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쉘'이라는 단어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두 개의 뜻이 나온다. 하나는 폭탄선언, 혹은 몹시 충격적인 일, 다른 하나는 아주 섹시한 금발 미녀. 영화 '밤쉘'은 후자보다는 전자의 뜻을 의미한다. 충격적인 일은 첫 장면에서부터 벌어진다. 까만 배경에 '가만히 서서 멍하니 있으면 어떤 여성도 아름다워 보일 수 있다'라는 헤디 라마의 명언이 떴다 사리지고, '지그펠드 걸'의 한 장면이 나온다. 헤디는 꿈속을 헤매는 듯한 멍한 표정으로 계단을 내려간다. 그녀의 얼굴은 수많은 별 모양 액세서리에 둘러싸여 있다. 머리띠에는 별 모양 막대사탕 같은 것이 잔뜩 꽂혀 있고, 양쪽 어깨 어딘가에서 튀어나온 여러 갈래의 장식은 탄력이 좋아 그녀가 걸음을 뗄 때마다 흔들린다. 누군가의 환상을 깨부수는 그녀의 말은 자신이 질리도록 연기했던 수많은 여성 인물을 지시하고, 그 중에서도 가장 멍하고 아름다운 인물인 지그펠드 걸은 헤디 라마를 가리킨다. '지그펠드 걸'에서 헤디가 연기한 인물은 브로드웨이 뮤지컬 기획자인 플로렌즈 지그펠드의 눈에 띄기 위해 '매력적인 여성'을 연기한다. 첫 장면은 영화사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성 배우로 평가되는 헤디 라마를 우리가 잘못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렇게 무지한 우리가 머지않아 충격에 휩싸이리라는 걸 암시한다.
세상에 타고난 이야기꾼과 재밌는 이야기는 많다. 하지만 세상에 막대한 공헌을 한 인물의 내밀한 이야기가 담긴 테이프가 쓰레기통 뒤편에 놓여 있다가 사라질 뻔했다는 사실은 듣는 이의 머릿속을 한동안 마비시킨다. 테이프가 재생되면 헤디 라마의 목소리가 들린다. 명랑한 은둔자. 순간 떠오르는 헤디 라마의 모습이다. 그녀는 말한다. “어머니는 제가 아들이기를 바라셨죠.” 이야기는 그녀의 어린 시절로 향한다. 가장 행복했던 시절, 세계 대전이 발발하기 이전의 오스트리아로. 유복한 유대계 가정에서 태어난 그녀는 네 살 때부터 사물의 작동 원리를 파악하는 천부적인 재능을 보인다. 처음으로 분해하고 재조립했던 물건은 오르골이다. 오르골은 그녀가 없는 현재, 노인이 된 아들의 손바닥 위에서 여전히 작동된다. 전쟁을 피해 영국으로, 영국에서 할리우드로 항해를 하는 중에도 오르골은 짐 속 어딘가에 있었을 것이다. 감상적인 노랫소리가 그치면 똑똑하고 아름다운 헤디 라마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자신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깨달은 그녀는 미모를 이용한다. 사람들이 대화를 하는 중에 등장하고, 소리가 일제히 잦아들고 시선이 한곳에 집중되는 걸 즐긴다. 그녀는 당연히 영화배우가 된다. 영화는 ‘알고 있음’에서 비롯된 극적인 효과를 원하니까.
알고 있기 때문에 불행해진다. 데뷔작 ‘엑스터시’에서 헤디 라마는 노출을 감행하고 유럽의 스타가 된다. 하지만 이때 생겨난 파격적인 이미지는 그녀가 활동을 하는 내내 걸림돌이 된다. 그녀가 아무리 우아하고, 자신감이 넘치고, 연기를 잘해도 누군가는 헤디 라마를 믿지 않는다. 여성을 ‘성녀’ 아니면 ‘창녀’라고밖에 여길 줄 모르는 그들은 헤디 라마가 아닌 모습을 경멸하는 동시에 사랑한다. 남편들도, 할리우드 최대의 영화사 MGM의 루이스 메이어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오직 헤디 라마의 이미지를 탐한다. 캐서린 헵번, 루실 볼 등과 함께 MGM의 대스타였던 그녀는 루이스 메이어가 제안하는 배역을 거부하고 자신의 능력으로 ‘알제’, ‘삼손과 데릴라’의 주역을 차지한다. 한 해에 서너 작품에 출연하고 밤늦도록 촬영을 하고 나서도 집으로 돌아가면 쓰러지지 않는다. 헤디 라마는 어머니가 오스트리아에서 미국까지 무사히 항해하길 바라는 마음, 유엔군이 나치를 이기길 바라는 마음, 그리고 세상에 진정한 자신을 보여주고 싶다는 야망으로 어뢰를 제어하는 보안 무선 통신 기술을 개발한다. 그녀가 리모컨의 초기 모델인 매직 박스를 보고 그런 아이디어를 떠올렸다는 건 그저 놀라운 일이다. 오르골을 신기해했던 것처럼 매직 박스를 이리저리 뜯어보다 그녀는 문득 세상을 구할 방법을 떠올린 것이다. 그녀는 특허를 받는다. 하지만 기술은 쓰이지 않는다.
헤디 라마는 해군에게서 전시 채권이나 팔라는 말을 듣고 정말로 전시 채권을 판다. 엄청난 수익을 올리고 유엔군의 사기를 돋우는 영화에도 출연한다. 그녀는 유대인이라는 정체성을 감추고 온몸으로 미국을 사랑한다. 하지만 제2의 조국은 전시 채권 수익을 챙기고 그녀가 특허권을 행사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한다. 그녀가 ‘외지인’이라는 이유로. 그때부터 헤디 라마는 상실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색다른 여성의 이야기를 만들자는 취지로 제작에 뛰어들지만 영화를 완성했음에도 배급사를 찾지 못한다. 삼손과 데릴라의 출연료까지 전부 잃어버린 그녀는 텍사스의 석유 재벌을 만난다. 칠 년의 결혼 생활 끝에 알코올중독자인 그와 헤어지기로 결심한다. 위자료로 요구한 건 딱 하나다. 오스트리아의 집을 본뜬 별장. 그녀는 원하는 걸 얻지 못한다. 홀로 육아를 하면서 아이들에게 지우기 힘든 사랑과 상처를 준다. 향수병, 아버지처럼 자신의 진가를 알고 사랑해주는 사람이 없다는 것, 영화사의 추천으로 촬영 내내 복용했던 마약의 후유증, 한때 가장 아름다웠던 배우를 향해 쏟아지는 ‘더 이상 아름답지 않다’라는 말. 헤디 라마는 자신을 괴롭히는 모든 것으로부터 멀찍이 떨어져 은둔자로 살아간다. 그러다 말년의 어느 날 특허권이 만료되기 전부터 정부가 자신의 기술을 써왔다는 것을 알아챈다. 하지만 그녀는 정부에 아무런 요구도 하지 않는다.
수십 년이 지나 헤디 라마는 상을 받는다. 과학 기술 분야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그녀의 공로를 기린다는 것이다. 헤디의 아들은 어머니를 대신해 무대에 오른다. 수상 소감을 말하려는 순간 전화를 받는다. 전화 말미에 그녀의 쾌활한 목소리가 들린다. “사랑한다!” 장내는 웃음소리로 떠들썩해진다. 아마도 영화에서 가장 감동적인 순간일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에는 도입부에 나왔던 지그펠드 걸의 한 장면이 다시 나온다. 테이프에서는 헤디 라마의 음성이 흘러나온다. “아름다운 글귀를 읽어드릴게요. 사람들은 비이성적이고, 비논리적이고, 자기중심적이에요. 그래도 그들을 사랑하세요. 당신이 잘하면 사람들은 이기적인 동기가 있을 거라고 매도할 거예요. 그래도 잘하세요. 가장 큰 생각을 가진 위인이 한없이 알량한 마음을 가진 소인배한테 무너질 수도 있어요. 그래도 크게 생각하세요. 오랜 세월 쌓아온 것들이 하룻밤 새에 무너질 수도 있어요. 그래도 쌓으세요. 당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세요. 그러다 궁지에 몰릴 수도 있어요. 그래도 최선을 다하세요.” 그녀가 말하는 도중 지그펠드 걸의 별 모양 머리 장식이 반짝인다. 그게 처음과 다른 점이다. 헤디 라마는 아름답고, 그녀의 머릿속은 반짝이는 아이디어로 가득하다. 헤디 라마의 기술은 우주 산업, 위성 통신, 안보, 휴대폰, GPS 등에 널리 쓰이며 인류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영화가 끝나고 휴대폰을 켜는 당신에게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