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저 멀리서 아득하게 (2)
“욱희까지 왜 이래.”
“진심으로 좋아하니까.”
“그게 왜 진심이야?”
“그럼, 진심 아니고 뭐야?”
“이 상황에서 이렇게 고백을 해서 영숙이를 버리라는 게 진심이라고?”
“응, 너랑 사귀고 싶고, 만나고 싶으니까. 난 진심을 얘기했는데?”
“욱희야, 너 또 시작한 거냐?”
“뭘? 이번엔 진지해.”
“아, 대체 왜들 그래!”
“지금 이럴 때가 아니잖아. 성영이도 찾아야 하고 영희도 찾아야 하고 영숙이랑 안희까지. 왜 찾아야 할 사람은 점점 더 늘어나는 거지?”
알뜰이가 나서자, 다들 조용해졌다. 조금은 긴 듯한 침묵이 이어졌다. 조금 후에, 고니가 자꾸만 소리를 질러서, 우리는 고니가 있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곳에서 살돌이가 고니를 잡으려 하고 있었다.
“아니, 저기서 뭐하는 거지?”
“저 돌은 또 어디서 났어?
“살돌아, 고니 괴롭히지 마!”
“난 오늘 이 고니를 잡고야 만다. 너네들 먼저 가! 나 오늘 이놈을 잡아야겠어!”
“살돌아, 그러다, 강물에 휩쓸리겠어!”
“나를 삼키고 싶으면 삼키라 그래. 내가 죽어도 이 고니를 잡고 만다.”
“살돌아! 대체 왜 그래?”
“자꾸 나보고 꽤액 소리를 지르잖아. 이 새 따위가!”
나는 살돌이를 어떻게 하면 말려야 할지 몰라서, 가만히 그가 하는 걸 바라보았다. 욱희가 살돌이한테 다가갔다.
“살돌아, 고니를 괴롭히면, 벌금 물어!”
“알아, 벌금 따위, 물고 말지.”
“아, 미치겠네. 너만 무는 거 아니라고! 우리도 벌금 같이 문다고!”
“내가 다 내줄 테니, 걱정 말아! 저놈의 고니랑 내가 결판을 내고 말 테다!”
“안 되겠다.”
욱희가 살돌이에게로 뛰어가더니, 고니에게 돌을 던지려던 걸 두 팔로 막았다.
“야, 왜 이래? 이거 놔!”
“못 놓는다. 너 때문에 우리까지 다 피해볼 수는 없어.”
“놓으라니까!”
“못 놓는다고! 나보다 힘이 세면 어디 해 보시든지.”
“진짜!”
살돌이의 손에서 힘없이 돌이 떨어졌다. 떨어진 돌은 공중곡예를 하더니, 바람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 살돌이가 그 돌을 마냥 바라보았다.
“이게 말이 돼? 이젠 돌까지 곡예를 하네?”
“살돌아, 이젠 우리 차례야!”
“그게 무슨 소리야?”
“밑에를 봐.”
흙더미가 살돌이와 욱희를 감싸기 시작했고, 순식간에 그들이 사라졌다.
“봤어?”
“어떻게 된 거야? 살돌이와 욱희까지 사라졌어.”
“아, 미치겠네. 다들 어디로 가는 거야?”
“우리 다 사라지는 거 아니야?”
“잠깐, 누구 남은 거야 이제?”
나는 누구누구 남았는지 점검을 해 보았다. 철수, 욱이, 알뜰, 살뜰, 영철만 남았다.
“욱아?”
“응?”
“너는 나랑 가자.”
“어딜?”
“내 이름 뭔지 알지?”
“살뜰”
“그래, 내가 너를 데려갈게.”
“어디로?”
“몰라.”
“몰라?”
“응.”
“근데, 나를 데려간다고? 왜?”
“이게.”
“응?”
“좋아하는 사람들끼리 사라지는 거 같아.”
“응?”
“아니면, 좋아하는 사람이거나.”
“응?”
“내가 욱이를 좋아하니까, 내가 너 데려갈게.”
“어떻게?”
“몰라.”
욱이가 당황하며 영철이랑 나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욱아, 우린 아무 말 안 했어.”
“그래, 우리 아무 말 안 했어.”
“살뜰아…”
“응?”
“사실은…”
“응.”
“나 있잖아…”
“응?”
“알뜰이랑…”
“살고 있어…”
“알아”
“응?”
“그래서 나랑 가자고…”
“왜?”
“내가 알뜰이한테서 널 뺏을 거니까.”
“야!!!!”
알뜰이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아까 소리를 지른 후, 살돌이의 만행을 피한 고니가 알뜰이한테 날아와 알뜰이 앞에 앉아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했다. 알뜰이가 고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살뜰이가 알뜰이의 그런 모습을보면서, 고니에게 다가가려 했다. 철수가 살뜰이를 말리려 하자, 고니가 살뜰이를 쳐다보며, 꽥 소리를 질렀다.
“얘들아, 제발 이러지들 마. 도대체 우리가 왜 이렇게 된 거야?”
그토록 쾌활하던 영철이가 잔뜩 주눅이 든 모습을 보니, 너무 안 되어 보였다. 문제는 갑자기 비가 오려 한다는 사실이었다. 하늘에 먹구름이 잔뜩 끼었고, 해도 구름에 가려져 날씨가 흐렸다.
“영철아, 우리 비 피해야 할 거 같아.”
내가 영철이에게 말을 걸자, 영철이가 고개를 돌리면서 말했다.
“지금 비 피하고 그러는 게 중요하지 않…”
“영철아, 아니야, 중요해…”
“왜?”
“사라졌어!”
“뭐?”
“넷 다 사라졌어! 우리 비 피해야 돼! 우리만 남았어!”
“어, 다들 어디갔어?”
“영철아, 다리 밑으로 가자!”
“그래야겠네.”
“어떻게 된 거지?”
“다들 어디로 간 거지?”
“투명인간 된 거 아니야?”
“영숙이를 못 찾으면 나 어떻게 하지?”
“영철아, 정말로 영숙이랑 사귀어?”
“응, 정말로 영숙이랑 사귀어! 너만은 내 말 믿지?”
“근데 왜 말 안했어?”
“사귄다고 말하기 애매해서. 그전에는 영숙이랑 얘기하고 사귄 게 아니라서.”
“아, 드디어 진짜 사귄다고 말해도 되는 거야?”
“응.”
“상황 설명을 좀 해봐.”
“영숙이가 투명인간이었다가 어느날 갑자기 내 앞에 나타났어. 그래서, 사귀게 되었어.”
“그럼, 투명인간이랑 얘기한 거야?”
“응. 아니아니, 투명인간이었던 거는 아니고, 투명인간이 되는 능력을 갖고 있다고 영숙이가 그랬어. 자기가 살고 있는 세계에서는 투명인간 되면, 아주 많은 걸 할 수 있다고 했어.”
“자기가 살고 있는 세계?”
“응.”
“영철아, 너 어딨어?”
“응?”
“영철아, 나, 너 안 보여. 어디서 얘기하는 거야?”
“응?”
“내가 안 보인다고?”
“그래.”
“내가 안 보인다고?”
“응, 목소리도 점점 더 작아져. 어떻게 된 거야?”
“나, 이런 기분 처음이야, 이런 느낌 처음이야, 영숙이를, 드디어 드디어…”
“영철아, 영철아, 영철아…”
대답이 없었다. 같이 갔던 친구들 아무도 내 눈에 보이지 않았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고니를 바라보았다. 비가 내리는 그곳에서 고니는 비를 맞으면서 물고기를 잡아 먹는 데에 여념이 없었다. 이 상황에서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비가 계속 내리고 있었다. 하늘을 봐도 아직은 조금 밝은 듯한 어둠 뿐이었다. 나는 비가 그치면 고니에게 다가가 이 모든 상황들을 물어보리라 다짐했다. 비가 그치길 나는 기다리고 있었다.
5. 비는 절대 그치지 않을 거라는 이상한 다짐 (1)
친구들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는 사실에 나는 씁쓸함을 감출 수 없었다. 안희는 어디로 간 걸까. 영철이랑 영숙이는 지금 뭘 하고 있는 걸까. 비는 좀처럼 그치려 하지 않고 있었다. 고니는 비가 오는데도 물고기를 잡아먹느라 아예 내 쪽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냥 비 맞으면서 고니한테 가서 물어볼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왜인이 이 비를 맞으면 나도 투명인간이 되어서 저 하늘 너머로 날아갈 것 같아 두려웠다. 친구들은 두려워했을까. 아니면, 그들만의 세계로 날아간 것일까.
비가 좀처럼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친구들 뿐만이 아니라, 주위에 사람이 단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는 그래도 사람이 있었던 거같은데, 어느 덧 다 집으로 가 버린 걸까. 아니면, 모두 다 투명인간이 되어 다른 세계로 가 버린 것일까. 아니, 어쩌면 다른 세계란 존재하지 않는지도 모른다. 다른 세계가 아니라, 그들은 모두 투명인간이 되어 내 주위를 맴돌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면서, 내가 뭐 하나 쳐다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다시, 안희가 떠올랐다. 안희의 모습. 그렇게 키가 컸었나? 아니면, 이상한 약을 먹어서 커진 걸까? 사람이 그렇게 클 리가 없다. 그렇다면, 여기 어딘가에 분명 해법이 있을 거다. 안희를 찾아야 한다. 영철이도 찾아야 하고, 영숙이랑, 욱이랑 욱희도, 살뜰이랑, 알뜰이도, 영희랑 살돌이, 그리고 철수랑 성영이도.
그런데, 방법이 있을까? 그들을 찾을 수 있는 방법이? 내가 아는 거라곤 그들이 사라졌다는 것 밖에는 모른다. 그러고 보면, 참, 나는 알고 있는 게 하나도… 여기까지 생각하는데, 문득, 내리는 비 사이로 해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그 해가 보이는 산 너머로 무지개가 보였는데, 거기엔 빨강 주황 노란색 초록색, 네가지 색깔 뿐이었다. 그 무지개는 잠시만 보이더니, 내가 본 것을 확인이라도 한 건지, 어디론가 슬슬 기어가듯이 옆으로 밀려났다. 그러더니, 슬금슬금 사라졌다.
그칠 것 같지 않던 비는 조금씩 조금씩 얇아지고 있었다. 이젠, 맞아도 될까, 하고 잠시 생각해 봤지만, 단 한 방울이라도 맞으면, 이 비에 쓸릴 것 같았다. 해가 완전히 나의 몸에 비추었고, 비가 확실하게 그친 걸 확인한 후에야, 나는 비로소 물고기를 잡으면서 놀고 있는 고니에게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고니는 내가 가는 건 신경도 쓰지 않았다. 가까이 다가가도 고니는 그저 물고기를 잡으려 하고 있었는데, 사실은 아까부터 고니는 물고기를 잡으려만 하고 있었지, 실제로 잡지는 않았다. 고니는 물고기를 괴롭히고 싶은 걸까, 먹고 싶은 걸까? 나는 고니에게 말을 걸어 보았다.
“고니야? 고니야? 내 말 좀 들어보련?”
내가 말을 걸지, 고니가 정말 대가리를 들더니, 내 쪽을 바라보았다.
“고니야, 고니야, 내 친구들은 어디 있니?”
대답이 없었다. 대답이 있을 리가 없다는 건 알겠는데, 진짜로 대답이 없을 줄은 몰랐다. 고니가 내 쪽을 한참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나도 한번 더 물어보았다.
“고니야, 고니야, 나를 친구들한테…아니다”
나는 잠시 고민을 했다.
“나를 친구들한테가 아니라, 친구들을 나한테 데려다 줘.”
고니는 계속 말을 거는 나를 계속 빤히 바라보았다. 여전히 대답은 하지 않았다.
“고니야, 내 친구들을 어떻게 했어? 내 친구들을 돌려줘.”
고니는 약하게 꽤액 소리를 질렀다. 여전히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을 뿐, 고니는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다.
“고니야, 나는 어떻게 해야 되는 거야?”
혼자 남겨진 나는 고니에게 계속해서 물으면서, 주변을 살폈다. 분명, 물이 회오리가 치면서 올라갔었는데. 그렇다면, 고니가 한 게 아닌가. 나는 강가를 살폈다. 물고기가 노니는 것이 투명하게 보였다. 너무도 깨끗하게 맑은 강물이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강물이 너무 깊었다. 쉽게 들어갈 수 있는 강물이 아니었다.
“고니야, 강물을 어떻게 했어? 왜 이렇게 깨끗해?”
나는 고니에게 계속 말을 걸었지만, 고니에게선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점점 더 답답해져서 나는 고니에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야, 이 고니야! 대답 안 할래!”
그러자, 고니가 갑자기 하늘을 쳐다보았다. 갑자기 들리는 천둥소리에 놀란 나도 하늘을 쳐다보았다. 해가 구름에 가려지려고 하고 있었다. 나는 놀라서, 얼른 다리 밑으로 비를 피하기로 마음 먹었다. 발을 떼려고 하는데, 발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내 발이 진흙탕에 빠진 줄 알고 발 밑을 쳐다보았지만,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빨리 비를 피해야 되는데. 나는 움직일 수가 없었고, 해는 구름에 완전히 가려졌다. 먹구름이 하늘을 가렸고, 슬슬 비가 올 채비를 하고 있었다.
6. 비는 절대 그치지 않을 거라는 이상한 다짐 (2)
“야, 이 고니야! 네가 그랬지? 이거 놔! 놓으라고! 내 발 놓아!”
고니가 꽥 소리를 지르며 하늘 저편으로 날아가는 줄 알았더니, 다리 밑으로 날아가 버렸다. 나는 고니에게 계속해서 내 발 놓으라고 고함을 질렀다.
“고니, 네가 그랬지? 이것만 벗어나면, 가만두지 않을 거다! 고니, 너 두고 보자!”
비가 톡톡 떨어지기 시작했고, 내 머리가 조금씩 젖기 시작했다.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다. 비를 맞으니, 안희가 더 생각났다. 안희가 비를 맞고 걸어가는 어느 날이었다. 나는 우산을 같이 쓰고 싶어서, 안희를 뒤에서 몰래 따라가고 있었는데, 영숙이가 안희를 보더니, 우산을 하나 건넸고 나는 둘이 나를 볼까봐 얼른 숨어서, 둘이 사라질 때까지 기다렸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문제는, 나는 지금 우산이 없다는 사실이다. 우산 없이는 집을 나서지 않는데, 왜 오늘은 우산을 가져오지 않은 것인지! 비가 점점 더 굵어지기 시작해서, 나는 발을 움직여 보았으나, 여전히 움직일 수가 없었다. 왜 움직일 수가없지. 하늘을 바라보아도, 고니가 있는 다리 밑을 바라보아도, 별다른 건 없었다. 친구들이 나타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것도… 아! 이럴 수가! 사람들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대체 여기는 어디지? 나는 고니를 바라보았다. 나를 도와줄 수 있는 건 누구냐고 물어보기 위해서다. 고니가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고니야, 이 비 절대로 그치지 않겠지?”
고니가 멀리서 고개를 끄덕끄덕 하고 있었다. 희한한 일이었지만, 고니는 내 말을 전부 다 알아듣고 있었다. 고니는 분명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고니야, 그럼 있잖아, 내 발은 어떻게 움직여야 하지? 좀 알려주련!”
고니가 고개를 들더니, 어딘가를 쳐다보았다. 나는 고니가 바라보는 쪽을 쳐다보았다. 거기에는 너무나 큰 플라타너스 나무 한그루가 있었다. 고니는 계속 그쪽을 바라보았다.
“고니야, 저건 왜 보라고 한 거야? 나보고 어쩌라고?”
고니가 그 나무를 향해 고개를 연신 저어대고 있었다. 나는 처음에 그게 무슨 뜻인지 몰랐는데, 고니가 계속해서 고개를 저어대자, 비로소 나는 그 뜻을 알게 되었다.
“알았어, 고니야. 그대로 할게.”
나는 플라타너스에 대고 외쳤다.
“플라타너스야, 나 이 발 움직이려면 어떻게 해야 돼?”
플라타너스의 잎들이 바람에 흔들거렸다. 잠시 잠깐 세찬 바람이 불어와서, 플라타너스 잎 중 하나가 내게로 날아오고 있었다.
“어, 고니야, 저거 왜 저래?”
고니를 쳐다보았더니, 고니는 이제 고개를 저쪽으로 돌리고 내 쪽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플라타너스 잎은 내 발등에 떨어졌다. 나는 그 잎을 줍기 위해 허리를 굽혔다. 그러자, 그 잎은 바람에 또 한 걸음 날아갔고, 내 걸음도 한 걸음 나아갔다.
“너, 지금 어디로 가는 거니?”
그 잎은 나를 어딘가로 계속 데려가는 듯 했다. 바람이 잎을 계속해서 날렸고, 나는 그 잎을 따라 계속 한 걸음씩 옮겼다. 천천히 가는 게 성질이 나서, 마구 발걸음을 떼어버리려 할 때마다, 나의 발에 그 잎은 내려앉아 내가 발걸음을 옮길 수 없게 막아버렸다. 그래서 나는 급하게 가려고 마음먹는 걸 포기해야만 했다.
“잎아, 도대체 어디로 가는 거야? 너도 대답 안 할래?”
잎은 바람이 부는 대로 그저 조금씩 움직일 뿐이었다. 한걸음 한걸음 나아가는 나의 발걸음은 무겁기만 했는데, 그렇게 가다 보니, 어느 덧 나는 다리 밑에 도착해 있었다. 내가 도착한 걸 고니가 쓰윽 쳐다보더니, 다시 물고기 잡는 놀이에 열중했다. 잎은 바람에 날려 강가로 떨어져서 내가 더 이상 그 잎을 따라갈 수 없었다. 그 잎은 내가 더 이상 자신을 따라오는 걸 원치 않는 것 같았다. 내가 그 강물에 들어가기엔 너무나 깊은 곳이어서, 들어갈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고니야, 근데 너, 왜 나한테 아무 말도 안 하는 거야? 넌, 내 친구들이 어딨는지 알고 있지? 너, 분명 말도 할 줄 알지?”
한참 물고기 잡기놀이에 열중하던 고니가 나를 다시 한번 쓰윽 쳐다보더니, 이번엔 플라타너스 나무가 있는 그곳으로 날아가 버렸다.
“야, 고니야! 너 자꾸 나한테 그럴래?”
비가 조금씩 얇아져 가고 있었다. 그런데, 왠지 이 비가 그치지 않을 것만 같단 생각이 들어서 나는 몹시도 힘든 하루를 보낼 것만 같았다. 아니, 어쩌면 하루가 아닐지도 몰랐다. 몇 년이 걸릴지도 몰랐다. 내 주위에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 오로지 고니만 있다는 사실은 나를 두렵게 했다. 나는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고니에게서가 아니라, 내 스스로 답을 찾아야만 했다. 플라타너스 잎이 내게 무엇을 해 준 것일까?
나의 길고 긴 고민은 시작되었고, 비가 그치길 기다리고 있었지만, 비는 정말로 그칠 것 같지 않았다. 나는 비를 맞아보기로 결정했고, 비로소 나는 비를 향해 한발을 내딛었다. 그 비에 무언가가, 진짜로 무언가가 있기를 가득가득 바라면서.
7. 양심적으로 말해서 나는 연애에 대해서 전혀 모른다 (1)
“이봐요, 여기서 뭐하세요?”
방금까지 내가 뭘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네? 누, 누구세요?”
“지금 여기 출입통제된 거 모르세요? 비가 많이 오잖아요. 얼른 나가세요. 위험해요.”
“아, 여기 있으면 안 돼요?”
“네, 여기 있으면 강물에 쓸려 가실 수도 있어요.”
“저기 근데요?”
“네, 무슨 질문이 있으신가요?”
“제가 왜 여기 있죠?”
“그걸, 저한테 물어보시면 어떻게 합니까? 얼른 위로 올라가세요.”
“네…”
나는 위로 올라가는 계단으로 향했다. 방금까지 뭘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정말 오랫동안 있었던 거 같은데. 계단 위에 사람들이 지나다니고 있었다. 우산이 없네. 비가 점점 더 굵어져서, 나는 편의점을 찾아보았다. 저기에 있네. 계단 위로 다 올라오자마자 거기 편의점이 있었다. 주머니를 뒤져보았다. 티머니가 있네. 이젠, 버스를 타고 집에 가면 되겠구나. 그전에 우산부터 사야 할 것 같은데. 티머니에 얼마나 남아 있는 거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나는 편의점에 들어갔다. 편의점 안에는 과자봉지들이 잔뜩 널려 있었고, 우산이 하나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이게 뭐지? 왜 편의점 안에 아무도 없지? 나는 어질러진 과자봉지들 사이에서 우산을 집어 들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편의점에는 과자봉지만 있을 뿐, 사람도 없고, 먹을 만한 것도 진열되어 있지 않았다. 오직, 과자봉지만 어지럽게 널려 있을 뿐이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갑자기, 내게서 착한 마음이 생겨났다. 나는 과자봉지들을 정리하고 싶어졌다. 과자봉지들을 차곡차곡 한쪽에 모아두기 시작했다. 과자봉지가 하나씩 쌓일 때마다, 마음이 뿌듯해졌다. 나는 그 과자봉지 옆에 우산을 놓아두었다.
밖에서는 비가 점점 더 세지는 게 보였다. 나는 쌓아놓은 과자봉지들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얘네들은 여기 왜 있는 걸까. 이 편의점은 대체 왜 먹을 게 하나도 없는 걸까. 그런 생각들을 하는데 또 안희가 생각났다.
“이거 먹어도 돼?”
안희가 나에게 유일하게 말을 했었던 순간이고, 그 후로 안희와 나는 말을 해 본 적이 없다.
“응, 먹어.”
그러더니, 안희는 내게 있는 과자봉지를 하나 통째로 가져가 버렸다. 나는안희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도 그거 먹고 싶다는 말조차 나는 건네지 못했다. 이미, 안희가 가져가 버렸으므로, 나는 그것이 안희의 것이 이미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후로 안희도 나도 서로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물론, 그전에도 마찬가지였지만.
비가 점점 거세어졌다. 차들의 빵빵거리는 소리들이 들려오기 시작했고, 저마다 헤드라이트를 켜기 시작했다. 거리에는 사람들이 점점 더 줄어들고 있었다. 나는 쌓아놓은 과자봉지를 과자봉지 하나에 모두 담고, 그 과자봉지를 들고, 우산을 들고 사람이 거의 없는 거리로 나왔다. 그런데 나는 지금 어디로 가야 하는 거지? 갑자기 집에 가는 길이 생각나지 않았다. 어떻게 가야 하지? 주머니엔 티머니 하나. 주머니를 더 뒤져보았다. 지갑 같은 건 없었다. 돈도 하나도 없고 티머니만 딸랑 하나 있을 뿐이었다. 가방도 있었던 거 같은데, 왜 가방도 없지? 나는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그냥 아무 버스나 올라타면 되겠지, 하는 생각에 아무 버스나 타려고 했는데…
버스가 다니지 않았다. 버스가 다니지 않는다는 사실에 놀란 나는, 거리의 차들을 바라보았다. 모두 회색으로 된 SUV차량이다. 모두 같다. 순간, 나는 두려워졌다. 나, 지금 어디에 있는 거지? 대체, 여기가 어딘 거야? 그러고 보니, 우산을 펴는 걸 잊어버렸다. 나는 우산 속에 뭔가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우산을 펴 보았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거리의 SUV 차량들은 모두 제 갈 길로 갔을 뿐이다. 그러고 보면, 그 차량들의 방향만은 일치했다. 다만, 그 끝에 갈래길이 있을 뿐이었다. 차량이 오고 가는 게 아니라, 오로지 일방통행만 있는 이곳. 이곳은 내가 있는 현실이 아니다. 그제서야, 나는 여기가 내가 살던 곳이 아니라, 낯선 곳으로 떨어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제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과자봉지를 보았다. 편의점으로 다시 들어가야겠다 생각하고 다시 나의 몸을 편의점 쪽으로 돌렸다. 그런데 거기 있어야 할 편의점이 사라지고, 거기에 커피숍이 들어섰다. 어떻게 된 거지? 이 세계에선 건물도 자유자재로 바뀌나 보다. 나는 커피숍으로 들어갔다. 커피숍 안에는 어느 덧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왜 이렇게 또 사람이 많아졌지? 나는 커피숍에 있는 메뉴들을 바라보았다.
아메리카노 – 1000만원
밀크커피 – 1억
복숭아홍차 – 10억
당신의 꿈을 이루어주는 만나커피숍입니다.
8. 양심적으로 말해서 나는 연애에 대해서 전혀 모른다 (2)
뭐 이렇게 비싸지? 이걸 어떻게 사 먹지? 하는 생각에 나가려고 하는데, 커피숍 주인이 내게 말을 건다.
“손님, 왜 그냥 나가십니까?”
“돈이 없어서요.”
“티머니만 갖고 계신가요?”
“네, 티머니만 갖고 있어요.”
“아메리카노부터 시키시죠. 티머니로 결재해 드리겠습니다.”
“네?”
“티머니를 저한테 주세요. 제가 계산해 드리겠습니다.”
“아메리카노부터요?”
“네.”
“여기요…”
얼떨떨한 마음으로 티머니를 주인에게 내밀었다. 주인이 남자인지 여자인지 알 수 없었지만, 이 주인은 내게 뭔가를 해 주려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그 주인한테 물어보았다.
“커피숍 주인님이시죠?”
“네, 그렇습니다만.”
“뭐 하나 물어봐도 돼요?”
“네, 뭔가요?”
“주인님은 남자예요, 여자예요?”
“그걸 알고 싶으십니까?”
“네, 꼭 알고 싶어요.”
“저는 경우에 따라서 남자도 되었다가 여자도 됩니다. 제가 남자이길 바라나요, 여자이길 바라나요?”
“아니예요, 아메리카는요?”
커피숍 주인이 장난을 치는 거 같아서, 나는 더 이상 아무 말도 묻지 않기로 했다.
“여기, 아메리카노 나왔습니다.”
“이렇게 많아요?”
“네, 저희는 1000만원어치를 드리기 때문에, 기본 1.5리터입니다.”
“아, 그럼, 이거, 가져갈 수 있게 담아주실 수 없나요?”
“네, 페트병에 옮겨드리죠.”
“네, 고맙습니다”
조금 후에 페트병에 옮겨진 아메리카노가 나왔다.
“손님”
“네?”
“기왕이면.”
“네?”
“밀크커피도 시키시죠?”
“네? 그래야 되나요?”
“네, 이 커피숍은 아무 때나 열리는 게 아니라서.”
“그럼 밀크커피랑 복숭아홍차까지 시켜야 되나요?”
“그래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모두 티머니로 결재해 주시면 됩니다.”
“아, 네에…여기요…”
나는 별로 기분이 좋지 않았다. 꼭 시키지 않아도 되는데, 그냥 티머니만 있으면 된다고 해서 시키긴 시켰는데…
“주인님?”
“네?”
“그럼 혹시, 티머니에 돈이 그렇게 많이 들어 있는 건가요?”
“메뉴판에 있는 가격은 현금가격이고요.”
“그래요?”
“네, 티머니로 받으면 티머니에 남은 돈 싹싹 긁습니다.”
“그럼, 저 돈이?”
“네, 티머니에 돈이 하나도 없습니다. 싹 다 긁었습니다.”
머리가 멍해왔다. 그럼, 나는 계속 걸어다녀야 하나? 하기야, 어차피 이 세계에는 버스가 다니지 않는데. 내가 진짜 살던 현실로 가게 되면, 분명 티머니가 되겠지.
“손님?”
“네?”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
“아니에요”
“여기, 밀크커피랑 복숭아홍차 나왔습니다.”
“이것도 담아주시면 안 될까요?”
“세 개를 담아드려야 하기 때문에”
“네, 안 되나요?”
“안 되는 건 아닌데…”
“네, 뭐가 또 필요한가요?”
“네, 이 티머니 카드를 저한테 주셔야 합니다.”
“네?”
“담아드릴까요, 아니면 그냥 여기서 드시고 가실 건가요?”
나는 여기서 중요한 결정을 해야만 했다. 티머니 카드가 없으면, 집에 돌아갈 방법이 없을 것만 같았다. 그렇다고 티머니 카드를 주지 않고, 여기서 마시게 되면, 정말 오랫동안 주인이 내게 자꾸 말을 걸 거 같았다. 귀찮은데.
“주인님?”
“네?”
“그럼 말이죠.”
“네, 말씀하세요.”
“여기서 만약 마시게 되면요. 제가 오랫동안 여기 있어야 되나요?”
“저, 손님?”
“네?”
“밀크커피랑 복숭아홍차를 한 번에 다 드시게 되면 금방 나가셔도 되고요…”
“아, 그럼?”
“금방 드실 수 있나요? 꽤 오랫동안 계시게 될 거 같은데요?”
“아, 그렇네요. 꽤 오랫동안 있어야 될 거 같네요.”
“어떻게, 담아 드려요, 아니면 여기서 드시고 가시겠어요?”
“생각 좀 해 보고 말씀드리면 안 될까요?”
“네, 저기 앉아서 차분히 생각해 보세요.”
“네”
나는 아까 전에 주인이 건네 준 아메리카노를 들고 테이블에 가서 앉아서 아메리카노를 홀짝 거리면서 생각에 잠겼다. 과연, 밀크커피랑 복숭아홍차를 페트병에 담아서 여기를 나갈 것인가, 아니면 여기서 오랫동안, 그것도 너무도 긴 시간 동안 여기서 있다가 주인의 질문공세에 시달려 가며 – 왜인지 그럴 것 같았다 – 이 테이블에 이렇게 앉아 있을 것인가. 나의 생각들은 끊임없이 이어져야 했고, 나는 정말 오랜 시간 동안을 고민했다. 여기 있으면, 주인의 질문에 시달리기는 해야겠지만, 이 세계에서 뭔가 탈출할 방법이 생각날 것 같았다. 여기는 또 손님도 많이 있으니, 옆에서 뭔가를 엿듣다 보면 방법이 생각나겠지. 그리고 무엇보다 나의 티머니를 이대로 포기할 순 없었다.
“주인님, 먹고 갈게요!”
“아 잘 생각하셨습니다. 여기 티머니카드 있습니다.”
“네, 고맙습니다.”
“네, 그럼 즐거운 시간 보내세요!”
혼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테이블에 앉았고 주변사람의 말소리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여기서 탈출할 방법이 있을지도 모른다, 내가 떨어진 이 낯선 곳이 어떤 곳인지 알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안고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