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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적 불감증 - 유동적 세계에서 우리가 잃어버린 너무나도 소중한 감수성에 관하여
지그문트 바우만.레오니다스 돈스키스 지음, 최호영 옮김 / 책읽는수요일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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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월 19일



    작년 내게 최고의 영화는 <시카리오(원제 : Sicario)>였다. ‘최고’는 연출기법과 배우의 연기와, 그런 것들이 준 의미가 아니었다. 통제하고자 하는 측이 허용한 어마어마한 폭력과 그를 둘러싼 비리, 상부의 결정, ‘늑대들의 땅’에 비유된 현실의 얽히고설킨 배경 역시 오랜 뒷맛으로 남지 못했다. 오히려 감독이 의도한 마지막 장면이 잊히지 않는다. 총격이 오가는 시내의 소음을 뒤로 하고 아이들은 다시 축구 경기를 시작하며, 이를 학부모들은 무심히 지켜본다. 폭력은 자신에게만 찾아오지 않으면 된다. 타인에게 가해지는 폭력은 나의 것이 아니다. 이렇게 총알은 유령이 되어 도시를 날아다닌다. 우리의 불감증을 조작하는, 이미 인간 안에 심어져 있는 화약통에 불을 붙이는 모든 것들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든 저항해봐야 한다. 방법을 잘 모르겠다는 것이 문제이지만. 그 기대로 이 책을 읽었다.


    지그문트 바우만과는 2년 여 만에 다시 만났다. 유동과 액체는 그의 상징이다. 이 단어를 둘러싼 멀미날 것 같은 일상의 ‘뭉글뭉글함’만 기억한다면 어느 독자든 그를 쉽게 소환할 수 있다. 그런 일상을 못 느낀다면 얘기는 다르고. 아, 한 가지 기억해낸 것이 있다. 그의 긴 문장이다.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에서 적응을 하지 못했다면 『모두스 비벤디』는 물론이고, 이제부터 말할 책 『도덕적 불감증(원제 : Moral Blindness)』은 덤비지 못할 복잡한 미로일 것이다. 중문들로 뒤덮인 원문을 고생하며 상대하는 역자의 모습이 얼핏 그려지기도 한다. 여기에다 노학자를 상대하는 혈기왕성한 레오니다스 돈스키스의 담화마저 중문을 쏟아낸다.


    감안해야 할 점이다. 미처 준비하지 못한 독자들에게는 적응이 문제가 되는 책이긴 하다. 하지만 읽을 만한 가치가 있다. 사실 그 가치를 허투루 말하는 건 잘못이다. 결국 ‘그 이야기’를 하는 인문학과 사회비판에 싫증을 내는 이들에게는, 다소 실망스럽겠지만 이렇게 말해야겠는데, 이 책 역시 그런 결말을 내린다. 하지만 중간의 담화를 뛰어넘는(무시하는) 우를 범하지 않았으면 한다. <시카리오>의 불감증이 시각적인 것이라면, 방금 언급한 우는 도덕적 불감증에 사로잡혀 거울을 보지 않는, 내적인 불화, 혹은 소비주의적 환멸에 지나지 않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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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행이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아쉽기도 하다. 악마는 없다. 특히 <콘스탄틴>, <애나벨>, <인시디어스>처럼 수도 없이 소비된 악마, 종교적 이름의 세속적 악마들은 없다. 강력한 폭력을 휘두르면서도 일부의 경험으로 제한되는 ‘악의 체험’은 이 시대에 부단히 가공되고 있다. 재미있긴 하다. 대체로 실화를 바탕으로 하기에 이런 중세적인 악마는 최첨단 과학의 도움을 받아 밝혀지는 구조를 가져야만 하고, 그래서 재밌다. 다행이기도 하고 아쉽기도 하다는 건, 그런 ‘보이는 악마’는 허구임이 밝혀졌고 그 대신 ‘민영화된 악마’, ‘허약한 악마’가 우리 주위에 있다는 것은 사실로 밝혀진 까닭이다.


    아이히만에서 조우한 돈스키스와 바우만이 역사(기억)의 조작과 탈도덕으로 나아가는 과정은 그 중간을 건너뛰고 보면 다소 비약이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저 둘은 분명한 관련이 있다. 아이히만. 그는 수많은 유대인들을 죽일 악마와 같은 사람이 원래 아니었다. 그는 건강한 사람에게도 도덕적 광기가 불어 닥칠 수 있는 기이한 현상을 환기시킨 수많은 사례 중 하나다. 두 학자는 묻는다. 그게 어떻게 가능한가?


    여기서 제시되는 게 바로 ‘기억 조작’이다. 우리가 온전치 못한 기억을 추억하며 사는 건 당연하다. 망각은 축복이기도 하고. 문제는 이런 차원의 기억이 아니라, 역사와 정체성에 관한 기억이 조작되어 바우만이 우려한 것처럼 논리와 우선순위가 떨어져 나간 ‘그릇’ 정도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 그릇이란 무엇인가? 바로 정체성의 오락화. 호모폴리티쿠스의 ‘호모루덴스’화다. 이 표현은 무섭다. “악마가 사는 복마전의 현관에 도달”(61쪽)했다는 바우만의 진단. 그 조작의 사례로 그는 팔레스타인을 상대하는 이스라엘의 폭력을 든다. 잊지 말자. 그는 유대인이다. 유대인인 그가 “먼저 공격하는 자가 정상에 선다는, 그리고 그런 자가 계속 정상에 있으면 처벌받지 않는다는”(66쪽) 것마저 배워버린 이스라엘의 통치자들과 그에 동조하는 세력을 비판한다. 홀로코스트에서 ‘복수’를 배운 그들을.


    이렇게 연쇄 작용이 일어난다. 누구에겐가 들었다. 정치는 누가 먼저 꼬리를 물고 늘어지는가의 문제라고. 어차피 자신도 꼬리를 물릴 것이고 그렇게 물고 물린 둘은 빙글빙글 돌며 역사의 춤을 출 것이다. 여기에서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의 유치한 논쟁은 춤사위를 북돋는 훌륭한 장단이 된다. 돈스키스는 그 관계를 해체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 무대에서 우리가 보는 건 지속적인 자극이다. 정치적 추문이다. Yellow한 문구들이다. 사회적이고 정치적 감각의 후퇴다. 추문을 생산하는 건 스타를 만드는 것과 같다. 둘은 베를루스코니를 말했지만 우리는 트럼프를 보고 있지 않은가. 정치적 스타와 영웅이 TV에 나와 상대를 언어로 가격하고 선동하면, 그럴수록 우린 ‘탈도덕화’된다. 그들이 겨냥하는 상대는 창조된 허구인 타자들이고, 남는 건 그 타자들이 교묘하게 타격을 받는 가학적인 말이다. 토론, 그런 건 없다. 우린 그런 장면을 싫어한다. 너무 박박 긁어 생채기가 생긴다. 그리고 학자들의 지혜로운 말을 그 위에 바른다.


    우리가 탈도덕화되는 또 다른 이유는 속도사회다. 이 용어는 이제 별로 낯설지 않다. 생각할 겨를이 없는 시대다. 그러니 도덕적 판단에 따른 오명을 두려워해 자신에게서 그 짐을 덜어버린다.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결론을 내리긴 어려울 것 같군요.”라고 말하며 자리에서 슬쩍 벗어나려고 한다. 대신 오명의 고통이 없는 어딘가가 가상으로 마련된다. 탈도덕의 공간. 이건 우리의 양심 문제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수많은 정보가 한 개인이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밀려오는 쓰나미 현상이,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소득불평등 현상이 우리에게 탈도덕화의 유혹을 쏟아 붓는다.


    빠르다. 기억이 사라져버린다. 조작되기 쉽다. 돈스키스는 대학을 바로 그런 시대에야말로 유지해야 할 공간으로 본다. 근대적 감수성을 수호할 장으로 말이다. 하지만 그의 조국 리투아니아도 우리의 사정과 별반 다르지 않은 모양이다. 이 문제는 제 1장과 제 4장에서 수시로 교차된다. 한편 속도사회에서 바우만은 언어를 보호하려고 시도한다. “황급한 삶과 순간의 폭정의 첫 번째 피해자는 언어”(85쪽)라고 확실히 말한다. 한 번에 140개 이상의 문자는 허용하지 않는 특정 공간에 한해서만 생각해볼 문제가 아니다.


    나 역시 바우만의 궤에 포개놓을 의견이 많다. 영화 100자평, 책 100자평, 나는 이런 짧은 문장들로 오가는 ‘인스턴트적’인 담론 현상을 결코 긍정적으로 보지 않는다. 짧고 간결해서 시크한 멋까지 풍기는, 흡사 아포리즘을 추종하는 낭만적 문화와도 겹친다 할 수 있는 이런 현상 속에서, 단편적이고 순간적인 것의 전문가 행세는 두 학자가 말한 기억조작의 위험에서 단 하나도 자유롭지 않다. 이는 수많은 말들 속에서 홀로 떨어져 있으며 정치적인 연루와 극소량의 자유를 유지하는 ‘유랑하는 학자’, 아니 ‘애호가(딜레탕트)’들을 옹호하는 바우만의 다소 비관적이고 소극적인 발언과 닿는다. 사견이나 나는 이 대목에서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좀머 씨’가 떠올랐다. 물론 어느 정도의 비관은 불가피하다고 봐야 할까. 바우만은 이런 표현을 몇 군데에서 썼다. “강의 다리 밑으로 많은 물이 흘렀다.”(125쪽) 무색하다는 말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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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치에 대한 맹비난은 돈스키스 쪽에서, 그리고 저항에 대한 비판은 바우만 쪽에서 나온다. 두 논조가 제 2장의 씨줄과 날줄이다. 기술이 정치를 앞질렀다는 돈스키스의 말에 동의한다. 바우만처럼. 이 말은 기술에 의존하지 않으면 정치적으로 아무런 힘도 발휘할 수 없다는 뜻이고, 굳이 트위터로 온갖 공방을 일삼는 정치인들의 “나 여기 있어.” 발언들을 예로 들 필요도 없다. 여기에다 소비되는 정치까지 붙여놓으면 우리 시대는 두 학자의 말마따나 진정 소비와 온라인의 시대다. 그래도 희망은 찾아봐야 하니 (소비에서는 아무런 단서도 찾을 수 없으므로) 바우만은 인터넷 공간의 혁명성, 우리가 아랍의 봄 사태로 새삼 주목했었던 푸르른 희망의 이름을 들여다본다. 아쉽지만 그는 줄곧 비관적이다.


    주의해야 할 점은 바우만이 고개를 갸우뚱하는 대상이 비단 인터넷에 한하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그는 저항을, 점거를, 타파를 겨냥한다. 독재자를 몰아낼 수 있다고 하자. 그리고 실제 달성된 바가 있다. 20세기의 유명했던 독재자들 중 상징적으로 축출된 이들. 사살된 자도 있었다. 그렇게 보면 시리아는 참극의 미완이다. 여하튼 이렇게 ‘독재자 없는 정권’을 향한 점거가 성공한다고 해도 그 이후의 건설에 대해서 점거와 저항과 타파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여기에 문제가 하나 더 붙는다.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민주주의가 정말 무섭고도 완벽에 가까운 이유는 분명하다. 아무리 많은 반대도 대체로 흡수하는 본성을 가지고 있다. 게다가 우리는 속도사회에 산다. 빨리 잊힌다. 감정이 먼저 소멸한다. 콘래드의 ‘바다’와 카네티의 ‘바다’, 그 군중의 매력과 힘이 사람들을 똘똘 뭉친다고 하더라도 다음 장면은 영화 <미스트>와도 같다. 안개가 걷혀야 보이는 바로 옆이 군중들에게 현전하지 않는다. 민주주의 정권은 바로 그 점을 간파하고 있다.


    그래도 우리는 반드시 저항하고 상대해야 하는 정치적 현상과 특정 정치인을 눈앞에 두고 있다. 이념과 사상에 따라 다르긴 할 것이지만, 정치는 늘 그런 상황을 염두에 둔다. 그렇다면 정치인들의 저 “비생산적인 충돌”(163쪽)에, 좌우 진영의 화해 불가능한 싸움에 우리가 브레이크를 걸 순 없는가? 돈스키스가 묻는다. 과연 누가 우릴 대변해주는가? 권력 대행자의 미래는 무엇인가? 하지만 자답으로 돌아가면서 사회운동의 가능성을 언급할 뿐, 즉 대의제의 의미를 확고히 하라고 조언할 뿐 딱히 내려지는 답은 없다. 나는 그 사이에서 잠깐의 머뭇거림을 본 것 같다. 민주주의는 무섭다. 소비주의와 결합되어 이제 누가 나를 대변하는지 물을 수 없는, 그래서 투표권 거부의 충동마저 느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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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 챕터 제목별로 딱 분간되는 책이 아니다. 공포, 정치, 감수성 등의 이름이 여기저기 매듭지어 있다. 정확히 나뉘어져 있으리라 기대해서도 안 되는 책이긴 하다. 나이 지긋한 바우만과 열혈학자 돈스키스가 논하는 건 그 모든 것. 둥실둥실 떠다니는 보이지 않는 유령 같은 유동하는 세계니까. 그러나 그 유동성에는 우리의 무지와 무기력과 그 둘로 인한 굴욕감의 쓰라림이 짙게 스며들어 있다. 하지만 그게 비단 우리만의 문제인가? 우리가 대표라고 뽑아놓은 정치인들은 문제해결법도 모르며(무지), 그걸 해결하려고 하지도 않고(무기력), 그로 인해 우리에게 실망감(굴욕)을 안겨준다. 그러니 우리는 불안해하지 않으려고 그 무한이동의 자유, 이리저리 흔들림의 자유를 포기한다. 공포를 무시하는 것이다.


    놀랍게도 우리가 기대하던 정치는 상업과 손을 잡고 그 공포를 밭에다 뿌려버린다. 우린 열매를 소비하며 풍작을 말한다. 이상한 풍작이다. 먹을 것은 참 많은데 소통이 위축되어 자기 자신을 지갑 속에 넣고 꺼내지 않는다. 이러니 상실된 균형이라는 과제를 누가 바로 잡을 수 있을까? 문제는 더 있다. 국가는 씨를 뿌려놓고 시장에게 맡기며 알아서 하라고 한다. 우리에게 붙어버린 공포의 그림자는 우리가 알아서 씻어내야 한다. 바우만의 말을 빌려놓는다. “사회적 지위의 심각한 허약성은 오늘날 사적인 문제로, 개인이 사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자원을 이용해 처리하고 극복할 문제로 재정의 되고 있다.”(189쪽)


    한편 국가가 이러한 방기 탓에 스스로 폐점하게 된다는 건 별로 놀라운 귀결도 아니다. 우린 국가의 무능을 묻는다. 그렇게나 기업과 시장에 목을 매면서도, 그 사이에 정작 ‘우리’에게는 별다른 관심도 보이지 않으면서, 기업인의 사면과 낙수 현상을 가증스레 말하면서도, 정작 그들은 상황을 호전시킬 수가 없다. 나는 투표하지 않겠다고 하루를 집에서 쉬는, 그냥 직장에서 일하는, 거리를 산책하는 이들에게 무책임을 되물을 정도로 정당과 부당의 확단을 내릴 수 없다. 이런 유보 상태가 겨냥하는 대상은 분명하지만.


    여기서 다시 돈스키스는 기억의 조작과 상실을 불러온다. 페이스북 현상을 말하면서 말이다. 참여 욕구가 늘어 그만큼 언어는 남발되고, 바우만의 우려처럼 언어는 피를 보면서까지 “설득력 있는 피해자”(217쪽)를 양산한다. 그런 말이 시청률의 우위를 점하며 ‘좋아요♡’를 얻는다. 여기에 들지 못하면 그건 허구에 불과하다. 하지만 생각해보자. 남발되는 언어는 신중하게 배치되고 마름질된 언어만큼이나 왜곡된다. ‘좀비의 언어’라고 하면 될까. 자기가 살아 있는, 피가 도는 말이라 주장하는 창백한 얼굴의. 바우만은 인터넷의 혁명 가능성을 논하면서 현장의 한계까지 나아갔고, 이 지점에서 돈스키스는 순식간에 생겼다가 해체되는 시뮬라시옹의 공간, 그 깨져버린, 점묘적인, 어지러운 공간의 폐해마저 비판한다. 왜곡되는 기억과 상실되는 감정을. 그리하여 그토록 열광하며 반긴 아랍의 봄 앞에서 서양은 왜 그렇게나 무감각했는지를 비판할 수 있다. 어디에 우리의 실체가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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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어가는 대학을 논하는 제 4장은 동떨어진 듯 시작하지만 실은 소비주의 사회, 그리고 매체만능주의 사회와 닿아 있다. 그럴 수밖에 없다. 돈스키스는 영국의 예로 대처 이후 변화된, 죽어가는 대학을 말한다. 바우만은 그걸 ‘대처 시대 이후’로 정정하고자 한다. 긍정의 평가에도 불구하고 민영화로 국회 쓰레기 대란까지 겪은 대처는 그에 관해서는 거의 대표적인 상징이다. 하지만 이 책에는 언급되어 있지 않은 오늘날을 하나 예로 들어도 된다. 2008년 금융 위기 때에 영국 대학들이 입은 타격은 엄청났고, 현지에서는 합병 이야기가 오가면서 대학이 더 기능적인 자세를 취하도록 무시무시한 수준의 압박을 받았다. 이는 두 학자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둘은 우리가 그 사태의 피해자인 것처럼만 생각하는 기만적 자세를 비판하며 정확하게 지적한다. 그건 우리가 초래한 사태였다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대학이 소비의 예외 대상인 게 더 이상하지 않은가? 그래야만 한다고 떳떳하게 말하고 다니는 건 위선이 아닌가? 우리가 화약통을 끌어다놓고 시기적절한 때에 터졌다고 봐야 옳다.


    나는 인문학을 공부하고 국문학을 전공한 까닭에 사회 나가기 직전인 지금 이런 말을 주변에서 심심치 않게 듣는다. 그거 해서 뭐 먹고 살 거냐고. 동기들 중에는 경영 전공으로 활로를 찾은 이들이 많다. 그들은 포기해야 할 것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한, 적어도 大學의 의미를 갈구해본 적이 있는 이들이었다. 많은 대학생들이 맹목적으로 그 추세를 따라간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그건 큰 무지에서 비롯된다. 아직 대학은 대학이 해야 할 일을 두고 아예 손을 놓아버리진 않았다. 아슬아슬한 줄타기 중인 건 맞지만. 그래서 수호해야 할 의미의 기치를 내건 동문, 교수진, 학우들의 저항이 있었고, 필자 동생의 모교인 한국예술종합학교 같은 특수한 기관에서는 기능주의화에 반대하는 운동이 있었다. 돈스키스를 보면 그게 리투아니아에서도 분명한 문제로 제시되는 듯하다.


    이 책을 읽으면서 줄곧 든 생각 중 하나는 저 두 학자가 한국 사회를 분석하면 동구의 문제이니 리투아니아의 문제이니 하는 지역적 이야기를 조금이나마 세계적인 문제 중 하나로 확장해서 해석하진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당연히 그런 진단을 내릴 것이다. 개그맨 유세윤 씨가 한 예능 프로그램에서 선택을 머뭇거리는 패널에게 던진 말처럼 여기는 ‘최강’ 자유주의 국가. 진중권, 홍세화, 강준만, 박노자, 그리고 최근으로 보면 다니엘 튜더와 같은 비판적 필진들은 『도덕적 불감증』과 전혀 다른 말을 하고 있지 않고, 나는 그것이 자본주의와 민주주의, 그리고 정치적 세태를 공감하고 공유할 수 있는 거의 모든 나라에게 적용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이런 초보적 생각도 바우만의 말처럼 환멸과 냉담에 젖은 채 사회에 들어갈 유동적 한 세대, 젊은 세대의 입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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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스발트 슈펭글러의 『서구의 몰락(원제 : Der Untergang des Abendlandes)』을 둘러싼 두 학자의 담화에 앞서 생각난 건 브렉시트(Brexit)였다.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를 놓고 영국민의 53% 정도가 탈퇴 입장을 표명했다는 한 여론조사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유럽에서 가속화되는 문제다. 유럽연합에서 탈퇴를 하든, 아니면 한 국가에서 한 민족이 영토를 가진 주권국가로 분리·독립을 선언하려고 하든, 유럽은 분명 통합의 기치를 내걸며 지난 반세기의 얼룩을 함께 치유하고자 했던 움직임과는 정반대의 동향 속에 있다. 우린 경제가 어려우면 나라는 쪼개지고 극우인종주의가 득세한다는 걸 안다. 게다가 지금 상황은, 즉 바우만이 말한 ‘포스트-베스트팔렌 시대’의 민족국가 유령이 계속 떠도는 상황은 국가의 무능과 소멸이 이야기되는 추세에 있다. 종말과 멸망은 없다고 이야기하는 측의 논지도, 즉 형태론에 반하는 논지도 분명 이해가 되지만 저 두 단어가 이해 안 되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 슈펭글러가 다시 언급된 것이다. 돈스키스가 지금 상황에다 포개어놓은 서구의 몰락은 교묘하게 맞아떨어지는 것도 같다. 분명히 하고 넘어가야 하는 건, ‘문명 유기체론’ 정도로 요약될 슈펭글러의 저 단어는 WWⅠ 이후 분위기를 반영한 것으로 문화는 서로 교착이 불가능하다는, 일종의 인종주의와 맞닿는 단어라는 거다. 그 상황이 지금 유럽에 도래했다는 것이 바로 돈스키스의 논점이다. 왜 그가 디스토피아 소설의 대표작들을 이 책에서 내내 언급하며 그 망조(亡兆)의 분위기를 구태의연하게 반복적으로 상기시킨 것인지는 사실 ‘서구의 몰락’에 와서야 온전히 이해될 수 있으리라. 그가 “반자유주의적인 새벽”(304쪽)이라 부른, 하지만 이미 한 번 겪었던 참상의 새벽이 다시 왔다. 유럽은 지금 극우주의가 득세하고 있다. 서서히 나온 것이 아니라, 때를 그들이 마침내 만난 것이다. 그렇다면 바우만은?


    다행이도 이 노학자는 희망을 보자고 한다. 디스토피아의 제기 이후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유토피아를 찾는 게 아니다. 그건 허황됨이고, 가식이며, 무엇보다도 기만이다! 바우만처럼 비관을 유지하되 역사의 사례에서 얻어낸 긍정적 교훈의 사례를 다시 한 번 우리가 실현할 수 있다는 positive의 분위기가, 그 마력에 휩싸인 상태가 필요하다. 간단하게 정리하자면 그가 말하는 건 “민족·종교적으로 다양한 집단이 오랫동안 평화롭게 공존하면서도 생존을 위해 비슷하게 혼합된 환경”(333쪽)의 구축이다. 민족국가의 연합은 군사의 힘으로도, 경제의 힘으로도 달성된 바가 없다. 경제에 매달리면서 유럽연합이 실패를 거듭하는 이유다. 유럽이 수많은 민족의 장으로 그 역사를 반복해오며 배운 중요한 교훈은 바로 타자와의 공존법이다. 바우만은 그것이 유럽의 유산이라 말한다. 서구의 몰락에는 결코 동의하지 않는다. 시종일관 비관의 뉘앙스를 풍기던 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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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게 될 것인가의 문제에 대해서는 학자인 입장에서 명확히 답할 수 없을 것이다. 그 까닭은 무엇보다도 현실의 원리주의 탓이라, 나는 생각한다. 대학에서 종교비교를 배우며 여러 분쟁들을 조사한 적이 있다. 장문의 과제는 체첸의 것을 고민해서 썼는데, 결국에는 평화로의 길을 제시해야 한다는 선에서 마무리되었지만 현실의 원리주의 문제는 일부 맹목적인 사람들에게 워낙 유착된 것이라 그걸 제거한 상태를 상상해보는 것조차 어렵다. 그리고 생각해본다. 원리주의는 선택하는 것일까? 선택되는 것일까? 나는 그것이 주체화의 과정이라 감히 말한다. 돈스키스는 어니스트 겔너의 용어 ‘모듈형 인간’을, 쉽게 말해 레고처럼 이것저것 갖다가 낄 수 있는 부품형 인간을 제시한다. 선택적 인간, 상호 교체의 가능성, 유혹과 쾌락과, 신뢰의 조작과, 무엇보다도 배반을. 그가 “작은 돈 후안들”(371쪽)이라 부른 유형의 인간들. 그리고 그들이 되지 말라는 충고가 이어진다.


    우리가 이상적인 무언가를 달성하지 못하게 되는 까닭은 그렇게 하지 못하게 만드는 부품을 가져다가 끼기 때문이다. 전통적인 원리주의란 없다. 성경에 대한 원리주의는 간결한 진리를 추구하려는 일부 미국인들에게서 시작된, 독일의 비판적 성경 해석에 대한 반동으로 등장한 하나의 선택이었다. 종교에 대한 원리주의는 서구-이슬람의 분명한 대립이 있을 거라 생각하는 이들이 권력을 얻기 위한 과정에서 제조되었으며, 그들의 서구화와 경제적 고립 사이의 연관성에 강박적으로 집중한, 일부 사람들이 선택한 관념이었다. 그리고 이런 선택이야말로 무지와 무기력, 굴욕감이라는 ‘공포의 3요소’에서 뒤따른다.


    돈스키스는 분명하게 말한다. 모듈형 인간의 인간관계는 그른 것이며, 그것은 사랑을 통해 자기 자신을 아는 태도와 타자의 모든 것을 다 알려고 하지 않는 태도에서 극복될 수 있다. 타인을 거치지 않는 ‘자기에의 앎’은 왜곡된다. 게다가 우린 첩보기관이 아니다. 사생활의 절멸과 소비주의로 촉발된 우리의 문제 해결은 돈스키스가 ‘사랑’이라는 단 하나의 단어로 축약해버린 삶에의 태도로 해결된다. 진부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일부는. 그들 중 대부분은 사회와 세계에 대한, 무엇보다 삶에 대한 관심으로 이 책을 펼쳤을 것이므로 ‘작은 돈 후안’이라 부를 수는 없다. 나도 진부하다는 생각에 동의한다. 이 책에서 두 학자가 서로에게 “전적으로” 동의한다고 했던 그 열렬함과 진지함으로. 하지만 그 비관에서 우린 이 책이 비판하는 세계로부터 거리를 둔다. 사랑? 진부해. 그러나 여기서 그치진 않으리라. 그 감수성이 한 번 움직이게 됐으니, 기대하게 되는 것이다. 비관 속에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우리에게 찾아올 또 한 번의 맥동을.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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