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꽃 김영하 컬렉션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03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강렬하고도 난감했던(?) 단편집, <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나>를 통해 알게 된 ‘김영하’님이 최근 주요 문학상(이산문학상, 황순원문학상, 동인문학상)을 싹쓸이하면서 다시 주목받고 있다.
그의 단편을 인상 깊게 읽기도 했지만 “감각적인 글이 돋보이는 신세대 작가” 정도로 얕잡아 본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얼마간은 쇼프로를 도배하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 잊혀지게 되는 고만고만한 반짝 가수처럼 곧 그 유행이 시들해질 줄 알았다. 하지만 그는 달랐다. 젊고 색다르다고 해서 깊이가 없고, 그래서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오빠가 돌아왔다>나 <검은 꽃>을 통해 왕성하고 야무진 ‘그만의’ 글쓰기를 계속하고 있었다.
다시 한번 그를 만나러 간다. 감각을 넘어선 깊이를 찾아 <검은 꽃>으로 달려간다.

이야기는 한 젊은이(이정)가 총에 맞아 죽으면서 시작된다. 멀리 이국땅의 늪에 처박힌 체 꺼져가는 의식이지만 오히려 지난날의 일들이 선명하게 되살아난다.
1905년 고향을 등진 1033명의 한인들은 일포드 호에 몸을 싣고 멕시코로 떠난다. 몰락한 양반, 전직 군인, 농민, 도시 부랑자, 파계 신부, 박수무당, 내시 등 다양한 신분의 이민자들이었지만 아픔과 절망에 대한 마지막 선택이라는 점에선 모두가 같았다.
하지만 어렵게 도착한 멕시코는 그리 녹녹하지 않았다. 그들은 이민자가 아니라 채무 노예로써 팔려왔던 것이다. 달콤한 감언이설에 속은 자신을 한탄해보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찌는 듯한 열기와 고된 노동, 턱없이 낮은 대가는 그들을 더욱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당시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해가는 풍전등화의 조선 운명처럼 위태로운 삶이었다.
그렇게 수년간의 농장생활을 견디며 살아남은 사람들은 멕시코 거리를 전전하며 이방인으로 살아가고 일부는 멕시코 내전에 참여하기도 한다. 하지만 무의미할 수밖에 없는 남의나라 전쟁인지라 어디서도 정착하지 못하고 이국땅에서 쓸쓸하게 죽어간다.

우리의 우울한 이민사지만 간결하고 긴박하게 써내려간 김영하님의 글빨에 유쾌한 축제를 대하듯 몰입하게 된다. 거기다 짧게 구성된 단락은 여려 주인공들의 ‘주목받지 못한 삶’을 한 컷, 한 컷의 슬라이드처럼 비춰준다.
편안하게 앉아, 거친 숨소리를 느끼며, 슬픈 이민사를 들여다본다.

또한 소설에서 다룬 역사, 국가, 전쟁, 전통, 사랑, 인권, 종교 등 다양한 내용 중에 특히 종교에 대한 역설인 기억에 남는다.
가톨릭을 맹신하는 멕시코의 지주(이그나시오)는 한인들의 굿판을 우상숭배로 곡해하고는 무당을 잡아 잔혹한 매질을 가한다. 그리고는 “아버지 저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라며 짓이겨진 벌레 대하듯 한인들에게 중얼거린다. 이 광경을 지켜본 박광수(전직 신부)는 그런 지주의 횡포에 대항하지만 권력의 힘 앞에선 역부족이다. 얻어맞던 박광수는 광기에 휩싸인 지주를 보며 이렇게 말한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라고. 하지만 그들의 매질은 멈추지 않았다...

서글프다.
탈출구 없는 현실에서 어떻게든 버티려는 각양각색의 인간군상과 이들의 고통을 보듬어 주지 못했던 나약한 국가, 그래서 저 멀리 이국땅으로 내몰린 백성들... 그들이 이유도 모른 체 당해야했던 매질과 목적 없이 참여했던 전쟁처럼 사회와 인간에게 가해지게 되는 ‘폭력’이 그저 안타깝기만 하다.
하지만 그들은 당당히 살아남았다. 멀리 이국땅에서 정착해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웠다. 오늘의 우리가 상상할 수도 없는, 땀과 눈물의 응어리로 일군 <검은 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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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 MBC 느낌표 선정도서 소설로 그린 자화상 2
박완서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199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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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오늘날의 우리 문단을 구성하는 거대한 여류작가, 박완서님의 기억을 쫓아 책을 들었다. 개성 박적골에서의 어린시절과 서울 상경후의 이야기가 작가의 따뜻한 시선 속에 잔잔하게 펼쳐진다. 한마디로 그녀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성장소설이랄까...

다큐멘터리나 영화에서나 볼 수 있었던 해방과 전쟁 전후의 모습들이 글속에 겹쳐진다. 실개울에서 빨래를 하던 아낙이나 종로거리에서 우마차를 피해 팔자걸음을 옮기는 할아버지, 물지게를 지고 언덕위의 판잣집으로 오르는 아저씨의 모습들이 나의 기억이라도 되는 양 정겹게 다가온다.
물론, 내가 태어나기 훨씬 전인 3~40년대의 수묵화 같은 이야기라 내가 기억하는 7~80년대의 흑백영상과는 많은 차이가 있다. 하지만 누구나 간직하고 있는 ‘기억’의 조각이라는 점에서 박완서님과 내가 이심전심이 된다.

특히, 어린 완서의 눈에 비친 세상과 어머니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조용하고 아름다운 산골에서 생활하다 가족과 함께 서울로 상경해서 겪는 새로운 생활이나 외롭다곤 하지만 오히려 이를 즐기고 음미하는 모습, 책과 친구, 세상을 알아가는 과정이 잔잔한 여운을 남긴다. 또한 교육을 통해 자식 잘되기를 바라는 어머니의 억척스러운 인생관과 그런 어머니의 이중성을 꼬집는 위트가 글의 맛을 더한다.
정말이지 “박완서만의 탁월한 기억력과 감수성으로 꿈결처럼 다가오는 유년의 공간을 우리 소설 문학 속에서 가장 아름답게 그려 내고 있다.”는 띠지의 소개처럼 전쟁이라는 공황상태마저도 훈훈하게 다가온다.

1.4후퇴 전후의 공동화된 서울을 두리번거리며 밀가루 몇 줌이라도 남아있을까 남의 집 대문을 빠끔히 열어보듯 박완서님의 유년시절을 잔잔하게 둘러봤다.
무엇보다 그 시대를 살아가는 민중의 시각에서 그려나가기에 부담스럽지 않고 편안했다. 해방이나 전쟁과 같이 우리역사의 중심축을 지날 때면 지나치게 고지식해지면서 무조건 어떤 의미를 부여하려는 의식적 무거움에서 벗어나 일상을 사는 서민들의 소소함을 있는 그대로 표현한 점이 마음에 든다. 어쩌면 그런 점이 역사를 더 생생하게 보게 만드는 지도 모르겠다.

햇살이 포근한 오후, 창가에 앉아 옛 기억을 더듬는다. 피부를 훑으며 올라오는 따신 기운처럼 뽀얗게 윤색되는 느낌에 흐뭇해진다.
어젠 한 인터넷을 통해 박완서님의 인터뷰 영상을 봤다. 약간 까랑까랑한 목소리와 눈가에 스며있는 웃음이 어찌나 인상 깊던지... 책에서 봤던 앙칼진 보드라움이 고스란히 와 닿는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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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와 술잔
현기영 지음 / 화남출판사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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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검푸른 제주바다를 닮은 표지를 넘긴다.
먼 곳을 응시한 작가의 사진은 바다의 심연을 헤집고 깊이 잠들어있던 지난날을 회상하는 듯 하다. 몇 장의 간지를 더 넘기자 흰 여백의 모퉁이에 <바다와 술잔>이라는 흘림글이 보인다.
어쩌면 바다는 현기영님의 존재를 확인하고 기억하는 비밀상자 같은 존재가 아닐까. 그 제주 바다에서 한모금의 술로 지난날과 오늘을 어우른다.


크게 다섯 부분으로 이루어진 <바다와 술잔>은 “한 소설 작품을 끝낸 후, 남은 자투리들로 마음 편하게 에세이를 엮는 일”이라 얘기했듯 현기영님의 자전적 소설적인 <지상의 숟가락 하나>에서 못 다한 잔 얘기가 한 부분을 차지한다.
[인간과 대지]에서는 제주라는 천해의 환경에서 태어난 현기영의 유년시절을 얘기한다. 하지만 그 기억 대부분은 4.3사태의 검은 잿더미와 산업화의 회색 콘크리트에 의해 매몰되어 버렸다. 제주는 있지만 더 이상 돌아갈 동심이 없어진 저자는 용두암에서 술잔을 기울인다.

그러면서 우리들로 인해 거대한 쓰레기장이 되어버린 대지(지구)에 대해 <녹색평론>의 글을 빌어 개탄한다. 물리적인 쓰레기와 함께 정신적인 공해까지도 점차 우리를 죄어온다는 현실이 안타깝기만 하다. ‘자연’이라는 화두는 어디에도 변할 수 없는 인간 본연의 질문일 것인데...
또한 세상 속에 휩쓸리며 치고 박고 싸우기보다는 한발 물러서서 바라보고 음미할 수 있는 관조의 자세, 오늘날의 각박함과 살벌함을 벗어날 수 있는 아웃사이더의 ‘변방정신’도 얘기한다.

[입새 하나 이야기]에는 소설 형식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다. 잔잔하면서 조금은 서글픈 듯한 이야기들이 흘러가는 세월은 물론 우리의 가족과 이웃을 돌아보게 만든다. 산문집 속에 들어있는 소설 같은 산문, 산문 같은 소설이라는 모호함에 색다른 재미를 느낀다.

[상황과 발언]에선 사소하지만 일상에서 음미해 봐야할 모습들을 찬찬히 둘러본다. 영화라든가 TV, 신문과 같은 미디어로부터 폭력과 전쟁, 테러와 같은 문제까지 사회, 문화 전반에 걸쳐 얘기한다. 한 분야에 국한되지 않는 작가의 폭넓은 시선이 돋보인다.
그래서 조금은 논설조의 글도 보인다. 4.3과 같은 암울한 격동기를 몸으로 느낀 작가이니만큼 오늘날의 부조리를 매우 위태롭고 안타깝게 생각한다. 하지만 다그치고 설득하고 애원한다한들 고착화된 우리사회의 바이러스는 쉽게 해결될 것 같지 않다...

[말의 정신]을 통해 자신의 글에 대해 주로 얘기한다. 그의 글이 4.3이라는 비극을 묻고 있는 제주도에 너무 얽매여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의구심도 있지만 그 내력에는 타지인의 무지와 외면 외에도 슬픈 역사에 대한 개인적 경험과 울분이 숨어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멋모르던 시절의 의구심과 나이가 들어가며 알아가게 되는 ‘제주도’의 의미가 작가의 뇌리에 깊이 각인되어 조금은 격앙된 목소리로 우리의 문화와 사회를 꼬집는다. 작가가 생각하는 세상과는 점점 동떨어져 가는 현실에 대한 안타까움이 절절하다.

[변경인 캐리커쳐]에서는 검은 목탄으로 대강의 윤곽을 잡아 날쌔게 그린 캐리커쳐처럼 작가의 지인들을 투박하게 그려놓았는데 거친 질감 속에 숨겨진 정겨움이 인상 깊다. 문화와 예술을 넘나들며 선배와 후배, 친구로서 만나고 이야기하며 술잔을 돌린다. 그 거나하고 왁자한 분위기에 괜한 입맛을 다셔본다.


술잔이라는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 조금은 애잔하고 씁쓸하다. 비워버린 술잔에 이런저런 상념을 풀어놓으며 또다시 한잔을 들이킨다. 붉게 격앙된 취기어린 목소리도 들리지만 어쨌든 그 속에는 바다라는 넉넉함과 따스함이 숨어있다.
오래전에 둘러봤던 용두암과 하얗게 부서지던 파도가 다시금 생각난다. 그곳에서 한잔 술로 바다에 취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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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수 거미
한승원 지음 / 문이당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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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책에서

서울에서 장흥으로 귀향한 한승원님의 경험과 생활이 바탕에 깔린 단편집으로 농촌에서의 생활이나 가족간의 애증을 연작형식으로 풀어놓는다. 마치 덜컹거리는 열차의 연결부를 지날 때처럼 각 이야기들의 고리를 신나게 넘나든다. 때로는 찡하게, 때로는 애달프게...

<수방청의 소>
실직한 후 주식으로 퇴직금마저 다 날려버린 아들과 아흔여덟 살의 혈기왕성한 노모를 둔 김명윤은 소를 팔아 주식 밑천을 마련해 달라는 아들을 매몰차게 쫓아버린다.
경제적 약자로 전락한 아들과 정신적 강자로 등극한 어머니를 통해 삶의 비예를 들여다보는 듯 하다.

<저 길로 가면 율산이지라우?>
결국 아들은 아버지(김명윤)가 지극정성으로 키운 소를 도둑질한다. 하지만 노모는 속이 까맣게 타들어간 아버지에게 손자의 신세를 걱정하며 경찰에는 신고하지 말 것을 당부한다. 아버지는 울분을 못 이겨 파출소를 찾지만 “율산으로 갈라면 어디로 가야 쓰요?”란 엉뚱한 말만하고 나온다.
부모자식간의 끊을 수 없는 연, 좋든 싫든 일단 ‘가족’으로 엮어진 이상 그 고리의 겁을 이고가야 할 우리. 가족이라는 피붙이 속에 숨겨진 질긴 힘줄을 느낀다.

<그러나 다 그러는 것만은 아니다>
사진사 이장환은 김명윤의 노모와 10대 소녀를 꾀어 “곱고 아름다우면서도 슬픈” 알몸을 렌즈에 담는다. 이에 격분하는 김명윤과는 달리 노모는 그 사진을 흥겨운 놀이(예술)로 인정하고 즐겁게 받아들인다.
예술이라는 것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다. 카메라만 들이댄다고 다 예술이 되는 것도 아니지만 옷을 벗었다고 무조건 외설이 되는 것도 아니리라. 책장의 골을 따라 그 모호한 경계 속을 걷는다.

<사람은 무슨 재미로 사는가>
인간의 내부에 존재하는 섹스와 관음증에 대한 욕망이 전직 경찰 오경만의 사건을 통해 전개된다.
“모든 남자들은 사실 다 색남입니다. 다만 숨기고 있을 뿐입니다.”는 말이 생각난다. 그러면 나는? 너는? 우리는? 욕망이 자연스럽게 표출되지 못하고 억압받는 과정에서 인간이 누려야 할 참 ‘예술’을 놓쳐버린 건 아닐까.
하지만, 우리 사회의 커밍아웃은 언제나 이르다...

<감 따는 날의 연통>
하는 일마다 실패를 맞본 아들은 급기야 “빚 보증 서준 친구들 신세까지 죄다 망쳐” 놓는다. 이로 인해 할머니와 손자(영구)는 어려운 생활을 하지만 앞마당의 풍성한 감나무처럼 자족하며 살아간다.
손자를 통해 자신의 존재가치를 찾는 할머니는 돈을 통해 사람의 존재가치를 따지는 우리들을 어떻게 생각할까...

<버들댁>
지극정성으로 손자를 쓸어안는 버들댁, 비록 천하가 손가락질하는 버러지 같은 놈일지라도 그녀에겐 유일한 혈육이자 삶의 온기다. 손자를 위해 자신의 집까지 팔아버린 버들댁은 국가대표가 된다는 그의 헛말에 더없이 기뻐한다.
‘할머니’란 단어가 든든한 기둥처럼 느껴진다. 어떤 어려움이나 낭패가 있더라도 되돌아갈 수 있는 영원한 집이 아닐까. 비록 이런 내리사랑에 이용만 당한다 한들 그 보금자리의 존재는 변함이 없으리라.

<잠수 거미>
“자낸 무슨 재미로 사는가?”
그렇다면 나의 재미는... 책을 읽거나 홀로 여행을 떠나는 것? 혹은 학생들과 이심전심으로 교감했을 때나 비 오는 날, 마음 맞는 친구랑 술이라도 한잔 걸칠 수 있는 것?
우리들은 물속에서 공기주머니에 의지해 위태롭게 살아하는 장수거미 같은 존재가 아닐까. 그래서 누구든 일상의 무게에서 벗어나길 꿈꿔본다. 어쩌면 그 탈출의 열쇠는 “흰 구름 사이의 쪽빛 하늘”같은 소소함 속에 감추어져 있는 건 아닐까.

<깨진 크리스털 조각>
할머니는 정직하게 살아왔던 자식의 병을 위해 무덤을 파헤쳐 인골을 꺼내 약재로 쓴다. 하지만 그의 손자가 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평소 자상하던 할머니와는 다른 기괴하고 역겨운 모습에서 충격을 받는다.
도덕적 관념과 인간과의 이율배반적인 모습들이 그려진다. 인간의 목숨을 걸면서까지 지켜야 할 ‘도덕’이라면 지나친 사치인가? 그 미궁 속을 손자의 깨진 크리스털 조각을 통해 들여다본다.

<홀>
할머니의 피를 이어받아서인지 종순 역시 남성들의 오줌통(성욕의 배출구)으로 전락한다. 결국 낙태까지 하고 골프장에서 캐디로 일하지만 남성들의 ‘홀’과 같은 생활은 여전하다.
순박하던 한 소녀를 인생의 검은 홀로 몰아가는 건 남성들의 이기적 욕망 때문이 아닐까...

<별>
밤하늘의 빛나는 별처럼 황녀같이 산다는 것, 그 끝없는 외로움의 모양새가 친구와의 대화를 통해 그려진다. 돈은 많지만 점점 소원해지는 정신에 타인을 끌어들이지만 결국 자신의 울타리 밖으로 쫓아버린다.
별처럼 화려한 인생이지만 실속 없고 허세 가득한 삶. 그러다 보면 느는 것은 말, 공허한 말뿐이다.

<길을 가다보면 개도 만나고>
댐이 들어서는 땅을 매입해 보상금을 타려는 친구와의 악연이 그려진다. 자신의 이득을 위해 친구를 이용하는 친구.
사회가 물질중심으로 바뀌다보니 우리의 관계도 돈을 중심으로 형성되거나 소멸해가는 건 아닐까. 나 역시 몇 푼 돈에 친구에게 상심하는 현대인일까...

<그 벌이 왜 나를 쏘았을까>
벌에 쏘여 고통스러웠지만 행운을 가져다준다는 어떤 이의 말에 은근히 벌어질 앞날을 기대한다. 그러던 중, 자신을 방문한 처자를 두고 은밀한 상상 속에 빠져든다.
행동한다는 것보다 어쩌면 상상 속에서만 있을 때가 더 행복할 경우가 있잖은가! 로또 1등에 당첨되거나 멋지고 아름다운 연인과의 데이트, 혹은 빨간 스포츠카로 아우토반을 질주하는 등의 ‘상상’이야말로 아무런 현실적 문제없이 즐길 수 있는 가장 경제적인 유흥이 아닐까.


#2. 독서토론회에서

그와 스치다.
토론회장이 있는 시내의 모 서점에서 자투리시간을 이용해 책을 본다. 문득 옷깃에 느껴진 인기척에 고개를 들자 낯익은 얼굴이 보인다. 한승원.
주최 측이 간단히 인사를 하며 주차장에 대해 물어본다. 그러자 “친구랑 같이 왔는데... 그냥 놔두세요.” 라며 소탈하게 웃는다. 글로는 전달될 수 없는 작가의 인생이 미소 속에 숨겨져 전해지는 느낌이다. 어쩌면 여기 온 목적의 90퍼센트를 조금 전에 이뤄내 게 아닌가 싶다.

“작가는 말을 못한다. 아니 말을 못해야 작가다.”
말로 쏟아내기보다는 글로써 흘러넘쳐야 된다는 작가론을 펼친 친구의 말처럼 약간은 어눌한 말투로 토론회를 시작한다. 곧이어 청중을 기죽게 만드는 논리 정연한 평론가의 장문이 토론회의 열기를 끌어올린다.

고향과 농촌, 가족과 남녀의 관계에 대해 많은 말들이 오간다.
고향을 찾아 귀향하는 모습이나 평상에 앉아 휴식하는 모습과 같이 한승원님의 자전적 이야기가 바탕이 되었기에 자신은 물론 어머니의 모습에서도 많은 부분을 빌려 왔다고 한다.
특히 소설 속에 자주 등장하는 노인과 아이에 대해 사라짐과 태어남, 꽃방과 꽃씨 등의 비유를 들며 소멸과 생성의 윤회관계로 설명한 부분이 인상 깊다. 아이를 통해 노인의 존재가치를 확인하고 이로써 아이는 미래를 여는 희망으로 자라난다고...
또한 여성을 어머니나 창녀라는 이미지로 지나치게 단순화하거나 성적인 도구로만 인식하는 건 아닌가 하는 질문도 있었는데 한승원님은 남성과 여성과의 관계를 지배와 피지배가 아니라 우주적 입장에서 양과 음의 상이한 존재로 탄생되어 융합되는 존재라 보고 남성성에 대비되는 여성성을 강조했다. 따라서 자신의 작품을 페미니스트적인(여성운동의) 관점에서 보지 말아달라고 했다.

진지하고 의미 있는 토론회였지만 약간의 아쉬움도 남는다. 사실 난해한 표현과 용어가 많아 그 핵심을 찾기가 힘들었다.(위의 글처럼!) 조금은 알아듣기 쉬운 말로 질문과 답변이 오갔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아무튼 책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한승원님의 생각이나 글 속에 숨겨진 코드를 음미해 볼 수 있었다. 또한 정확하게 작가의 느낌을 끄집어냈다는 자부심과 함께 더 깊고 다양한 소감들을 접할 수 있는 기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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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빈치 코드 - 전2권 세트
댄 브라운 지음, 양선아 옮김 / 북스캔(대교북스캔)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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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바람이 불고 있다. 다빈치의 후폭풍이 전국을 휩쓸고 있다. 출판사의 광고전과 더불어 사람들의 입으로 전해지는 선전효과가 더해져 올 여름을 휘어잡고 있다.
대부분 신간코너에서 오래전에 사라졌거나 한 철 지나버린 책들만 보다 모처럼 최신 유행의 책을 집어 들었다. 가끔은 ‘베스트셀러’ 목록 속의 세태 흐름에 무작정 동참해 보는 것도 남다른 재미를 준다. (물론 미디어와 군중심리에 의해 조작된 ‘반짝스타’도 상당하지만 말이다.)

작년 여름, 프랑스에서 폭염을 피해 마신 하이네켄의 알싸한 취기로 루브르박물관을 헤맸던 기억이 난다. 미로같이 다가왔던 긴 회랑과 높은 벽의 궁전, 그곳을 가득 매우고 있던 명장의 작품과 이를 지켜보는 수많은 사람들.
박물관의 기억과 함께 <다빈치 코드>를 읽는다. <모나리자>와 <밀로의 비너스>를 찾던 발자국 소리를 따라 책장 속을 걸어간다. 순간 한국의 골방이 아니라 루브르박물관 중앙, <승리의 날개> 밑에 서 있는 듯 하다.

짧게 이어지는 단락과 빠른 전개는 이야기의 긴박함, 궁금증을 증폭시킨다. “그래서, 그래서 어쨌다는데?” 라며 친구의 응답을 다그치듯 책장을 넘긴다.
랭던(기호학자)과 소피(소니에르의 손녀)는 살해된 소니에르(루브르박물관장)가 남긴 이상한 메시지를 아나그램(철자의 위치를 바꿔서 새 단어를 만드는 것)을 통해 하나씩 풀어나간다. 곧, 이 메시지가 다빈치와 연관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는 그 그림 속에 숨겨진 은유와 상징, 기독교의 역사와 성배의 진실을 향해 위험한 길을 간다.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장면들은 두 뼘 남짓한 책을 와이드스크린에서 보는 서스펜스 영화처럼 느끼게 한다. 나는 결정적인 순간의 슬로모션처럼 천천히, 천천히 마지막 장을 펼친다.
미로와 같은 수수께끼의 터널을 지나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도착한 랭던과 소피. 그리고 서서히 밝혀지는 사건의 전모와 성배의 정체!

소설이긴 하지만 <다빈치 코드>는 작가의 상상력과 함께 논리적이고 탄탄한 구성으로 허무맹랑한 공상이 아닌 실재했던 역사를 보는 착각을 일으킨다.
그저 댄 브라운(저자)의 능력이 놀라울 따름이다. 사실과 가설, 그리고 상상력을 조합하여 이렇게 표현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였을까.
그가 기독교에서 말하는 우리 인류를 창조한 ‘그’처럼 느껴진다.

“다빈치와 함께 지난 2천 년 동안 이어져 온 비밀의 공모자가 된 기분”이라는 옮긴이의 말처럼 가슴속의 보물하나를 넣어둔 기분이다.
어서 이 보물, <다빈치 코드>를 친구들에게 떠벌리며(?), 선물하고픈 생각이 간절하다.


PS:
이 글을 적고 다른 사람의 <다빈치 코드>에 대한 느낌을 찾아본다.
좋았다는 사람과 그렇지 못하다는 사람이 극과 극을 달린다.
전자는 빠른 전개와 논리적인 구성에 점수를 줬을 테고,
후자는 베스트셀러 통속성과 할리우드 영화식의 가벼움에 비중을 뒀을 것이다.
하지만 ‘재밌다’라는 부분만은 대부분 인정한다.
그렇다면 나는 책 표면의 재미로 그 통속성과 가벼움을 놓쳐버렸단 말인가?
^^;
이런 오락가락하는 모호한 생각들 때문에 느낌을 쓰고, 느낌을 읽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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