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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세자의 고백
이덕일 지음 / 휴머니스트 / 2004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어렸을 적, 드라마 [한중록]을 본 기억이 어렴풋이 난다. 최수종이 맡은 서서히 미쳐가던 사도세자가 그의 아버지인 영조에 의해 뒤주 안에 갇혀 고통에 찬 비명을 지를 때, 영조는 아침마다 귀를 씻은 물을 사도세자가 있는 쪽으로 버릴 정도로 아들에 대한 경멸을 감추지 않는다. 결국 사도세자는 뒤주 안에서 죽어버린다. 그 드라마에서 내가 가장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는 것은 그 이후, 영조의 꿈에 나타난 사도세자의 모습이었다. 그 장면에서 사도세자는 분노로 가득 차서 영조에게 자신을 죽인 이들에게 반드시 복수할 거라고 외치고 있었다.
어느 때부턴가, 나는 사도세자가 무척이나 억울하게 죽은 사람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것은 아마도 사도세자와의 첫 만남이었던 [한중록]을 볼 때부터, 아버지가 아들을 굶겨죽이는 저 무시무시한 광경에 끊임없이 의문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었으리라. 어째서 아버지가, 그것도 국부이자 백성의 모범이라 불리우는 왕이 제 핏줄인 왕자이자 아들인 사람을 죽여야 했을까.
비극으로 점철된 내용을 담고있으면서도 어이없게도 '한가한 날의 기록'이라는 뜻의 제목을 달고 나온 [한중록]이 진실을 담고 있지 못함은 명백하다. 그러니 사도세자와 관련한 세밀한 기록이자 저자인 혜경궁 홍씨의 기구한 일생에 대한 아우라가 겹쳐져서 정전 이상의 권위를 행세했던 [한중록]에 대한 비판에서부터 시작하는 [사도세자의 고백]은 사도세자의 탄생과 죽음 전후를 실록과 [한중록], 정사와 야사를 넘나들며 당시 상황에서부터 인물들까지를 재구성한다. 대중적인 역사서를 지향하는 저자의 의도는 시간순을 따르는 평이한 흐름에 간결한 문장으로 표현되어 조선 역사에 있어서 가장 분명한 색을 지닌 패륜이자 역겨운 정쟁의 표상이었던 사건으로 독자들을 끌고 들어간다.
아버지가 아들을 죽인다, 라는 비정상적인 상황이 유교이념을 숭상하고 멀쩡하게 세워진 정부가 근 300여년째를 유지하고 있는 나라의 한복판, 그것도 궁궐에서 벌어져야 했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그 속이 제대로 된 상태가 아니었음을 뜻한다. 그렇기에 독자가 여기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혐오감을 일으키게 만드는 피비린내 나는 정쟁의 소용돌이다. 같은 유교의 틀 안에서 비롯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문자와 지역에 사로잡혀 서로를 물어뜯기에 급급했던 노론과 소론이 벌이는 단어 한톨한톨의 의미를 가지고 벌이는 싸움과 한다리 건너뛰어 발휘되는 의도와 속임수로 가장한 음모의 간책들은 썩어문드러진 정치란 무엇인가를 교과서처럼 보여주고 있다. 그들의 혀와 눈물과 손짓발짓에 수십명의 사람들이 죽고 또 죽는다.
사람을 죽인 값은 사람의 목숨으로만 환원이 되는 법. 그래서 그들은 원한을 만들고 원한에 두려워한다. 원한이 원한을 끊임없이 낳는 왕궁이라는 이 고약한 폭력의 공간 속에서 혈통과 권력에 천착하는 영조의 컴플렉스는 사도세자의 죽음을 완성시키는 또다른 축이다. 끝없는 복수극과도 같은 당파간의 혈투와 봉건영주로서(혹은, 만이) 가질 수 있는 정신적 문제를 안고 살아야했던 영조. 어째서 사도세자는 죽어야만 했는가. 어째서 영조는 자신의 아들을 제 손으로 죽여야 했는가. 그 모든 문제의 핵심에 있는 것은 권력이었다. 일종의 확신범이었던 영조와 노론은 자신들이 만들어낼 비극이 가질 무게에 의외로 무감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것을 지켜야했기에 두려워했고 조급해했다. 비단 저자가 시종일관 취하고 있는 사도세자에 대한 적극적인 변호가 아니라 하더라도 제대로 대처도 못하고 비참하게 죽어가야 했던 사도세자에게서 희생양의식의 비극을 발견하는 건 어렵지 않다. 권력을 따르고 권력에 취한 이들이 만들어낸 죽음의 행진의 정점, 그것이 사도세자였다.
드라마 [한중록]에서 꿈에서 아들을 만난 영조는 불길한 마음을 감추지 못한다. 하지만 억울한 죽음은 이미 이뤄졌고 그는 늙었다. 아버지의 비극을 체감했던 정조는 너무 어렸고 남편을 죽이는데 일조한 혜경궁 홍씨는 81살까지 천수를 누릴 팔자였다. 그리고 드라마 제목은 [한중록]이었다. 복권은 그때나 지금이나 오랜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PS. 그래서 불만인 것은 저 제목이다. 사도세자의 심약한 '고백'이 아니라 분노에 찬 '눈물'이어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