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의 신간] 우연으로 쌓아올린 운명, 그 세겹 이야기
소설가가 소설 속 주인공으로… 짜릿한 글 맛 낸 추리적 작법

신탁의 밤/폴 오스터 글/황보석 옮김/열린책들

“세계는 내 머리 속에 있고, 내 몸은 세계 속에 있다.”

뉴저지의 뉴어크에서 가구점 집 아들로 태어난 폴 오스터(Paul Auster·57)는 무명 시절 열일곱 군데 출판사에서 거절당한 적도 있다. 지금은 “재치 넘치는 언어, 도회적(뉴욕적)인 감성”을 통해 “동시대인들의 열망과 좌절, 고독과 절망, 강박 관념 등을 그려내는 데 탁월한 솜씨를 발휘해 왔다”는 평을 듣는 세계적 작가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뛰어난 연주가의 스타일과 음악적 구조 때문에 오스터의 소설을 무척 좋아한다”고 말했다.

이번 작품처럼 작가가 주인공이 되는 소설가 소설은 일종의 유체이탈이다. 소설을 쓰고 있는 나 자신을 소설 속의 주인공으로 옮겨 놓음으로써 극도의 리얼리즘과 극도의 작가주의를 동시에 겨냥하면서 가장 기묘한 방법으로 소설의 입체성을 획득한다.

오스터는 ‘스모크’(1996) ‘블루 인 더 페이스’(〃) ‘다리 위의 룰루’(1998) 같은 영화의 시나리오를 쓰거나 감독을 하기도 했다.

운명은 우연(偶然)을 먹고 자란다. 운명의 침입으로 얼룩진, 사랑하는 사람들의 인생은 대개의 경우 열정과 비밀의 구렁에 내던져져 있다. 우리는 때로 무작위적인 우연의 힘에 저항하기도 하고, 때로는 우리 내면에 잠복한 미래의 암시를 염탐하기도 한다. ‘어쩌면 그게 글쓰기의 전부인지도’ 모른다.(287쪽)

스승처럼 알고 지내는 선배 작가 존 트로즈가 그의 삶에 엄청난 결과를 안겨줄 것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는 주인공 시드니 오어(Sidney Orr)는 아직은 크게 성공하지 못한, 서른네 살 소설가다. 아내인 그레이스 테베츠는 ‘어느 순간 와 닿는 빛의 강도와 색조에 따라 색이 변하는 눈’을 가진 아름다운 여인이다. 오어는 출판사 미술부에서 디자이너로 일하는 그레이스에게 한눈에 반해 결혼까지 이른 마당이다.

오스터의 신작을 기다리는 세계 곳곳의 열성 팬들은 제 나름의 이유를 갖고 있겠으나 무엇보다 스토리의 묘미가 압권이다. ‘이야기는 모든 운명의 증언이기’ 때문일까. 2003년에 발표했던 이번 장편도 대략 세 겹으로 겹쳐지는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당신이 펼친 소설 속 주인공인 시드니 오어는 소설을 쓰는 작가다. 그런데 독자를 더욱 흥미진진하게 만드는 것은 오스터의 소설 속에서 주인공 오어가 쓰는 소설의 또 다른 주인공인 닉 보언도 뉴욕의 한 출판사에서 소설 편집자로 일하고 있다는 점이다. 게다가 닉 보언은 1927년에 쓰인 후 원고 상태로 전해오는 어떤 소설을 읽고 있는데, 그 세 번째 소설의 제목이 ‘신탁의 밤’이다.

정리하자면, 소설①의 주인공은 소설가 시드니 오어, 소설②의 주인공은 출판편집인 닉 보언, 소설③의 주인공은 영국군 대위 르뮈엘 플래그다. 마치 영화 ‘디 아워스(The Hours)’에서처럼 이 세 주인공들은 전혀 다른 시공간에서 전혀 다른 액자에 갇혀 살아가고 있지만, 그들 역시 우연, 운명 그리고 현재에 징후를 드러내는 미래의 검은 망토 자락에 휘둘리는 삶을 견디고 있다.

소설③의 주인공 플래그 대위는 제1차 대전에 참전했다가 박격포탄 폭발로 눈이 멀고 간질병을 닮은 발작 증세를 일으킨다. 그는 발작 도중에 미래를 이미지로 예언할 수 있는 놀라운 능력을 얻지만, 사랑에 빠진 여인과 결혼하기 전날 예기치 못했던 발작을 일으키고 그 애인이 채 1년도 가지 않아서 어떤 행위를 할지 미리 알게 된다. 플래그 대위가 그처럼 가혹한 운명의 벼랑 앞에서 어떤 선택을 할지, 독자의 궁금증은 더욱 가렵다.

이 같은 소설③을 읽게 되는, 소설②의 주인공 닉 보언은 아무런 예고 없이 11층 아파트의 건물 정면에 붙어 있는 이무기 돌이 떨어져 삶이 끝날 수도 있었다는 경험 때문에 ‘인생을 닥치는 대로 바꾸기로’ 결심한다(이 또한 대실 해밋이란 소설가의 작품 속 일화를 소설 속 작가 오어가 재창조한 것이다). 그는 직장과 아내를 버리고 전혀 낯선 도시인 캔자스시티를 향해 밤 비행기에 몸을 싣는다. 닉 보언은 예순일곱 살 먹은 흑인 택시운전사를 만나고, 세계 유명도시의 전화번호부를 수집하는 기묘한 일에 휘말리다가 지하의 방사선 대피소에 홀로 갇히게 된다. 자, 닉 보언의 운명은 또 어떻게 될 것인가.

이런 스토리로 소설②를 쓰던 소설①의 주인공 시드니 오어는 아내 그레이스가 임신 중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돈을 좀 벌어볼 요량으로 타임머신에 관한 공상영화의 시나리오를 썼다가 퇴짜를 맞기도 하며, 중국인 문구점 주인이 안내하는 갈봇집에 가서 오럴 섹스를 경험하기도 한다. 또 존 트로즈의 아들인 제이콥이 오어의 아파트를 도둑질하는 사건과 그레이스가 아무 말 없이 외박을 하는 일도 벌어진다. 그러나 이러한 불안을 몰아내기라도 하겠다는 듯이 시드니와 그레이스는 ‘옷을 반쯤 벗은 채 침대로 가려다 결국 그러지도 못한 채 바닥에 구르며’(240쪽) 격렬한 섹스에 탐닉하기도 한다.

시드니 오어가 아내의 비밀을 알아내는 것은 연역적 추론을 통해서였다. 불명확했던 과거의 애매함들에 대해 마치 현재진행형 소설을 쓰듯 특정 구도를 설정하자 모든 일의 아귀가 희한하게 맞아떨어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것은 시제(時制)로서 과거이자 소설 작법상의 미래였다.

▲ 폴 오스터는 문학성과 대중성이라는 두마리 토끼를 잡는데 성공한 작가다. 현재 뉴욕의 브루클린에 살고 있다.
오스터의 최대 출세작인 ‘뉴욕3부작’(1986)에 나오는 주인공 퀸은 빨간 공책에 글을 썼고, 이번 장편에서 주인공 시드니 오어는 파란 공책에 글을 쓴다. 둘 다 소설가다.

오스터는 거의 예외 없이 추리적 작법을 즐겨 쓴다. ‘어디로 갔어? 어떻게 된 게야?’ 같은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그러면서 찡한 여운이 남는 것은 이중 삼중의 상자를 뚫고 우연의 총탄 세례를 맞아가며 운명적 사랑을 껴안는 휴머니즘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운명의 바닥에는 허무주의라는 배설구를 만들어 카타르시스를 돕는다. ‘사람은 우연한 일로 죽으며 눈먼 우연이 용서해 주는 동안에만 살아 있다’(80쪽)는….

세 겹으로 장치한 ‘소설가 소설’의 장점은 소설가와 소설 사이의 공간을 좁힐 수 있다는 점이다. 그때 수집하는 아이디어와 에피소드는 피부감각적으로 적나라하다. “나는 스스로 리얼리스트라고 생각한다”는 오스터는 재래식 리얼리즘의 강박관념을 깨고, 대신 허구(소설)보다 더 기이(奇異)한 사실들을 채집한다.

또 하나 오스터의 작법은 ‘상자 속에서 상자 꺼내기’(차이니즈 박스)다. 그러나 이것은 누구나 쓰는 테크닉이다. 오스터를 오스터답게 만드는 것은, 풀면 또 나오고 풀면 또 나오는 ‘다중의 상자’라는 구조 밑에, ‘막다른 방은 없다’는 오스터 특유의 문학적 전략이 작동하고 있다는 점이다. ‘뉴욕3부작’에서도 ‘방안에는 창문 없는 칸막이 방으로 통하는 문이 또 하나 있었고’(196쪽), 이번 장편에서도 소설②의 주인공이 갇히는 지하 벙커에는 ‘또 하나의 방’이 있다. 이것은 ‘그전까지 썼던 모든 것은 지금 이야기하려고 하는 끔찍한 일의 전주곡에 지나지 않았다’(287쪽)는 긴장고조 방식이다.

이번 장편은 ‘환상의 책’ ‘달의 궁전’ ‘공중 곡예사’ 등에 이어 국내에 번역되는 열다섯 번째 책이며, 황보석은 그중 아홉 권을 번역했다. 소설가 김영하 같은 오스터 매니아뿐 아니라, 오스터라는 이름을 처음 듣는 독자들께도 진심으로 권해 드린다.

(김광일기자 kikim@chosun.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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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우맘 2004-05-11 12: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루키, 김영하... 폴 오스터는 내게 있어, <좋아하는 작가>가 아니라, <꼭 좋아해야만 하는 작가>이다.

진/우맘 2004-05-11 1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폴 오스터의 작품을 읽을 때 왜 발동이 늦게 걸리는지를, 이 글을 읽으며 깨달았다. <차이니즈 박스> 기법. 상자 안에서 상자가 나오고, 그 안에 또 상자가 들어 있는...폴 오스터의 소설에는 저런 식의 이야기가 최소 두 개에서 많게는 네 개 정도까지 포개져 있는데, 대부분 안으로 갈 수록 더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나온다! 책을 통해 사색하기 보다는 스토리텔링을 즐기는 나로서는, 후반부가 더 재미있을 수 밖에.^^

물만두 2004-05-11 1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스퀴즈 플레이>랑 <뉴욕 삼부작>밖에 안 읽었는데요. 꼭 미로에 갇힌 기분이 들더군요. 나와는 넘 거리가 먼 작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스퀴즈 플레이>는 추리 형식이라 읽은 거구요...

문학仁 2004-05-11 13: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사람 인상 무섭네...ㅡ..ㅡ;;;;

진/우맘 2004-05-11 13: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눈이 금방이라도 쏟아져 내려, 얼른 손으로 받아야 할 것 같은 불안감을 제외하면...카리스마 넘치는 외모 아닙니까? 저래뵈도 상당한 바람둥이라 하더군요.^^

뎅구르르르~~ 2004-05-11 13: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니 나 어떻게해.. 쿠하하.. 저 사진보니까 개콘의 허둥선생님이 생각나는건 왜일까..
부담스러운 다크써클의 압박!! ㅡㅡ;;

진/우맘 2004-05-11 13: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푸하하하하하~~~ 듣고 보니.....!!!

Laika 2004-05-11 15: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폴 오스터가 이렇게 멋지게 생긴줄 몰랐네요...^^

마냐 2004-05-11 17: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진/우맘님이 쓴 글인줄 알고 읽다보니..왠지 본듯한 글인게...^^;;

진/우맘 2004-05-11 19: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요! 우리집 아직도 조선일보 봐요!!!! TT (자격지심에 울부짖는....-.-;)

stella.K 2004-05-11 2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거 스크랩 할려고 했는데 그냥 퍼가야겠군요. 조도 조선일보 봐요. 기죽지 말자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