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림트의 그림과 네코미미라는 이 엄한 조합....

근간의 일본 애니메이션 계의 특징이라면 매니악한 감각의 수요에 대한 집중적 공략이 세분화된 형태로 분류되어 일종의 의식적인 진화 과정을 거쳐 나오는 하이브리드적 결과물이란 점이다. 이것은 대중 문화산업에서의 소비 주체자로 오타쿠 계층이 완전히 수면 위로 올라왔다는 걸 뜻하는 것이고 에반게리온이 끌어들인 적극적인 담론화의 과정 이후에서부터 꾸준히 내려져 온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요정의 노래라는 고상한 이름이 붙은 이 작품 또한 그 흐름의 연장선이라고 볼 수 있겠다. 하드고어 미소녀 하렘물이라고 칭할 수 있는 이 작품은 티비 애니메이션에서 표현할 수 있는 잔혹성의 한계를 시험한다. 일본 하드고어 애니메이션의 전통이 보여줬던 노골적인 잔혹성에 열광했던 이들이라도 이 정도의 표현이 야간 방영이라곤 하지만 티비에서 버젓이 방영되었다는 것에 충격을 먹을지도 모르겠다. 오카모토 린이 영점프에 연재하는 더럽게 재미없는 동명의 원작을 베이스로 만들어진 이 작품은 첫화에서부터 사지절단의 학살극으로 시작한다. 이 작품에서 날아다니는 팔다리와 쏱아지는 핏더미를 구경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스토리를 따르는 친절한 학살 안내도.

절단된 손가락의 단면을 클로즈업으로 비춰주는 잔혹함에도 불구하고 작품의 한가운데에 있는 건 미소녀들이고 하렘의 법칙에 따라 주인공 주변으로 좀비들처럼 서서히 몰려온다. 히로인인 뉴의 머리에 달린 귀를 주시하라. 네코미미의 변형형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저 오타쿠적 미소녀 패턴에 대한 배려가 돋보이는 디자인이라니. 그런데다 그들은 서비스씬에 있어서도 무척이나 충실하다. 한쪽에선 하드고어의 제전이 펼쳐지지만 다른 한쪽에선 미소녀들과 누드가 그만큼 충실하게 시청자들에게 서비스를 제공해준다. 이 두가지 극단적인 감각의 공존은 작품에 병적인 이미지를 씌워준다. 그 관계가 유독 낯설어보이는 것은 문제의 두가지 요소가 인과성 있게 융합되지 못하고 따로 놀고 있다는 점에서 기인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어찌 생각해보면 이것은 <네크로맨틱>보다 더 고약한 취미이다. 적어도 <네크로맨틱>은 죽음과 섹스의 결합이 지독하게 끈끈했기 때문에 작품 자체에는 별로 동의하고 싶진 않지만 로맨티시즘의 기운마저 돌았었다. 하지만 <엘펜리트>가 추구하는 영역은 하나의 전형이 된 하렘물의 주인공들에게 가하는 극단적인 폭력의 광경이다. 그것은 하드고어 동인지의 전통에서 확인해 볼 수 있는 의식이며 미소녀와 하드고어라는 두 조합은 발상의 참신함과 표현상의 불쾌감을 동시에 감수해야 확인할 수 있는 결과물이다. <엘펜리트>는 그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오간다.

솔직히 왜 연재중단이 안 되는지 의문이 들 정도의 놀라운 퀄리티를 보여주는 원작. 작가가 여자라는 점이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오기도 했었다.

개인적으로는 오카모토 린의 원작이 워낙에 형편없는 작품이었기 때문에 원작이 가진 너저분한 군더더기를 제거하고 최대한 발상의 참신함을 가진 모티브를 유지하려 애쓰면서 하드고어적 감각을 티비 애니메이션 수준을 뛰어넘는 지점으로까지 발전시킨 애니메이션판은 이제는 아예 관습이 되어버린 부실한 작화와 연출의 시공을 가리지 않는 출현이 눈에 거슬리긴 해도 그럭저럭 점수를 주고픈 작품이다. 그레고리오 성가를 연상케 하는 음악과 더불어 클림트의 그림들과 연결시킨 유난히 정적인 오프닝은 역시나 자뻑 증세의 일환이 아닌가 하는 의심도 들게 만들지만 피칠갑이 된 죽음과 오타쿠적 에로티즘이 공존하는 병적인 감각이 클림트의 그림이 보여주는 건조하고 병적인 에로티즘과 괜찮은 화학효과를 일으키는 걸 고려하자면 그 선택이 그리 납득이 안 가는 것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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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슬링거 걸> 1쿨 13화를 다 봤다.(미쳤지...-_- 내일은 방언학 관련 리포트 하나에 시험이 두개가 껴있는데... 1바이트도 작성 안 한 상황.) 뭐 매드하우스에서 제작을 맡았지만 명성에 걸맞지 않는 부실한 작화가 눈을 찌푸리게 만들긴 했는데.... 아는 사람은 알테지만 이 애니메이션은 스토리적으로 아동인권을 완벽하게 무시하는 작품이다. 바로크풍 하드보일드 로리물이라고나 할까.

배경은 현대 이탈리아. 북부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한 극우 정치조직인 공화국파와 마피아의 끊임없는 테러에 대항하여 정부는 사회복지공사라는 듣기는 좋은 조직을 출범시킨다. 그 조직은 사고나 선천적인 문제로 인해 정상적인 신체 활동이 불가능한 소녀들을 데려와서 의체를 통해 신체기능을 비약적으로 향상시키고 정신제어로 대테러 작전에 적합한 정신 상태를 유지시키면서 여러 비밀임무를 수행하는 것이 목적인 조직이다. 이것은 그 소녀들에 대한 이야기다.

일찌기 총과 자동차와 미녀의 조합은 총포상과 주차장에 가면 쉽게 볼 수 있는 그라비아 모델 달력을 통해서 입증이 되는 바, 소노다 켄이치는 <건 스미스 캣츠>를 통해서 마초이즘이 가장 극적으로 발현되는 현대 대중문화의 한 양상을 훌륭하게 형상화했다. 거유 취향에다 로리콘, 본디지까지 아우르는 다양한 취향을 선보여줬던 건 스미스 캣츠는 핀업걸의 세련된 하드보일드 액션 버전이었다. 동시에 총과 미소녀라는 아이콘의 만화에서의 장르적 공식이 그 지점에서 완성됐다.

<건슬링거 걸>은 차를 제외한 총과 미소녀라는 컨셉을 보다 고급화, 특정화한 결과물이다. 비록 사각턱이지만 어쨌든 미소녀, 그것도 로리타 컴플렉스를 자극하는 연령대의 미소녀들이 나오는 것은 시대의 흐름을 따른 결과이다. 그들은 모두 총과 무술 등 전투 교범의 달인들이며 그중 하나는 무식하게 생겨먹은 SIG를 달고 다닌다. 피렌체와 시칠리아의 아름다움을 얘기하고 미술관에선 총질을 금하는 품위있는 테러리스트도 나오지만 안타깝게도 작화는 이탈리아 미술이 이룩해낸 찬란한 성과를 전혀 따라가지 못하고 그저 이탈리아의 단편적인 풍경들만 가까스로 따온다.

흥미로운 것은 미소녀들이 주인공으로 되어있음에도 작품 내에서 제대로 된 노출은 단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는 점이다. 육체의 드러냄이란 측면에서 이 작품은 엄격할 정도로 금욕적이며 그것은 작품의 중심에 남성 권력에 착취 당하며 손쉽게 로리콘적 욕구의 대상이 될 어린 여자아이을 배치시켜놓으면서 어두운 색감과 낮은 톤의 대사들, 내내 정장을 고수하는 인물들을 통해 한참 우회해서 발현되는 자기검열적인 페티시즘적 에로티즘이다.

만화적 자유주의에 모든 책임을 떠넘겨서 작품이 가지는 일체의 논쟁적 함의들을 지우고 나면 이 작품은 무척이나 패셔너블하며 감각적인 발상이 돋보이는 물건이다. 그런데다 주인공들은 비극이 만연화된 현실 속에서 살아가는 너무나 가련한 존재들이라 그들이 기뻐하는 일상의 소소함과 삶의 모순이 안겨주는 갈등은 이야기가 전해주는 운명적 슬픔을 극대화시킨다. 그것이 작품의 흐름 내에서 설득력을 갖지 못한다면 분명 히로인들을 너무도 가혹하게 몰아가는 새디스틱한 설정에 대한 거부감일테지만. 아, 그리고 애니메이션판에 대해서라면 앞서도 언급한 딸리는 작화와 다소 부실한 연출.

그림에 있어서나 이야기의 흐름에 있어서나 아이다 유의 원작 만화책판이 낫다고 단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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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호천사를믿어요 2006-05-30 2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나치게 현학적이고 더구나 시니컬한 글이군요.
 

화사(花蛇) --- 서정주


 


사향(麝香) 박하(薄荷)의 뒤안길이다.
아름다운 배암
을마나 크다란 슬픔으로 태어났기에
저리도 징그러운 몸뚱아리냐


꽃대님 같다.


너의 할아버지가 이브를 꼬여 내던 달변(達辯)의 혓바닥이
소리 잃은 채 낼룽거리는 붉은 아가리로
푸른 하늘이다. 물어뜯어라. 원통히 물어뜯어


달아나거라, 저놈의 대가리!


돌팔매를 쏘면서, 쏘면서, 사향 방초(芳草)ㅅ길
저놈의 뒤를 따르는 것은
우리 할아버지의 안해가 이브라서 그러는 게 아니라
석유 먹은 듯 석유 먹은 듯 가뿐 숨결이야.


바늘에 꼬여 두를까 보다. 꽃대님보다도 아름다운 빛


크레오파트라의 피 먹은 양 붉게 타오르는
고흔 입설이다. 스며라, 배암!


우리 순네는 스물 난 색시, 고양이같이 고운 입설
스며라, 배암!



 * 출전 : [시인부락]2호(1936)


 


화사를 꾸준하게 관통하고 있는 이미지는 달리 찾아볼 것도 없이 뱀의 이미지다. 여기서 뱀은 강렬한 자극이 있는, 그래서 취할 수도 있는 공간을 배경으로 미와 추를 동시에 아우르며 동서고금을 넘나드는 이미지의 여행을 보여준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뱀이라는 아이콘이 역사와 문헌들, 신화들 속에서 어떻게 다뤄져왔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시가 가장 먼저 차용하고 있는 뱀의 이미지는 구약성서에서 이브를 유혹하여 인간을 타락시켰던 뱀의 이미지다. 그래서 이후 기독교 시대 내내 서구에서 뱀은 사악함의 상징으로 취급받아왔다. 그러나 이 흥미로운 히브리 민족의 일대기 외에 다른 오래된 민족들의 전설 속에서 뱀은 신성한 동물이었다. 그리스 신화에서 지식을 날라주던 헤르메스가 뱀 두 마리가 서로 얽힌 지팡이를 들고 다녔던 것처럼 세계 여러 민족의 신화와 전설 속에서 뱀은 지혜와 지식을 전해주는 입장이었으며 달의 대리자이자 다산의 상징이었고 허물을 벗는다는 특성 때문에 또아리를 튼 모습, 혹은 자신의 꼬리를 물고 있는 모습이 되어 무한과 영생을 상징하기도 했다. 사악한 피조물로 묘사된 구약성서에서의 뱀조차 이러한 뱀을 상징하는 것들로부터 벗어나지 않고 있다. 뱀은 이브에게 세상을 볼 수 있는 시야를 준 것이며 그 열매는 지식의 나무라 불리운 것이었다. 성서에서 뱀과 동일시되는 루시퍼는 성서 외전에서 야훼가 가장 사랑했던 동시에 가장 강대한 힘을 가졌던 천사로 묘사된다. 그러나 루시퍼는 힘과 지식에 근거한 오만함으로 신에게 저항하다가 지옥으로 추락해버린다. 성서는 문명의 불가피함과 그 파멸적인 속성을 보여줌으로써 신의 권위를 강화하고 있고 그것은 다신교 문화였으며 당대의 가장 강력했던 문명인 메소포타미아 문명에 대한 반작용으로 시작된 유대교의 성격을 보여주고 있다. 이렇듯 성서에서 뱀은 유대교외의 종교들이 경배했던 신성함이 거세된 유혹자 이상이 아니었지만 다른 민족들에게도 뱀은 숭배하는 동시에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뱀이 금기가 된 것은 그 신성한 동물이 치명적인 독을 품고 있다는 사실을 고대 사람들이 잊지 않았던 것 때문이다. 그래서 뱀은 위험인 동시에 유혹의 상징이라는 모순적인 양상을 가지며 총체적으로는 인간이 가진 지식-지각에 대한 본능적인 갈구와 위험을 가리킨다.


'화사'의 화자 또한 그 모순의 감정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4연까지 화자는 뱀에 대한 혐오와 매혹을 반복하며 왔다갔다 한다. 여기서 뱀에 대한 혐오는 뱀이 가진 독, 그리고 미끈한 몸뚱이가 만들어내는 징그러운 인상으로 인한 것이지만 그 묘사가 모호하여 쾌히 충분하진 못한 반면에 화자로 하여금 뱀에 대한 매혹을 끌어내는 것들은 보다 구체적이고 강렬하다. 단적으로 말해서 그 매혹은 뱀이 가지는 성적인 요소들 때문에 일어난다. 뱀은 앞서 말했듯 다산의 상징이며 종종 남성기와 동일시된다. 공간적인 묘사에 있어서도 사향과 박하 같은 후각을 자극하는 소재들의 쓰임은 화자가 서있는 곳을 흐릿한 환몽과 같은 상태로 만들어준다. 또한 그런 공간 안에서 뱀에 대해서 언급할 때 신화적인 설명에서 빠지지 않았던 지적인 측면이 유혹 그 자체의 인상으로 전이된다(~달변(達辯)의 혓바닥이// 소리 잃은 채 낼룽거리는 붉은 아가리로). 이것은 뱀이 가지는 육체적인 유혹의 강화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시에서 처음 쓰이는 붉은색의 표현이다. 붉은색은 이후 시에서 내내 감각적인 힘을 발휘한다. 이후 화자의 모순적인 감정은 점점 강해져서 뱀에게 취한 화자는 푸른 하늘을 물어뜯으라고 응원하기까지 한다. 여기서 푸른하늘은 성서적 의미에서 야훼의 대체물로 봐야할 것이며 붉은색과 대비되는 색으로 질서와 차분함, 침잠과 차가움을 뜻하는 것들에 대한 반항적 표현이라 봐야할 것이다.


화자는 결국 돌팔매질로 뱀을 쫓아내기 시작하지만 이내 홀린 듯 그것을 뒤따라간다. 그 과정에서 화자는 뱀에 대한 매혹을 온전히 고백해버린다.(저놈의 뒤를 따르는 것은~가뿐 숨결이야.) 그런데다 뱀을 따라가는 길은 사향(박하가 빠져있다는 것을 주목하자)과 아름다운 꽃들이 널린, 첫부분보다 더 화려해지고 성적으로 자극이 강해진 공간임을 짐작 가능하다. 화자는 뱀에게 완전히 매혹되고 그것은 소유욕으로까지 이어진다. 그는 이어서 꽃대님과 같았던 뱀을 꽃대님보다도 더 아름답다고 선언한다. 그리고 그의 의식은 이집트로 날아간다. 정확히는 꽃대님보다는 더 유명하고 구체적이며 아름다운 상징을 찾아나선 것이리라. 그 대상은 클레오파트라다.


클레오파트라는 뱀과 무척 친한 여자였다. 뱀을 숭배했던 이집트의 여왕이었던 것이 그렇고 안토니우스와의 연애로 인해 파멸적인 여자를 상징하기도 했으며 죽을 땐 독사에게 물려 죽었다. 기구한 인생과 절대적인 미를 표상하는 이 여자의 피는 전통적인 원형으로 봐서 곧 생명이고 그녀의 대체물이다. 그녀의 피를 먹었다는 것은 그녀의 생명-그녀의 미美라는 상징의 전이됨을 가리킨다. 동시에 피가 묻은 입술은 앞서 묘사됐던 석유-석류로의 의미전이의 가능성을 뒷받침한다. 피와 석류로 인해 붉게 물든 입술은 유혹적이고 성적으로 발현된 상태로 화자는 그 안에 뱀이 스며들라고 소망하고 있다. 여기서 석유-석류는 동시에 붉은색의 감각으로 귀결된다. 붉은색은 불, 뜨거움, 정열, 유혹 등등의 활동적이고 위험할 수도 있는 요소를 갖춘 감각을 불러일으키는 원형이다. 그렇기에 붉은색은 금기를 나타내는 상징으로서 유혹과 금기라는 뱀이 함께 품는 이중적인 의미와 일맥상통하는 바가 있다.


7연에서 대상은 뒤에 이어지는 순네와 앞서 꾸준히 묘사된 '화사'와의 경계가 불분명하기에 실제적으로는 '화사'와 뒤에 이어서 등장할 순네가 융합되고 있는 부분으로 보여진다. 그 이유는 순네라는 이미지가 만들어내는 감각이 앞서 얘기된 성서-클레오파트라와의 지리적, 인종적인 이질감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순네는 앞서 꾸준히 이어져 온 뱀의 유혹적인 양상과 클레오파트라의 미를 계승한다. 그녀는 또한 막 성년에 이른 스무살이다.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자각하고 만개할 나이, 말하자면 가장 유혹적이고 성적인 아우라로 둘러싸일 시간이다. 그래서 화자는 그녀를 묘사함에 있어 고양이를 불러들인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고양이는 성스러운 숭배의 대상이었지만 앞서서 클레오파트라가 나왔다고 하여 굳이 이집트로까지 이을 필요는 없을 듯 하다. 여기서 고양이는 앞서 등장했던 뱀이 가지고 있던 신화적 신성성이 희미해지면서 뱀의 관능적인 면에 힘을 보태는 것으로 전이된 것처럼 소위 요물로서의 고양이를 지칭하는 것으로 봐야할 것이다. 고양이는 길들이기 힘들고 이기적인 성미와 아기 울음소리를 연상케 하는 울음소리를 지니며 짝짓기 때의 요란스러움 때문에 여성성이 요사스럽게 발현된 화신으로 묘사되기도 했다. 여기서 보여지는 순네는 고양이로 표상되는 총체적인 유혹의 힘이 스며든 입술을 가지고, 화자는 그에 만족 못하고 따로 나뉘어 강조한 절(스며라, 배암!)을 통해 뱀의 이미지가 그녀에게 더해지길 보다 적극적으로 소망한다. 연을 따라 계속해서 이어지는 붉은색-입술의 연장선에서 해석되는 이 부분은 동시에 클레오파트라와의 동질성의 증거로 반복되는 구절이기도 하고 또한 석유-석류로 보여졌던 이중적 유희가 재발견되는 부분으로 오럴섹스의 구현을 은근히 묘사하고 있다. 여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화자는 성서와 클레오파트라 같은 비교적 동떨어진 원형적인 상징과 인물들을 지나 순네라고 하는 현실적인 인물에게 귀착되는 의식의 여정을 끝낸다. 여기서 결과이자 목적으로서의 순네는 그 이름에서 오는 느낌으로부터라도 앞서 얘기된 성서-클레오파트라를 주변화시키고 그에 대한 낯선 감각들을 환기시킨다. 그러나 그 낯설음이 지리적, 인종적인 차이만으로 만들어지는 문제라는 걸 인식하면 이 동떨어진 요소들의 긴밀한 협조가 만들어내는 자장의 스무스함으로 인해 도리어 신화, 원형적인 이미지들이 가지는 보편성을 반증하는 것처럼 보인다.


시 안에서 혼재되어 날아다니는 의미들은 흡사 뱀의 움직임처럼 이리저리 이동하며 의미와 언어의 충돌과 자극적인 감각을 생성해낸다. 만약 해석에의 머뭇거림을 포기한다면, 그 모든 것들이 지향하는 바가 삶, 보다 정확히는 생생하게 살아 꿈틀거리는 생명에 대한 원형적인 의미에서의 지향점을 갖고 있다고 판단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뱀과 얽혀 죽음을 얻게된 이브와 스스로 죽음을 택한 클레오파트라의 운명은 죽음에의 의지와도 연결되는 바가 있다. 에로스적 양상과 타나토스적 양상에서, 비록 시에서 드러나는 바는 지극히 에로스적인 양상이지만 뱀이 전해주는 파멸과 두려움의 상징 또한 잊혀지진 않고 있고 그것은 서로의 의미를 상쇄하는 기능을 가진다. 그렇기 때문에 이 시는 욕망 자체를 지향하는 이미지의 흐름, 그 뒤를 쫓는 해체적 작업의 필요성이 요구된다고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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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6개월 전엔가 한겨레 신문사에 떨렁떨렁 놀러가서 주워온 책이다. 그 이름도 찬란한 마법의 책! 무엇보다도 포장이 멋지다. 튼튼하게 박음질된 것이 배게로 써도 괜찮을 것 같긴 하지만 의외로 두께는 얇은 편. 그러나 실용서적에 그런 리스크가 무슨 대수랴....

어떤 문제에 대한 답을 쉬지않고 갈구하며 책장을 더듬거리다가 삘이 왔을 때, 쫙! 하고 펼치(기만 하)면 그 페이지에서 당신이 원하는 답을 찾아낼 수 있을 것.... 이라는 거의 맥도날드 햄버거와 다를 바가 없는 수준의 패스트푸드성을 진하게 보여주고 있는 실용 점술 서적. 그러나 이 책을 소유한 나로선 이 책이 가진 위력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기억이 있다....

그것은 중고 매물 시장에 '피아캐럿에 어서오슈3' 정품 패키지가 올라왔을 때의 일이다. 이것을 사야할 것인가 말아야 할 것인가. 그 즈음에 18금 업계의 화이널 환타지(-_-)라고도 불리는 '피아캐럿3'는 이미 해볼 사람은 다 해본 그런 게임이었으나 정품이라는 것, 미개봉이라는 것에 어쩔 수 없이 끌리는 마음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얼마나 절박했으면 이 책에 나의 미래를 물어볼 생각을 다 했겠는가-_- 나는 책의 가르침을 따라 충실한 절차를 거쳐(그래봤자 더듬거리는 것 이상이 아니다....) 점괘를 냈다!

이 책의 진정성을 조금, 검토해보게끔 만들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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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츠라 마사카즈는 전영소녀라는 전설적인 물건에 대한 막연한 두근거림으로 다가왔다. 당시 소문만으로 그 야하고 화끈하다는 소리를 질리게 들어야 했던 나로선 드디어 마침내 전영소녀를 일본판으로 구하여 콧구멍 벌름거리며 집으로 돌아와 래핑을 뜯었을 때의 감각을 아직도 잊지 못하는 바이다.

그러나... 그러나.... 어떤 새끼가 이 만화에 대한 구라를 쳤는지, 그 모든 정보들은 한낱 꿈이었는지. 아니면 내가 순진하지 않았던 건지 그건 잘 모르겠는데 아무튼 그 야하다는 전영소녀는 쥐뿔도 야하지 않은, 아니 그보다는 어린 나이에도 괴상한 의심을 품지 않을 수 없는 작품이었다.

대체 팬티하고 브라자는 왜이리 자세하게 그려져 있는 거야?

그렇다. 카츠라 마사카즈는 페티시즘에 관한한 일종의 확신범이었다.(슈에이사에서 나오는 수퍼점프에 중편 양식으로 1회 연재됐던 'M'을 보면 확실해진다.) 그는 내가 아는 한 그 어떤 작가보다도 속옷을 미려하게 표현해낼 수 있는 능력과 애정을 동시에 갖춘 작가였다. 아아~ 그렇다. 내가 로빈슨 크루소의 사랑을 읽지 않고 페티쉬즘의 세계로 빠져들었다면 나는 그의 작품에서 툭하면 보여지는 엉덩이 살랑~ 살랑~ 에 감동의 눈물을 흘렸을 터, 안타깝게도 실제의 나는 그 예쁘장한 애들이 바람이 불 때마다 엉덩이를 들추고 말도 안되는 시추에이션으로 레이스의 세심한 부분 하나하나까지 정성스럽게 양각된 듯한 브라자를 자랑스럽게 까보여도 전~혀, 척추에 달린 쿤달리니 따위는 커녕 뇌내 남성 호르몬 활성화의 기미조차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데다 더 심각했던 문제는 이 양반의 만화들이 정말, 진심으로 재미가 없었다는 것이다. 전영소녀서부터 아이즈까지 주루룩.

그래서 제트맨이라는 이 양반의 후속작을 고르는데 그리도 망설였던 것은 당연한 수순이리라. 그러나 '씨버, 그래도 미소녀 하난 기가 막히게 그리니까. 아무리 아스트랄 영역으로 날아간 재미를 보여준다해도 참자. 발정난 강아지한테 물린 셈 치자.' 그래서 나는 이 책을 집어들었다....

충격적인 얘기일지도 모르겠지만 이 작품에서 여자는 달랑 한 명밖에 안 나온다. 오오 씨버, 그런데다 별로 오래 나오지도 않는다. 그런데다 미소녀도 아니다....

그. 그런데 뭐냐. 무엇이냐, 이 재미는. 대체 당최 이 놀라운 가독성의 회오리는 대체! 이, 이것이 마사카즈의 만화란 말인가. 정말로 그렇단 말인가아아~

...하고 비명까지 지른 건 아니지만, 어찌보면 도식적인 구조를 가진 안티히어로의 이야기, 그 1권은 정말 재밌었다.

이제 겨우 1권이 나온 상황에서 섣불리 단정하는 것은 금물. 하지만 제트맨이 여지껏 자의든 타의든 페티시즘에의 단호한 의지를 보여줬던 카츠라 마사카즈의 만화 영역을 확장시켜 줄 것은 틀림없어 보인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재밌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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