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사가 사랑한 수식 오가와 요코 컬렉션
오가와 요코 지음, 김난주 옮김 / 현대문학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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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가와 요코, 김난주 역, [박사가 사랑한 수식], 이레, 2004.

Ogawa Yoko, [HAKASE NO AISHITA SUSHIKI], 2003.

제1회 서점대상

제55회 요미우리문학상

  뒤늦은 영화의 소문, 책의 절판, 도서정가제의 시행, 신판의 출간, 잠시 머뭇거림, 중고서점 신공으로 구판의 만남... 오가와 요코의 [박사가 사랑한 수식]은 오래전부터 꼭 읽고 싶었던 소설이다. 개인적으로 올해 서점대상을 받은 [유랑의 달](은행나무, 2020.)하고 투톱(=쌍벽)(?)을 이루는 최고의 작품이다. 독서를 하며 대부분은 결말이 궁금해서 서둘러 읽는다. 그런데 이 책은 한 장 한 장을 아껴가며 읽었다. 오랜만에 느끼는 따뜻한 숨결이고, 감동이다. '수학'을 소재로 어쩌면 이렇게 서정적인 글을 쓸 수 있을까? 문득 작가의 이력이 궁금하다.

  나와 우리 아들은 그를 박사라고 불렀다. 그리고 박사는 우리 아들을 루트라고 불렀다. 아들의 정수리가 루트 기호처럼 평평했기 때문이다.(p.5)

  "단적으로 말해서 기억을 못하는 거죠. 노망이 든 것은 아닙니다. 뇌 세포는 건강하게 움직이고 있으니까요. 다만, 17년 전에 뇌의 일부분에 장애가 생겨서 기억하는 기능이 사라졌어요. 교통사고를 당해서 뇌를 다쳤거든요. 도련님의 기억은 1975년에 멈춰 있습니다. 그 후에는 새 기억을 아무리 쌓으려고 해도, 금방 무너져 내려요. 30년 전에 자신이 발견한 정리는 기억해도, 엊저녁에 뭘 먹었는지는 기억하지 못할 정도죠. 간단히 말해서, 뇌 속에 80분짜리 테이프가 딱 한 개 들어 있다고 생각하면 될 거예요. 새로운 것을 녹화하면 이전의 기억은 깨끗이 지워집니다. 도련님의 기억은 80분밖에 가지 않아요. 정확하게 1시간 20분."(p.11)

  화자인 '나'는 이십 대 후반의 미혼모로 열 살짜리 아들을 키우고 있다. 파출부로 일하면서 새로 소개받은 곳은, 고객의 불만으로 아홉 명이 그만둔 집이다. 예순네 살인 박사는 17년 전의 교통사고로 모든 기억이 1975년에 머물러 있다. 뇌에서 기억을 저장하는 기능을 상실해 80분, 즉 1시간 20분만 기억을 유지할 수 있다. 그래서 매일 아침 현관에서는 새로운 만남이 이어진다. 박사는 메모지에 필요한 것을 기록해서 소맷자락에 붙여놓는다.

  "맞아. 그야말로 발견이지, 발명이 아니고. 내가 태어나기도 전, 아니 먼 옛날부터 아무도 모르게 존재해왔던 정리를 파헤쳐내는 거야. 신의 수첩에만 기록돼 있는 진리를 한 줄씩 베껴 쓰는 것이나 다름없지. 그 수첩이 어디에 있고, 언제 펼쳐질지는 아무도 몰라."(p.63)

  "28의 약수를 더했더니 28이 됐어요."

  "오호......"

  박사는 아르틴의 예상에 관한 무늬에 이어서 '28=1+2+4+7+14'라고 썼다.

  "완전수로군."(p.64)

  수학에 관한 박사의 사랑, 열정은 매우 대단하다. 만날 때마다 신발 크기는? 생일은? 전화번호는? 숫자에 의미를 부여하고, 수의 세계에 몰입한다. 오래전 과거에 머무르며 짧은 기억이라는 후유증을 앓고 있지만, 그의 삶은 수와 혼연일체였다. 오만함으로 수학적 지식을 뽐내는 게 아니라 겸손함으로 신의 영역에서 펼쳐진 진리를 발견해가는 중이다. 나와 아들 루트는 박사를 돌보며 수의 세계에 매료된다.

  "신은 존재한다. 왜냐하면 수학에 모순이 없으니까. 그리고 악마도 존재한다. 왜냐하면 그것을 증명할 수 없으니까."(p.142)

  마침내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처음에 나는 그 소리가 박사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줄은 모르고 방 어디에선가 망가진 오르골이 울리는 줄로 착각했다. 루트가 손을 베었을 때 들은 울음소리와는 전혀 성질이 다른, 오직 자신만을 위한 나직한 울음소리였다.

  가장 눈에 잘 띄는 곳에 붙어 있는 메모지, 박사는 윗도리를 걸치면 보기 싫어도 보게 되는 가장 중요한 메모를 읽고 있었다.

  '내 기억은 80분밖에 지속되지 않는다'(p.144-145)

  첫 만남, 집안일, 외출, 한신 타이거스, 야구장, 고열, 해고, 오일러의 항등식, 복직, 치과 병원, 생일 파티, 에나쓰 야구 카드...등 숫자하고 연결된 에피소드는 다양한 수의 세계로 인도한다. 나는 수학을 암기과목으로 배웠다. 요즘하고 다르게 이해하기에 앞서 무조건 외우는, 공식에 주어진 숫자를 대입해서 답을 찾는 방식이었다. 사고력, 논리력, 추리력하고는 상관없는, 인생을 살아갈 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은 지루한 숫자 놀음이었다. 그런데 박사가 사랑한 수학은 놀랍도록 아름다운 세계이다. 그 감정을 고스란히 독자에게 전달한다. 한 번 더 읽고 싶은 소설이다.

  "소수의 성질이 분명해졌다고 해서 생활이 편리해지는 것도 아니고 돈을 버는 것도 아니지. 그러나 아무리 세상을 등지고 있다 해도, 수학의 발견이 결과적으로 현실에 응용되는 사례는 얼마든지 있어. 타원 연구는 혹성의 궤도를 밝혀주고, 아인슈타인은 비유클리드 기하학으로 우주의 형태를 제시했지. 소수 역시 암호의 기본으로 전쟁을 돕고 있어. 한심한 일이지. 그러나 그것은 수학의 목적이 아니야. 수학의 목적은 오로지 진실을 밝혀내는 데 있어."(p.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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