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수학자 모두는 약간 미친 겁니다 - 수학자 폴 에어디쉬의 삶
폴 호프만 지음, 신현용 옮김 / 승산 / 199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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헝가리 출신의 수학자 폴 에어디쉬의 생애에 대해 간략하게 말하면 다음과 같다ㅡ폴 에어디쉬는 1913년에 도착해서 누구에게도 포획되지 않았고, 당연한 귀결로 해방된 적도 엡실런을 둔 적도 없었다. 그리고 그의 두뇌는 상대를 가리지 않고 거의 언제나 열려진 채 'SF(독재자)의 책에 있는 바로 그것'을 알고자 했으며, 무엇보다도 그는 결코 사망을 맞지 않고서 1996년 떠났다.

그러니까, 도대체 무슨 소리인지 이해하기가 어렵다면 일단 안심해도 좋다. 위에서 알듯 모를 듯한 표현들은 에어디쉬가 즐겨 사용한 표현들을 이용한 것인데(가령, 수학에서 지극히 작은 숫자를 의미하는 엡실런은 아이를, 두목과 사망은 각각 아내(혹은 남편)과 수학을 그만두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표현들은 못 알아듣는 게 너무도 당연하다. 이건 단순히 익숙지 않은 단어의 사용이 문제가 아니다. 좀 더 분명히 하기 위해 책에 언급된 발언을 인용하자면, 에어디쉬와 공동연구를 한 바 있는 수학자 해롤드 데이븐 포트의 미망인은 남편과 에어디쉬의 기괴한 대화 장면을 회고하며 이렇게 말한다. "두 사람 주위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그들이 미쳤다고 생각했을 거예요. 물론 그들은 미쳤지요." 미친 사람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건, 명백하게도 다행스러운 일이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만, 대개의 수학자들이 아마도 조금쯤 미친거라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1과 자신을 제외하고는 어떻게도 나누어 떨어지지 않는 '소수'를 찾기 위해 수십만, 수백만 자릿수를 헤매고 다니는 그들을 보라. 2를 3,021,377제곱하여 얻은 수에서 1을 뺀 수가 '소수'인데 대체 어쩌란 말인지. 설마하니 하필이면 딱 그 수만큼의 빵이 있다면 결코 한 사람 당 하나씩 외에는 달리 나누어줄 방법이 없을까봐 미리 걱정이라도 할 참이란 말인가! 수백 년 동안 풀리지 않았던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는 또 어떤가. "일반적으로 2보다 큰 어떤 거듭 제곱도 두 개의 같은 거듭 제곱의 합으로 나타낼 수 없다."는 것을 대관절 왜 증명해야 하는가. 유일한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오직 수학자들이 조금 미쳤기 때문일 것이다. 미친 사람이 하는 일에는 별다른 이유가 필요 없는 법이니까 말이다.

하지만 책 속의 소제목에서 가져온 '우리 수학자 모두는 약간 미친 겁니다'라는 다소 도발적인 이 책의 원제가 실은 '숫자만 사랑한 남자(The Man Who Loved Only Numbers)'라는 건 당연한 귀결이다. 이 책은 약간 미친 수학자들 중에서도 유별난, 그러나 또한 그만큼 뛰어난 수학자였던 폴 에어디쉬의 생애를 주로 좇으면서 그와 관련된 (미친) 수학자들 그리고 그들이 다룬 (미친) 수학적 문제들도 아울러 언급하는데, 놀랍게도 이러한 (미친) 이야기들은 종종 재미있고 또 경이적이다. 가령, 콜럼비아 대학의 프랭크 넬슨 콜이 1903년, 지난 250여 년 동안 일반적으로 소수로 믿어져왔던, 2의 67거듭 제곱에서 1을 뺀 수가 193,707,721과 761,838,257,287의 곱으로 나타내짐을 담담히 칠판에 쓴 일화에서는 나도 모르게 '브라보'를 외치고 싶었고, 미친 짓처럼만 보였던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가 마침내 증명되는 역사적 과정도 대단히 흥미진진했다. 만약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가 끝내 증명이 되지 않았다면, 나라도 그 정리를 풀기 위해 이제라도 수학에 투신하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였다(라는 건 조금 뻥이지만, 파울 볼프슈켈이라는 사람은 연인에게 실연을 당하고 자살을 생각했다가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를 접하고는 흥미를 느껴 그 문제를 푸는 사람에게 상당한 금액의 상금을 걸었다고 한다).

"미쳐야 미친다."는 표현은 수학자들에게 특히 유효하다. 책 속에서 폴 에어디쉬가 말하듯이, 무엇보다도 수학자들은 "무한과 맞서서 싸우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이유로 종종 그들이 하는 일들은 일상생활과는 더욱 더 멀어지며 그저 미친 짓으로 보이는 듯도 하지만, 또한 그런 이유로 그들은 숫자를 더욱 더 사랑한다. 이 책은 그렇듯 숫자를 사랑하여 미친 사람들의 세계를 따뜻하고 세심하며 또한 유머러스하게 담아내었으며, 수학적 주제에 대한 친절한 설명으로(그럼에도 여전히 어려운 내용도 있지만, 그런 건 대충 넘어가도 별로 문제될 건 없다) 독자들이 그 세계의 매력을 함께 느낄 수 있도록 돕는다. 그러니까 이제와서 하는 말이지만, 그러한 진지함과 치열함이 있는 한 미치는 것은 분명 자부심을 가질 만한 일인 것이다.

A graduate student at Trinity    트리니티 대학의 한 대학원생이
Computed the square of infinity    무한의 제곱을 계산해 보았네
But it gave him the fidgits    그러나 그 숫자를 써나가다가
To put down the digits,    그만 현기증이 나버려서 그는
So he dropped math and took up divinity    수학을 그만두고 신학을 하게 되었네

ㅡAnonymous   (p2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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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 세트 - 전3권
아고타 크리스토프 지음, 용경식 옮김 / 까치 / 199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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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종 TV의 고발 프로그램이나 뉴스에서는 마치 인간성이 상실된 듯한, 난폭하고 잔인하며 무도한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를 접할 수 있다. 낮에는 마냥 좋은 남편이자 아들이었던 사람이 밤에 술을 마신 후 돌변하여 아내와 어머니를 폭행했다든지, 어느 10대가 강남에서 살기 위해 엄마와 누나가 집에 있을 때 후배를 시켜 집에 불을 지르게 했다든지, 아버지가 의붓딸 혹은 심지어 친딸을 성폭행했다든지 등등. 이런 일들은 물론 끔찍한 일들이지만, 대개의 경우 '나'와는 무관하다. 나의 일이 아닌 타인의 일이니 아무래도 좋다는 뜻이 아니라, 그 일들은 나로서는 감히 상상하기 어렵고 또 그래야 마땅한 일이라는 의미다. '나'의 도덕률(혹은 '나'가 모인 '우리'의 도덕률)로 재단할 때, 그런 일들은 영원히 일어나서는 안 되고 또 일어날 수도 없는 일이다. 하지만, 이건 명백한 '거짓말'이다. 결국 그 일들은 일어났다는 게 그 부인할 수 없는 증거다.

거짓말 하나 - '나'는 '나'가 아니다 

헝가리 태생의 작가인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3부작 소설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 중, 1부에 해당하는 '비밀노트'에서는 온갖 비밀들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쌍둥이인 루카스(Lucas)와 클라우스(Claus)가 함께 쓴 '비밀노트'에는 도둑질이나 폭력에서부터 살인과 방화에 이르기까지 모든 일들이 낱낱이 기록되고, 이는 그러한 일들이 '우리'에 의해 그대로 자행되었음을 뜻한다. 그들은 전쟁 통에 할머니 댁에 맡겨지면서 할머니의 온갖 폭언과 구박에 시달리고, 선과 악의 혼돈 상황 속으로 휘말려 들어간다. 그리고 이것은 다른 사람들이라고 하여 크게 다르지 않아서,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누구나 그 자신만의 '비밀노트'를 가지고 있다. 거기에는 일반적으로 용인되지 못하는 일들이 은밀히 숨겨져 있고, 작가는 이러한 비밀들을 감정을 배재한 채 지극히 담담하고 간결한, 그러나 대단히 매혹적인 문체로 풀어낸다.

물론 '우리'에 의해 자행된 반인륜적이기까지 한 일들은 '실제'가 아닐 수도 있다. 각각 2부와 3부에 해당하는 '타인의 증거'와 '50년간의 고독'을 통해 루카스와 클라우스의 기록들은 허구로 암시되기도 한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 일들이 특정한 누군가에 의해 실제로 행해졌느냐에만 있는 게 아니라, 그러한 은밀한 '비밀(혹은 욕망)'들이 '나'의 의식 속에 존재했다는 데에 있다. 추악한 비밀들을 그저 숨겨둔 채 겉으로만 달리 행세한다고 해서 겉으로 드러난 '나'만이 그대로 '나'가 되는 것은 아니다. 작가가 쌍둥이들을 작중 화자로 내세워 '우리'로 서술한 것은 어쩌면 이렇듯 의식 속에 감추어둔 비밀과 행동의 이중성을 의도하는 것처럼 느껴지고, 이를 통해 작가는 '나'라는 존재가 지닌 모순을 여지없이 폭로하는 듯하다.

거짓말 둘 - '너'는 '너'가 아니다 

2부인 '타인의 증거'에서는 유독 '타인'의 존재로부터 '나'의 존재를 증거 삼는 모습이 눈에 띈다. 이를테면, 불구의 몸을 지닌 소년은 잘 생긴 금발 소년의 모습으로부터 자신의 추악한 용모와 불구를 더욱 뚜렷이 인식하고, 서점 주인은 누나의 존재로 인해 자신이 글을 쓸 수 없다고 여기는 반면 누나는 자신의 희생이 모두 동생이 글을 쓸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루카스는 클라우스가 반드시 생존해있음을 강하게 주장하며, 클라라는 여전히 남편의 잔영을 떨치지 못한다. 그래서 1부와는 달리 2부에서는 모든 등장인물들이 비로소 각기 '이름'을 갖게 되지만, 이것은 '타인'으로서의 그들 각자를 의미하는 것이 아닌, 오히려 '나'의 실존을 규정짓는 하나의 표식이 되는 듯하다. 그리하여 심지어 서점 주인 빅토르는 죽음의 순간에 이르러 이렇게 묻는다. "내 누나의 시체 하나만으로는 부족해서 거기에 내 것까지 보태야 하는 건가? 하지만 누가 그 두 번째 시체를 원하는 거야?"

모든 생존과 죽음은 '나' 스스로의 의식과 결정으로만 비롯되지 않고, 이러한 실존적인 문제를 결정짓는 주체는 오히려 '타인'이다. 누군가의 애정을 갈구하며, 혹은 누군가를 끊임없이 증오하며, 혹은 누군가를 하염없이 기다리며, 또는 누군가에게 계속해서 말을 걸기를 원하며 '나'는 '타인'의 존재에 매달린다. '그들이', '그들은', '그들의', '그들을'. 유달리 굵은 글씨로 표시된 '그들'이라는 인칭대명사 속에는 '타인'의 존재에 대한 질식할 것만 같은 강박관념마저 느껴지며, 이러한 타인의 존재 속에서 독자는 문득 깨닫게 되는 듯하다. '너'는 그저 '타인'이 아니라 '나'를 규정하고 속박한다는 것을. 그것은 태생적으로 '나'와 구분되어야 할 '너'라는 존재가 지니는 모순처럼도 보인다. 요컨대, '너'는 그저 '너'가 아닌 셈이다.

거짓말 셋 - '나'는 '너'가 아니다 

3부인 '50년간의 고독'에 이르면 모든 것들이 뒤죽박죽이 되어 버린다. 분명하게 드러나는 듯했던 사실들은 모호해지고, 모호한 듯하던 것들이 도리어 사실처럼 밝혀지기도 한다. 거짓말들이 쌓이고 모순은 중첩되며, 와중에 의미는 풍성해진다. 하지만 굳이 하나의 단어로 3부를 이야기하자면, 내가 생각하기에 그것은 '단절'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3부에서는 드디어 '우리'가 아닌, 또한 3인칭의 어느 '이름'이 아닌 '나'(클라우스)가 화자가 되는데, 이러한 형식 자체가 이미 분화된 혹은 단절된 쌍둥이의 의식 상태를 의도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을 듯하다. 그리고 이 단절을 조금 확장하면, 결국 '나는 너가 아니다.'라는 문장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원제가 '세 번째 거짓말'인 3부에서 세 번째 거짓말은 '나는 너가 아니다.'라는 당연한 전제로부터 비롯된다. 가령, 병원에서 요양 중인 아이들에게 전해진 편지에는 부모의 따뜻한 애정이 충만해 있는 것 같지만, 클라우스가 다시 멋대로 바꾸어 읽어주는 편지에는 잔인하고 냉정한 말들이 가득하다. 아이들은 설령 거짓일지라도 따뜻한 애정을 갈구하지만, 내가 원하는 감정이 상대에 의해서도 똑같이 공유된다는 믿음은 근본적으로 거짓말을 야기한다. 마찬가지로, 평생 서로 함께 하기를 원했던 사라와 클라우스의 감정도, 루카스를 끊임없이 미화시키며 그리워하는 어머니의 감정도, 다시 함께 하기를 원하는 루카스의 바람도 그래서 진실과는 멀어진다. 이는 결국 '나'의 존재는 '너'의 존재와는 다른 까닭이며, 이러한 '단절'은 현실의 폐쇄성에도 불구하고 인쇄소에서 찍어내는 "우리는 자유다."라는 표어가 상징하듯, 이상과 현실 사이의 괴리에 관한 냉소적인 은유로도 읽힌다.

진실 하나 - 그것은 우리가 아는 사항이다

책 뒤에 수록된 '작가와 작품해설'에서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내 작품의 인물들이 체험하는 일들을 모두 내 자신의 일로 느낀다. 따라서 그들과 함께 슬픔에 빠지기도 하고 두려움에 떨기도 한다." 독자 또한 마찬가지다. 비록 그 체험들이 먼 이국의 역사적 배경 하에서 하나 같이 인간의 어두운 측면을 비추고 있는 것일지라도, 작품 속 인물들의 체험에 공감하기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은밀하게 자리한 추악한 비밀과 타인에 의해 강요되는 폭력과 근본적인 단절로 인한 고독 등, 인간의 존재가 초래한 그 어떤 일이든(혹은 그 어떤 거짓말이든), 그것은 결국 인간의 역사와 경험 속에서 이미 증명된 것에 다름 아니므로. 그리고, 그렇기에 그러한 체험이 '나'와는 무관한 일이라는 말이야말로 가장 터무니없는 '거짓말'이 되는 것이다.

헝가리가 1,2차 세계대전을 경험하기 훨씬 이전부터 존재했던 옛 마자르 격언에는 'Temetni tudunk'라는 말이 있다. 영어 단어 10개로도 완전한 번역이 어려운 이 말은 대체로 이렇게 번역된다고 한다. "사람을 어떻게 매장할까ㅡ그것은 우리가 아는 사항이다." 물론 되풀이된 헝가리의 폭력과 파괴의 역사 속에서 끌어올린 이 말의 의미를 명확히 이해하기란 어렵다. 하지만 전쟁을 배경으로 하면서 인간의 존재가 지닌 모순과 폭력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이 책을 이해하는 데에, 이 격언은 어쩐지 요긴할 것 같다. 그러니까 이 격언을 살짝 바꾸어서 이렇게도 말할 수 있겠다는 의미다. "인간이라는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ㅡ그것은 우리가 아는 사항이다." 설령 그 세 가지 거짓말이 얼마나 참혹하고 적나라한 것이든, 그것이 우리가 이미 아는 사실이라는 것만큼은 명백한 진실이 아닐까. 그 진실이 다행인지 불행인지는 아직 단언할 수 없을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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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 브라이슨 발칙한 미국 횡단기 - 세상에서 가장 황당한 미국 소도시 여행
빌 브라이슨 지음, 권상미 옮김 / 21세기북스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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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덜이 스퍼프가 마침내 스머프 마을을 떠나기로 한다고 해도, 그건 별로 놀랄 만한 일은 아니다. 이 스머프든 저 스머프든 죄다 엣지 없이 흰색 두건과 흰색 바지(?)를 착용하고 있다거나 혹은 모든 집들이 천편일률적으로 버섯 모양을 하고 있다는 것도 못 봐줄 노릇이지만, 특히 항상 가가멜과 아지라엘의 위협을 감내해야 하는 상황에도 불구하고 대책 없는 낙관과 평화가 넘쳐 흐르는 스머프 마을은 분명 투덜이 스머프가 마음에 쏙 들어할 마을은 아닌 탓이다. 좀 더 다채롭고 엣지 있는 패션과 창의적이고 다양한 집들이 넘쳐나고, 무엇보다도 적당한 흥밋거리와 자극이 있으면서 또한 풍요와 평화가 공존하는 마을을 찾으려는 투덜이 스머프의 여정은, 그러니까ㅡ어디까지나 가정이지만ㅡ당연한 귀결인 셈이다.

난데없이 투덜이 스머프의 여정을 가정해보는 데에는 사실 이유가 있다. 이 책 <빌 브라이슨 발칙한 미국 횡단기>는 제목 그대로 빌 브라이슨의 미국 여행을 다루고 있는데, 이 여정은 마치 '투덜이 스머프가 스머프 마을을 떠난다면?'하는 가정을 꼭 현실에 적용한 느낌이기 때문이다. "나는 아이오와 주 디모인 출신이다. 누군가는 그래야 했으니까."라는 첫 문장에서부터 고향마을에 대한 미묘한 불만을 감지하게 하는 빌 브라이슨은 성인이 되어 고향을 떠난 이후 다시 돌아와, 이른바 "재발견 여행"을 떠나며 모든 것이 완벽한 마을(일명 '모아빌')을 찾아 나선다. 물론, 이 여행은 그가 어린 시절의 가족여행으로부터 얻은 추억을 다시 돌아보는 의미도 있지만, 나비테 안경에 벌집 머리를 한 여자들과 '농부의 선탠'으로 표식을 삼는 남자들이 있는, 그리고 이상하리만치 평온하기만 한 아이오와와는 다른 이상적인 마을을 희구한다는 점에서 빌 브라이슨의 여행은 영락없이 투덜이 스머프의 여정을 연상시킨다.

투덜이 스머프, 아니 빌 브라이슨의 이 여행의 경과는 짐작할 만한 그대로다. 빌 브라이슨은 미국 대부분의 주를 차로 2만 2496킬로미터를 달리며 여행하지만, 그가 바라던 '완벽한 마을'은 발견되지 않는다. 오히려 이 여행에서 그가 지나치는 수많은 마을들은, 너무나 당연하게도(?) 그의 투덜거림의 대상이 되기 일쑤다. 마치 다른 나라의 언어를 쓰는 듯한, 독특한 억양과 발음을 구사하는 사람들과 불친절하기 그지없는 사람들이 풍자와 조롱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싸구려 관광지로 변하거나 지독하게 가난하거나 범죄가 넘쳐나는 도시들이 조소와 비난의 대상으로 언급된다. 그리고 그러한 와중에 그의 추억 속에서 아름답게 채색되었던 낭만과 즐거움과 매력 역시 종종 우중충한 회색빛으로 현현하기도 하지만, 빌 브라이슨은 결코 특유의 유머를 잃어버리는 법은 없다.

물론, 때로는 빌 브라이슨이 구사하는 유머가 지나치게 과격한 탓에 읽는 이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기도 한다. 그가 만나는 사람에 대한 인신공격에 가까운 언사들과 그가 둘러본 마을과 유적지 등에 대한 일방적이고 과장된 평가는 이 책의 객관성과 균형성을 의심하게 만든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빌 브라이슨의 무례함을 결국 웃음으로 받아줄 수 있는 건, 능글거리며 불평이나 토해내던 그가 갑자기 정색을 하는 순간이 있음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일 테다. 이를테면, 미국의 의료체계에 대한 강도 높은 힐난이나 인종차별에 반대한 '자유의 기수'들이 살해당한 사건에 대한 확고한 비판의식 등, 이러한 대목에서 빌 브라이슨의 진정성은 빛을 발한다. 그리고 이는 불평으로 일관하던 그가 자연의 순수한 경이로움과 잘 보전된 역사의 가치에 대해 찬탄을 발할 때도 마찬가지다.

설령 투덜이 스머프가 스머프 마을을 떠날지라도 그가 다시 돌아올 것을 확신할 수 있는 이유는, 불만 끝에 언제나 "하지만 아기 스머프는 좋아."라고 덧붙이던 투덜이 스머프의 말에서 아마도 따뜻함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빌 브라이슨의 여행 또한 그렇다. 비록 여전히 아이오와의 디모인은 결코 '완벽한 마을'은 아니지만 그가 길고 긴 여행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그를 진정어린 환대와 편안함으로 맞아준 건, 그가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던 그리고 그의 어머니와 고향집이 있는 아이오와의 디모인이었다. 물론 여전히 이곳은 나비테 안경에 벌집 머리를 한 여자가 있고 이상하리만치 평온한 분위기가 있는, 단조롭고 지루하기도 한 곳임을 빌 브라이슨은 잊지 않고 다시 한 번 지적하기는 하지만, 그리운 추억과 느긋한 평화가 넘쳐흐르는 이곳이야말로 그가 찾아 헤매던 마을이었음을 빌 브라이슨은 긴 여행 끝에 비로소 따뜻하게 자각한다. 그리고 기실, 이러한 따뜻함이야말로 거침없는 불평과 비판 뒤에 가리어진 빌 브라이슨의 진면목이며, 또한 이는 내가 빌 브라이슨의 글을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다만 아쉬운 점을 조금 말하자면, 이 책은 20년 전에 이미 발간된 것으로 이 책이 다루는 미국은 아무래도 오늘날의 미국과는 거리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점을 들 수 있겠다. 또 솔직히 개인적으로는, 빌 브라이슨의 다른 책들보다는 이 책이 흥미가 조금 덜하다고도 생각한다. 하지만 빌 브라이슨의 책들은 모두 일정 부분 조금씩 연결되어 있어서 그러한 부분들이 엮이는 재미가 있다. 가령, 이 책에서 빌 브라이슨은 인생을 살아가면서 할 수 없는 세 가지 일이 있음을 얘기하는데 그게 <빌 브라이슨 발칙한 미국학>에서 번복된다거나, 혹은 이 책에서 종종 회상되는 그의 가족 얘기가 <빌 브라이슨의 재밌는 세상>에서 구체화되는 식이다. 그러니까 빌 브라이슨의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이 책 역시 읽을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는 뜻이며, 적어도 내가 보기에 그건 꽤 환영할 만한 일이다. 어쨌거나 투덜이 스머프의 여행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지만, 빌 브라이슨의 이 여행은 가정이 아니니까 말이다. 게다가 투덜이 스머프의 여행보다는 역시 빌 브라이슨의 여행 쪽이 좀 더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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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둘레길 걷기여행
이혜영 지음 / 한국방송출판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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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둘레길'에 대해 처음 들었던 건 '제주 올레길'을 걷고 난 이후였다. 제주 올레길에 환호했던 나는, 곧 새로운 걷기여행의 명소가 될 가능성이 농후해 보이는 지리산 둘레길을 머릿속에 단단히 새겨 두었고, 그래서 <지리산 둘레길 걷기여행>이라는 이 책이 나왔을 때에는 적잖이 반가운 마음이 들었었다. 제주 올레와는 또 다른 매력으로 가득할 지리산 둘레길을, 과연 이 책은 어떻게 펼쳐낼지 무척이나 기대되고 궁금하였더랬다. 하지만 그렇게 적지 않은 기대로 집어든 이 책은, 솔직히 말해서 조금 아쉬웠다.

일단 이 책은 여러모로 준비를 많이 했다는 인상을 준다. "사람살이 땅살이 보듬은 산채비빔밥 같은 길"이라는, 지리산 둘레길에 대한 책표지의 수사처럼 책도 지리산길 위의 '사람살이'와 '땅살이'를 다양한 시각으로 접근해 버무려낸, 꼭 '산채비빔밥' 같은 느낌이다. 이를테면 길 위를 걷는 와중에 만난, 길 위에 사시는 분들의 삶이 조명되고, 지리산의 역사적 사실들이 언급되고, 지리산을 읊었던 문학작품이 인용되며, 또 지리산을 무대로 펼쳐졌던 비극을 되살려 내기도 하는 식이다. 물론, 지리산 둘레길을 걷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상세한 정보 역시 빠지지 않는다. 

그런데 지리산을 둘러싼, 이러한 많은 역사와 문학과 삶과 정보가 버무려지는 와중에 정작 '걷기여행의 즐거움'은 잘 느껴지지 않는 듯했다. '지리산 둘레길'의 매력에 조금씩 빠지려다가도 곧바로 언급되는, 만만치 않은 '무게'를 지닌 서술들에 경쾌한 발놀림은 이내 무거워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아무래도 이건 내가 지리산 둘레길을 아직 경험해보지 못한 탓인 듯도 하지만, 저자가 딛고 있는 공간을 내가 따라가기가 꽤 버거웠고, 당연히 그 공간을 배경으로 풀어내는 이야기들은 머릿속에서 생경하게 흩날리기 일쑤였다. 좀 더 경쾌하고 즐거운 '걷기여행'을 기대했던 내게, 이 책은 쉬이 읽히지만은 않았다.

그러나 저자가 "아픈 상처까지 불쑥 선물마냥 휙 던져주고는 내내 담담한" 지리산 둘레길을 걸으며, "'소문'의 굴레에 갇힌 길까지 고민하자니 여행자는 어렵다고 뒤통수만 긁적거린다."고 말할 때에는 속으로 뜨끔했음을 밝혀 두어야겠다. 즐거운 길을 걸으며 지나치게 무거운 주제(빨치산과 민간인 집단 학살, 제주 4. 3 등)에 유독 관심을 가지는 게 아닌가 하는 불만이 있었지만, "'역사의 기억'이라는 후대의 일차적인 의무론"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저자의 말에는 동의를 하지 않을 도리가 없을 것 같다. "오고가고, 기억하고, 묻다보면 언젠가 진실 또한 밝혀지겠지."라는 저자의 믿음 앞에서는, 어쩐지 이 책에 대한 아쉬움이 그저 내 탓인 듯 미안해진다.

4. 3을 기억하지 않아도 제주여행에는 사실 지장이 없다. 굳이 상기하면서 다니더라도 제주의 목가적 풍경이 그 역사를 거짓말처럼 여기게 만든다. '잃어버린 마을' 터에 자못 무거운 걸음을 했다가도 비석 뒤편 푸른 초원에 마음을 훌렁 뺏기고 만다. 아무래도 제주는 어제의 사실과 오늘의 감각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는 여행자를 시험에 들게 하는 섬이다. 그래도 '역사의 기억'이라는 후대의 일차적인 의무론은 진부하지만 유효한 것 같다. (p3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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닉 혼비 런던스타일 책읽기
닉 혼비 지음, 이나경 옮김 / 청어람미디어 / 2009년 5월
평점 :
절판


내가 생각하기에 내가 가진 꽤 좋은 습관 중의 하나는, 길을 나설 때면 대개 책 한 권쯤은 챙겨서 나선다는 것이다. 나는 장시간 이동을 해야 될 때 책을 가져가는 것은 물론이고, 여행을 떠날 때도 짐을 줄이기 위한 노력과는 별개로 책 한 권에 대해서는 그 무게를 문제 삼지 않는 편인데, 이게 꽤 좋은 습관인 이유는 적어도 책을 읽는 동안은 주변에 민폐를 끼칠 일이 드물기 때문이다(시끄럽게 떠들 일도 없고, 졸다가 옆사람을 머리로 받을 일도 없다). 그런데 내가 지닌 사소한 문제라면, 그렇게 들고 간 책을 실제로 안 읽게 되는 경우가 부지기수라는 것 정도다. 아니, 솔직히 고백하자면, 가져간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어내는 것은 언감생심이려니와 심지어 어쩔 때는 들고 간 책을 손에 쥐어보지조차 않을 때도 있을 정도다. 이쯤 되면 대체 이게 웬 바보짓이냐 하겠지만, 다행히도 변명거리는 차고 넘친다. 이를테면, 장시간 이동 중에 지쳐서 잠이 들었다거나, 혹은 주변이 복잡하고 시끄러워서 도저히 책을 읽을 수 없었다거나, 또는 여행이 너무 근사해서 차마 책 따위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거나, 심지어는 그저 멍때리느라 책을 읽을 수 없었다는 핑계도 가능하다. 책으로서는 유감이겠으나, '책읽기'의 우선순위는 기실 멍때리기보다도 낮다는 얘기다.

눈을 씻고 봐도 '런던스타일'과의 관련성을 찾기가 쉽지 않은 <닉 혼비 런던스타일 책읽기>는(원제는 물론 따로 있다) 심지어 유명 작가마저도 '바보짓'을 서슴없이 한다는 데에서 일단 위로가 되는 책이다. 닉 혼비는 매달 책을 사는 일에 돈을 쓰고 휴가기간이면 느긋하게 책을 읽을 계획을 세우곤 하지만, 그는 언제나 산 책을 다 읽어내지 못해 쌓아두기 일쑤고 휴가기간에는 다른 일 때문에 책을 읽는 일에 시간을 충분히 할애하지 못한다. 아기가 태어나고, 축구 시즌이 시작되고, 폭탄 테러가 벌어지기도 하는 마당이니 그것은 당연한 일이다. 책에서 닉 혼비가 직접 언급하지는 않지만, 아마도 그는 심각한 부부싸움을 할 때도 있었을 테고, 몸이 아픈 날도 있었을 테고, 또 좌절감에 사로잡혀 인생에 대한 회의에 빠진 날도 있었을 테니, 솔직히 그 와중에 살아남은 것만 해도 장하다고 칭찬할 일이다. 그럼 도대체 '책읽기'는 어쩌냐고? 닉 혼비의 입을 빌자면, 명백하게도 책은 레이예스(아스날 축구선수)의 30m 중거리 슛처럼 우리를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게 만들지 못한다. 그러니 '책읽기'쯤이야 아무려면 어떤가.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 책에서 닉 혼비가 사 놓은 책을 읽지 못했던 이유를 무수히 나열하며 책의 가치를 폄하하려고 하느냐 하면, 전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모조리 읽어 내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책을 계속해서 사서 쌓아 두거나 혹은 생각만큼 책읽기에 시간을 할애하지 못하게 되었다 할지라도, 닉 혼비는 '책'과 '책읽기'를 열렬히 찬양하는 쪽이다. 나중에 다시 말을 번복하기는 하지만 그는 책과 다른 문화매체들, 가령 영화나 스포츠 등과 권투 시합이 벌어진다면 30번 중에 29번은 책을 응원할 것이라고 말하며, 책의 가치를 다른 어떤 문화매체보다도 우위에 둔다. 물론 아스날의 중요한 경기가 벌어질 때면 백이면 백, 책을 집어 던지고 경기장을 찾을 것임은 저자도 알고 나도 알지만, 어쩌면 오히려 그런 이유로 책의 진정한 가치는 다른 모든 일에 기꺼이 우선순위를 내주면서도 언제나 변함없이 옆을 지키고 있다는 데서 찾을 수 있는 것이라고, 닉 혼비는 말하고 싶은 건지도 모른다. 하긴 말이야 바른 말이지만, 심지어 내일 지구가 멸망한다고 할 때조차도 축구나 연극을 보거나 혹은 나무 한 그루를 심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만, 가까이 놓여 있는 한 권의 책을 읽는 일은 여전히 충분히 가능한 법이니까 말이다. 뭐 물론, 어디까지나 그럴 마음이 있을 때의 얘기지만.

<빌리버>에 매달 연재된 칼럼을 모은 이 책은, 그래서 궁극적으로는 '책 읽기의 즐거움'에 관한 책이다. 닉 혼비가 매달 사거나 얻은 무수히 많은 책들 중에서 선택된, 비교적 적은 수의 책들에 대한 이야기, 어떤 책을 읽은 이유나 혹은 읽지 않은 이유에 대한 이야기, 읽다가 집어 던진 책 혹은 도저히 읽을 만한 기분이 아니라 읽기를 관둔 책에 대한 이야기 등, 닉 혼비는 때로는 진지하고 열정에 가득 차서, 또 때로는 가볍고 경쾌하게, 또 종종 냉소적이고 비판적으로 이야기를 이끌어 가면서 결국 책에서 얻는 즐거움에 대해 항시 유머러스하게 풀어낸다. 물론, 가끔은 주로 그가 읽은 책을 내가 전혀 몰라서 맥락이 이해가 안 될 때도 있긴 했지만, 그런 이유로 닉 혼비의 조언대로 이 책을 집어던지기에는 역시 이 책을 읽는 즐거움 쪽이 내게는 더 컸다. 게다가, 가브리엘 자이드의 <너무나 많은 책들>에 나오는, "진정한 교양인이란, 읽지 않은 수천 권의 책을 소유하고 있으면서 태연자약하게 더 많은 책을 원할 수 있는 이들이다."와 같은, 멋진 구절들을 함께 공유하게 해주는 것은 근사한 덤이다. 알고 보니 닉 혼비는 교양인이었고, 나는 차마 교양인이라고 슬며시 무임승차하지는 못하겠지만, 적어도 책을 들고 갔다가 그냥 들고 온다고 해서 바보는 아니었던 것이다. 그게 어딘가!

이 칼럼을 시작한 이래 적어도 열두 권의 훌륭한 책을 읽었다고 생각된다. ...(중략)... 그리고 앞으로 한 해 동안에도 그만큼을 만나게 될 것이다. 더 빨리 읽는다면, 더 많이 만날 수도 있겠다. 지난 한 해, 여러분들은 책을 읽는 것 말고 그만큼 멋진 경험을 열두 번이나 한 일이 무엇이 있는가? 거짓말은 사절하겠다. (p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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