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순간도 냉소할 수 없는 기억이 있다. 은희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런 기억을 돌이킨다. 어떠한 충동에도 숨을 멈추지 않고 과거를 인내한다. 그러기까지 실패를 거듭했을 수도, 어쩌면 아무런 시도조차 하지 않았을 수도 있지만 그는 불가능할 것만 같은 일을 침착하게 해낸다. 한결같이 이해하기 어려운 사람들과 사건들 사이에 있었을 때처럼 섣불리 판단하지 않으면서, 그때와는 달리 영향력을 미친다. 그는 자신에게 영향을 줬던 사람들의 힘이나 사건들의 충격이 아닌, 정서에 초점을 맞춘다. 극적으로 기억의 장면을 넘기지 않는다. 한 문장 한 문장을 찬찬히 읽는 듯 감정으로 가득한 사람들을 바라본다. 그의 시선은 온정적이다. 그러나 그는 그 누구도 동정하지 않는다. 이제는 그들을 이해할 수 있지만 여전히 알 수 없기 때문에. 다시 떠오른 기억 속에서 그들은 비로소 삶을 살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저마다의 복잡한 감정을 자신도 모르게 드러낸다. 이야기를 품고 있다 병에 걸린 것 같다. 무력하고 어둡다. 모두의 고통 속에서 그는 조숙하다. 조숙한 아이의 호흡을 놓치지 않는다. 그는 늘 자신의 감정을 들여다본다.

은희는 왜 하염없이 문을 두들길까. 왜 하필이면 아무 상관도 없는 문 앞에서 이야기가 시작되는 걸까. 엘리베이터에서부터 잘못됐을지 모른다. 은희가 버튼을 잘못 눌렀거나 누군가가 은희가 무심코 내린 층에서 버튼을 눌러놨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건 은희가 엘리베이터에 탑승하기 전부터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다는 것이다. 무의식에 자리하고 있던 것이 눈앞에 나타난 순간 기억은 악몽으로 바뀐다. 비록 착각일지라도 조금만 주의를 기울였더라면 결코 꾸지 않았을 악몽 속에서 수도 없이 울부짖었던 걸 생각하면 안심이 될 리가 없다. 은희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윗집으로 향한다. 벨을 누르고 기다린다. 시간이 조금 걸리지만 엄마를 재촉하지 않는다. 말없이 대파가 든 봉지를 내민다. 그새 두려움을 몸속 깊숙이에 주워 담은 것 같다. 은희의 얼굴에는 엄마가 알아채지 못할 정도의 불안감만 남아 있다. 은희의 표정으로, 은희의 감각으로 은희가 두려움을 어떻게 느끼는지 알 수 있다. 두려움은 은희를 관통하지 않고 작은 원을 그리며 맴돌고 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잊힐 만한 것은 아니지만 말하기에는 뭐한 것이다.

악몽 같은 기억에도 서사가 있다. 처음부터 끝까지 괴롭기만 한 것은 아니다. 일상을 영영 벗어나지 못할 것 같다는 느낌이 들 때나 일상을 지속할 수 없을 때를 빼고는 악몽은 일상과 다르지 않다.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평범하다 해도 악몽은 추억되지 않는다.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득 떠오르곤 한다. 하룻밤의 꿈으로 끝이 나지 않기도 한다. 악몽은 어느 날을 향해 치닫는 일상을 보여준다. 악몽의 협소한 서사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에게 자꾸만 허무한 느낌을 준다. 삶이 기억의 연장처럼 느껴지게 한다. 은희가 자신의 기억을 그저 들여다보기로 결심한 건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일지도 모른다. 삶을 살아가기 위해. 은희는 자신의 감정을 따라가며 기억의 서사를 맞춘다. 학교에서는 그림을 그리며 부끄러움을 견디고, 학교가 파하면 남자 친구나 단짝 친구인 지숙이를 만나고, 안정을 찾은 뒤에는 집으로 향한다. 혼자 있을 때는 자신의 고독을, 가족과 있을 때는 가족의 고독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어떤 사건이 일어나도 은희는 사건에서 악몽의 계기를 찾으려고 하지 않는다. 은희의 감정은 익숙한 전개 방식에서 벗어나 끝없이 흐른다.

잘 짜여진 기억은 거짓될까. 은희의 기억에는 거침이 없다. 장면이 말 그대로 '마음대로' 전환되어 장면과 장면 사이에 의심이 파고들 여지가 없다. 만약 은희의 이야기가 산란된 기억에서 비롯되었더라면 은희는 고양된 마음이 가라앉는 장면을 떠올리지 못하거나 떠올렸더라도 의아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은희의 이야기는 기억 조각의 모음일 뿐 이야기의 꼴을 갖추지는 못했을 것이다. 은희가 거짓말에 능숙한 사람일 수도 있지만 자신을 속일 생각이 있었다면 구태여 고통스러운 기억을 돌이키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주장과는 상관없이 잘 짜여진 이야기를 통해 기억의 진위를 따지는 건 불가능하다. 이야기의 초반부에서 은희는 갑자기 귀 밑을 만진다. 혹이 만져지지만 은희는 그것을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모른다. 미심쩍은 표정은 점점 멍해진다. 아마도 이물감이 저절로 사라지지는 않으리라는 걸, 말로 하기에는 뭐한 불안감에 관하여 머지않아 말해야만 한다는 걸, 도움이 필요하다는 걸 직감한 것 같다. 은희는 진실을 말하기를 망설인다. 진실을 말하면 진실에서 해방될지도 모른다며.

마음은 무엇 하나 쉽게 허락하지 않는다.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마저 주저한다. 은희는 대치동에서 홀로 버스를 타고 성수대교를 건너 행당동에 있는 병원에 간다. 무슨 생각에 잠겨 차창을 보는 것일지 짐작할 수 없다. 어쩌면 그 순간만큼은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 것 같다. 호명이 되기를 기다리는 은희는 조금은 심란해 보인다. 의사에게서 모르겠다는 말을 들으면 어쩌나 상상한 모양이다. 은희는 결국 혹의 정체를 모른 채 돌아간다. 하지만 얼마 뒤 조직검사를 받기 위해 또 혼자서 병원에 간다. 보호자의 동의가 필요하다는 말에 의사를 재촉한다. 부모님이 바쁜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보다는 마음이 급하기 때문일 테다. 아무런 진전도 없이 같은 길을 오가면서 머릿속이 아득해지는 경험을 더는 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은희는 조직검사의 결과를 확인하러 병원을 다시 방문한다. 큰 병원에 가서 검진을 받으라는 말에 왜 그래야 하는지 묻는다. 낙담한 것 같지는 않다. 집에 가는 길에 엄마를 보고는 너무도 반가워한다. 엄마를 수없이 부른다. 은희는 자신을 돌아보지 않는 엄마에게 실망한다. 병이 도진듯 고통스러워한다.

마음 밖에 마음이 있다. 마음을 열면 고통스러워하는 타인이 보인다. 은희가 혹의 정체를 향해서 한 발짝 다가서자마자 엄마의 고독을 마주한 건 우연이 아니다. 마음을 열길 주저하는 마음 속에는 타인의 고통을 마주하고 싶어 하지 않는 마음이 깃들어 있다. 엄마의 고독 앞에서 은희의 얼굴과 음성은 점점 거칠어진다. 자신이 버려졌다는 걸 뒤늦게 깨달은 아이 같다. 은희는 아랫집 문을 두들겼을 때처럼 돌연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힌다. 엄마의 고독에 빈틈이 없을 것이라는. 하지만 이번에 든 예감은 확신에 가깝다. '저' 사람은 틀림없는 '엄마'이기 때문이다. 은희는 숨소리를 죽인다. 엄마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한다. 엄마는 하늘인지, 나무인지, 뭔가를 올려다보고 있다. 웃는 건지, 우는 건지 알 수 없다. 경이감 혹은 좌절감을 느끼는 것 같다. 다음 장면에서 은희는 안방에 누워 있는 엄마를 본다. 엄마는 밖에서보다 힘이 없어 보인다. 온몸의 힘이 다 빠져나가 버렸는지 은희가 의사의 말을 전해도 몸을 일으키려 하지 않는다. 제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고 걱정 어린 말을 한다. 그때 은희는 엄마의 고독을 우두커니 내려다본다.

고독은 비밀일까. 그렇다고 하기에는 너무 무겁고 만연하다. 그러나 일단 마주하면 봐서는 안 될 것을 봤다는 느낌이 든다. 그 앞을 무심코 지나치기는 어렵다. 아무 것도 보지 못한 척을 하거나 더 나아가 없는 척을 할 수밖에 없다. 고독이 시선을 느끼지 못하도록. 고독을 목격한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으로부터 고독을 지켜야 한다는 의무감을 느낀다. 은희가 엄마를 부르면서도 좀처럼 엄마에게 다가서지 않는 건 은희가 엄마의 고독을 깨뜨리고 싶다는 충동보다 이런 의무감에 더 사로잡혀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자신의 감정보다 타인의 고독에 경도된 은희는 변화를 겪고 있는 걸까. 고독을 사유하고 있는 걸까. 은희가 변화를 겪고 있는지 충격에 휩싸여 있는지는 은희의 표정이나 숨소리로는 알 수 없다. 한사코 엄마를 바라보는 시선을 통해서만 확인할 수 있다. 은희는 엄마보다 먼저 사라진 것 같다. 엄마의 모습을 담을 수 있는 장치를 설치해놓고 자리를 뜬 것 같다. 그곳에 없는 척 연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 없는 것 같다. 비약적인 변화가 느껴진다. 은희는 고독에 경도되었으나 잠식되지는 않은 것이다.

고독은 비밀이 아니다. 밝힐 수 있는 것, 헤아릴 수 있는 것이다. 고독은 빛을 필요로 한다. 어디에도 빈틈이 없는 것 같지만 고독에 빛을 비추면 어딘가로 빛이 든다. 참을 수 없이 우울한 날 은희는 영지 선생님을 만나러 한문 학원에 간다. 그런데 교실 문을 열기 전에 잠깐 뜸을 들인다. 혼자 교실에 남아 고독을 견디고 있을 영지 선생님을 상상한다. 상상으로나마 영지 선생님을 헤아리는 것이다. 고독이 비밀이라면 이런 상상은 실례가 될 테지만 은희는 거리끼지 않고 영지 선생님을 비춘다. 그날 밤 영지 선생님과 헤어지고 집으로 돌아가는 은희는 벅찬 듯하면서도 왠지 모르게 슬퍼 보인다. 곧 수술을 받기 때문일까. 병원에 입원하기 전에 은희는 다시 한문 학원에 간다. 빛이 드는 층계참에서 영지 선생님과 작별 인사를 나눈다. 돌아서자마자 영지 선생님을 불러 세우고 선생님의 품으로 뛰어든다. 그 순간 은희는 선생님이 너무 좋다는 말을 하고, 영지 선생님은 그게 무슨 말인지 알겠다는 듯 은희를 안아준다. 창밖으로 흔들리는 나뭇잎이 보이고, 장면은 눈이 부실 만큼 하얘진다. 빛은 다음 장면까지 퍼져 수술을 마친 은희를 비춘다.

은희는 이제 맞지 않는다. 맞서서 싸울 줄 안다. 기억 속 사람들을 이해한다. 그들의 고독에 상처받지 않는다. 그들이 말하지 못한 것에 더 이상은 외로워하지도, 분노하지도, 안타까워하지도 않는다. 은희는 기억을 돌이켜 그들에게 삶을 준다. 1994년 10월 21일이라는 시점을 향해 치닫는 삶, 특정한 시점을 기준으로 희극과 비극으로 양분되는 삶이 아닌, 끝을 알 수 없는 삶을. 은희는 10월 21일 밤을 기억한다. 언니는 장면 한편에서 유령처럼 나타나서는 가족이 모여 있는 식탁 앞에 앉는다. 그의 뒷모습은 평소처럼 크고 새까맣다. 아빠가 그의 삶을 알리자 오빠가 그의 곁에서 울기 시작한다. 은희는 오빠가 우는 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는 언니를 본다. 언니는 아무런 원한도 없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유령 같다. 그날 새벽 은희는 거울에 비친 언니를 엿본다. 언니는 단정하지만 평소보다 어둡고 무거워 보인다. 운 좋게 살아남은 것 같지 않다. 뜻밖에 삶을 떠안게 된 것 같다. 은희는 언니가 집을 나서는 소리를 듣는다. 다시 하루가 시작되는 소리, 기억을 빠져나가는 발걸음 소리. 은희는 삶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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