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묻는 아이들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92
김고연주 지음 / 책세상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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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 무라카미 류는 무력한 소설가의 시선으로 당당하게 원조교제를 하고 다니는 고등학생 여자아이의 하루를 따라가본 적이 있었다. 여자아이가 보여주는 당당함에 소설가는 주눅들어 있었다. 그래서 마침내 한 불한당의 손을 빌려 여자아이에게 외친다. '니가 이러고 있는 걸 알면 슬퍼할 누군가가 있다는 걸 알라고.' 도덕극의 마땅한 결론. 글쎄, 그는 그 작품을 쓸 때도 고등학생 여자아이도 느낄 거 다 느끼고 할 거 다 할 줄 아는 '여성'이라는 걸 인식하지 못했던 것일까. 중립적인 시선으로 보여지던 그의 태도가 막판에 가서 기이하게 왜소화된 마초적 행위로 드러난 것은 작가의 한계가 아니었나.

그에 비하면 김고연주가 쓴 이 얇은 책은 여성의 시선으로 바라본 남성적 사회의 '자연스러운' 경제행위인 원조교제에 대한 흥미로운 시선을 제시한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이 책은 적어도 현재 시점에선 상당히 정확하며 현실을 예리하게 꿰뚫어보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비록 웹상에 구축된 유영철팬클럽과 같은 현상을 남성주의적 현상의 일환으로 연결시켜버리는 오버가 보이긴 하지만 그정도 오판은 실로 미미한 수준이고 전체적으로 이 책에서 보여주는 시선은 더없이 고르다.

여기서 가장 주안이 되는 것은 경제행위다. 저자는 원조교제의 당사자인 여성들이 단순히 나이 때문에 성인에 비해 상대적으로 미성숙한 인간으로 취급받으면서 보다 성스럽고 보호 받아야 할 가치가 있는 존재가 된다는 것, 그리고 동시에 그것이 자신을 상품화할 수 있는 이 영악한 아이들에게 무기로 작용한다는 걸 지적한다. 하지만 저자의 시선으로 보자면 이 아이들은 이미 성인이 느끼는 것과 별다를 바가 없는 감각과 판단력을 갖춘 존재들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사회에서 받는 부조리가 어떤 것인지 충분히 이해할 정도의 경험과 지식을 갖고 있고 조직적으로 성매매를 하는 시스템을 구축할 정도로 시장을 파악하고 있다. 그래서 이들을 대하는 저자의 접근은 이들과 철저하게 같은 위치에서의 관찰로 맞추어진다. 이들의 이야기들은 결론적으로 이들이 기성의 가치관과는 완전히 다른 가치관에서 맞추어져 있다는 걸 인정해야 이해가 가능한 종류의 것들이다. 그런데 그 가치관이 안드로메다 혹성에서 떨어진 것이냐. 아니다. 그들이 그런 시스템을 구축해야 했던 이유도 결국은 기성의 가치관이 만들어낸 구조에 대한 저항, 혹은 틈입에의 의지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여기서 소위 말하는 사회적 도덕과 일탈은 동전의 양면으로 그 모습을 드러낸다.

그래서 어쩌자고? 이 질문은 거의 모든 관련 문서들이 갖는 종국적인 난제이며 여기서도 그 미래와 해답이 분명하게 제시되진 못하고 있다. 그러나 이해와 인정이란 측면에서, 그리고 이것이 일종의 노동문제란 점에서 이 책은 미약하게나마 그 해법을 보여주고 있다. 청소녀들이 비정규직 시장에서 받는 대우, 그리고 주가 아닌 논외로서의 얘기로 원조교제뿐만 아니라 매춘으로 먹고 살아야 했던 성인여성들의 측면에서 지방에서의 비정규직이 받는 대우에 관해서 생각해보면, 그 인정이란 것이 정당하게 추정되어야 하는 이유가 나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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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죽음
짐 크레이스 지음, 김석희 옮김 / 열린책들 / 200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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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다룬 수많은 형이상학적 문제제기들과 대답들과는 완전히 반대지점에서 시작하는 이 소설은 살이 썩고 뼈가 부서지는 죽음, 오로지 현상적 측면에서의 죽음에 대한 해부학적 접근을 시도한다. 작가는 인류가 땅위를 걷기 시작했을 때부터 있었을 죽음에 대한 두리뭉실한 의견개진과는 애초부터 담을 쌓고 죽음이 일으키는 온갖가지 다양한 양상들을 세밀하게 묘사한다. 그래서 소설의 중심을 잡고 있는 노부부 생물학자의 죽음이 세계와 동화되는 과정은 놀라울 정도로 다채로운 광경들로 드러난다. 그들이 부서지는 그 모든 광경은 소설 속의 인물들이 그 죽음을 마주했을 때 자연스럽게 느끼게 되는 것처럼 냄새나고 혐오스러운 것이지만 동시에 하나의 경이-삶과 죽음이 일치하는 접점을 드러내는 흥미롭고 놀라운 풍경이 된다. 그래서 두 사람의 딸은 썩어문드러진 자신의 부모를 직시하면서 최초로 경이감과 존경심을 느끼게 되며 슬픔과 공포가 아닌 삶을 살아갈 용기를 얻게 된다.

소설에서 죽음만큼이나 비중있게 다뤄지는 것은 두 노부부, 특히 아내인 샐리스의 사고의 영역이다. 거의 대부분의 서술에서 화자가 되어 살아있을 때, 그녀의 의식의 흐름과 성격과 그로 인한 결과들을 보여주고 있는 샐리스는 단 한 번의 열정으로 결혼을 해버린 주인공 부부의 삶의 지리함을 드러내는 인물이다. 생물학적인 열정(물론 직업적인 의미가 아니다)이 사라져버린 노년의 부부가 보여주는 모습들은 일상의 지리함을 가감없이 보여준다. 그 둘은 너무 닮았기에 처음부터 서로에게 맞지 않는 커플이었고 그것은 결혼 후에도 어색하다 싶을 정도로 삐걱거리는 성격상, 스타일 상의 차이로 보여진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이 처음 섹스를 했을 때의 기억을 재생하려다 난데없는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것은 삶-죽음의 라인이 얼마나 밀접한지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은유다. 그리고 죽음으로 인해 비로소 축제가 시작된다. 여기서부터다. 이 소설의 원제가 [Being Dead]라는 것을 기억하자.

기실, 이 소설은 한방에 달려간다. 소설의 처음을 장식하며 끝까지 이끌어가는 두 노부부의 죽음과 그에 얽힌 관계, 인물들의 사고의 흐름과 과거의 이야기들은 수십년을 넘나드는 시점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읽기에 전혀 부담이 안될 정도로 스무스하게 이어지는 솜씨가 발휘되고 있다. 이것은 물론 소설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삶과 죽음의 두 영역이 떨어진 영역이 아니라 오히려 밀접하게 붙은, 그러면서 서로를 끊임없이 자각하게 해주는 현상이라는 주제를 드러내기 위한 장치이기도 하다. 그러나 여기서 보여지는 죽음은 삶과 이어지는 일상의 한부분이라 의미가 없는 것이 아니라 일상을 꿰매주기 때문에 의미가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삶의 대척점이자 언제나 함께 존재하는 죽음은 일상이 가진 지리함의 연장이 아니다. 그것은 작가의 손에 의해서 묘사되는 죽음이 보여주는 그 많은 다채로운 변화와 삶에의 보완수단으로서의 기능으로 설명된다. 그래서 의미를 잃고 살아왔던 두 부부가 삶의 이유를 되살리기 위해 벌인 이벤트 와중에, 그리고 그것이 가장 절정에 머물 시점에 그와 같은 무게로 찾아온 죽음을 맞이한 후 남게된 두 시체가 일궈내는 그 다양한 경이들이 그토록 풍요로운 필치로 보여지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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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흥용
박흥용 지음 / 청년사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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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솔직한 제목 그대로 이 책은 박흥용이 1986년부터 월간 만화광장과 주간만화에 발표됐던 단편들 18편을 모아 4개의 파트로 나누어 수록한 단편집이다. 시간순으론 그가 본격적으로 만화광장에 데뷔하게 된 '백지'에서부터 시작하는 이 이야기들은 왜 만화광장이란 잡지가 이후에 창간되는 성인 지향의 한국만화잡지들에게 넘어서야 할 벽으로 존재했는지를 증명하는 것처럼 보인다. 초창기 시절의 작가들이 가지는 치기어림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박흥용의 단편들이 보여주는 호흡은 진중하고 무거우며 근간의 우리나라 만화들에서 쉬이 느껴지지 않는 성찰이 보여진다. 당시의 만화광장엔 이희재와 오세영 같은 작가들도 있었던 바,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지타산이 맞았다고 하니 이 잡지가 이후의 한국성인만화잡지들이 넘어서야 하는 하나의 벽이자 꿈같은 대안이 되버린 건 당연한 일이다. 물론 한국만화라는 정체성에 대한 결벽증과 이득산출이라는 현실적인 목표가 행복하게 결합되리란 건 근간에 와선 거의 불가능에 가깝게 된 일이고, 그것은 마땅히 받아들여야 할 사항이긴 하지만.... 종이 만화 산업의 전반적인 축소화 경향과 인터넷 매체의 확산이 불러온 검열의 모호성이 문제로 떠오른 지금에 와선 어쩌면 좀 늦은 판단이 아닐까 싶다.


암튼, 작가 자신이 서문에서 밝혔듯이 이 단편집에 실린 대부분의 이야기들 가운데에 서 있는 것은 사회적 약자들이다. 하나같이 가난과 제도적 폭력 밑에서 살아가며 존재 자체를 부정 당하는 위치에까지 이른 이들의 삶은 고난하기만 하다. 박흥용은 이 작품집에서 세상을 약자와 강자의 대립각으로 확실하게 세워두고 약자들의 입장에서 세상살이의 고난함과 페이소스를 이끌어내고 있다. 분명히 그의 만화 속 세상은 가혹하기만 하다. 그런데 그의 만화는 그렇게 슬프지만도, 억지스러운 감동을 자아내지도 않는다. 또한 그 세계는 그 무수한 부조리에도 불구하고 최지룡의 만화처럼 광기에 시달리는 세상도 아니다. 기본적인 인식만큼은 세상은 약육강식이라는 확고한 세계관으로 무장한 지룡선생과 일치하는데 말이다.


만화평론가인 정준영이 책 말미에 쓴 해설에서 그의 작품세계를 성찰이라는 키워드로 이해 가능하다는 풀이를 써놓았거니와, 나는 그것을 능청스러움이라고 보고싶다. 성찰을 통해 얻어낸 능청스러움. 이것이 해학이고 이 정서란 것이 그의 만화를 다른 만화들과 구분짓게 하는 중요한 가름길이라고 볼 수 있겠다. 자신이 드러내는 인물들만큼이나 능청스러운 이 작가는 세계가 만들어내는 결과에 대해 뻔히 알고 하층민 특유의 궁상맞은 여유를 동반하는 특유의 능청스러움을 통해, 그 가혹함을 중화시키고 있다. 이것이 최지룡과 박흥용이 갈리는 지점이다. 극단적인 망상을 통해 블럭버스터적 가혹함으로 세상을 바꿔놓은 최지룡의 작품은 인디펜던스데이를 위시한 미국형 DDR용 블럭버스터 영화와 다를 바가 없다. 그것은 성찰이 배제된 세상이며 평행감각을 잃어버린 사람의 시선이다. 세상은 그런 망상보단 훨씬 더 냉정하고 계산적이다. 박흥용의 시선은 그런 세상을 꿈속이 아니라 현실 속에서 좀 더 차분하게 바라보고 진심으로 그것을 극복하려 하는 의지의 산물이다.


재밌는 것은 이 작품집에서 단편의 시간적 추이에 따라 작가가 자신만의 색을 가지게 되는 과정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1986년작인 '백지'와 1988년작인 '잃어버린 향' 등의 작품을 보면 오세영의 '월북작가 단편순례'나 김동화의 '한국단편문학선집'에서 볼 수 있었던, 단편 소설을 만화로 표현해낼 때의 연출들인 정적인 씬의 표현과 그에 부가되는 설명구의 강조를 통한 일종의 그림소설적인 양상이 두드러지게 보여지는 반면 1992년작인 '나무 위에 사는 나무'에 이르면 작가 특유의 해학과 능청스러움이 잘 드러나는 연출이 완연하게 보여지고 있다는 점에서 간단하게나마 확인할 수 있겠다.


현재에 이르러서 일본만화와 한국만화의 차이에 대해서 벌이는 논쟁은 무의미해졌다. 만화는 만화인 것이고, 그것으로 족하다. 일찌기 양영순은 우리나라 작가들이 더 많이 일본만화를 베껴야 한다고 했거니와, 그것은 결국 진정한 작가라면 자신의 한계와 그것을 돌파할 힘을 알고 있다는 의미에서 말한 것이었다. 스타일이란 것이 파고들고 파고들어 정형화되면 결국 매너리즘에 사로잡히게 되고 작가라면 그것에 대해 고민하게 되기 마련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선을 통과한 작가는 살아남고 그렇지 못한 작가는 사라져버린 걸 알고 있다(심지어 김성모조차 이현세의 어시들을 끌어와 용주골 블루스를 그리기 시작했다). 그런 시대에 박흥용이란 작가는 독자적인 자신의 길을 찾아냈고 그 길을 꾸준히 걸어 몇 안되는 장인의 지위를 획득했다. 그의 작품을 읽는 것은 지나치게 가벼움만 추구하는 근자의 만화들에 비추어, 일종의 소화제 역할을 충분히 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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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타쿠 가상 세계의 아이들
에티엔 바랄 지음, 송지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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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 번역된 오카다 토시오가 쓴 <오타쿠학 입문>은 오타쿠라고 하는 특화된 계층의 정당함을 웅변하고 있다. 그는 그자신이 오타쿠의 입장에 서서 그제껏 오해되고 왜곡되어 온 오타쿠들의 문화와 능력을 설명하고 그들의 업적과 인간적인 면모까지 개선해내려 애쓰고 있다. 그러나 오카다 토시오의 책은 그들이 왜, 어떻게 해서 이 세상에, 그리고 일본이라는 사회에 출현했는지에 대해서 썩 설득력 있는 설명을 해주진 못했다. 그들은 진화된 인간이며 거기 있어 마땅한 인간이라는 것 이상의 설명이 실리지 못한 그의 저서는 사회과학적 측면에서의 한계를 갖는다.

그런 의미에서 에티엔 바랄이 쓴 이 책은 사회과학적 입장에서, 그리고 재일 프랑스인이라는 외부인의 입장에서 쓰여진 흥미로운 오타쿠 분석기이다. 여기서 저자는 오타쿠의 생성원인을 밝히는 작업에 분명한 촛점을 맞추고 그 문제를 풀기 위한 논리를 전개시켜나간다.

비록 <유유백서>를 '남성우월주의적 경향이 강한 레슬링 선수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이야기'라고 표현하는, 일본에서 십년을 넘게 산 사람이 쓴 책이라곤 도저히 믿겨지질 않는 센스와 지식을 보여주기도 하는(이 부분은 저자 탓인지 번역자 탓인지 명확하지가 않다) 이 책은 <유유백서>에 대한 설명과 맞먹는 무지가 곳곳에서 돌출됨에도 불구하고 그런 것들을 좀 넘겨주고 참아주고 하면 현대 일본 사회의 하위 문화에 대한 다양한 사례와 그에 대한 설득력 있는 주해로 가득한 괜찮은 오타쿠 개설서이기도 하다. 이미 오타쿠 문화라는 것이 영역별로 특화된 일종의 종합지식인의 형태로 놀고 있는 것이라고 본다면 직접 오타쿠가 되지 않는 한엔 그들을 설명하는 것은 어쩔 수 없이 일종의 개설, 혹은 설명에 대한 양상으로 나갈 수밖에 없다. 이것은 또한 외부인으로서 오타쿠 문화를 바라보는 이의 한계를 담보하는 조건이기도 하다. 학문이 아닌 행동으로서의 오타쿠를 강조하는 오타쿠 이론가들은 이 부분에서 오타쿠와 비오타쿠가 구분된다고 천명한다.

그렇다면 장 자크 베넥스의 서문에서 보여진 가능성처럼, 그리고 오카다 토시오가 그렇게 바라던 것처럼 오타쿠란 단어는 과연 '매니아'라는 단어처럼 그 쓰임새가 광범위한 영향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인가. 언어가 하나의 권력으로서 자리한다고 보자면 '매니아'가 퍼지게 된 데에는 영미권 제국주의의 성과라고 볼 수 있겠지만 그에 비해서 현재 시점에서 오타쿠는 그 표면에 걸리적거리는 것들이 너무 많이 붙어있다. 그것은 역사적, 사회적 측면의 문제이다. 그랜다이저가 100% 시청율을 기록했던 프랑스와 우리나라는 오타쿠라는 일본어를 대하는 시점에서의 미묘함이 가진 폭이 더 커진다. 다수의 부정적 사건과 연관되어 온 오타쿠란 단어가 일본에서는 찬반양론이 그나마 담론의 자리를 형성했다고 본다면 우리나라에서 오타쿠는 철저하게 부정적인 단어다. 그것은 현상 이전에 역사적 차원의 문제이다. 그러나 우리 대부분의 어린시절 추억 중 하나가 국적을 속인 일본 애니메이션과 관련되어 있고 공사판에서 쓰이는 단어의 대부분이 일본어라는 걸 생각해보자면 이 오타쿠란 단어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가 이율배반적임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겠다. 전자에 있어선 가면라이더와 울트라맨에 빠져살았음에도 이후 그 세계를 저버린 일본의 소위 '비오타쿠' 계층과도 일치하는 측면이다. 오타쿠의 부정적 현상을 증폭시키는 외양적 측면을 받아들이는 모습은 우리나라와 일본이 일맥상통한다. 오타쿠 문화가 가치파괴적이고 반사회적 성향을 보이며 동시에 특정영역에서의 고도화를 꾀하고 있다는 점에서 일종의 극단을 대변하고 있다는 걸 감안하자면 오타쿠층에서 뒤어나오는 일탈과 직접적인 반사회적 현상에 대한 사회의 시선이 유난히 따가운 것은 당연한 일이다. 몇몇 오타쿠 이론가들은 자신들이 얼마나 흔한 인간인지를 설명하려고 애쓴다. 그러나 그것은 마치 장르문학이 주류문학으로 편입하려 애쓰는 것과 비슷한 일이다. 가능성은 있지만, 시간이 많이 필요한 시도.

혹은, 그리 애쓸 필요가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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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과 꿀벌 7 - 완결
안노 모요코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0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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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트럼프스>로 잠시동안 외도를 하긴 했지만(그리고 성과가 좀 아녔지만) 안노 모요코의 장기는 역시 연애물에서 발휘된다. 소위 '쿨하다' 라고 하는 형용사를 완벽에 가깝게 만족시키는 그녀의 캐릭터들, 주로 주체적인 여성들이 등장하는 작품군 가운데에서 이례적으로 남성 캐릭터를 주인공으로 잡은 이 작품은 그 선택에도 불구하고 이채롭다기보다는 동어반복에 가깝다.

일단 이 작품이 연재된 잡지는 청년지다(영매거진). 그래서인지 기본적인 상황 설정, 코마쯔라고 하는 천하쑥맥이 화자가 되어 이야기를 끌고 가는 모습은 소학관 소년잡지에서 시작되어 진화한 전통의 연애물들(전영소녀, 아이즈, 딸기백푸로... 등등, 정확히는 점프쪽 연재물들에서 그 공식이 성립된)에서 나오는 적당히 멍청해서 정겹고도 지겹기까지 한 주인공들의 행각과 다를 바가 없다.

그러나 기존 순정만화에서의 공식을 바꿔 놓은 안노 모요코 만화의 특징은 스토리 전개에 있어서의 패턴 뒤집기와 개성 강하고 스타일이 탁월한 캐릭터들이 풀어내는 현란한 수다와 유쾌한 오버액션에 있으며 이 작품에서 그녀는 간만에 그러한 자신의 장기들을 유감없이 드러내보인다. 어쩌면 발상과 기본틀이 마사카즈의 매너리즘적인 작품들과 일맥상통한다고 할 수 있는 이 작품이 소위 스탠다드한 영역 밖에서 노는 것은 그러한 그녀의 솜씨 덕이다. 그녀가 만들어내는 캐릭터들은 그녀의 전작들이 그랬던 것처럼 실로 거침이 없다. 그게 한심한 모양이든, 쿨한 모양이든, 적어도 행동에 대한 진심을 묻는다면 그들은 당당하다.

또한 이 작품을 청년만화답지 않게 복잡다단하게 만드는 요소는 연애라고 하는 것을 이미 질릴 정도로 다뤄본 작가의 감각이 여성 캐릭터들에게 부여된 탓에 기존의 청년만화에서의 연애물에선 보지 못한 거칠고 쿨하며 동시에 섬세하고 롤렉스시계 속마냥 복잡한 구조의 성격을 지닌 그녀들에게서 빚어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니까 이 작품은 당최 고민의 겨를이 없는 한심단순한 코마쯔라는 숫컷 캐릭터의 시선을 빌어 여성들의 심리, 정확하게는 작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여성적 연애관을 되짚어보는 거울과 같은 역할을 수행한다. 그런 점에선 언니들의 재치있고 쿨한 세계관보다는 지독하게 정형화된 우리의 화자 코마쯔의 한심한 행각과 사고관쪽이 보는 이를 지긋지긋하게 만들어준다. 이 부분은 작가의 본바탕이 순정만화쪽에 있었다는 걸 증명하는 것일 수도, 소년만화라는 틀에 맞추려 한 작가의 지나친 오버액션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겠다.

또한 이 작품의 문제점이라면 그녀의 작품들에서도 소수의 작품군만이 그 재난을 피해갈 수 있었던 특유의 미묘한 용두사미적 흐름과 관심이 없어진 캐릭터에 대한 적극적인 폐기정신이다. 이것은 그녀의 작품이 시트콤적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단발마적인 감각에만 목을 매달고 있다는 비판의 근거가 된다.

하지만 그 흐름에 철저하게 따라가는 모습이야말로 지독할 정도로 트렌드에 민감한 작가의 사고관을 대변해주는 건 아닌지(그러나 개인적으로 큐티하니 실사판에서 보여준 그녀의 감각은 패션의 패자도 모르는 나에게 꽤나 안도감을 안겨줄 정도의 수준이었다). 지독하게 하드보일드했던 <러브마스터X>의 보다 유연해진 버전인 이 작품은 오랜만에 낄낄거리며 읽을 수 있게 만든 센스 있는 작품이었다(참고로 본인은 딸기 일백푸로를 1권을 채 못 넘기고 던져버린 기억이 있다) 물론 그 안에서 감정과 관계에 대한 무수한 질문들과 답들과 오류들은 각각 진실과 착각을 담고 있다. 그 헛점의 범위가 전성기를 거치고 한동안 헤매면서 보여줬던 그녀의 작품들에 비해 보다 분명히 갈피를 잡고 있는 덕에 그리 크지 않다는 것만으로도 이 작품에 합격점을 주고싶다. 나머지는 그녀의 유희적인 감각이 담당해야 할 몫이고 다행스럽게도 확실하게 유쾌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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