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라비아의 로렌스는 오프닝 타이틀부터 끝까지 완성도가 높은 영화다. 알렉 기네스를 비롯한 배우들의 연기도 탁월하다. 현실에 발을 붙이지 못한 로렌스라는 인물의 매몰된 정신을 보여주는 연출은 경이롭다. 하지만 감독 데이비드 린은 그런 로렌스에게 틀림없이 숭고한 면이 있다고 말하는 것만 같다.


로렌스는 영국군 장교지만 자신만의 도덕적 가치를 중동에서 추구하려 든다는 점에서 너무도 순진무구하다. 그 점이 도를 지나쳐 기만적으로 보이기까지 하는 인물이다. 그런데 영화 속 수많은 중동 사람들이 그를 따른다. 특히 오마 샤리프가 연기한 알리는 로렌스를 사랑한다.


알리는 허구의 인물이다. 중요 인물들 중 허구의 인물은 그가 유일하다. 그는 자신의 부족을 위하기보다는 로렌스와 함께한다. 점점 잔인해지는 로렌스의 변화를 알아채고 전투에서는 그를 달래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모습은 보기 민망할 정도로 내밀하게 느껴진다.


로렌스를 향한 알리의 사랑은 정도에 맞지 않다. 그것은 중동의 정세와 영국군이 개입을 하고 있다는 현실을 초월해 조작된 것이다. 어쩌면 알리가 로렌스의 사상에 경도된 것일지도 모르지만 알리는 마음속 깊이 로렌스를 이해하는 유일한 사람으로 그려진다.


알리의 사랑에는 누구의 마음이 투영되어 있을까. 로렌스의 사상은 정황상 실현될 수 없다. 영국군 장교라는 그의 입장은 한계로 작용한다. 로렌스를 제외한 모두가 그 사실을 안다. 족장 알리도 그런 한계를 인지한다. 그럼에도 부족의 목소리보다 로렌스의 사상을 숭고하게 여기며 로렌스를 좇는다.


알리의 정체는 분명하지 않다. 도구적으로 쓰이기 위해 만들어진 인물인지, 로렌스와 이상을 함께 그렸을지도 모르는 인물인지. 하지만 알리가 어떤 사람이든 그는 신기루나 다름이 없는 로렌스의 이상에 휘말린 자다. 로렌스가 자기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았더라면 알리는 상처받지 않았을 거다.


알리라는 인물은 존재 자체로 중동 사람들에게는 모욕적으로 보일 수 있다. 그가 로렌스에게 마음을 내주기까지 넘어섰던 수많은 경계와 그의 눈에 비친 로렌스의 숭고한 모습을 떠올리면 말이다. 로렌스가 무시한 당사자성이 이 미적으로 우수한 영화에도 빠져 있다.


조만간 “아라비아의 로렌스”라는 책을 읽어보려고 한다. 로렌스가 자기 자신을 도대체 어떻게 생각했을지 궁금하다. 그토록 무모하게 움직일 수 있었던 이유를 알고 싶다. 책에는 당시 중동의 정세에 관해서도 상세히 나와 있다고 한다. 중동을 잘 모르기 때문에 책을 읽으면 많은 공부가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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