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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셸 투르니에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시간 -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간절히 필요한 순간, 두뇌에 신선한 자극을 주는 지적 유희
미셸 투르니에 지음, 김정란 옮김 / 예담 / 2011년 11월
평점 :
절판
이 책의 별점을 매기는 것을 떠나 우선 내가 읽고 싶었던 에세이가 바로 이런 종류의 에세이였다는 점에서 반가왔던 책이다. 아무리 수필, 또는 에세이를 자유롭게, 붓가는대로 쓰는 글이라고는 하지만 누구나 쓸 수 있는 내용보다는 그 사람만 쓸 수 있을, 그 사람의 개성과 취향과 생각이 드러나는 글.
미셸 투르니에는 철학이 발달한 나라 프랑스에서, 현존하는 최고의 지성 중의 한 사람이라고 일컬어지는 사람이다. 원래 철학을 공부했는데 철학 교수 자격 시험에 낙방하고서 (교수 자격 시험이란 것도 있나보다) 작가의 길로 들어섰다고 한다. 그래서 그의 작품엔 철학적 성찰이 녹아있다는 소개가 따라다니며 이 책 역시 '두뇌에 신선한 자극을 주는 지적 유희'니, '철학 요리서'니, 하는 소개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대체 어떤 내용이길래?
책을 펼치니 목차에 각각 두개의 단어가 쌍을 이루어 줄을 서있다. 남자와 여자, 사랑과 우정, 웃음과 눈물, 동물과 식물, 고양이와 개, 건강과 병, 물과 불, 이 정도는 서로 대조가 되는 단어군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는 경우이지만 다음과 같이 무슨 연관이 있을까 싶은 경우도 있다. 버드나무와 오리나무, 철도와 도로, 어린이와 사춘기 소년, 샘물과 가시덤불, 아름다움과 숭고함, 기호와 이미지, 연대기와 기상학, 포크와 스푼, 척추동물과 갑각류 등등. 여기에서 읽는 이들의 상상력이 시작되는 것을 노린 제목이 아닐까 한다. '생각의 거울'이라는 원제가 '상상력을 자극하는 시간'이라고 번역되어 이 책의 제목이 된 이유말이다.
생각지도 못했던 '버드나무와 오리나무'에 대해서 써놓은 부분을 보면, 둘다 공통점은 물가에서 자라는 나무라는 것. 하지만 미셸 투르니에는 여기에서 어떤 대조를 발견했을까? 두 나무를 길러내는 물의 정령은 정반대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무슨 말일까. 오리나무는 북쪽 지방의 안개 낀 평원에서, 죽은 검은 물에서 자란다. 축축하고 음습한 느낌이랄까? 반면 버드나무는 맑은 물가를 따라 자란다. 죽은 검은 물이 아니라 노래하는 발랄한 물의 나무이다. 버드나무의 계절은 봄이다. 버드나무는 '아스피린'이라는 약의 재료로서 인류에게 공헌하고 있는 나무이기도 하다. 이 책에도 인용되어 있는 슈베르트의 유명한 가곡 '마왕 (Elfenkonig)'은, 괴테가 스칸디나비아 지방의 전설을 수집하던 헤르더로부터 요정 엘프들의 왕 (Elfenkonig)의 이야기를 듣고 이 제목을 Erlenkonig, 즉 오리나무 왕이라고 잘못 읽고서 그에 대한 시를 썼고 후에 슈베르트가 그 시에 곡을 부쳐 탄생한 것이라고 한다. 나도 '마왕'이라고 알고 있는 시가 이 책에 난데없이 '오리나무 왕'이라고 제목이 달려 소개되어 잠시 어리둥절했었다.
'동물과 식물'에 대한 글에서는 초식동물이 먹은 식물들은 사실 초식동물의 위 속에 살고 있는 박테리아의 배양에 필요한 양분을 제공하는 역할만 하기 때문에 초식동물 역시 박테리아라는 특정한 단세포동물을 먹고사는 특별한 육식동물이라는 그의 생각이 흥미로왔다. (하지만 박테리아가 단세포인것은 맞지만 '동물'로 분류되지는 않음)
'쾌락과 기쁨'에 대해 나라면 어떤 생각을 펼칠 수 있을까. 쾌락은 좀 더 본능적이고 말초적인 것? 그 정도에서 생각이 더 확장되지 않는다면 말을 꺼내지도 말것. 그의 생각은 어디까지 갔나?
쾌락은 쉽게 변질되기도 하고, 마약 중독이나 알코올 중독처럼 살인적인 습관을 수반하기도 한다. 쾌락에 대한 혐오는-어떤 신비주의자들에게서 발견되는-생명에 대한 증오를 많이 닮아 있으며, 고행이나 단식 등 마약 중독 못지않은 자기 파괴적인 행동의 동기를 부여한다. (123쪽)
쾌락에 대한 혐오는 생명에 대한 증오를 많이 닮아 있다는, 지금까지 한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이 말에 이렇게 순식간에 공감이 될 수도 있다니. 그래, 이쯤 되어야하지 않겠나? 내가 읽고 싶은 에세이라하면.
'두려움과 고뇌'에서 그는 블레즈 파스칼의 말을 인용하여 고뇌의 세가지 근원으로 침묵, 무한 (無限), 그리고 영원을 꼽고 있다. 침묵, 무한, 그리고 영원이라. 세가지 모두 깊이 공감한다.
'재능과 천재성', 이 글도 재미있다. 재능이 있는 사람은 대중이 원하는 바에 귀를 기울이고 대중이 원하는 대로 작업할 확률이 높은 반면 천재적인 인간은 대중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작품을 만들고, 거의 언제나 시대의 조류와 반대 방향으로 노를 젓기 때문에 그의 작품은 대체로 배척당한다는 것. 그런데 천재성도, 재능도 뚜렷하지 않은 나 같은 사람은 다음글에 더 공감할 것이다. '천재성과 재능이라는 창조의 두 가지 상위 단계 아래에서 일정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두 가지 다른 능력이 있는데 우선 솜씨 또는 손재주가 그것이고, 이보다 격이 뚝 떨어지는 만만한 능력이 있는데 그것은 잔재주이다' (146쪽) 라는 글. 우하.
'오른쪽과 왼쪽'이라는 제목의 글에서는 단어 자체에서 드러나듯이 오른쪽에 비해 왼쪽이 얼마나 보잘것 없는 대우를 받고 있는가 하는 이야기 끝에 (이 얘기는 누구나 할 수 있다), 그 잘난 오른손은 사실 대뇌의 좌반구, 즉 '왼쪽' 절반 부분에 의존하고 있다는 말은 얼마나 유쾌한 반전인지.
책 끝에 옮긴이의 글까지 빠짐없이 읽었다. 삶의 모든 요소들은 혼자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얽히고 설킨 관계망 속에서 비로소 존재하는 것이고, 그런 면에서, 흐릿한 안개 속에서 매우 비슷한 의미 계열에 속해 있다고 생각해왔던 두루뭉수리해보이던 사물들이 갑자기 섬세한 분화를 하는 것을 목격하게 하는, 이 책에서의 투르니에의 시도는 삶에 대한 그 나름대로의 성찰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아무나 해낼 수 있는 일이 아니다' (146쪽), 예, 맞고요. '삶에 대해 정말 빼어난 통찰력을 갖기 전에는 이런 글을 쓰기 힘들다' (146쪽) 그렇다. 기분과 감정만을 쏟아내는 에세이가 아니라 이런 통찰력이 담겨 있는 에세이를 읽고 싶었던 이유이다.
집념과 집착, 욕망과 의지...이것들은 내가 종종 비교, 대조하기 위해 자주 떠올리곤 하는 단어들인데 아직도 명쾌한 구분이 이루어지지 않은 채, 그저 애매한 상태로 머리 속을 떠다닐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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