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는 18세기 후반 여자들의 화랑에서 시작된다. 화가 마리안느는 제자들 앞에서 모델을 서다가 무언가를 보고 외친다. 누가 그림을 꺼냈냐며. 그의 목소리에는 불쾌감이 묻어 있다. 하지만 그는 그림을 꺼낸 제자를 꾸짖지 않는다. 그림의 제목을 묻는 제자에게 말한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그림 속에는 불이 붙은 드레스 자락을 끌고 어딘가로 향하는 것만 같은 여자가 있다. 마리안느는 여자를 보며 오랜 기억 속으로 빠져든다.

마리안느는 아버지의 지인인 백작 부인으로부터 딸 엘로이즈의 초상화를 그려달라는 의뢰를 받고 외딴 섬으로 향한다. 엘로이즈는 수녀원에서 만족스러운 생활을 하고 있었지만 언니의 죽음으로 그의 운명을 떠맡게 된 처지다. 언니가 그랬듯 원치 않는 결혼을 해야 한다. 마리안느의 임무는 엘로이즈의 남편이 될 밀라노의 귀족에게 보낼 초상화를 완성하는 것이다. 하지만 심히 흔들리는 배를 타고 항해를 하는 것보다 어려운 문제가 있다. 엘로이즈가 포즈를 취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백작 부인의 말에 따르면 이전에 고용되었던 화가는 엘로이즈의 얼굴도 보지 못했다고 한다.

마리안느는 엘로이즈를 그리기 위해 자신의 정체를 감춘다. 엘로이즈의 '산책 친구'가 된다. 엘로이즈가 언니처럼 자살을 할까 봐 두려워하는 백작 부인의 조언에 따라 엘로이즈와 함께 산책하며 그를 감시하기로 한다. 엘로이즈를 만나기도 전에 그를 구해야만 한다는 사명감을 갖는다. 엘로이즈와의 첫 번째 만남에서 마리안느는 엘로이즈의 뒷모습을 마주한다. 점점 더 걸음을 서두르는 그를 불러 세우지 않는다.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전속력을 다해 뛰지만 그를 붙잡지 않는다. 그러기도 전에 그의 얼굴을 본다. 그는 웃고 있다. 마리안느는 그 순간 자신이 일종의 시험을 통과했다는 걸 깨닫지 못한다. 엘로이즈는 마리안느가 대상의 본질에 다가서고 싶어 하는 사람이라는 걸 안다.

마리안느 자연스럽게 연기한다. 첫 번째 산책을 마치고 엘로이즈의 부탁을 듣는다. 책을 빌려 달라는 말에 화구 옆에 있던 짐더미에서 책 한 권을 조심스럽게 꺼내 건네준다. 얼마 뒤에는 담배를 빌려주며 말한다. 내일 혼자 외출을 할 테니 자유를 느낄 수 있을 거라고. 하지만 엘로이즈가 혼자가 되면 자유로워지냐고 묻자 당황한다. 그렇지 않냐며 되묻는다. 다녀와서 소감을 알려주겠다는 말에 할 말을 잃는다. 잠깐의 침묵 끝에 엘로이즈의 외출 계획을 듣는다. 음악을 들으러 성당에 갈 거라는. 마리안느는 엘로이즈에게 관현악을 들어본 적이 있냐며 묻는다. 그게 무엇인지 가르쳐 달라는 엘로이즈의 부탁에 하프시코드 앞에 앉는다. 음악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다가 기억을 더듬어 비발디의 ‘사계’ 중 여름 3악장을 연주한다. 천둥과 번개를 동반한 폭풍우가 몰려와 만물이 시름을 겪는 여름. 엘로이즈는 마리안느의 곁에서 음악을 듣는다. 마리안느는 혼자만의 외출에서 돌아온 엘로이즈에게서 고백을 받는다. “당신의 부재를 느꼈어요.” 마리안느는 엘로이즈를 돌아보지 않는다. 마음을 돌려 사실을 말하기로 한다.

완성된 그림 앞에서 마리안느는 힐책을 받는다. 엘로이즈의 분노에 담긴 논지는 여태껏 당신에게 내가 고작 이 정도였다니 실망스럽다는 것이다. 마리안느는 화가로서 지켜야 할 규칙이 있다며 자신을 두둔하지만 자존감을 회복하기 위해 그림을 망쳐버린다. 엘로이즈는 생기가 없는 얼굴이 사라진 걸 보고는 웃는다. 마리안느가 화가가 아닌 연인으로서의 선택을 한 것을 알아본 것이다. 엘로이즈는 마리안느의 기행으로 인해 황당해하는 백작 부인을 간단히 안심시킨다. 포즈를 취하겠노라고 선언한다.

백작 부인이 집을 비운 사이 마리안느와 엘로이즈에게 평화가 깃든다. 그들은 하녀 소피의 낙태를 돕는다. 해변에서 소피가 그들 사이를 뛰게 하고, 잡초가 무성하게 자란 밭에서 약초를 찾는다. 공중에 매달려 하중이 밑으로 쏠리도록 안간힘을 쓰는 소피의 곁을 지키고, 한밤에 소피를 따라 여자들만의 모임에 참석한다. 마리안느와 엘로이즈는 소피가 낙태 시술자와 시술 약속을 하는 틈에 모닥불을 사이에 둔 채 서로를 마주한다. 여자들의 노래를 들으며 웃음과 정적을 나눈다. 하염없이 반복되는 라틴어 가사에 그들은 정신을 놓은 것만 같다. ‘Fugere non possum(나는 벗어날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현실을 용인하는 가난한 여자들의 노래가 그들에게 깨달음을 준다. 그들은 사랑에 빠졌다. 엘로이즈는 마리안느의 시야 한편으로 걸음을 옮긴다. 그곳을 벗어나려고 하는 것 같다. 하지만 곧 불이 붙은 드레스 자락을 내려다본다. 마리안느는 비명을 지르지 않는다. 타오르는 엘로이즈를 멍하니 본다. 누군가가 뛰어와 불을 꺼주자 비로소 이성을 찾는다. 마리안느는 엘로이즈를 붙잡는다. 현실을 받아들인다.

기암 사이에서 마리안느와 엘로이즈는 키스를 한다. 엘로이즈는 도망치듯 자리를 뜨고, 마리안느는 엘로이즈를 찾는다. 그런데 자신의 방 앞에서 엘로이즈의 환영과 마주친다. 환영은 아름다운 결혼식 예복을 입고 있다. 마리안느는 환영을 등지고 방으로 들어선다. 벽난로 앞에서 엘로이즈와 다시금 입을 맞춘다. 그 뒤로도 종종 환영과 맞닥뜨리지만 결코 놀라지 않는다. 환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는 듯 담담하게 사랑을 지속한다.

마침내 완성된 초상화 앞에서 엘로이즈는 만족한다. 하지만 그는 또 분노에 사로잡힌다. 그림을 망쳐버리고 싶다는 마리안느에게 자신을 몰아세우지 말라고 당부한다. 결혼하지 않기를 바라면서도 말릴 수는 없는 마리안느의 처지를 지적한다. 마리안느는 엘로이즈를 쫓아 바다로 내달린다. 그를 끌어안고 용서를 빈다. 곧 백작 부인이 돌아올 거라는 소식을 전한다. 엘로이즈와 함께 자신의 방으로 돌아간다. 다시 포즈를 취하는 엘로이즈를 부른다.

기억에서 돌아온 마리안느가 말한다. “이제는 슬프지 않아.” 하지만 제자의 그림 속에서 그는 어쩐지 슬퍼 보인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을 꺼내 오랜 기억을 불러일으켰던 제자는 그의 실체를 가늠한다. 그에게는 떨쳐낼 수 없는 슬픔이 있다. 비록 이별 후에도 사랑이 지속되고 있음을 알았지만, 틀림없는 사랑의 근거를 찾았지만. 마리안느는 엘로이즈를 마지막으로 목격한 순간을 기억한다. 콘서트홀에서 엘로이즈는 마리안느의 맞은편에 있었다. 비발디의 ‘사계’ 중 여름 3악장이 시작되자 간신히 숨을 쉬며 울고 웃었다. 마리안느는 그런 엘로이즈를 바라봤다. 탄식도 하지 않았다. 연인이 아닌 시인으로서의 선택을 했다. 영원히 사랑을 기억하고 노래하기 위해.

감독 셀린 샴마는 연인의 슬픔에 주목한다. 그것이 어떤 슬픔인지, 어떤 이별에서 비롯된 것인지. 그는 그들이 잃어버린 건 ‘평등에서 오는 평화’라고 말하는 것 같다. 그들은 현실을 안다. 밖으로 나가면 평화로운 사랑을 다시는 할 수 없다. 그들 내부에 그려진 그림은 금기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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