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밤중 톰의 정원에서 시공주니어 문고 3단계 14
필리파 피어스 지음, 수잔 아인칙 그림, 김석희 옮김 / 시공주니어 / 199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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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톰의 한밤의 정원.' 뭐랄까. 다 읽고 난 뒤에 확인하게 된 이 원제가 전해주는 진한 소유감과 은밀한 공모의 냄새는 한글로 번역된 제목인 '한밤중 톰의 정원'이 만들어내는 주변화된 인상을 낯설게 보이게끔 만들고 있다. 한밤중 통의 정원- 이렇게 되면 읽는 이로 하여금 제삼자가 된 인상을 강하게 주어 처음서부터 톰의- 라고 할 때 만들어지는 일체감이 약하다고나 할까. 그렇잖아도 정원이란 공간은 우리에게 그리 친한 공간이 아닌데 말이다.


사실 이 책의 주요 소비대상이 될 한국의 아이들에게 정원이라는 공간은 그리 익숙한 공간이 아니다. 그것은 국가명이 정원의 한 양식으로 존재할 정도로 정원에 대한 개념이 발달해 있는 영국에 비추어 정원이라는 개념에 대해 익숙해지려면 양반층도 아닌, 거의 왕족 수준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 우리나라의 역사적 전통 때문이기도 하겠고 개화와 근대화 이후 정원이라는 개인적인 공간의 소유보다는 아파트와 같은 밀집형 공간에 더 익숙해야 했던 우리들이기 때문이기도 하겠다. 물론 우리네에게 있어서 자연을 억지로 가꿔서 개인적인 공간으로 만든다는 개념은 너무 인위적이고 파괴적인 발상이라 그에 익숙치 않은 탓도 있다. 더군다나 여기서의 정원은 빅토리아 시대라는 영국적 노스탤지어를 자극하는 시공간이기에 톰, 정확히는 작가가 의도한 정도의 살가움을 느끼기란 힘들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름의 벽두에서부터 즐거운 계획들에 대한 가능성을 상당 부분 박탈 당한, 그래서 내내 툴툴거리고 있는 톰의 모습에서 우리의 옛시절, 혹은 지금의 나를 발견할 수가 있다. 세상 어디에 사는 인간이든 놀려고 하는데 방해받으면 열받기 마련이다. 이렇게 아주 단순한 사실에서부터 이 동화는 서서히 맞이하게 될 톰의 경이와 우리의 소망이 일맥상통한다는 것을 조금씩 보여준다.


어른의 명령에 의해 생활을 바꿔야 하는 톰 롱은 대개 그와 같은 상황에 처한 아이들 대부분이 그런 것처럼 첫장에서부터 불만에 가득차 있다. 톰은 강제로 집을 옮겨야 하기 때문에 자신이 놀 공간이 없어졌을 뿐 아니라 그로 인해 즐거운 여름방학을 보내게 될 모든 기회를 박탈 당한 소년이다. 심지어 그렇게 해서 도착한 이모네 집은 형편없는 정원에 다소 황량하기까지 한 인상을 풀풀 풍기고 있으며 히스테릭한 할머니 관리자라는 전형적으로 스트레스를 안겨주는 인물까지도 기다리고 있다. 이 불행한 소년에게 기적이 찾아오지 않으면 도대체 누구에게 기적이 찾아오겠는가. 실은 기적은 정말 불공평하게 찾아오는 법이지만 아무튼 톰은 자신만의 환상의 정원을 발견하게 되고 그곳에서 외로운 소녀 해티와 만나게 된다.


이 책이 1958년에 나왔다는 걸 기억하자. 솔직하게 말하자면 이 작품의 플롯은 지금의 우리들 눈으로 볼 땐 그리 엄청나거나 획기적이진 않고, 오히려 익숙하기까지 한 전개와 결과를 보여준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책이 가지는 미덕이라는 것은 앞서 말한 억울하고 원통한 소년의 소박하지만 자유로운 모험담이라는 점에서다. 미시시피강을 헤집고 다녔던 톰소여나 허클베리핀 정도의 막무가내와 풍자보다는 훨씬 점잖지만 영문도 모르는 체 보물덩어리를 선사받은 이 영국소년의 여름방학은 작가의 꼼꼼한 필치로 묘사되는 해티와 정원으로 인해 아기자기하고도 정감있는 시간의 모험을 치뤄낸다.


다시 정원으로 돌아가본다. 곳곳에 거위 같은 동물들과 식물들이 자생하고 있고 타고 올라갈 수 있는 커다란 나무들이 여기저기에 자라있으며 혼자라서 힘들고 외롭지만 활달한 소녀가 자신과 놀아줄 친구, 나를 기다리며 비밀기지를 만들고 있는 곳. 물론 작가는 그 고정된 시공간이 가질 한계와 비영속성을 잘 알고 있다. 꿈이 가진 허상의 위험함 또한 알고 있다. 하지만 이렇게 달콤한 공간이라면, 그 푸근함이 비록 꿈속에서나마 느껴 마땅하다는 건 충분히 용인한 바였다. 그렇다면 그 낭만적인 정원, 누군가의 환상 속에 들어간 내가 그녀의 추억이 되고 그녀 또한 나의 꿈이 될 수 있다면 이 어찌 멋진 일이 아닐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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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9-25 02: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hallonin 2005-09-25 2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동화는 앞으로 몇개 더 할 생각.... 한창 읽고 있는 중이라.

2005-09-26 02: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hallonin 2005-09-27 0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헐. 쓸 생각도 있답니다-_-

2005-09-27 00: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hallonin 2005-09-27 0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헐-_- 그 생각도 있답니다-_-
 
헌법의 풍경 - 잃어버린 헌법을 위한 변론
김두식 지음 / 교양인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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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원론에 대한 지리한 의견개진은 애초부터 배제했다. 어려운 한자어나 그것을 조합해서 만든 괴이한 단어들도 없다. 실생활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문제들을 중심으로 에세이식으로 구성하여 공손체로 설명하는 대중 지향의 전문지식 저술서인 [헌법의 풍경]은 그렇기에 실용서적인 면모 또한 훌륭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이 책은 쉽고, 보편적인 정서를 자극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여기서 우리는 잊혀졌던, 혹은 지워져야 했던 우리의 당연한 권리에 대한 얘기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근간 들어가는 헌법 강의에서 가장 빈번하게 접하게 되는 것은 개인이 가지는 권리에 대한 문제들이다. 반대로 말하자면 그간 우리들이 얼마나 기본권에 대한 침해를 받고 살아왔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현상이기도 하겠다. 군사 독재 시절과 검사 시절, 그리고 도미후 보다 발전된 법체계를 모두 겪은 소장학자인 저자의 장외시각으로 보자면 아직 우리나라는 갈 길이 먼 나라다. 기득권과 언론이 만들어낸 그물망 속에서 보통사람들은 제대로 된 정보를 얻어내는 것조차 요원해 보인다. 그러나 우리가 알지 못해서 결정적일 때마다 곤란하게 되는 대부분의 관련 사항은 놀랍게도 법전에 명백히 기록되어 있는 것들이며 저자의 쉽디 쉬운 문장들로 서술되어 중학생 정도의 논리력만 되도 이해가 가능한 당연한 것들이다. 그래서 저자는 현실이 도외시해왔던 개인의 권리에 대한 문제제기와 복권을 적극적으로 시도하고 있다. 우리는 이 책에서 지금껏 은밀하게 구축된 시스템이 우리를 어떻게 굴려먹어왔는가를 친절한 설명과 함께 목도하게 된다. 그것은 부조리한 풍경들이다. 이유도 모르는 체 운동장에서 일장욕설을 들어야 하고 무죄인 사람이 몽둥이가 언제 날아 들어올까 두려워 벌벌 떨어야 하는 불쾌한 풍경들이다. 저자는 그에 대한 해결법으로 법원리의 철저한 실천을 촉구한다.

그러나 과연 법현실의 전환만으로 우리의 생활이 바뀔 수 있는 걸까. 우리는 부조리와 무척 친숙한 사람들이다. 그 틈에서 우리도 부조리한 인간이 되어가고 있다. 그래서 권인숙 교수는 80년대 학생운동 한복판에 자리한 군대문화를 발견하게 되고 김어준은 삼성수사에 대한 한겨레 기고글에서 다음과 같은 얘기를 한다.

"삼성, 이번에 처음 알았다. 마지못한 종범인 줄 알았더니, 적극적 기획자인 거… …사실 이해 안 가는 건 사람들 반응이다. 별반 분해하지 않는다. 이상하다. 우린 불합리한 건 참아도 불평등한 건 못 참는 사람들인데. …잡소리 다 빼면 이거, 노예근성이다. 강자의 우산 아래 덕 보는 대신 내 권리는 내주고 그로 인한 불평등은 끌어안는, 노예근성."

난 이 문제의 근원을 제대로 된 토론문화의 부재에서 찾아본다. 서로의 의견을 교환하고 정당하게 반박하며 더 나은 대안을 찾아보는 토론문화가 우리나라에선 안타깝게도 침묵, 혹은 스트리트 파이팅의 스타팅포인트로 자주 쓰인다. 대화라는 고전적인 방법에 아직 미숙한 우리는 이 책의 저자가 밝힌 것처럼 봉건적 원님문화에서 아직껏 자유롭지 못한 건지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 스스로의 결론이 아닌 타인-권력자의 결론을 통한 '공명정대하고도 절대적인' 강제적 구속에 익숙한 것인지도 모른다. 어쩌겠나. 두들겨 맞으면서 살아왔는데 말이다. 그것도 간판은 국민을 지킨다고 써놓은 법에 의해서 두들겨 맞아왔는데 말이다. 그러면서도 그 안에서 어떻게든 살아야 했던 것이 민초 아니던가. 그렇게 맞아서 힘이 빠진 민초는 다시금 권력의 먹이가 된다. 고약한 뫼비우스의 띠. 이렇게해서 내재화된 부조리적 태도에 대해서 완전히 자유롭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한국땅에 얼마나 되겠는가.

법은 시스템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인간을 위한 것이다. 국가와 정부의 것이 아니라 나라는 개인을 위시한 국민의 것이다. 이 가장 기본적인 전제를 바탕으로 법에는 가짜가 아닌 진짜 생명이 돌기 시작하고 진실로 정당한 힘이 붙게된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아주 오랜만에 바뀌기 시작하는 이 시대, 이제부터가 시작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감히' 이런 책도 이렇게 활자로 찍혀서 서점에 버젓하게 진열되어 있는 것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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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9-21 21: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hallonin 2005-09-22 13: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편한 에세이집으로 생각하면 읽기가 한결 수월하실겁니다.
 
흑철 5
토우메 케이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0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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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우메 케이를 [예스터데이를 노래하며]라든지, [양의 노래]와 같은, 그래도 좀 장편스러운 작품들로 접한 이들에게 [흑철]은 낯선 만화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흑철]은 토우메 케이에게 있어서 꽤 중요한 작품이다. 왜냐하면 토우메 케이는 1994년에 이 [흑철]로 애프터눈 사계상에 입선, 작품활동을 할 근거를 마련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흑철]은 토우메 케이가 보여주는 마이너함과는 대비되는 정석적인 만화의 공식이 적어도 설정상에는 들어가 있다. 반은 인조인간인 주인공과 그의 동반자인 말하는 칼이 보여주는 다소 팬시적인 인상이라든지, 스토리적으론 대개 아련한 사연의 비극의 형태를 가진 옴니버스식이라는 것 등등. 소년만화적인 소재들과, 슬프지만 그리 복잡한 플롯을 요구하지는 않는 무난한 스토리, 독특한 선에도 불구하고 상대적으로 사무라 히로아키보다는 단순한 작화 등등이 처음 보는 이에게도 눈에 잘 들어올 포지션에 위치한 이런 요소들이 그녀가 이 작품을 '노리고' 만들었다는 근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다작을 동시에 연재중이지만 대부분이 휴재상태인, 어지간히 호흡이 짧은 작가로서도 상당히 오랜 기간 연재중인 작품인 [흑철]은 작가의 만화들에서 대중적인 호흡에 슬며시 기대어있는 양상이 가장 분명하게 보인다.

하지만 이 작품이 토우메 케이의 만화라는 걸 기억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그녀의 만화들에서 공통되게 드러나는 우울의 증상을 여기서도 발견할 수 있다. 우선 주인공인 진데츠라는 캐릭터에겐, 살아가는 의미와 목적이 없다. 그저 길을 따라서 흐르고 또 흘러갈 뿐. 그 도중에 만나는 사연과 사건들이 슬프고 우울하기 그지 없는 것은 어쩌면 그런 목적 없는 방랑의 아우라가 이야기에도 덧씌워진 결과로 보인다. 다시 잘 보면, 이 만화에서 살아있는 이는 극히 드물다. 일단 진데츠부터가 반은 죽어있는 상태라고 할 수 있고 매 에피소드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은 대부분 죽음을 예정하고 있는 인물들이다. 그나마 진데츠를 쫓아다니는 마코토의 좌충우돌과 작품의 후반부가 다른 연재작들인 [예스터데이를 노래하며]와 같은 작품과 동시에 연재되었던 영향 덕인지 갈수록 적잖이 상쇄되는 점이 없잖아 있다.

토우메 케이의 우울은 감정을 억제하고 감추는 게 본능화된 인물들을 만들어낸다. 그녀의 짙은 선이 만들어내는 이야기들은 [양의 노래]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인물들의 감정은 저 깊숙이 묻혀져 있거나 표현이 되질 않고 그런 답답한 분위기 속에서 예정된 비극으로 흘러가는 이야기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옴니버스 형식이라는 면죄부를 쓴 [흑철]은 작가로선 영원히 끝내지 못할 이야기인지도 모른다. 동시에, 지금 당장 끝내도 이상하지 않을 이야기다. 결국 진데츠는 죽거나, 방랑하거나, 둘 중 하나일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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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세자의 고백
이덕일 지음 / 휴머니스트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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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적, 드라마 [한중록]을 본 기억이 어렴풋이 난다. 최수종이 맡은 서서히 미쳐가던 사도세자가 그의 아버지인 영조에 의해 뒤주 안에 갇혀 고통에 찬 비명을 지를 때, 영조는 아침마다 귀를 씻은 물을 사도세자가 있는 쪽으로 버릴 정도로 아들에 대한 경멸을 감추지 않는다. 결국 사도세자는 뒤주 안에서 죽어버린다. 그 드라마에서 내가 가장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는 것은 그 이후, 영조의 꿈에 나타난 사도세자의 모습이었다. 그 장면에서 사도세자는 분노로 가득 차서 영조에게 자신을 죽인 이들에게 반드시 복수할 거라고 외치고 있었다.

어느 때부턴가, 나는 사도세자가 무척이나 억울하게 죽은 사람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것은 아마도 사도세자와의 첫 만남이었던 [한중록]을 볼 때부터, 아버지가 아들을 굶겨죽이는 저 무시무시한 광경에 끊임없이 의문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었으리라. 어째서 아버지가, 그것도 국부이자 백성의 모범이라 불리우는 왕이 제 핏줄인 왕자이자 아들인 사람을 죽여야 했을까.

비극으로 점철된 내용을 담고있으면서도 어이없게도 '한가한 날의 기록'이라는 뜻의 제목을 달고 나온 [한중록]이 진실을 담고 있지 못함은 명백하다. 그러니 사도세자와 관련한 세밀한 기록이자 저자인 혜경궁 홍씨의 기구한 일생에 대한 아우라가 겹쳐져서 정전 이상의 권위를 행세했던 [한중록]에 대한 비판에서부터 시작하는 [사도세자의 고백]은 사도세자의 탄생과 죽음 전후를 실록과 [한중록], 정사와 야사를 넘나들며 당시 상황에서부터 인물들까지를 재구성한다. 대중적인 역사서를 지향하는 저자의 의도는 시간순을 따르는 평이한 흐름에 간결한 문장으로 표현되어 조선 역사에 있어서 가장 분명한 색을 지닌 패륜이자 역겨운 정쟁의 표상이었던 사건으로 독자들을 끌고 들어간다.

아버지가 아들을 죽인다, 라는 비정상적인 상황이 유교이념을 숭상하고 멀쩡하게 세워진 정부가 근 300여년째를 유지하고 있는 나라의 한복판, 그것도 궁궐에서 벌어져야 했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그 속이 제대로 된 상태가 아니었음을 뜻한다. 그렇기에 독자가 여기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혐오감을 일으키게 만드는 피비린내 나는 정쟁의 소용돌이다. 같은 유교의 틀 안에서 비롯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문자와 지역에 사로잡혀 서로를 물어뜯기에 급급했던 노론과 소론이 벌이는 단어 한톨한톨의 의미를 가지고 벌이는 싸움과 한다리 건너뛰어 발휘되는 의도와 속임수로 가장한 음모의 간책들은 썩어문드러진 정치란 무엇인가를 교과서처럼 보여주고 있다. 그들의 혀와 눈물과 손짓발짓에 수십명의 사람들이 죽고 또 죽는다.

사람을 죽인 값은 사람의 목숨으로만 환원이 되는 법. 그래서 그들은 원한을 만들고 원한에 두려워한다. 원한이 원한을 끊임없이 낳는 왕궁이라는 이 고약한 폭력의 공간 속에서 혈통과 권력에 천착하는 영조의 컴플렉스는 사도세자의 죽음을 완성시키는 또다른 축이다. 끝없는 복수극과도 같은 당파간의 혈투와 봉건영주로서(혹은, 만이) 가질 수 있는 정신적 문제를 안고 살아야했던 영조. 어째서 사도세자는 죽어야만 했는가. 어째서 영조는 자신의 아들을 제 손으로 죽여야 했는가. 그 모든 문제의 핵심에 있는 것은 권력이었다. 일종의 확신범이었던 영조와 노론은 자신들이 만들어낼 비극이 가질 무게에 의외로 무감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것을 지켜야했기에 두려워했고 조급해했다. 비단 저자가 시종일관 취하고 있는 사도세자에 대한 적극적인 변호가 아니라 하더라도 제대로 대처도 못하고 비참하게 죽어가야 했던 사도세자에게서 희생양의식의 비극을 발견하는 건 어렵지 않다. 권력을 따르고 권력에 취한 이들이 만들어낸 죽음의 행진의 정점, 그것이 사도세자였다.

드라마 [한중록]에서 꿈에서 아들을 만난 영조는 불길한 마음을 감추지 못한다. 하지만 억울한 죽음은 이미 이뤄졌고 그는 늙었다. 아버지의 비극을 체감했던 정조는 너무 어렸고 남편을 죽이는데 일조한 혜경궁 홍씨는 81살까지 천수를 누릴 팔자였다. 그리고 드라마 제목은 [한중록]이었다. 복권은 그때나 지금이나 오랜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PS. 그래서 불만인 것은 저 제목이다. 사도세자의 심약한 '고백'이 아니라 분노에 찬 '눈물'이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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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오 바이러스, 미국의 나르시시즘
지아우딘 사르다르·메릴 윈 데이비스 지음, 장석봉 옮김 / 이제이북스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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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가 후기에서 고백했듯이, 9. 11 테러가 터졌을 때, 그 광경을 바라보는 미국인과 '나머지 세계인'의 시선은 분명하게 갈렸을 것이다. 나 또한 역자와 같은 심정을 공유했던 사람으로 2001년 9월 11일, 가평에 있는 군부대 내무반에서 잠에서 깨어나 여느 때처럼 아침뉴스를 보기 위해 텔레비전을 튼 내 눈에는 현실 같지 않은 광경이 보여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 상황은 순식간에 납득이 갔다. '그럴 줄 알았다.' 하지만 미국인들은 되묻는다. '왜 그들은 우리를 증오하죠?' 저자는 왜 미국인들이 그렇게 질문할 수 밖에 없는가와 왜 미국외 세계인은 미국을 '증오'할 수밖에 없는가를 추적해 들어간다. 그러니까 이 책은 2001년 9월 11일뿐 아니라 그 이전부터 쌓여오던 제국 밖 사람들의 제국에 대한 사고가 어떤 구조로 이뤄져 있는지를, 그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을 위해 준비된 책이다.

따라서 처음부터 분명하게 말하자면 이 책이 보여주는 관점이나 제시되는 근거들은 미군이 주둔하거나 미국이 벌이는 전쟁에 강제로 끌려갔거나 정치적인 개입을 받았던 나머지 세계 사람들에겐 무척이나 익숙한 이야기들이다. 그 동어반복이 아주 기초에서부터 찬찬히 이뤄지기 때문에 이런 계단쌓기와 같은 과정은 반대로 우리에게 저자들이 설득하고자 하는 대상들이 우리가 생각하는 이들과는 또 얼마나 다른 관점에서 살아오고 있었는지를 확인할 수 있게 만들어준다. 그리고 우리는 여기서 좌파, 소수인종 논객들과 마이클 무어의 다큐멘터리, 미국을 다룬 다큐멘터리들, 심지어 멜 깁슨이 주연한 [패트리어트]에서조차도 쉽게 접할 수 있었던 미국이라는 나라의 폭력적 태생과 총체적 모순과 몰이해와 거만함을 다시금 접하게된다. 민주주의의 전도사를 자처하지만 가장 민주적이지 않은 나라, 평화를 외치지만 가장 폭력적인 나라, 끝없이 열린 사회를 주장하지만 그것이 되려 정치적 약점이 되는 나라. 이 거대하고 무거운 모순의 구조는 미국을 총체적으로 정의하게 만든다. 미국엔 노엄 촘스키도 있고 마이클 무어도 있고, 아마도 세상에서 좌파와 진보지식인들, 아나키스트들이 가장 많이 모여있는 나라이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그 누구도 미국을 완전하게 변화시키진 못했다. 공화당과 민주당이라는 한정된 두 정치집단 사이에서 오락가락해야 하는 현실과 민주주의라는 제목이 부끄러울 정도로 엉성하기 그지없는 선거인단 투표제도, 그리고 그 모든 주변부적인 정치적 주장을 개방성이라는 미국적 특성을 통해 결국 미국이라는 용광로 속에서 녹여 흡수해버리는 식성.

다시 9.11의 순간으로 돌아가보자. 앞서 얘기한 것처럼 우리는 그 현상을 무척이나 익숙한 느낌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당연하다라는 감정. 그것은 단순히 미국이라서 쌤통이다 라는 느낌이라든지, 죄의 인과율적 관점에서만 바라본 결과가 아니다. 우리는 그런 광경을 무척이나 자주 봐왔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만들어진 영화들 속에서, 테러를 당하고 끊임없이 위협 속에서 살아가는 영화속 미국의 모습에서 우리는 비슷비슷한 폭발의 풍경들을 아주 징하게 봐왔다. 그 익숙함은 미국영화에 물든 거의 모든 세계사람들에게도 공통된 것이리라. 그 영화들은 단순화되고 표피화된 미국의 적들을 보여줌으로써 스스로의 세계가 가진 복잡다단한 모순의 구조에 면죄부를 씌워준다. [트루라이즈], [에어포스 원], [비상계엄] 등등의 영화들 속에서 미국인은 피해자이며 돌발적이고 폭력적인 상황에 어쩔 줄 몰라하고 홀연히 등장한 육체적 백인 영웅은 그 모든 난관을 타개하는 신화적 과업을 차례차례 수행한다. 9.11 시대의 현실은 이런 일련의 대량생산형 플롯의 영화들을 그대로 복제했다. 영화 속에서만 보던 폭력의 비극은 더욱 구체화되어 그라운드제로라는 현실로 드러났고 그 모든 전개에서 보여주는 음험한 음모론적 상황들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은 단순하고 표피화된 헐리웃 영화 같았다. 그래서 부시는 스스로 선의 축이 되어 악의 축을 지정했고 B급 헐리웃 액션영화처럼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 보복의 미사일 세례를 퍼붓는다. 증오. 적. 그렇기 때문에 덜렁 편집되어 줄기차게 보여지는 9.11의 붕괴장면은 압도적이지만 싸구려 같아 보인다.

그래서 우리의 실베스터 스탤론과 브루스 윌리스는 악을 물리치고 전투에서 승리하였는가? 당연하지만 영화 속과는 달리 그들은 그렇지 못했다. 처음부터 미국이, 정확히는 부시정권이 줄기차게 얘기하는 악 같은 건 없었기 때문이다. 혹은 그 모든 것이 제국이 드러낸 잔인한 모순성의 현현, 바로 그 자체이기 때문이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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