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려서부터 학문에 몰두했다. 16세 때에는 이미 이학(理學)을 좋아했으며, 17세 때에는 지금의 학생 여러분만큼의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뒤에 사현도의 <논어해>를 읽고 크게 감격하여 숙독했다. 우선 붉은 연필로 해석이 뛰어난 곳에 줄을 긋고 그 부분을 더욱 숙독하여 잘 음미하여보면 붉은 줄이 쳐진 부분이 몹시 번잡하게 생각되었다. 그러면 이번에는 다시 붉은 줄 가운데에서 더욱 중요한 부분에 검은 줄을 긋고 그곳을 더욱 숙독하여 음미했다. 또 한층 더 숙독하여 검은 줄 가운데에서 정수가 되는 부분을  떼어내어 푸른 줄을 긋고 그 다음에는 또다시 그 푸른 줄의 정수의 또 정수를 추출했다. 여기까지 오면 얻을 것이 매우 적어져 단지 한두 구절만이 문제가 되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리하여 하룻밤 이 한두 구절에 마음을 집중시켜 완미하면 가슴 속이 저절로 시원해졌다.
                                                                                                           
<인간주자> 35쪽에서

주자가 만년에 자신의 곁을 떠나 귀향하는 석홍경이라는 제자에게 술회한 글이다. 주자가 개발한 독특한 독서법을 말하고 있다. 이른바 박(博)에서 약(約)으로 증류시켜가는 주자의 학문자세가 나타나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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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마늘빵 > [말들의 풍경] <19> 가장 아름다운 우리말 열 개 (고종석)

2006. 7. 12 한국일보

http://news.hankooki.com/lpage/culture/200607/h2006071117464985150.htm

 

[말들의 풍경] <19> 가장 아름다운 우리말 열 개
가시내… 서리서리… 내 영혼 적시는 울림


‘가장 아름다운 우리말’은 세대와 계급에 따라, 더 나아가서 개인에 따라 다르다. 각자 자신의 ‘가장 아름다운 우리말 열 개’를 꼽아보자.

김수영 시인

누구에게나 모국어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언어다. 그것은 아름다움이 그 심판관의 편견에 깊숙이 연루돼 있다는 뜻이기도 하고, 아름다움을 느끼기 위해선 먼저 깊이 알아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자라서 외국어로 배운 언어에서도 아름다움을 느낄 수는 있겠으나, 그 아름다움에는 문화적 허영이라는 불순물이 섞여 있기 쉽다. 프랑스 바깥에서 프랑스 문화를 숭배하는 사람들이 제 몸뚱어리에도 이물감을 주는 프랑스어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언어로 꼽는 것 따위가 그 예다. 마흔일곱 해 동안 한국어를 써온 한 남자에게 가장 아름답게 들리는 낱말 열 개를 벌여놓는다.

하나, 가시내. 컴퓨터 모니터 속 활자 ‘가시내’에는 붉은 밑금이 그어져 있다. 그것은 이 낱말이 규범 한국어가 아니라는 뜻이다. 이 말은 한국어 사전에 올라있지 않다. 그것이 표준어 ‘계집애’의 서남 방언이기 때문이다. ‘가시내’라는 말에 깊은 울림을 입힌 이로 서남 출신의 시인 서정주가 있다.

“가시내두 가시내두 가시내두 가시내두/ 콩밭 속으로만 작구 다라나고/ 울타리는 막우 자빠트려 노코/ 오라고 오라고 오라고만 그러면”(‘입마춤’)이나, “눈물이 나서 눈물이 나서/ 머리깜어 느리여도 능금만 먹?杵底? 어쩌나… 하늬바람 울타리한 달밤에/ 한 집웅 박아지꽃 허이여케 피었네”(‘가시내’) 같은 시행에서, 가시내는 순애와 애욕을 동시에 체현하고 있다. 사랑과 관련된 정서적 소구력의 크기에서, 표준어 ‘계집애’는 도저히 ‘가시내’에 다다를 수 없다.

둘, 서리서리. 부사 ‘서리서리’는 동사 ‘서리다’에서 나왔다. 서린다는 것은 (국수나 새끼 따위를) 헝클어지지 않게 빙빙 둘러서 포개 감는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서리서리’는 포개어 감기는 모양과 관련 있는 부사다. 국수 뭉치를 세는 단위 ‘사리’가 ‘서리서리’와 동원어(同源語)임은 물론이다. ‘서리서리’는 사랑의 부사다. 이 낱말을 사랑의 부사로 만든 사람은 황진이라는 여자다. 이 여자의 유명한 시조 한 수는 이렇다.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버혀 내여/ 춘풍 니불 아래 서리서리 너헛다가/ 어론 님 오신 날 밤이여든 구뷔구뷔 펴리라.” 애인과 떨어져 있는 황진이에게 겨울 밤은 한없이 길다. 그런데 그 밤은 애인과 함께라면 너무나 빨리 새버릴 밤이다. 시간의 빠르기는 각자의 심리 상태에 달렸으니 말이다. 그래서 우리 시인은 이 밤을 여투어두기로 한다. 그녀는 밤을 한 토막 잘라내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어놓기로 한다. 애인이 온 날 밤에 굽이굽이 펴기 위해서. 황진이의 놀라운 상상력은 시간을 공간으로, 물질로 바꿔놓고 있다.

셋, 그리움. 그리움은 결핍의 정서적 효과다. 프랑스어 화자들은 “나는 네가 그리워”를 “너는 내게 결핍돼 있어”(Tu me manques)라고 표현한다. 모든 사랑의 시는 그리움의 시다. 사랑은 결핍과 부재의 상태에서 가장 격렬하기 때문이다. “아! 그립다/ 내 혼자 마음 날같이 아실 이/ 꿈에나 아득히 보이는가”(김영랑의 ‘내 마음을 아실 이’)나 “‘그립다’ 생각하면/ ‘그립다’ 생각하는 아지랑이”(서정주의 ‘아지랑이’) 같은 시행에서 그리움은 사사로운 감정이지만, “쓰러지고 쓰러지고 다시 일어서서 드리는/ 이 피 묻은 그리움”(이성부의 ‘벼’)이나 “그러나 불현듯, 어느 날 갑자기/ 미친 듯이 내 가슴에 불을 지르는/ 그리움은 있다”(김정환의 ‘지울 수 없는 노래’) 같은 시행에서 그리움은 정치적 사랑과 이어져 있다. 그 둘은 다른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둘 다 빈 데를 채우려는 마음의 움직임이다. 그 마음의 움직임을 좀더 객관적으로는 ‘기다림’이라 부른다.

넷, 저절로. ‘저절로’는 인텔리전트빌딩이나 하이테크파크의 작동 원리다. 그것은 인간을 노동에서 해방시키는, 또는 노동에서 배제하는 새로운 사회의 부사다. 다시 말해 ‘저절로’의 공간은 ‘인간이 거세된 인공’의 공간이다. 그러나 그것은 또 자연의 공간이기도 하다.

16세기 문신 김인후(金麟厚)는 “청산도 절로절로 녹수도 절로절로/ 산(山) 절로 수(水) 절로 산수간에 나도 절로/ 이 중에 절로 자란 몸이 늙기도 절로절로”라 노래한 바 있다. ‘저절로’는 애씀이나 집착을 넘어선, 마음과 몸의 가장 높은 단계이기도 하다. 인위와 자연을 동시에 품고 있는 것이 ‘저절로’의 매력 또는 마력이다.

다섯, 설레다. 설렘은 마음의 나풀거림이다. 그것은 정서적 정신적 미숙의 증상일 수도 있다. 부동심(不動心)은 동서고금의 많은 현인들이 다다르려 애쓴 이상적 마음상태였다. 그러나 설렘이 없다면 생은 얼마나 권태로울 것인가. 소풍 전날의, 정인(情人)을 기다리는 찻집에서의, 설날 해돋이 직전의 설렘을 기억하고 되새기는 것은 생의 정당한 사치다. 그것은 생의 밋밋함을 눅이는 와사비다.

여섯, 짠하다. 내가 늘 펼치는 한국어 사전에는 ‘짠하다’가 “지난 일이 뉘우쳐져 못내 마음이 언짢고 아프다”로 풀이돼 있다. 내가 굳이 사전을 펼쳐본 것은 컴퓨터 모니터 속 활자 ‘짠하다’에 붉은 밑금이 생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당연히 밑금이 그어지리라 지레짐작했다. 이 말을 서남 방언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전의 설명이 표준어 ‘짠하다’의 올바른 정의일지는 모르겠으나, 내가 아는 ‘짠하다’는 사전의 정의와 뉘앙스가 조금 다르다.

그 뉘앙스를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은 한국어 화자 가운데서도 서남 지방 사람들일 것이다. 서남 사람들이 잘 쓰는 ‘짠하다’는 표준어 ‘안쓰럽다’와 뜻이 비슷하지만, 그렇다고 고스란히 겹치지는 않는 것 같다. ‘짠하다’에는 안쓰러움과 애틋함이 버무려져 있다. ‘짠하다’는 마음 가장 깊숙한 곳에서 우러나오는 연민의 형용사다.

일곱, 아내. ‘아내’라는 말이 내게 아름답게 들리는 것은 내가 남자이기 때문일 테다. 요즘엔 젊은 세대고 나이든 세대고 할 것 없이 ‘아내’ 대신 ‘와이프’라는 말을 즐겨 쓰는 듯하다. 힘센 언어에서 차용된 외래어는 그 비릿한 사용 맥락에도 불구하고 우아하게 들리게 마련이지만, 이 ‘와이프’는 전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한국어 속에 끼여든 ‘와이프’는 그 본적지에서와 달리 천박하게 들린다. 나만 그런가?

여덟, 가을. 지방에 따라 ‘가을’이라는 말이 ‘가을걷이’ 곧 ‘추수’의 뜻으로도 쓰이고 있는 걸 보면 한국인들의 상상 속에서 가을은 무엇보다도 결실의 계절이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가을은 또 조락(凋落)의 계절이기도 하다. 미국 사람들의 ‘가을’(fall)에는 그 조락의 상상력이 또렷하다. 성함의 끝과 쇠함의 시작이 맞닿아 있는 때가 가을이다.

아홉, 넋. 넋에 대한 믿음을 지닌 사람들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 그것은 공식 통계와 상관없이 인류의 종교적 심성이 점점 옅어지고 있다는 뜻일 테다. 넋이 과학의 까탈스러운 눈 앞에 제 모습을 번듯하게 드러내지 못했으니, 이것은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넋이 사라진 세상은 얼마나 허전할 것인가. 얼마나 납작할 것인가.

열, 술. 이 말이 아름답게 들리는 것인지 이 말이 가리키는 물질이 아름답게 보이는 것인지 섞갈릴 때가 있다. 아무튼 ‘술’이라는 말만큼 술처럼 들리는 말이 내가 아는 외국어에는 없다. ‘술’의 마지막 소리인 설측음 /ㄹ/은 술의 물리적 성질을, 다시 말해 액체로서의 유동성을, 그 흐름의 본성을 드러내는 것처럼 들린다. 한편 그 첫 소리인 치마찰음 /ㅅ/은 술이 예컨대 증류수 같은 무미 무취 무색의 액체가 아니라 빛깔과 향기와 맛을 지닌 매력적인 액체라는 것을 상상하게 한다.

그리고 그 두 자음을 이어주는 원순 후설모음 /ㅜ/는, 내게, 술은 내뱉는 것이 아니라 마시는 것이라는 점을, 또 마시되 예컨대 모음 /ㅏ/가 연상시켰을 수도 있듯 폭음하는 것이 아니라 절제 있게 느릿느릿 마시는 것이라는 점을 함축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므로 술은 뇌세포에 상처를 낼 정도로, 또는 그렇게까지는 아니더라도 청각이 흐릿해져 서로 악다구니를 써대거나, 과장된, 또는 가장된 애상의 몸짓이 펄럭일 정도로 마실 일이 아니다. 이 말을 해 놓고 보니 쑥스럽긴 하다. 나 자신 ‘음주인’의 직업윤리를 잘 지키지 못하고 있으니.


시인 김수영이 꼽은 말은?
마수걸이·에누리·은근짜·총채… 상인집안 내력에 장사 용어 많아

시인 김수영(金洙暎ㆍ1921~1968)은 ‘가장 아름다운 우리말 열 개’라는 수필에서 자신이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말들로 마수걸이, 에누리, 색주가, 은근짜, 군것질, 총채, 글방, 서산대, 벼룻돌, 부싯돌을 꼽은 바 있다. 시인 자신이 “내가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말들은 아무래도 내가 어렸을 때에 들은 말들이다. 우리 아버지는 상인이라 나는 어려서 서울 아래대의 장사꾼 말들을 자연히 많이 배웠다”고도 고백하고 있거니와, 이 말들 가운데는 ‘시장 언어’가 꽤 있다. 장사꾼의 공간이라는 ‘아래대’란 동대문에서 광희문에 이르는 지역을 가리킨다. 그 맞은편의 서울 서북 지역은 ‘우대’라 불렀다.

젊은 독자들 귀에 설지도 모를 말들을 설명하자면 ‘마수걸이’는 하루나 한 해 중 처음으로 물건을 파는 일을 뜻하고, ‘은근짜’는 몸을 파는 여자를 뜻하며, ‘서산대’는 옛날 글방에서 학동들이 책의 글자를 짚는 데 사용하던 막대기다. 먼지떨이라는 뜻의 ‘총채’도 요즘은 많이 쓰지 않는 듯하다.

김수영이 꼽은 이 말들은 ‘가장 아름다운 우리말’이 세대(와 출신지역과 계급)에 따라, 더 나아가 개인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요즘 젊은 세대라면, 설령 이 말들의 의미를 알고 있다 하더라도, 그 아름다움을 느끼는 단계로 건너가기 위해 포착해야 할 뉘앙스를 도무지 잡아낼 도리가 없을 것이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말(의 뉘앙스)이 변하는 것은, 그래서 아름다운 말의 기준이 변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김수영은 이 수필에서 자신이 ‘매우 엉거주춤한 입장’에 있다며 “‘얄밉다’ ‘야속하다’ ‘섭섭하다’ ‘방정맞다’ 정도의 낱말이 퇴색한 말로 생각되고 선뜻 쓰여지지 않는 반면에, ‘쉼표’ ‘숨표’ ‘마침표’ ‘다슬기’ ‘망초’ ‘메꽃’ 같은 말들을 실감 있게 쓸 수 없는 어중간한 비극적 세대가 우리의 세대”라고 푸념하고 있다. 그렇지만 김수영 세대만이 아니라 모든 세대는 언어의 생태학 속에서 ‘매우 엉거주춤한 입장’에 있을 수밖에 없고, 그래서 ‘어중간한 비극적 세대’일 수밖에 없다. KBS 텔레비전의 오락 프로그램 ‘상상플러스’의 ‘세대 공감 OLD & NEW’라는 코너는 한 세대의 말이 다음 세대로 고스란히 옮겨지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을 실감나게 보여준다. 각자 자신의 ‘가장 아름다운 우리말 열 개’를 꼽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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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인장 호텔 마루벌의 좋은 그림책 2
브렌다 기버슨 지음, 이명희 옮김, 미간로이드 그림 / 마루벌 / 1995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요즘 선인장은 우리에게 낯익은 식물이 아니다. 예전에는 선인장을 키우는 사람이 많았는데, 요즘은 참 보기가 어렵다. 왜 그럴까? 도시 생활을 하다보니까 집에 키우는 식물은 상당부분 건강을 위해서 키우는 경우가 많더라. 광합성 작용을 하는 중에 수분과 산소를 방출하고 그래서 집안의 공기와 습도가 좋아지는 기능을 하게 된다. 물론 이게 전부는 아닐 것이다. 내 관찰이 턱없이 좁을 수도 있다. 어쨌든 예전에는 시골의 집집마다 있는 자그만 화단에 선인장 하나씩은 다 있었던 것 같다. 이것도 내 착각일 수 있다.

 

<선인장 호텔>의 선인장은 미국 애리조나 주 남부의 소노란 사막과 멕시코 북부에서만 자라는 사구아로 선인장이다. 다 자라면 어른 키의 열배 정도(15-20미터 정도)까지 되고, 수명은 200년 가까이 된다고 한다. 그런데 이런 선인장의 어린시절을 살펴보면 참 재미있다. 쥐 수염에 붙어있다가 떨어질 정도로 크기가 작은 씨앗이라고 한다. 그러다가 싹이 트서 자라면 10년이 지나도 겨우 어른 손 한뼘 정도 크기에 불과하다고 한다. 25년이 지나면 다섯살 어린이 키만해진다. 오십년이 지나면 엄마 키 두배만큼 자라고 드디어 하얗고 노란 꽃을 피우게 된다. 그 때부터 피는 꽃은 한해에 딱 하룻밤만 핀다. 꽃이 지고 나면 열매가 달리는데 그것이 너무 맛있어서 사막의 온갖 동물들이 군침을 흘린다. 그 지방에 사는 파파고 인디언들도 그 열매를 아주 좋아한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키가 3미터 이상 자라면 드디어 그 곳에 온갖 동물들이 집을 짓기 시작한다. 딱따구리, 흰줄 비둘기, 난쟁이 올빼미, 박쥐, 곤충들, 사막쥐도 이곳을 삶의 거처로 삼는다. 그래서 '선인장 호텔'이다. 다자란 선인장은 키가 어른 키의 10배 정도, 몸무게는 8톤 정도 된다. 이 정도면 거의 고래 수준이다.

 

이 책의 내용을 글로 옮기면 기껏해야 A4용지 한장도 안 될 것이다. 내용도 그렇게 흥미를 끌지는 않는다. 그런가보다 할 뿐이다. 무슨 대단한 갈등이 있는 것도 아니잖는가. 그런데 그림이 기막히다. 그림과 글이 잘 어울려서 감동을 준다. 이게 그림책의 묘미다. 선인장에 붙어 사는 다양한 동물들을 선인장과 함께 그려놓으면 선인장은 손자 손녀가 50명쯤은 되는 할머니 같다. 오래된 나무에서 우리가 느끼는 감동을 똑같이 느끼게 된다. 더구나 선인장의 배경으로 등장하는 산과 하늘의 파랑과 보라색이 뒤섞인 빛깔과 평원의 흙빛깔이 참 잘 어울린다. 선명한 대비가 느껴지기도 한다. 동물들이 싸우지 않고 그렇게 잘 어울려 살 것 같다. 개미에서 사막쥐, 방울뱀, 토끼, 여우, 늑대에 이르기까지 사막에 몸붙여 사는 동물들은 이 선인장 덕택에 그나마 평안한 삶을 누리는 것 같다. 시아구로 선인장 같은 사람이 되어야겠다. 늙어 죽어서도 덕이 사라지지 않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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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방에 갇혀 노래를 부르면서
정작 노래를 잃어버렸다
텅 빈 하늘을 행해 서서
목이 터져라 부르던 노래
바람이 머리칼을 흔들면
걸음을 뗄 때마다 저절로 나오던 노래
물가에 앉으면 가슴이 먼저 젖어 흘러나오던
그런 노래를 잃어버렸다
노래의 마음인 노랫말이 우리 마음을 움직이고
노래의 몸인 소리가 우리 몸을 흔들던 그런 노래들
어떤 날은 노래가 깃발이 되어
우리를 끌고 가고
어떤 날은 수천 수만의 사람을
한 방향으로 한 발짝씩 나아가게 하던 노래
혼자서 돌아오는 밤길 낮은 소리로 읊조리는
내 노래에 내 볼이 젖던 노래
그런 노래들을 잊어버렸다
혼자 부르고 또 불러서
온전히 내 노래가 되던 노래
노래 한 곡이 술 한 잔을 마시게 하고
노래만으로도 온 밤을 깨어 있게 하던
그런 노래들이 우리 곁을 떠나버렸다
중심도 방향도 놓친 뒤부터
바람도 물소리도 멀리한 뒤부터
                                                        <슬픔의 뿌리>

 

노래란 무엇인가? 사람에게 노래란 무엇인지. 스스로의 마음을 위로하고, 때로는 삶의 환희를 표현하고, 함께 나아갈 이상을 드러내기도 하는 그런 것이다. 노래방이 아니라 광장에서 부르는 노래. 그런 노래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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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겁이 많은 편이다. 어릴 때부터 겁많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다. 늘 주저하고 머뭇거리는 편이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느리다. 느리다는 이야기도 많이 듣고 살았다. 곰이라는 별명도 있다. 때로는 이 규정들이 지겹도록 싫을 때가 있다. 이것이 내 정체성인가 싶어서 혼란스럽기도 하고 그렇다.

아이들을 데리고 운동을 시켜보면 확연히 겁많고 느린 아이들이 구별된다. 얼굴표정에 쓰여져 있다. 무슨 사정인지는 몰라도 약간은 겁에 질린 표정이다. 그것은 삶에 대한 두려움이다. 같은 동료인 친구들에게 핀잔을 듣거나 따돌림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다. 그런 아이들은 혼자 있을 때, 혹은 집에서만 자기의 본성을 드러낸다. 그 때는 두려움이 없다. 자기만의 세계에서는 겁낼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자기만의 세계. 그러나 어둠은 싫어한다. 한낮의 고요함과 외로움도 싫어한다. 누군가 지켜주고 있다는 확신이 있어야만 움직인다. 이것은 정체모를 것에 대한 두려움이다. 귀신같은 알 수 없는 존재가 자기를 해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일까? 이것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라고 해도 되겠다.

삶도 두렵고 죽음도 두렵다. 두 세계의 중간에 서서 머뭇거리고 있다. 왜 삶과 죽음을 정면으로 쳐다볼 생각을 못하는 것일까? 어떤 선입견이 그를 사로잡고 있는 것일까? 관념없이 세계의 속내를 쳐다본다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것인지. 무엇인가에 사로잡혀서 이 세계의 사물을 바라보면 그것은 어느 순간 헛것처럼 보인다. 도깨비. 근거없는 두려움. 내 두려움에는 실체가 없다. 헛것의 관념이 지배하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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