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차 블랙펜 클럽 BLACK PEN CLUB 24
미야베 미유키 지음, 이영미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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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베 미유키, 이영미 역, [화차], 문학동네, 2012.

Miyabe Miyuki, [KASHA], 1992.

제6회 야마모토 슈고로상

  소설 [화차]가 이렇게 노골적이고, 대장정의 추적 드라마였던가... 오래전에 구판(시야, 2000.)을 읽었을 때는 일본소설을 읽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그 충격이 어마 무시했다. 본격하고 구분하는 사회파 미스터리라는 것도 처음 알았고... 신판을 읽는 느낌은 탄탄하고 세밀한 구성으로 미스터리의 교과서라는 생각이다. 세키네 쇼코라는 이름, 우쓰노미야라는 지명, 신용카드 사용과 개인정보 보호라는 주제... 등 이미 내용을 알고 있어도 재미있다. 예전에는 모르고 지나쳤던 문장의 맛을 찾을 수 있고... '화차'(火車)란? 생전에 악행을 저지른 망자를 태워 지옥으로 실어나르는 불수레라고 한다.

  "은행과 신용판매회사의 신용정보기관 양쪽 모두에서, 세키네 쇼코라는 이름이 '요주의자 명단'에 올라 있었기 때문입니다."(p.28)

  젊은 여성의 실종 자체는 드문 일이 아니다. 도시에서는 길거리에 방치된 쓰레기통 뚜껑이 도난당하는 것과 맞먹을 정도로 빈번하게 여자들이 모습을 감춘다. 그러나 젊은 여자의 단독 실종에 '개인파산'이 얽혀 있는 경우는 별로 들어본 적이 없다. 가족이 다함께 야반도주를 했다면 모르겠지만, 남자가 아니라 빚 때문에 여자 혼자 도망을 치다니.(p.33-34)

  사고로 한쪽 다리에 총상을 입고 휴직 중인 형사 혼마 슌스케에게 죽은 아내의 먼 친척이 찾아온다. 은행원이라는 조카뻘 되는 남자는 결혼을 앞두고 실종된 약혼녀를 찾아 달라는 의뢰를 한다. 세키네 쇼코는 신용카드를 만들기 위해 신용조회를 했더니 요주의 인물로 분류되어 있었고, 그 이후에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개인파산하고 관련하여 사라진 여자를 찾는 과정은 아주 생생하다. 도대체 어떤 사연이 있었던 것일까?

  "이 호적등본을 본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구라사카 가즈야 씨의 약혼녀는 단순히 '세키네 쇼코'라는 사람의 호적을 이용한 것만이 아니라, 그걸 모조리 자기 걸로 만들어버리고 싶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p.114)

  "화차?"

  뒤를 돌아보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혼마에게 이사카가 천천히 뒷말을 이었다.

  "화차여, 오늘은 내 집 앞을 스쳐 지나, 또 어느 가여운 곳으로 가려하느냐."

  온화한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어젯밤에 집사람이랑 개인파산 얘기를 나누던 중에 문득 떠올랐어요. 옛날 노래예요. <슈교쿠슈>(무로마치 시대의 개인 시가집)에 있던가."

  그것은 운명의 수레였는지도 모른다. 세키네 쇼코는 거기서 내리려 했다. 그리고 한 번은 내렸다.

  그러나 그녀로 변신한 여자가 그것도 모르고 또다시 그 수레를 불러들였다.(p.145)

  그녀가 다니던 직장에 가서 이력서를 확인한다. 첫 번째 반전은, 이력서는 거짓이다. 고용보험을 확인하고, 5년 전 파산신청을 담당한 변호사 사무실을 찾는다. 두 번째 반전은, 사진 속 얼굴은 세키네 쇼코가 아니다. 누군가가 다른 사람 행세를 한 것이다. 살았던 집에서는 아무런 흔적이 없고, 앨범 속 사진을 한 장 얻는다. 주민표, 호적등본, 호적부표를 확인하고 진짜 세키네 쇼코부터 조사한다. 고향, 동창, 옛 직장... 신용사회에서 한 여자의 인생은 꼬일 대로 꼬여있다. 단서를 찾아, 퍼즐의 조각을 맞춰야 한다.

  "상식적으로 보면 스무 살 안팎의 젊은이들에게 천만 엔, 이천만 엔씩 빌려주는 업자가 있다는 것부터가 비정상적이죠. 그러나 실제로 존재합니다. 그것은 이 업계 자체가 장렬한 자전거조업(만성적으로 자기 자본이 부족하여 타인의 자본을 잇달아 거두어들여서 가까스로 이어가는 조업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을 하고 있기 때문이죠. 그래서 빌려주고, 빌려주고, 또 빌려주는 겁니다. 마지막에 뒤집어쓰는 게 자기네 회사만 아니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니 그럴 수 있는 겁니다. 사실 은행이든 신용판매회사든 신용대출이든 대기업은 좀처럼 마지막 차례가 되지 않아요. 지금 얘기한 구조 속에서 피라미드 상층에 있는 업자는 절대 당하지 않으니까요. 그래서 청구서는 아래로, 또 아래로 밀려갑니다. 그에 짓눌려 채무자는 점점 더 나락으로 떨어지고, 다중채무자라는 이름에 옥죄어서, 두 번 다시 떠오를 수 없는 곳까지 침몰해갑니다."(p.157-158)

  "특히 젊은 사람들이 이런 속임수에 걸려들기 쉽습니다. 소비자신용은 젊은 층 이용자 개척에 힘을 쏟고 있으니까요. 어느 업계나 마찬가지겠지만, 기업은 고객에게 달콤한 말밖에 안 합니다. 이쪽이 현명해지는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 현 상태에서는 그 부분이 뻥 뚫려 있는 겁니다. 대형 도시은행에서 학생용 신용카드를 발행한 지 올해로 딱 이십 년째인데, 그 이십 년 동안 어느 대학교가, 고등학교가, 중학교가 이 신용회사에서의 올바른 카드 사용법을 지도했습니까? 그것이야말로 지금 당장 시작해야 하는 일인데 말이죠. 도립 고등학교에서는 졸업을 앞둔 여학생들을 모아 메이크업 강습을 하는 모양인데, 그렇게 멋을 부릴 여유가 있으면 신용사회로 나가는 데 필요한 기초 지식을 가르치는 강습도 같이 해야 옳은 거 아닙니까?"(p.160)

  작가는 개인파산과 관련된 사회문제를 사용자의 부주의보다 구조의 문제로 보고 있다. 젊은이에게 무분별하게 노출된 대출 서비스, 카드 한 장으로 누구나 쉽게 어디서든 돈을 빌릴 수 있다. 무리한 이자는 상환일을 어기면 금세 불어나서 빚이 빚을 부르는 설계이다. 우리나라도 사채 폭리가 사회문제로 대두된 적이 있는데, 일본의 대부업을 도입(또는 진출)해서 생긴 것 같다. 처음 사회에 진출하는 이에게 올바른 신용카드 사용 교육은 꼭 필요하다.

  ......선생님, 어쩌다 이렇게 많은 빚을 지게 됐는지 나도 잘 모르겠어요. 난 그저 행복해지고 싶었을 뿐인데.(p.170)

  "뱀은 허물을 벗잖아요? 그거 실은 목숨 걸고 하는 거래요. 그러니 에너지가 엄청나게 필요하겠죠. 그런데도 허물을 벗어요. 왜 그런지 아세요?"

  혼마보다 앞서 다모쓰가 대답했다. "성장하기 위해서 아닌가요?"

  후미에가 웃었다. "아니에요. 목숨 걸고 몇 번이고 죽어라 허물을 벗다보면 언젠가 다리가 나올 거라 믿기 때문이래요. 이번에는 꼭 나오겠지, 이번에는, 하면서."(p.346)

  당신들 두 사람은 같은 부류였다.

  혼마의 뇌리에 스친 말은 그것이었다. 세키네 쇼코와 신조 교코. 당신들 둘은 같은 고통을 짊어진 인간이었다. 같은 족쇄에 묶여 있었다. 같은 것에 쫓기고 있었다.

  이 얼마나 잔인한 일인가. 당신들은 서로를 잡아먹는 것이나 다름없다.(p.368)

  진짜 쇼코와 가짜 쇼코 사이의 접점을 찾아야 하는데, 그게 잘 드러나지 않는다. 억울하게 빚을 지고, 단지 행복하기 위해 빚을 지고... 그러면서 인생은 꽃가마(花車)를 타지 못하고 불수레(火車)에 오르게 된다. 결국 두 여자의 고된 인생은 같은 부류였고, 서로를 잡아먹었다. 형사의 체계적인 추적, 마지막까지 탄탄한 전개는 사회파 미스터리의 매력을 한층 돋보이게 한다. 소설은 아주 세밀하고, 논리적이고, 방대하다. 역시 미야베 미유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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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사가 사랑한 수식 오가와 요코 컬렉션
오가와 요코 지음, 김난주 옮김 / 현대문학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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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가와 요코, 김난주 역, [박사가 사랑한 수식], 이레, 2004.

Ogawa Yoko, [HAKASE NO AISHITA SUSHIKI], 2003.

제1회 서점대상

제55회 요미우리문학상

  뒤늦은 영화의 소문, 책의 절판, 도서정가제의 시행, 신판의 출간, 잠시 머뭇거림, 중고서점 신공으로 구판의 만남... 오가와 요코의 [박사가 사랑한 수식]은 오래전부터 꼭 읽고 싶었던 소설이다. 개인적으로 올해 서점대상을 받은 [유랑의 달](은행나무, 2020.)하고 투톱(=쌍벽)(?)을 이루는 최고의 작품이다. 독서를 하며 대부분은 결말이 궁금해서 서둘러 읽는다. 그런데 이 책은 한 장 한 장을 아껴가며 읽었다. 오랜만에 느끼는 따뜻한 숨결이고, 감동이다. '수학'을 소재로 어쩌면 이렇게 서정적인 글을 쓸 수 있을까? 문득 작가의 이력이 궁금하다.

  나와 우리 아들은 그를 박사라고 불렀다. 그리고 박사는 우리 아들을 루트라고 불렀다. 아들의 정수리가 루트 기호처럼 평평했기 때문이다.(p.5)

  "단적으로 말해서 기억을 못하는 거죠. 노망이 든 것은 아닙니다. 뇌 세포는 건강하게 움직이고 있으니까요. 다만, 17년 전에 뇌의 일부분에 장애가 생겨서 기억하는 기능이 사라졌어요. 교통사고를 당해서 뇌를 다쳤거든요. 도련님의 기억은 1975년에 멈춰 있습니다. 그 후에는 새 기억을 아무리 쌓으려고 해도, 금방 무너져 내려요. 30년 전에 자신이 발견한 정리는 기억해도, 엊저녁에 뭘 먹었는지는 기억하지 못할 정도죠. 간단히 말해서, 뇌 속에 80분짜리 테이프가 딱 한 개 들어 있다고 생각하면 될 거예요. 새로운 것을 녹화하면 이전의 기억은 깨끗이 지워집니다. 도련님의 기억은 80분밖에 가지 않아요. 정확하게 1시간 20분."(p.11)

  화자인 '나'는 이십 대 후반의 미혼모로 열 살짜리 아들을 키우고 있다. 파출부로 일하면서 새로 소개받은 곳은, 고객의 불만으로 아홉 명이 그만둔 집이다. 예순네 살인 박사는 17년 전의 교통사고로 모든 기억이 1975년에 머물러 있다. 뇌에서 기억을 저장하는 기능을 상실해 80분, 즉 1시간 20분만 기억을 유지할 수 있다. 그래서 매일 아침 현관에서는 새로운 만남이 이어진다. 박사는 메모지에 필요한 것을 기록해서 소맷자락에 붙여놓는다.

  "맞아. 그야말로 발견이지, 발명이 아니고. 내가 태어나기도 전, 아니 먼 옛날부터 아무도 모르게 존재해왔던 정리를 파헤쳐내는 거야. 신의 수첩에만 기록돼 있는 진리를 한 줄씩 베껴 쓰는 것이나 다름없지. 그 수첩이 어디에 있고, 언제 펼쳐질지는 아무도 몰라."(p.63)

  "28의 약수를 더했더니 28이 됐어요."

  "오호......"

  박사는 아르틴의 예상에 관한 무늬에 이어서 '28=1+2+4+7+14'라고 썼다.

  "완전수로군."(p.64)

  수학에 관한 박사의 사랑, 열정은 매우 대단하다. 만날 때마다 신발 크기는? 생일은? 전화번호는? 숫자에 의미를 부여하고, 수의 세계에 몰입한다. 오래전 과거에 머무르며 짧은 기억이라는 후유증을 앓고 있지만, 그의 삶은 수와 혼연일체였다. 오만함으로 수학적 지식을 뽐내는 게 아니라 겸손함으로 신의 영역에서 펼쳐진 진리를 발견해가는 중이다. 나와 아들 루트는 박사를 돌보며 수의 세계에 매료된다.

  "신은 존재한다. 왜냐하면 수학에 모순이 없으니까. 그리고 악마도 존재한다. 왜냐하면 그것을 증명할 수 없으니까."(p.142)

  마침내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처음에 나는 그 소리가 박사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줄은 모르고 방 어디에선가 망가진 오르골이 울리는 줄로 착각했다. 루트가 손을 베었을 때 들은 울음소리와는 전혀 성질이 다른, 오직 자신만을 위한 나직한 울음소리였다.

  가장 눈에 잘 띄는 곳에 붙어 있는 메모지, 박사는 윗도리를 걸치면 보기 싫어도 보게 되는 가장 중요한 메모를 읽고 있었다.

  '내 기억은 80분밖에 지속되지 않는다'(p.144-145)

  첫 만남, 집안일, 외출, 한신 타이거스, 야구장, 고열, 해고, 오일러의 항등식, 복직, 치과 병원, 생일 파티, 에나쓰 야구 카드...등 숫자하고 연결된 에피소드는 다양한 수의 세계로 인도한다. 나는 수학을 암기과목으로 배웠다. 요즘하고 다르게 이해하기에 앞서 무조건 외우는, 공식에 주어진 숫자를 대입해서 답을 찾는 방식이었다. 사고력, 논리력, 추리력하고는 상관없는, 인생을 살아갈 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은 지루한 숫자 놀음이었다. 그런데 박사가 사랑한 수학은 놀랍도록 아름다운 세계이다. 그 감정을 고스란히 독자에게 전달한다. 한 번 더 읽고 싶은 소설이다.

  "소수의 성질이 분명해졌다고 해서 생활이 편리해지는 것도 아니고 돈을 버는 것도 아니지. 그러나 아무리 세상을 등지고 있다 해도, 수학의 발견이 결과적으로 현실에 응용되는 사례는 얼마든지 있어. 타원 연구는 혹성의 궤도를 밝혀주고, 아인슈타인은 비유클리드 기하학으로 우주의 형태를 제시했지. 소수 역시 암호의 기본으로 전쟁을 돕고 있어. 한심한 일이지. 그러나 그것은 수학의 목적이 아니야. 수학의 목적은 오로지 진실을 밝혀내는 데 있어."(p.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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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킬 수 없는 약속
야쿠마루 가쿠 지음, 김성미 옮김 / 북플라자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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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야쿠마루 가쿠, 김성미 역, [돌이킬 수 없는 약속], 북플라자, 2017.

Yakumaru Gaku, [SEIYAKU], 2015.

  인터넷 서점에 들어갈 때마다 인기도서로 눈에 띄는 책이 있다. 소설 부문에서 히가시노 게이고의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현대문학, 2012.), 손원평의 [아몬드](창비, 2017.) 그리고 야쿠마루 가쿠의 [돌이킬 수 없는 약속]이 그렇다. 오래 전에 절박함으로 했던 약속, 이제 그 약속을 지켜야 하는 순간이다. 두 사람을 죽여야 하는... 이 책의 원제는 [誓約](서약)이다.

  히스란 영국 스코틀랜드 지방의 황무지와 거기서 군생하는 키 작은 식물을 말한다. 혹독한 기후에도 불구하고 8월 하순에서 9월에 걸쳐 황량한 대지 일대에 히스와 엉겅퀴 꽃들이 핀다고 한다.(p.22)

  야쿠마루 가쿠는 일본의 소년법을 소재로 사회파 미스터리를 쓰는 작가이다. [천사의 나이프](황금가지, 2009.) 등 그의 작품은 소년법 개정에 공헌할 정도로 유명한데, 이번에는 소재를 바꾸어 약속(서약)에 관해서이다. 작가로서 2막을 열었다는 평가, 과거를 회상하며 복선과 암시로 전개하는 이야기 구조는 박진감과 긴장감이 흐른다.

  나는 봉투를 뒤집어 발신인을 보았다. 주소는 쓰여 있지 않고 '사카모토 노부코'라고만 되어 있다.

  그 인물이 누구인지 바로 알아채지는 못했지만 이윽고 그 이름의 주인에 생각이 미치자 심장 박동 소리가 요란해지고 봉투를 든 손이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봉투 입구를 뜯고 안에 든 편지지를 빼냈다.

  "그들은 교도소에서 나왔습니다."

  편지지에는 그것만 적혀 있었다.(p.28-29)

  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한 손으로 봉투를 뜯고, 안에 든 내용물을 꺼냈다.

  "최근 일주일 동안 당신을 지켜봤습니다만, 정말로 약속을 지킬 생각이 있기나 한 건가요? 지금 당신이 행복한 것은 나와 그 약속을 한 덕분 아닙니까? 만약 당신이 이대로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면, 당신 주변에도 나와 똑같은 재앙이 덮칠지도 모릅니다."(p.50-51)

  봉투 안에는 몇 장의 사진이 들어 있었다. 첫 번째 장은 운동복 차림으로 담배를 피며 파친코를 하고 있는 중년남성의 사진이다. 또 다른 한 장은 술집에서 술을 마시는 중년남성의 옆얼굴이었다. 모두 멀리서 몰래 찍은 것 같은 사진이었다.

  이 두 장의 사진은 각각 가도쿠라 도시미츠와 이이야마 켄지인 것일까?

  나머지 한 장의 사진을 더 본 순간, 심장을 예리한 것으로 도려내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공원에서 놀고 있는 호노카의 사진이었다.(p.104-105)

  "언제쯤 약속을 지켜줄 건가요? 나는 오랫동안 당신을 살펴봐 왔습니다. 약속을 지켜주기를 기대하고 있는데, 당신은 전혀 행동으로 옮기려고 하지 않아요. 할 수 없이 그 남자들의 소재를 알려주는 준비까지 해줬는데 당신은 내 말을 계속 무시하고 있어요."(p.133)

  무카이 사토시는 바텐더로 히스(HEATH)의 공동창업주이다. 아내와 딸, 가게의 동업자와 직원들, 안정되고 평탄한 삶에서 사카모토 노부코의 편지를 받는다. 그들이 교도소에서 나왔다는, 어서 약속을 지키라는, 그렇지 않으면 재앙이 덮칠 것이라는... 내용이다. 그의 원래 이름은 다카토 후미야였다. 태어날 때부터 얼굴을 크게 뒤덮은 멍 때문에 버림받고, 보육원에서 자라며 괴물로 불리었다. 폭력성으로 소년원을 들락거리고, 범죄에 가담해서 야쿠자에게 쫓기는 길바닥 인생이었다. 그러던 중 사카모토 노부코를 만나 한 가지 약속을 한다. 호적을 바꾸고, 성형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할 비용으로 500만 엔을 줄 테니 딸의 복수를 해달라는 것이다. 딸을 유린하고 살해한 범인들이 무기징역을 살고 있다. 언젠가 그들이 출소하면 죽여달라는... 절박한 상황에서의 거래, 16년 전의 약속이다.

  "내일로 16년간 당신을 옥죄어왔던 것에서 해방되는 거예요. 약속을 완수한 기념으로 가게에서 건배라도 들면 좋겠지요."

  "너는... 너는 악마야. 사람이 아니야."

  나는 모든 증오를 퍼부어 말했다.

  "그러는 당신은 사람이기라도?"

  비웃는 말에 나는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p.177)

  누구에게나 죽음은 공평하게 괴로울 것이다. 하지만 그 시절의 나와 지금의 나는 목숨의 가치라는 게 다른 것 같다.

  지금이니 드는 생각이지만, 그 무렵의 나는 내 목숨과 인생을 가볍게 보고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도, 지켜야 할 존재도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내게는 사랑하는 사람도, 지켜야 할 존재도 있다.

  죽고 싶지 않다는 마음은 그 무렵과 다르지 않겠지만, 그 이상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는 것을 더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다.(p.277-278)

  그런데 사카모토 노부코는 이미 오래전에 암으로 사망했다. 무심코 지내온 세월... 이제 와서 누가 편지를 보낸 것인가? 형기를 마치고 출소한 두 사람을 찾아가 죽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다카토 후미야에서 무카이 사토시로 신분을 바꾼 것을 아는 사람은...? 편지의 압박은 거세지고, 과거의 범행이 드러나고, 딸이 납치되고... 주위의 눈을 피해 발신인을 찾아야 한다.

  소설은 마치 한 편의 스릴러, 로드 무비를 보는 듯하다. 현재를 조여오는 과거의 행적은 긴장을 놓을 수 없고, 반전의 타이밍은 적절하다. 자칫 흐트러질 수 있는 논리를 끝까지 잘 유지하고, 인간의 본성, 원한과 복수...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에 관한, 지킬 수 없는 약속, 상황 윤리의 문제... 다시 과거로 돌아간다면, 그 약속을 또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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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 치바 이사카 코타로 사신 시리즈
이사카 고타로 지음, 김소영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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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사카 고타로, 김소영 역, [사신 치바], 웅진지식하우스, 2006.

Isaka Kotaeo, [SINIGAMI NO SEIDO], 2005.

제57회 일본추리작가협회상

  이사카 고타로는 일본소설을 읽는다면 누구나 좋아하는 작가이다. 수없이 회자된 이름인데, 그동안 나는 별다른 인연이 없었다. [사신 치바]는 처음으로 읽은 소설이다. 혹시나 해서 책장을 찾아보니 [골든 슬럼버](웅진지식하우스, 2008.)를 가지고 있다. 들은 소문만으로 기대가 컸던 것일까? 15년 전에 이 책을 읽었다면, 별점은 달랐겠지... 죽음을 몰고 다니는 사신을 주인공으로 6개의 단편은 이런저런 것을 생각하게 한다. 참고로 작가는 치바현 출신이다.

  치바는 정확하다

  치바와 후지타 형님

  산장 살인사건

  연애 상담사 치바

  살인 용의자와 동행하다

  치바 vs. 노파

  경험하는 순간 모든 것이 끝나는 죽음... 죽음에 관한 많은 종교적, 철학적, 생물학적 사고가 있지만, 이번에는 사신(死神)이 등장하는 문학적 사고이다. 사신이 일하는 세계관, 치바라는 사신 캐릭터... 시작은 좋다.

  내가 일을 할 때면 늘 날씨가 안 좋다. '죽음을 다루는 일'인 만큼 으레 날씨도 궂은 거겠지 하고 생각도 해봤지만, 다른 동료들의 경우는 그렇지 않은 걸 보면 아무래도 우연인가 싶다.(p.15)

  찬찬히 확인해 보지는 않았지만 이번의 내 모습은 젊은 여성들이 매력적으로 느낄 만한 외모일 터였다. 패션잡지의 남성 모델이라고 해도 좋을 만한 20대 초반의 청년. 설정이 그렇다고 정보부에서 설명을 해주었다. 그네들은 조사 때마다 가장 일하기 좋은 인물상을 이끌어내서 우리의 외모나 나이를 결정한다.(p.17)

  "아까는 갑자기 쓰러지는 바람에 놀랐어요." 내가 맨손으로 건드리는 바람에 그렇게 되었다고는 설명할 수 없는 법. 우리가 맨손으로 만지면 인간의 수명이 일 년 단축되긴 하지만, 어차피 그녀는 오늘내일 죽게 되어 있으니까 별 상관은 없을 것이다.(p.20)

  "치바라고 해요." 나는 대답했다. 일을 맡아 파견될 때는 이름이 붙는데, 하나같이 거리나 도시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모습이나 나이는 그때그때 바뀌지만 이름만큼은 바뀌지 않는다. 관리상의 편리 때문이리라.(p.20)

  "수명 전에 죽는 경우도 있어요. 돌발적인 사고나 예기치 못한 사건 같은 것들은 대체로 수명이 아니에요. 화재나 지진, 익사 같은 거. 그런 것들은 수명과는 별개로 나중에 정해지는 거죠."(p.27)

  상대를 직접 만나보고 조사를 해서 '죽음'을 실행하기에 적합한가 어떤가를 판단하여 보고를 한다. 그것이 나의 일이다.

  조사라고는 하나 거창한 것은 아니다. 일주일 전에 상대와 접촉해서 두세 번 이야기를 듣고 '가(可)' 혹은 '보류'라고 하면 된다. 하지만 이 조사제도는 형식적인 것이나 다름없다. 그 판단 기준이라는 게 사신의 재량에 맡겨져 있어서 어지간한 경우가 아닌 다음에는 '가'를 보고하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p.28)

  우리는 일주일간의 조사가 끝나면 담당 부서에 결과를 보고한다. 그 결과가 '가'일 경우(하기야 대부분이 '가'이지만), 그 다음 날인 여드레째 되는 날에 '죽음'이 실행된다. 간단히 말하자면 우리는 그 실행을 끝까지 확인해야만 일을 끝낸 셈이 된다.

  덧붙여 말하면 우리는 자신이 담당했던 인간이 어떤 식으로 죽게 되는가에 대해서는 사전에 통지받지 않는다. 조사 기간인 일주일 동안 사인이 발생하는 경우도 없고, 예를 들어 엿새째에 입은 상처가 덧나 여드레째에 사망한다는 식의 사례도 없기 때문에 확인의 시간이 올 때까지 그네들이 어떠한 형식으로 죽게 되는지에 대해서는 상상도 할 수 없다.(p.30)

  내 동료들은 일하는 사이사이 짬이 나면 음반 매장에서 음악을 듣는 경우가 많다. 한눈팔지 않고 귀에 헤드폰을 댄 채 꿈쩍도 하지 않는 손님이 있다면, 아마 나 아니면 내 동료일 것이다.(p.30)

  내 일은 일주일 동안 후지타를 관찰하고, 이야기를 듣고, 그 결과 그가 죽을 만한지 어떤지를 보고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후지타를 만나지 않고 보고만 해도 된다. 보고를 '가'로 정해두면 문제가 없다. 내 동료 중에는 제대로 조사도 하지 않고 보고하는 이들도 많다. 하지만 나는 착실하게 일하는 타입이다. 성실함이라든가 책임의식을 갖고 내가 해야 할 일을 한다. 따라서 좀 번거로운 절차를 밟아서라도 후지타를 만나러 가는 길이다.(p.60)

  물론 인간은 최종적으로는 죽게 되어 있다. 다만 가까운 장래의 일만을 말하자면, 내 보고가 나오지 않는 이상 후지타의 죽음은 확정되지 않는다. 자살이나 병은 사신의 관할 밖이지만 조사 기간 동안 그런 일이 발생하지는 않는다.(p.81)

  나는 맛도 느끼지 못하고, 영양분을 섭취할 필요도 없다. 식사에 흥미는 없었지만 아무튼 2인분의 요리를 먹었다.(p.122)

  곧잘 오해를 받곤 하는데, 우리 사신은 자살이나 병사에는 관여하지 않는다. 가령 '불시에 차에 치여서'라든가, '느닷없이 나타난 노상강도에게 찔려서'라든가, '화산폭발로 집이 무너져서' 같은 죽음에 대해서는 우리가 실행하고 있지만 그 이외의 것과는 관계가 없다.

  따라서 진행중인 병이나 자신이 지은 죄로 인해 받은 극형, 빚에 시달리다 못한 자살 등은 우리 사신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인간들이 때때로 "암이라고 하는 사신에 걸려들어서" 같은 수사법을 구사하면 "뭉뚱그려서 취급하지 말아 달라고!" 하며 우리는 분노에 떤다.(p.167)

  천사는 도서관으로 모이고, 사신은 음반 매장에서 모인다. 작가적 상상력은 아주 대단하다. 사신은 정보부에서 제공한 정보를 토대로 모습을 바꾸어 조사 대상(곧 죽을) 사람에게 접근한다. 일주일간 죽음이 적합한지를 판단해서 보고해야 하는데, 대부분은 죽음이 정해져 있고 여덟 번째 날에 실행된다. 사신은 고통이나 맛을 느낄 수 없고, 감정도 없다. 오직 음악을 좋아할 뿐이다. 사신 치바는 비를 몰고 다니며 가끔 대화의 초점이 어긋난다.

  죽음을 맞이하는 여섯 사람은 나름의 사연을 안고 있다. 그래서 죽기를 원하는 이가 있고, 죽음을 전혀 예상하지 못하는 이가 있다. 담담히 죽음을 맞이하는가 하면, 세상의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이도 있다. 후지키 가즈에는 대기업 전자제품 제조회사에서 고객 불만 처리를 담당하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이상한 요구를 하는 전화로 골머리를 앓는다. 후지타는 야쿠자의 중간 보스로 의협심이 강한 남자이다. 그는 형님의 복수를 위해 죽음의 길로 뛰어든다. 거친 눈보라 속 산장에 모인 사람들은 하나씩 죽어 간다. 오기와라는 한눈에 반해 짝사랑하는 여자가 있다. 호감을 사고 사랑이 이루어지려는 순간 사신이 찾아왔다. 모리오카는 살인하고 도주 중이다. 그는 옛 기억을 찾아 마지막 여행을 한다. 미용실을 경영하는 니타 할머니는 사신을 알아보고 마지막 부탁을 한다.

  '치바는 정확하다'는 마지막 반전이 돋보이고, '치바와 후지타 형님'은 논리적인 전개가 눈에 띈다. '산장 살인사건'은 한 편의 추리극을 보는 기분이고, '연애 상담사 치바'는 여운이 남는다. '살인 용의자와 동행하다'는 막장에 몰린 인간의 본성을 볼 수 있고, '치바 vs. 노파'는 따뜻함을 느낄 수 있다. 다양한 상황에서 임박한 죽음의 순간을 이야기하는데, 세계관과 캐릭터의 설정이 가장 큰 장점이다. 취향의 차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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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랑의 달
나기라 유 지음, 정수윤 옮김 / 은행나무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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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기라 유, 정수윤 역, [유랑의 달], 은행나무, 2020.

Nagira Yuu, [RUROU NO TSUKI], 2019.

제17회 서점대상

  나는 문학성과 대중성의 사이에서 서점대상을 받은 소설을 좋아한다. 코로나19로 답답한 생활에서 인생 이야기를 읽고 싶었다. 어쩌면 이렇게 구구절절 애잔한 글을 쓸 수 있었을까? 소설 [유랑의 달]은 올해 읽은 최고의 작품이다. 주인공 여자와 남자의 심리 묘사가 매우 뛰어난데, 사쿠라바 가즈키의 소설 [내 남자](재인, 2008.)가 떠오른다. '유랑(流浪)'이란, 일정한 거처 없이 떠돌아다니는 것을 의미한다. 세상을 떠돌아다니는 인생 이야기는 이야기 자체로의 재미와 글맛을 함께 느낄 수 있다.

  내가 무리에서 떨어져 나온 이유는 '이상한 집에 사는 아이'이기 때문이었다.

  예전부터 반 아이들은 우리 엄마가 대낮부터 술을 마신다고 수군거렸다. 마음이 내킬 때만 요리를 하는 것도, 가끔씩 저녁으로 아이스크림이 나오는 것도, 집에서 과격한 성인용 영화를 보는 것도, 엄마와 아빠가 키스를 하는 것도, 반 아이들에게는 신기한 일인 모양이었다.(p.20)

  -다카히로가 죽었으면 좋겠어.

  -운석이라도 떨어져서 지구가 박살 나든가.

  다카히로 한 사람의 죽음이 전 인류의 죽음과 동등해져 있었다. 그 정도로 그 녀석이 싫었다. 정말로 죽었으면 좋겠어. 아니면 내가 죽거나. 내가 죽는 건 지금 당장이라도 가능하다.(p.31)

  십 대 여자아이와 젊은 남녀가 패밀리 레스토랑에 있다. 수수께끼 같은 짧은 도입, 무슨 사연이 있는 것일까? 의문과 궁금증은 시선을 사로잡는다. 가나이 사라사는 가끔씩 저녁으로 아이스크림이 나오는... 등 이상한 집에 사는 아이였다. 사실 남의 눈에는 이상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엄마 아빠와 함께 그들만의 재미가 있는 행복한 가정이었다. 그런데 한순간에 부모를 잃고 모든 것이 뒤바뀐다. 초등학교 4학년, 아홉 살 소녀는 이모 집에서 애물단지로 지내다가 공원에서 만난 낯선 남자를 따라간다.

  남자는 비닐우산을 내 머리 위로 가져왔다.

  "우리 집에 올래?"

  그 말이 따뜻한 빗물처럼 내 머리 위로 떨어졌다. 정수리부터 발끝까지, 달콤하고도 서늘한 것에 잠겨 든다. 전신을 뒤덮었던 불쾌함이 씻겨나간다.

  "갈래."(p.32)

  후미는 나에게 제대로 하라는 말 같은 건 하지 않는다. 학교 선생님처럼 다른 아이들하고 일제히 같은 행동을 하지 못하는 나를 곤란하다는 눈으로 쳐다보지도 않는다. 뭐든 제대로 하는 후미 옆에서 뒹굴뒹굴 만화나 보고 있어도 아무 소리 하지 않았다. 후미는 그저 후미대로 단정한 생활을 계속했다. 후미 자신이 똑바로 하는 것과 다른 사람이 똑바로 하는 것은, 후미에게 별개의 일이었다.(p.51)

  사에키 후미의 집에서 모처럼 편안하게 잘 수 있었다. 피자를 시켜 먹고, 이불에서 뒹굴며 저녁밥 대신 아이스크림을 핥아먹는... 잠시 부모님과 살았던 시절로 돌아간 기분이다. 더불어 아늑함과 안전함, 하지만 열아홉 살 대학생이 아홉 살 여자아이를 언제까지 데리고 있을 수는 없다. 이미 실종 소식이 TV 뉴스를 장식하고, 세상은 발칵 뒤집혀 있었다. 끝이 정해진 두 달의 동거는 진실과는 다르게 로리콘 유괴범과 그로부터 몹쓸 짓을 당한 가여운 피해자라는 낙인을 찍는다.

  나는 엄마에게 있어 살아남는 데 필요한 밥도 아니었고, 슬픔을 덜어줄 과자도 아니었다. 엄마가 그토록 싫어하는 '무거운 짐'이었다. 엄마는 무거운 짐을 들지 않았다. 엄마는 참지 않는 사람이었다.(p.65)

  아무리 입을 다물고 있어도 나의 이름은 나를 자유롭게 놓아주지 않았다.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정보에 목덜미가 잡혀 초중고, 아르바이트, 직장에서도 내가 '가나이 사라사 양 유괴사건'의 피해 아동이라는 사실이 반드시 퍼져나갔다.

  -너, 유괴된 동안 온갖 짓 다 당했지?

  다카히로의 그 말은 세상이라는 것의 정체를 꽤나 잘 드러낸 것이었다.

  세상 사람들이 바라보는 혐오의 눈빛은 피해자에게도 해당되는 것임을 알고 아연했다. 위로나 배려라는 선의의 형태로 '상처 입은 불쌍한 여자아이'라는 도장을, 내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쾅쾅 찍어댄다. 다들 자기가 상냥하다고 생각한다.(p.84)

  후미의 방보다 더 위로 시선을 가져갔다. 여름날 사위는 빨리 밝아와, 동쪽 하늘에 화염처럼 붉은 장미꽃색이 일고 있었다. 하지만 밤의 영역에는 아직도 어렴풋한 흰 달이 걸려 있다.

  곧 사라지겠네. 마치 나 자신처럼 여겨졌다.

  목이 잘리기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나는 가만히 옆은 달을 올려다본다.

  그런데도 달은 언제까지나 그곳에 더 있었고, 내 목도 아슬아슬하게 붙어 있었다.(p.149-150)

  이즈미가 해준 이야기와는 꽤나 분위기가 다르다. 어느 쪽이 진짜일까.

  하지만 아마도 진실 따위는 없으리라. 이즈미에게는 이즈미의, 료에게는 료의 각기 다른 해석이 있을 뿐. 나도 똑같다. 내가 아는 후미와, 세상이 아는 후미는 전혀 다르다. 그 사이에서 발버둥 친다. 료도 그럴까.(p.162-163)

  후미는 그렇게 말한 뒤, "들어올래?"하고 물었다. 후미를 처음 만난 날이 생각났다. 그날은 비가 왔고, 후미는 남색 모카신을 신었고, 내게 우산을 씌워주었다.

  -우리 집에 올래?

  달고도 차가운 얼음사탕 같은 목소리가, 내 위로 미지근한 빗방울처럼 부드럽게 떨어졌다. 15년이 지난 오늘 밤도, 나는 그날과 똑같이 쉽게 녹아들었다.

  "갈래."(p.191)

  "사라사, 요즘도 저녁으로 아이스크림 먹니?"

  맥락 없는 질문에 나는 고개를 옆으로 저었다.

  "어째서?"

  "이젠 아이가 아니니까."

  지루한 이유다. 하지만 지루함의 집합체가 일상이다.(p.206)

  "그럼 서로 맘이 같네. 사귀어버려."

  "그거랑 좀 달라. 더 절실하게 좋아해."

  "절실하게?"

  "내가 나로 살기 위해서 없어선 안 되는 것, 같은."(p.293-294)

  이모 집에서 보육원으로, 새로 사귄 남자 친구에게로... 그녀는 안식처가 없는 유랑하는 달이다. 그 일이 있고 난 이후로 세상은 혐오스러운 눈빛과 불편한 친절을 베푼다. 인간관계에서 연인에 이르기까지 영향을 주고,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인터넷 사건 기록은 가는 곳마다 발목을 잡는다. 사실하고 다른 진실을 믿어주는 이가 하나도 없다. 어느 뒷골목 빌딩 2층에 있는 카페 calico에서 후미를 만난다. 그로부터 15년, 후미는 서른네 살이 되어 있다.

  일반적인 남과 여의 사랑이 아니라 없어서는 안 되는 절실한 사랑, 놓을 수 없는 인연의 끈... 두 사람이 함께하지 않으면 불안정한 삶이 되고 마는... 한 사람은 가는 곳마다 무거운 짐으로 여겨지고, 다른 한 사람은 기대와 희망에서 어긋나버린... 불완전하기에 둘은 절대로 떨어져서는 안 된다. 세상이 아는 사실과 그들이 간직한 진실은 다르기에 따가운 시선을 받으면서도 함께 한다. 등장하는 인물의 우울한 사연을 심미적으로 풀어내어 상처 입은 인생을 보듬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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