점 :
지난 3월, 한국과 일본의 WBC 결승전 중계방송을 보기 위해 내가 느지막이 TV를 틀었을 때, 옆에서 한국이 경기 종반까지 1대3으로 지고 있는 것을 확인한 엄마는 이제 일본에 진거냐고 내게 물었다. 나는 '야구는 9회말 투아웃부터'라는 야구계의 격언을 그대로 읊어 주고 아직은 모르는 일이라고 덧붙였었지만, 엄마가 내 말을 이해하기를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잠시 후, 한국의 8회말 공격에서 선두타자가 2루타를 치고 나갔다. 나는 갑자기 흥이 올라 TV화면을 손으로 짚어가며 투수가 공을 던지면 타자는 그 공을 치고, 진루한 주자가 홈으로 돌아오면 점수가 나는 거야, 하는 둥의 설명을 엄마에게 하다가는, 이내 관두어 버리고 말았다. 이야기를 하면 할수록 이야기할 게 많아지는 '야구'에 대해서 나는 도저히 엄마에게 설명할 재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행히도, 반세기가 넘도록 야구에 대해 별 관심이 없었던 엄마 역시 더는 내게 묻지 않았다. 대체 '야구'를 무어라 설명해야 좋단 말인가.
내가 아는 한 야구에 대한 가장 짧은 정의는 '야구는 공놀이다.'라는 것인데, 이 간단명료해서 심지어 철학적으로 보이기도 하는 정의는, 그러나 오직 '야구'만이 지닌 특성에 대해서는 전혀 설명하지 못한다는 결정적 한계를 지니고 있다. 실상 '공'을 가지고 하는 거의 모든 스포츠가 '공놀이'라고 불려도 전혀 문제될 게 없기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야구의 특징을 좀 더 드러내 줄 수 있는 정의로는 '야구는 던지고 치고 달리는 스포츠다.'를 들 수도 있겠는데, 야구의 역동적인 면만을 특히 부각한 이러한 정의는 보다 '정적인' 스포츠인 야구를 설명하는 데 아무래도 무리가 있다. 잘은 몰라도, 야구는 던지기 직전, 치기 직전, 그리고 뛰기 직전이 훨씬 더 긴장되고 재미있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얼핏 들으면, '던지고 치고 달리는 스포츠다'라는 것은 흡사 미국 프로 레슬링을 연상케 하기도 한다.
이쯤에서 인정해야 할 것은, 야구가 결코 쉽게 설명하고 이해할 수 있는 스포츠는 아니라는 사실일 것이다. 야구는 단순하게 공을 빠르게 던져서 될 것도 아니고, 그저 힘차게 배트를 휘두른다고만 되는 것도 아니며, 무작정 바람같이 달린다고 되는 것도 아닌 스포츠다(물론, 기본적으로는 공을 빨리 던질 수 있고, 배트를 힘차게 휘두를 수 있으며, 빨리 달릴 수 있다면 나쁠 리 없다). 또한, 비록 '공'을 가지고 하는 스포츠이기는 해도 당연히 그저 '공놀이'일리도 만무하다(물론, 종종 어떤 상징적 의미로 그저 '공놀이'라고 부를 수는 있겠지만). 던지고 치고 뛰기 전에 헤아려야 하는 점들이 수없이 많고, 따라서 공이 없는 곳에도 항시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것이 바로 야구다. 요컨대, 야구란 결코 한 마디 말로 정의되거나 혹은 손쉽게 설명될 수 없는, 알아야 할 것이 꽤나 많은 복잡다단한 스포츠라는 것이다.
<야구란 무엇인가>는 이렇듯 간단치 않은 야구를 압도적인 스펙트럼으로 펼쳐 보이는 책이다. 잠깐 목차를 그대로 옮기자면, 타격, 피칭, 수비, 베이스러닝, 감독, 사인, 벤치, 지명타자, 심판원, 구장 등을 다룬 1부 '야구의 현장'부터 미디어, 원정 경기, 프런트, 스카우트, 통계, 기록, 구단주, 선수노조, 커미셔너, 에이전트 등을 다룬 2부 '막후에서 벌어지는 일', 그리고 동계 훈련, 포스트 시즌, 타격 실종, 가장 위대한 투수, 명예의 전당, 구단 증설, 공과 배트, 규칙의 변천, 장래의 야구상 등을 다룬 3부 '위대한 야구'까지, 이 책은 '야구'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요소들을 총망라해서 언급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위에서 나열한 어떤 요소도 허투루 다루는 법이 없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말해서, 이 책은 '야구의 모든 것(이때의 '야구'는 물론 '미국야구'를 가리킨다)'을 거의 '완벽하게' 다루고 있다고 해도 그리 과언이 아닌 셈이다.
그러나 이 책이 다루는 '야구'는 단순한 역사적인 사실이나 맹목적인 설명과는 거리가 있다. 수십 년 동안 야구 현장을 누빈 야구기자 출신의 저자는 야구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들 속에서 '실상'과 '허상'을 밝혀내는 데 주력하고, 이를 통해 궁극적으로는 야구팬들이 '야구'를 보다 폭넓고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다. 가령, 타격에서 마주하는 두려움이나 인조잔디 구장의 효과 그리고 구단 증설에 따른 변화 등이 야구팬들이 간과하는 '실상'이라면, 감독의 역할이나 커미셔너의 절대적 권력 그리고 통계의 효능은 야구팬들이 맹신하는 '허상'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모든 것을 오직 '실상'과 '허상'이라는 극단적인 이분법으로 구분할 수는 없겠지만, 저자는 보통의 야구팬이 지나치거나 오해하기 쉬운 것들을 예리하게 파헤치는 한편, 깊은 통찰력과 풍부한 실제 사례를 통해 그 의미를 명료하게 해석해낸다. 그리고 이로써, 독자는 지금껏 알던 '야구'와는 다른, 전혀 '새로운' 야구와 맞닥뜨릴 수 있게 된다. 즉, 이전에는 무심코 넘겼을 야구의 구석구석이 비로소 시야에 가득 들어오게 된다는 의미다.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야구의 모든 것'을 다루는 방대한 분량에 걸맞게 유용하고 흥미로운 내용이 가득한 이 책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을 단 하나만 꼽으라면, 그것은 단연코 저자의 지극한 '야구사랑'이 아닐까 싶다. 야구에 관한 책을 쓰는 저자에게서 야구에 대한 애정이 느껴진다는 건 물론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지만, 야구에 대한 날카롭고 탁월한 분석과 통찰력을 자랑하는 저자가 한편으로는 그저 막연한 낙관만이 넘쳐흐르는 동계 훈련을 예찬하고, 야구의 화려한 역동성만을 특히 주목하는 텔레비전에 의해 "유유히 진행되면서 서서히 긴장이 고무되는 야구 특유의 리듬"이 가리어지는 것을 염려하며, 심지어 야구를 단순한 스포츠가 아닌 하나의 '예술'로 대하는 모습에는, 오랜 세월 동안 한결같이 함께 해온 야구에 대한 지극한 애정이 담뿍 담겨있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모르긴 몰라도, 복잡다단한 '야구'에 대해 이야기하는 이 책이 전혀 어렵지 않고, 그저 즐겁고 흥미로울 수 있는 근본적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으리라.
그러고 보면 내가 엄마에게 야구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금세 그만둔 건, 내게 야구에 대한 애정이 부족했기 때문이라는 게 유일한 이유인지도 모르겠다. 야구의 매력 중의 하나가 바로 풍부한 이야깃거리로 가득하다는 것이고, 그러므로 야구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건 결국 야구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야구를 즐기는 일임을 인정한다면 말이다. 자, 그러니까 당신이 만약 야구팬이라면, 야구에 대한 해박한 식견과 인생에 대한 풍부한 은유로 가득한, 그러나 무엇보다도 야구를 사랑하는 한 야구팬의 "가장 완벽한 야구 예찬서"인 이 책을 읽고, 당장 야구 이야기를 시작해 보기로 하자. 이 모든 게, 다만 야구를 사랑하고 즐기는 일에 다름없으니까(아, 근데 난 축구팬이었지 참!).
다음은 필자가 지금까지 한 말 중에서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다. 빌 스턴이 라디오 토크쇼에서 부린 익살 한 토막.
임종 직전의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이 애브너 더블데이 장군을 불렀다.
"여보게, 야구를 꼭 살리게. 이 나라에선 언젠가 그게 필요하게 될 거야."
필자는 누군가가 야구 당국 관계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해 주었으면 싶다.
"야구 이야기가 끊이지 않게 하시게. 언젠가 필요하게 될 게 아니고 매일, 지금 당장 필요한 거니까."
자, 우리끼리도 지금 당장 야구 이야기를 시작해 보자. (p612-6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