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의 미술관 - 그림이 즐거워지는 이주헌의 미술 키워드 30 이주헌 미술관 시리즈
이주헌 지음 / 아트북스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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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1.24

 

  이주헌氏는 ‘미술’이라는 척박한 분야에서 성공한 몇 안 되는 국내파 저자이다. 그가 많은 사랑을 받는 이유는 그가 대중을 만족시킬 줄 알기 때문이다. 나 역시 많은 것을 읽고 배웠다. <지식의 미술관>을 펴보면 온갖 밑줄로 낙서를 한 흔적이 있다. 다만 나는 이번 리뷰에서 이 책의 타이틀을 빌려 우리나라 미술도서 시장의 흐름에 대한 비판을 견지하고자 한다. 물론 이 글에서 짚어보는 <지식의 미술관>의 한계점과 그의 서문이 갖는 태도의 시대성이 그의 다른 책에까지 모두 적용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재차 밝힌다. 

  미술은 우리나라에서 단편적인 교양으로 취급받고 있다. 따라서 왜 그 작품이 명작인지는 주변지식의 종합으로만 판단하도록 권장된다. 하지만 이것이 원래 미술의 모습은 아니다. 단지 하나하나 정보를 쪼개어 경제성을 살리는 전략이 이 시대의 편의에 의해 대세가 된 풍토일 뿐이다. 미술은 본래 지식이 아니다. 미술의 지식은 주석 이상도 아니다. 또한 지식이어서는 안 되는 이유가 이 시대의 대중들이 가진 속성에서도 추론되는 바이다. 나는 이 책을 읽고자 하는 미술애호가들에게 지식일변도로 치닫는 우리나라 미술문화계의 이해가 왜 잘못된 것인지를 상기시키는 역할만을 이하 글들에 심어놓았다. 오해가 없길 바란다. 나도 그의 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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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 미술이 부분적으로는 ‘지식’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유독 <지식의 미술관>이라는 제목에 거부감을 가지고 있던 까닭을, 아마 이곳에 오기 전부터 나를 알고 있었던 나의 오래된 이웃블로거들은 알고 계실 것이다. 나는 미술도서의 저자들이 대중의 무지를 겨냥해 조금 더 겸손해져야 한다고 늘 생각해왔으나, 작금의 상황에 큰 변화는 없다. 학계에서는 잰슨과 곰브리치 이상의 새로운 미술사관을 지닌 학자들의 놀라운 책이 나와야 한다며 입을 모은다. 우리나라에도 뛰어난 학자들은 많다. 하지만 서양미술을 대하는 토양 자체가 서구와는 천지차이일 수밖에 없는 까닭에 그들의 집대성된 명작이 나오기 위해서는 더 많은 시간이 요구되는 핸디캡이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임영방 교수의 책들은 참으로 명작이다.) 

  대중적인 저자들의 책에도 다소 획일적인 구조가 있어 아쉬운 것은 매한가지이다. 시대 구분을 통해 챕터별로 끊어 설명하는 것에도 학자들 간의 이견이 많고, 그 부분에 유독 많은 저자들이 조심성을 가지고 접근하지만 미술을 “끊어 설명하는” 전략은 예전 그대로이다. 특히 현대미술일 경우가 이런 경향이 심하다. 물론 대중들에게 교양 삼아 읽어볼 정도의 책을 내놓을 것이라면 그런 책들이 잘 팔리고, 인기도 많고, 또한 영양가도 높다. 하지만 미술은 ‘스토리’이다. 지식은 스토리의 주석일 뿐이다. 극단적인 예로, 만약 우리에게 누군가가 영화로써 한 사람의 인생을 소개한다고 했을 때, 그가 단편적 설명들을 나열한 것과 스토리를 살려 표현한 것 둘 중 어느 것에 사람들이 박수를 쳐줄까? 그나마 미술가 평전들은 대중들에게 넓은 눈을 갖게 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지만 스토리가 누락된 나머지 책들은 주식(主食)이 될 수 없다. 여러 미술책을 접하며 늘 아쉬웠던 부분을 정리하자면, 나의 지론은 이러하다. 

  나는 미술공부를 하는 동안 마랑고니의 <보기 배우기>라는 문제작을 읽으면서 결코 미술이 대중화될 수 없으리라는 패배론적 관점에 빠지기도 했는데, 이주헌氏도 비슷한 말을 했다. 뛰어난 감식안은 쉽게 얻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감식안을 얻는 방법에 있어서 마랑고니와 이주헌氏의 접근은 상이하다. 나는 둘 중 마랑고니의 의견이 훨씬 타당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런 글을 쓰게 되었다. 이 리뷰는 이주헌氏의 <지식의 미술관>에 대한 글이지만 (혹시나) 미술에 대해 심도 있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이 글을 읽을 것을 고려하여 마랑고니의 의견을 부득이하게 참조하게 되었다. 

  신랄한 어투를 자유자재로 구사해 소위 ‘안티’들을 끌고 다녔던 이탈리아의 고집쟁이 마랑고니는 그의 책 <보기 배우기>에서 대중적 저자들이 대중들을 상대로 미술을 ‘주입’시키려는 현학적 태도에 대해 이렇게 비판한다. “원칙적 오류는 아직 보고 이해하지도 못하는 사람들에게 예술작품을 보여주고 또 그것에 대해 끊임없이 이야기한다는 사실이다.” 때론 추상적이며, 얼토당토하지 않은 자기적 분석으로 독자들을 매혹시키거나 편견을 갖게 하는 저자들도 있으니, 마랑고니의 지적은 적절하다고 하겠다. 그리고 저자들은 대중의 성향에 대해 십분 이해해야 하나, 그 부분에 있어서도 결핍이 있는 듯하다. 무슨 말인가 하면, 대중들은 “마지못해 흥미를 보이는” 승차감을 지니고 있다는 뜻이다. 

  우리는 스스로를 대단히 똑똑한 사람이라 여기지만 막상 ‘대중’이라는 집단은 단순한 루머 하나에도 자신의 의견을 180도로 바꾸는 경향을 갖는다. 그리고 그들은 요즘 들어 교양에 부쩍 관심을 갖고 있는데, 미술이 여기에 포함된다. 즉, ‘지식의 미술관’이라는 테마는 교양인들의 지적 욕망을 만족시켜주는 능력에 있어서는 탁월할 수 있어도 정작 미술을 좋아하나 망설이는 사람들에게 어떤 진입로 역할을 하긴 어렵다는 것이다. 지식이 흥미 있을까? 지식이 곧 교양이라면 성립될 논리이지만 우리는 때론 교양을 경멸하기도 한다. 이런 사람들에게 ‘지식’이라는 단어는 미술의 일면을 크게 부풀려 받아들이게 만들기도 한다. 마랑고니는 이에 “지식으로만 가르치는 방식은 시들은 열매만을 내놓았을 뿐이다.”라고 일갈한다. 그가 내놓은 방책은 그렇다면 대체 무엇일까? “보는 습관”이다. 

  이번에는 다시 이주헌氏의 서문으로 돌아가 보자. 그는 “지식과 경험은 구슬이고 직관은 꿰는 실이다.”라고 했다. 그리고 그림 감상의 경험이 적은 사람들이 작품에서 ‘스토리’만 이해하고 그 이상의 호기심은 갖지 않는다고 했다. 그가 말한 ‘그 이상의 호기심’이란 이런 것들이다. “시대적 조건, 당대의 역사, 작가의 성격, 취향, 신분, 철학, 작품의 미학적인 구조, 조형어법, 사조, 스타일 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요소.” 그리고 양비론을 내놓는다. “지식의 양이 더 많다고 더 뛰어난 감상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와 “직관의 능력을 배양하기 위해서는 지식과 경험의 확대를 위한 노력이 필수적이다.”라는 것이다. 둘은 모순 관계에 있다. ‘적당량의 지식’이 정답이라면 그 선은 어디에서 어디까지 그어져 있을까? 그가 내리지 못한 답을 마랑고니가 내린다. 구성요소를 학습하는 것이다. 이 점에서 마랑고니는 탁월한 ‘교육자’가 된다. 

  대체 무엇을 학습하라는 것일까? 구성요소는 간단하다. 선, 명암대비 효과, 계조, 색채 등. 어떻게 작품이 그려지는지, 그 세포들을 알라는 것이다. 마랑고니는 여기서부터 시작하라고 조언한다. 고집쟁이 할아버지의 ‘오래된 경험칙’이 바로 이 대목에서 드러난다. 이주헌氏는 ‘직관’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면서 그것을 지식과 직접적으로 연관시켰다. 하지만 마랑고니는 직관을 작가와 연결시킨다. “미를 안다는 것은 그것에 정통한다는 뜻이다.”라는 인용문을 통해 이 이탈리아의 학자는 “형태들에 친숙해져라.”고 말한다. 그가 생각하기에 직관은 갑자기 용솟음치는 무언가가 아니다. 적어도 관찰자에게는 그러하다. 노(老)학자는 이것이야말로 대중들이 미술을 이해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길이라 확신하면서도 그렇게 하지 못하는 자국 이탈리아의 상황을 대단히 안타까워한다. 더불어 이런 것을 알지 못하는 비평가들의 현학적 세태에 대해서 쓴 소리를 마구 뱉어낸다. 원래 쓴 소리 하는 사람들 중 대부분은 그가 하는 말이 옳은 것임에도 곤경에 처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는 고집을 끝까지 밀고 나갔다. 

  이주헌氏는 미술을 둘러싼 지식으로 기법, 주제, 역사, 위작, 미술시장 등을 알려준다. 읽어 보면 참 재미있는 내용들이고, 그가 지닌 특유의 친근감과 배려는 독자들에게 어려운 전문용어들을 쉽게 학습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 하지만 그 내용들은 모두 스토리 바깥에 있는 것임을 독자들은 알아야 한다. 미술사의 주석 정도로 달려 사람들이 참조하면 되는 내용이다. 진정한 미술사를 추적하기 위해서는 마랑고니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하고, 한편으로 국내의 저자들은 그들이 아는 것을 총동원해서(그들은 얼마나 해박한가!) 스토리로 전개되는 책으로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잰슨과 곰브리치의 편향된 사관(史觀)을 극복할 대작을 내놓아야 할 의무가 있다. 

  내로라하는 저자들의 미술책들이 책장에 꽤 많이 꽂혀 있으나, 지식일변도로 치닫는 우리나라의 지식인문화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것들이 대다수이다. 미술은 과연 네루의 <세계사 편력>이나 자크 바전의 <새벽에서 황혼까지>와 같은 ‘후루룩’ 읽고 마실 수 있는 문장과 내용의 조화로 쓰이기 힘든 분야일 것일까? 그 중 다행스럽게도 이진숙氏의 <러시아 미술사>와 김상근氏의 <카라바조, 이중성의 살인미학>은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다. 미술을 사랑하고, 또한 미술과 최대한 동화되고자 하는 수많은 미술팬 중 한 명으로써 열망하건데, 이주헌氏가 독자들을 놀라게 할 만한 뛰어난 역작을 하나 써줬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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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1-24 13: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1-24 22: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1-25 16: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1-25 21: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1-08 01: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탕기 2012-01-08 12:28   좋아요 0 | URL
링크해주신 글 천천히 읽어보겠습니다.^^

2015-02-13 16:14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