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생 5 - 완결
키오 시모쿠 / 대원씨아이(만화) / 200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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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시연] 6권을 보면 결국 포기를 모르는 사나이가 되어버린 마다라메의 모습에서 제법 동정심 및 공감대를 느꼈을 사람도 있겠거니와, 이미 4권에서 안드로메다 저 편의 님을 향하게 된 그의 홍조띈 얼굴에서부터 [현시연]의 미래에 대해 이 작가의 전작을 떠올리며 불길함을 느꼈던 이들도 상당수였을 것이니 그 근거가 되는 문제의 전작이 바로 '연애지옥도' [5년생]인 것이라.

[5년생] 1권을 처음 봤을 때의 갑갑함을 잊기란 힘들다. 고등학교 시절, 그제 막 만화를 본격적으로 보기 시작한 나로선 가히 극리얼리즘이라고 불릴 법한 이 만화의 방향성에 조금 당황하고 있었음이 틀림없었다. 절제된 감정과 치밀한 일상 묘사. 멀어져가는 연인들의 심리에 대한 집요한 추적. 이 모든 것을 아직 사랑 한 번 제대로 겪어보지 못한 그때의 내가 완전하게 이해했다면 당연히 거짓말이고. 그러나 아무 것도 몰랐던 나로서도 마치 현실을 그대로 베껴낸 듯한 전개에 숨이 턱턱 막혔던 기억만은 생생하다.

그게, 세월은 흐르고 흘러 이제 나도 [5년생]의 등장인물들, 아키오, 요시노와 비슷한 나이가 됐다. 그리고 헌책방에서 이 [5년생]을 5권 전권으로 구해가지고 왔다. 난 나와 같은 고민과 일상을 다룬 이들의 이야기를 같은 나이대가 되서야 드디어 끝까지 읽을 수 있었다. 이것은 어찌 생각하면 행운이다. 치기에 씌여 읽어서 섣불리 내려졌을지도 모를 오독의 함정을 넘어갔을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니. 뭐, 일본은 군복무 의무가 없으니까, 만화 속 인물들보단 나이는 넘어선 때이지만 결국 이들처럼 역할상으론 사회로 나가느냐 마느냐의 기로, 그리고 몇 차례의 쓰라린 기억들과 만화속 에피소드들이 오버랩되어 [5년생]의 리얼리티는 그 어느 때보다도 나에게 직접적으로 다가왔다.

5년생이라는 낙제생과 사회인의 괴리. 원격연애와 바로 옆에 잡히는 몸뚱이간의 괴리, 나의 마음과 너의 마음의 괴리, 남자와 여자의 괴리, 나와 나자신간의 괴리. 차이가 만들어내는 골에 대한 이야기를 살갑게 풀어내고 있는 [5년생]은 작화의 어색함을 감추는 기능을 함과 동시에 인물들의 정서를 그대로 끌어내는 페이스-바스트 클로즈업의 빈번한 사용과 주변적인 풍경에 대한 디테일함, 그리고 인물들의 생동감 넘치는 대화가 만들어내는 감정의 교류와 대립각에 그 미덕을 두고 있다. 다분히 정적이지만 정서적인 측면에서의 폭력적 흐름들로 인해 상처는 점점 벌어지고 인물들은 각자 겪어본 적이 없었던 감정과 경험에 대면하기 시작한다. 다르게 말하자면 뒤늦게, 혹은 다시 찾아온 열병, 첫사랑과도 같은 것이다.

이야기의 끝, 그 복잡스럽고 불편한 흐름들의 결말에서 이제 20대 중반이자 겪을 것도 다 겪었다 싶은 청춘들은 좀 더 능숙해지고 뻔뻔스러워진다. 그러나 나와 너는 끝까지 서로의 상처를 알지 못한다. 다만 짐작할 뿐이다. 그럼에도 한 번 부숴졌던 이들은, 보다 뻔뻔스러워져서 서로에게 두터운 장갑으로 둘러싸인 자신의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한다. 소위 어른이 된다는 것, 아키오의 5년째란 결국 유예의 연장이 아니던가. 그런가하면 일찌감치 유예를 끝냈다 생각했던 요시노는 자신이 통제 못하는 감정의 틈입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망가지는 시간을 보내야했다. 길고 험했던 통과의례를 끝마쳤지만 그들은 여전히 불안하다. 그래서 봄은 여전히 멀어만 보인다. 하지만 그들은 아주 오랜만에 서로에게 웃어보인다. 언제 또 찾아올지 모를 열병을 근심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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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세영 - 한국 단편 소설과 만남
오세영 지음 / 청년사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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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세영이란 작가의 작품을 처음 만났던 것은 그가 빅점프에 [오세영 만화문학관]을 연재할 때의 일이었다. 트웬티 세븐이나 빅점프, 당시 만화계의 양대 축이었던 두 출판사에서 의욕적으로 내기 시작한 두 잡지의 방향성은 공통적으로 저 전설적인 성인만화잡지인 만화광장을 계승하는 것에서 시작하고 있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목록에서 중견에 이른 기성 성인작가들의 작품들을 볼 수 있었지만 다르게 말하자면 당시 흡수해야했을 젊은 성인 대중의 취향과는 유리된, 다소 고루한 면모가 보였던 것도 사실이었다. 잡지 전체적으로 작품들의 구성 및 분배 차원에서 젊고 발랄한 정신세계를 가진 작가의 기용이 아쉬웠다고나 할까. 그런데 그 안에서 그 어떤 작품보다도 살아서 빛나고 있는 것은 오세영의 만화였다.

아직 만화광장도 몰랐고 그의 이전 작업들도 몰랐던 나에게 그의 만화는 박흥용의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과 함께, 한마디로 충격이었다. [드래곤볼]과 [란마]와 같은 소년만화를 중심으로 한 일본 만화들이 보여주던 스타일과 [어쩐지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저녁] 이후 그에 전반적으로 물들어가던 소년잡지의 흐름, 스토리와 발상의 표절과 이현세 작화의 동어반복들이 대세처럼 꾸준하게 이어지던 대본소 스타일과도 다른,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음으로써 되려 한국인이 만든 만화라는 걸 가장 완벽하게 표현해낸 만화. 굳이 박재동의 절찬을 보지 못한 이라 하더라도 그의 그림을 보면 이 작가가 얼마나 독보적인 세계를 구축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으리라. 그런 의미에서 이 노작가가 70년대 한국만화계의 공장시스템 한복판에서 박봉성과 함께 같은 작가 밑에서 문하생으로 있었다는 것은 조금 놀랍고도 재밌는 아이러니라고나 할까. 결국 오세영은 공장시스템에 질려서 그 판을 떠나 극장 간판을 그리는 일로 10년 가까이 보내게 되고, 박봉성은 남아서 그 시스템의 정통파 후계자가 됐지만.

만화의 형식으로 보자면 이 작품집에서 보여지는 양상은 일종의 다이제스트식 컨버전이라고 부를 수 있을 듯 싶다. 단편소설 원작의 양식 자체를 존중하여 작가의 주관적 해석을 피하고 최대한 텍스트를 살려놓는 가운데 텍스트가 묘사하는 세계를 그대로 뽑아내어 그 시대와 사람들에 대한 극리얼리즘적 접근을 시도하는 것. 이것은 고전적인 만화시대를 살아온 작가가 가진 원본을 대하는 자세에 관련한 정석이라 할 수 있는 형식이며 동시에 만화를 문학에 가까운 영역에 배치시켜놓는 만화장르의 고전적 형태이기도 하다. 작품집에 실린 작품들은 주로 근현대 우리나라 소설(과 사회의)의 본격적 태동기 즈음에 발표된 단편들이 중심이 되어 작품군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격변기 와중에 새롭게 구축되는 계급과 자본, 신식문물들이 뒤엉키는 혼돈기 속에서 살아가는 민중의 삶을 그려내는데는 오세영의 심지 굳은 접근법이 제격이었고 그 결과는 달리 말이 필요없을 정도로 탁월하다.

작품 19편이 실린 이 작품집의 두께는 책장을 만족스럽게 메꿔줄 두툼한 부피를 자랑하고 있음에, 배게 대용으로 써도 충분히 만족할 법한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물론 배게로 쓴다는 것이 이 압도적인 작품집에 대한 욕이 아니라 그 출중한 기능성에 대한 너그러운 찬사로 비춰지길 바라며, 이 노작가가 곧 만들어낼 [토지]의 세계에 대한 기대 또한 부풀어있음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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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의 목적(2disc)
한재림 감독, 이대연 외 출연 / CJ 엔터테인먼트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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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관계

무릇 대부분의 연애를 다룬 영화들이 숙명적으로 지니게 되는 속성이 그렇듯이 이 영화 또한 관계에 대한 탐구의 일환에서 비롯됐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영화가 단순하게 연애의 목적이란 제목이 함유하는 질문에 정확히 무엇이다라는 결론이 내려지도록 촛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 아닌, 치유와 화해의 과정을 다루고 있다는 것 또한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는 바일 것이다. 그런데 이 과정이 좀 묘하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연애의 목적]은 홍의 정신병력 치료기랄까.

우리가 그간 봐왔던 연애영화들을 기억해보자. 대부분의 영화들은 사회다수인 남성적 판타지에 그 촛점을 맞추어 공주님을 습득한 그지왕자, 그 둘은 (아마도) 영원히 오래오래 사랑을 나눴습니다, 로 끝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 둘이 이혼을 하건 사별을 하건 중국에서 주식투자로 때돈 번 아내 몰래 남편이 정부를 들이건 일단 영화는 그 아름다운 커플이 온갖 고난을 겪고 결국 표피적인 사랑을 쟁취하는데 성공한 지점에서 끝나는 것이 영화적 미덕이라고 생각하는 영화들이다. 실제로 이제 백년이 좀 넘어간 영화의 역사 속에서 대부분의 연애물들이 이런 구조에 기대고 있다는 것을 부정하진 못할 것이다. 그리고 그와 반대편에 선 영화들이 있다. 어차피 인생 존나 쿨하게 사는 게 손해 안 보고 사는 거다, 해서 쿨한 여자와 쿨한 남자가 만나서 진하게 사랑을 나누고 서로 잘 놀고 잘 빠굴치는데 결국 나중에 헤어질락말락할 때 알고보니 요게 사랑이었다.... 90년대 초반 이후의 영화들에서 이런 공식을 찾아보는 것은 어렵지가 않다. 별외로 연애대왕 허진호의 영화들은 어떠한가. 소멸되어가는 것에 대한 아련한 매혹이 담긴 그의 영화들에서 남녀의 정치성에 대한 적극적인 모색을 발견하기 힘들다. 적어도 그의 영화들 속 캐릭터들은 고전적이며 전개는 상투적이었다. 우리가 허진호의 영화를 새롭게 느낄 수 있었던 건 그의 관조적 시선 덕이었을 것이다.

꽤 노골적이었던 예고편과 카피 등으로 미리 관객을 달궈놓은 [연애의 목적]의 시작은 누구나 느끼겠지만 앞서 말한 라인 중 쿨한 인생의 쿨한 사랑 공식에 맞춰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섹스에 대한 맹렬한 의지를 가지고 있는 유림의 작업에 의해 점점 허물어져 가는 홍. 다짜고짜 섹스하자고 하는 남자와 그를 받아치는 50만원을 내라는(솔직히 50만원은 너무 비싸....) 당당한 여자를 보여주는 이 영화는 쿨한 남녀의 그렇고그런 청춘편력기가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영화는 그리 단순하지가 않다. 섹스가 목적이었던 유림의 작업이 성공한 시점이 영화의 런닝타임이 한시간이 채 되지 않는 시점이라는 것을 생각해보자. 그 이후 영화의 반절은 유림은 홍과 같은 자리로 내려앉기 시작하기 과정이며 동시에 홍의 치료기로 전환되는 부분이다. 그럼 어째서 유림은 홍에게 매혹되는가.

이 영화의 정치성이 지향하는 젠더적 평등성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드러나지 않는 이 부분은 불안과 불면을 달고 사는 홍에게 매혹된 유림의 동정심과 '사랑은 알 수 없어요'라는 인류보편적 반복형 레파토리에 의한 결과로 고려할 수밖에 없다는 점은 이성의 위대함에 확신을 가진 이들에겐 영화의 정치적 좌절로 보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우선 유림이란 캐릭터가 홍과는 달리 트라우마가 없는, 그래서 맹목적인 섹스에의 욕구에 완벽하게 적용될 수 있는 캐릭터라는 것을 알아둬야 한다. 그는 상식적으론 받아들이기 힘들 정도로 노골적으로 대시하며 그의 야비스러운 말투와 에로영화에서나 쓰일 법한 대사들은 선생이란 지위가 주는 아우라를 충분히 배반할 수 있을 정도로 천박하다. 그리고 이미 애인이 있고 그녀와 충분한 섹스를 나누는 사이임에도 그는 홍에게 매혹된다. 좋게 말하면 사랑은 이렇듯 어쩔 수 없이 벌어지는 사태라는 것이고 나쁘게 말하면 숫컷본능이랄 수 있는 이러한 유림의 태도에 의해 흘러가게되는 영화의 얼개는 이후 동정과 애정이 뒤죽박죽된 매혹에 빠진 유림의 갈팡질팡하는 정신세계의 도움이 크다. 영화 속에서 유림이 보여주는 태도는 너무 미숙해보여서 그가 이런 일에 별로 익숙하지 못한 인간이란 것을 확인해준다. 그는 홍에게 사회의 쓴맛에 대해 강의하면서 처음부터 어른인 척 하지만 에로소설과 김진명 소설만 디리따 본 어린아이와 별로 다르지 않다. 섹스신에서의 그의 행동선이 유난히 사춘기적 열정을 가진 격렬함을 가지고 있다는 걸 주목하자.

이 시점에서 홍은 어떤 정신상태일까. 영화 중후반부에 가서야 밝혀지는 그녀의 과거에 대한 진실은 영화 전반에 흐르는 그녀의 태도가 아직 낫지 않은 정신적 상처에 의해서 비롯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녀가 유림과 섹스를 하게되는 순간은 역시나 '사랑은 알 수 없는 것'이란 편법이 동원되는 순간이지만 우리가 알게된 유통기한이 끝나지 않은 그녀의 과거가 이 파트를 받아들이게 만든다. 진부하게 느껴지는 것까지 지워버리진 못했지만. 아무튼 그것은 유림에게 일단 한 수 접혀버렸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건이며 이후 그녀의 상처를 다시금 후비게 되는 스위치가 된다. 그래서 그녀 또한 자신의 정신세계에 대한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갈팡질팡하며 자기혐오에 빠져든다.

정신과의사들이 환자를 치료하기 위해 가장 먼저 행하는 것은 환자와 같은 위치에서 바라보려고 노력하는 일이다. 평등해지기. 그래서 홍의 정신적 외상을 치료하기 위해 영화는 홍에게 성추행고백이라는 강력한 무기를 부여하고 섹스에 대한 열정만 넘치면서 인간사회의 정치성을 다 아는 듯한 허세만 부렸지 정작 쓴맛을 보지 못했던 유림을 생전 느껴보지 못했던 나락으로 떨어뜨리게 한다. 이것이 바로 '연애의 목적', 혹은 홍의 재활치료기의 마무리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이다. 난데없이 날아든 상황에 유림은 골로 가게 되고 홍은 드디어 불면증에서 해방된다. 사회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망가진 유림의 눈은 드디어 홍의 눈과 같은 위치에 서게된다. 이 고난하고 폭력적인 과정이라니. 생각해보면 폭력을 처음 행사했던 것은 유림이었으니, 결국 유림과 홍의 미래가 마냥 장밋빛이라고 보장하는 성급한 실수는 하지 않더라도 이 과격한 치료행위의 마지막이 권선징악적 쾌감을 불러온다고 말하지 않을 순 없으리라. 남자와 여자라는 이항대립에 대한 끝없는 의문과 짝퉁 답변들이 넘치는 (혹은 계속 넘칠 것이 분명한)세상에서 이처럼 정치적으로 위트있는 아이러니의 묘미를 살린 연애물의 미덕은 쉽게 찾아보기 힘든 것이다.

2. 현실(남자의 입장)

한마디로, 유림처럼 작업하고 찌질거려서 여자를 눕히기란 확률적으로 대단히 어려운 일이라고 본다. 앞서 말했던 것처럼 홍의 상처라는 변명이 계속 존재하고 있긴 하지만, 영화 자체적으로 유림의 천박함이 홍의 태도를 무너뜨리는 것과 관련하여 홍의 트라우마가 어떻게 작용했는지 유기적으론 잘 설득이 안되기에 보는 내내 영화가 되다만 경험을 말끔하게 잘 포장하려 애썼다는 느낌이랄까. 하지만 뭐, 환상에서라도 즐거움이 제공되지 않는다면 인간세상 살아가기에 얼마나 빡쎈 일일텐가. 그의 찌질거림에서 우리-남자-는 얼마나 뼈저린 정서적 공감을 얻을 수밖에 없는가. 하지만 결국 유림과 홍의 격렬한 섹스신을 보면서 그 환상이 채워짐에 따른 만족과 그에 대비되는 수많은 실패의 경험들을 되씹어보면서 씁쓸해하지 않을 수 없음이라. 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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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라멘트 Filament - 유키 우루시바라 작품집
우루시바라 유키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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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루시바라 유키의 출세작인 [충사]는 아직 안 봤다. 왜냐하면 그 작화라는 것이, 마치 구마가이 가즈히로의 [사무라이건]과 토우메 케이의 스타일을 적당히 섞은 것 같은 인상이었기에 거부감이 일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 작가의 초기단편들을 모은 이 작품집이 늦게나마 나오게 된 것은 나로서는 행운이거니와 이를 먼저 보게된 이유는 그녀가 가진 세계관의 시작서부터 이해하고픈 맘이 들었기 때문이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게 되는 작화로만 본다면, [필라멘트]에서 보여주는 그림들은 썩 훌륭하다고 보기 힘들다. 흔들리는 거친 선, [충사]와는 다르지만 역시나 어딘가 익숙한 순정만화적 캐릭터 디자인들. [필라멘트]에서 가장 먼저 느낄 수 있는 것은 아직 능숙하지 못했던 시절의 작가가 가진 아마추어리즘이다.

그러나 필라멘트, 전구 속에 들어있으면서 그 가는 선으로 인간이 그제껏 가질 수 있었던 가장 밝은 빛을 만들어냈던 얇은 텅스텐 덩어리를 제목으로 삼은 이 작품집은 그 제목만큼이나 끊어질 듯 아련하지만 그래서 더욱 분명하게 남을 소박하게 빛나는 이야기들을 풀어놓고 있다. 그것은 대부분 기억들과 이미 지나간, 혹은 지나가게 될 옛시간에 대한 정겨운 괴담들이다. 오래 묵어 반폐허가 된 장소들, 땅끝 구석에 있을 법한 한적한 시골, 여름.

물론 연출상의 감상적 실험성, 그리고 꾸준하게 회고와 소멸의 키워드를 가지는 이야기들은 앞서 지적한 작화의 빈약함과 더불어 작가의 아마추어리즘을 강조하는 결과가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여기서 보여주는 그림의 불안정한 선은 몽환적인 아우라를 만들어내고 특징없는 캐릭터 디자인은 작품의 소박한 맛을 더해준다. 나름의 파격을 선보이고 있긴 하지만 이해 못할 영역이 아닌, 모험은 하지 않는 담백한 연출은 작가의 태도가 결코 치기어린 것이 아니란 걸 느끼게 해준다. 분산된 컷들이지만 스무스하게 이어지는 연상들 속에서 우리가 알아챌 수 있는 것은 작가의 내재화된 겸손함이다. 그래서 짤막하지만 짧지 않은 여운을 가져다주는 이 이야기들을 통해 아직 세상에 익지 않은 아마추어리즘이 보여주는 반가운 미덕을 오랜만에 발견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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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개 2005-08-11 17: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충사>를 인상깊게 봤는데... 이 책도 꼭 봐야겠군요..

hallonin 2005-08-12 07: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충사의 모티브가 되는 단편 두개도 실려있습니다. 소재만 같고 완전히 다른 이야기라고 봐야 하지만.... 그리고 작품들 전반적으로 충사에서 느낄 수 있었던 고풍스러운 느낌보다는 현대적인 느낌이 더 강하죠.
 
요츠바랑! 3
아즈마 키요히코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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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드롬에 가까운 현상을 불러 일으켰던 [아즈망가 대왕]의 작가가 내는 후속작이 어떤 작품이 될지는 [아즈망가 대왕]이 끝나는 그 시점서부터 관심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4컷 만화라는 마이너한 형식으로 웬만한 주간 연재작을 훌쩍 뛰어넘는 인기를 구가했던 [아즈망가 대왕]은 미디어믹스를 통해 그 인기가 절정에 달했을 바로 그 지점에서 완결을 지었다는 점에서 만화 작품으로서 쉽지 않은 미덕을 보여줬다. 전 4권이라는 간결한 분량으로 끝을 맺은 작가 아즈마 키요히코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아즈망가는 여기서 다 보여줬다고 하면서 차기작 준비에 들어갔고 그렇게 준비된 [요츠바랑!]은 월간 전격대왕에 연재되기 시작하여 2003년 9월 15일, 그 첫 단행본을 내놨다.

[아즈망가 대왕]은 18금 동인지 출신 작가가 그린 작품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차분하고 무자극적인 작품이었다. 대부분의 동인 출신 작가들이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매니악한 취향에 대한 팬층의 지지를 과신하거나 스스로의 작화 실력에 경도된 나머지 제대로 된 작품을 내놓은 사람이 거의 없다는 걸 기억하자면 아즈마 키요히코가 [아즈망가 대왕]에서 보여줬던 신중함과 4컷 만화라는 장르에 대한 이해는 놀랄만 한 것이었다. 그는 개성이 강하지만 결국은 평범한,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여고생들의 1학년에서 3학년까지 이르는 생활을 담담하지만 유머스럽게 보여준다. 천성적으로 낙천주의자들인 [아즈망가 대왕]의 캐릭터들은 너무나 자연스럽고도 즐겁게 학교 생활을 영위해 나간다. 그 자연스러움과 생동감에 보는 이가 충분히 부러워질 정도로.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이것은 우리가 놓쳐왔던 너무나 평범한 이야기들의 모음이었다. 이 작품에서 섹스와 폭력, 학원 문제와 입시 문제 등등, 여러 현실적 차원에서의 문제들이 의식적으로 배제되고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순 없지만 그렇게해서 드러난 여고생들의 삶 또한 진실의 한 축을 맡고 있는 것이기에 무시할 순 없는 것이다(또한 우리가 너무도 쉽게 간과해왔던 것들이다). 무엇보다도 그 개성 강한 캐릭터들이 만들어내는 유쾌한 사건들에 우리들은 슬며시 웃음 짓곤 하지 않았는지.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지만 정작 제대로 잡아내진 못하던 개성 있는 빛의 세계를 포착했다는 것이 [아즈망가 대왕]의 성공의 축이었다.

[요츠바랑!]은 [아즈망가 대왕]의 성공으로 입지를 굳힌 작가가 자신에게 성공을 가져왔던 길을 따라 다시금 보여주는 보다 여유로운 '착한 세상'에 대한 이야기다. 아버지와 단 둘이 한적한 마을로 이사를 오게 된 요츠바라는 혈기왕성한 꼬마 소녀가 보는 세상은 더없이 일상적인 즐거움으로 가득한 공간이다. 이제 막 세상에 대해 알기 시작하는 요츠바와 그 주변의 '착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한마디로 '대단히 심심하다.' [아즈망가 대왕]에서 보여준 개성들이 너무 쎘던 탓인지 같은 그림으로 그려진 인물들이 보여주는 카리스마(...)는 전작에 비하면 더없이 약하고 [아즈망가 대왕]이 보여줬던 아우라에 푹 빠져있던 이들은 [요츠바랑!]에의 몰입을 힘들어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작가는 꿋꿋이 밀어부쳤다. 그래서 그 담담함의 여유를 버리지 않는 작가 덕에 밋밋하기만 하던 [요츠바랑!]의 등장인물들에겐 생명이 불어넣어지고 밝은 유머엔 슬슬 물이 오르기 시작한다. 요츠바는 내내 쉬지 않고 즐거워한다. 소위 우리가 아이답다고 하는 감수성의 가장 민감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요츠바에게선 당최 어둠을 찾을 수 없다. 아니, 그 주변에서도 어둠은 없다. 이제 막 세상을 알기 시작한 요츠바와 그녀의 충실한 조력자들은 평온한 삶의 가치를 일깨우려고 동분서주하는 것처럼 보인다.

[아즈망가 대왕]으로 확실한 지지층을 확보하게 된 작가가 이 분위기를 쉽게 저버릴 것 같지는 않다. [요츠바랑!]이 보여주는 세상은 (이제 와선) 그리 흔한 세상이 아니다. 하지만 읽는 동안 심심하다고 생각했던 그 착한 세상이, 읽고 난 후 조금 더 보고 싶어졌다면 이것은 성공했다고밖에 말할 수 없는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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