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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요한 사회
존 케네스 갤브레이스 지음, 노택선 옮김, 신상민 감수 / 한국경제신문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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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우리는 풍요한 사회에 살고 있는가? ‘풍요’는 가치의 지향점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에 누구도 이 질문에 명쾌한 답을 내놓지 못하리라. 경제학자 존 갤브레이스 의 책 ‘풍요한 사회’(The Affluent Society)(한국경제신문)에서의 풍요(Affluence)는 경제적 의미의 풍요를 말한다. 이 책의 초판이 벌써 50여년이 됐다고 하니, 갤브레이스는 반 세기 전의 미국을 ‘풍요한 사회’로 본 셈이다. 자본과 재화의 규모에 주목해 본다면 50여년 전 미국은 이미 풍요한 사회였으며, 똑같은 잣대로 평가한 우리나라 역시 ‘풍요한 사회’임에 틀림 없다.


존 겔브레이스가 ‘풍요한 사회’에서 주목한 부분은 ‘빈곤’한 사회에서 태동한 경제학이 사회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해 ‘풍요한 사회’의 분석을 제대로 해내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예전 경제학의 이론이 가진 통념 그대로 현재를 해석하다보니, 그 분석이 심각한 오해를 불러 일으킨다고 지적한다. “통념의 적은 사상이 아니라 세상이 계속 변해간다는 사실이다.(p.27)”


그의 지적은 ‘불평등’에 대한 진단으로부터 시작한다. 경제가 성장할수록 ‘불평등’이 심화되는 까닭으로 주류 경제학이 흔히 꼽는 것은 자본주의의 ’생태학‘적 특성이다. 즉 자본주의는 내재적 원리상 ’불평등‘이 필연적으로 수반된다는 것이다. 예컨대 멜더스의 경우“국가의 자본과 생산량이 늘면 이윤도 늘어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생산이 늘면 인구도 증가한다. 따라서 필요한 식량도 늘어나기 때문에 토지에 대한 수요는 더 늘어나고, 결국 지대가 올라서 지주가 이득을 본다. 다시 말해 경제가 성장하면 자본가가 번영을 누리고, 그 열매는 지주에게 돌아가게 마련이다. 이처럼 자본주의가 발생하는 필연적인 불행은 결국 대부분 일반 대중의 몫이다."(p.43)    


불평등의 ‘합리화’는 1930년대 후반 미국 전역을 뒤엎었던 사회진화론(Social Darwinism) 에 의해 ‘정당성’마저 확보한다. 자본주의의 경쟁에 그에 따른 도태는 약자를 제거함으로써 훗날 사회에 득이 된다는 논리가 사회진화론의 고갱이다. 이에 따르면 ‘불평등’은 정당한 경쟁의 ‘당연한’ 결과물로 외려 칭찬받아 마땅한 것이 된다. 

 

‘불평등 문제’하면 떠오르는 학자가 바로 마르크스다. 마르크스는 이 불평등이 사회적 혁명의 씨앗이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마르크스의 장기적인 전망은 바로 자본 집중의 심화이다. 그는 자본의 집중 현상이 진행될수록 사회자본이 점점 더 소수에 의해 지배되는 경향이 있다고 예견했다.”(p.85) 사회자본에서 소외된 자들은 자신의 발목에 묶여 있는 쇠사슬을 풀 ‘행동’을 결의한다. 그것이 바로 혁명이다. 결국 마르크스 역시 ‘불평등’은 자본주의가 배태한 어쩔 수 없는 사생아로 본 셈이다.  


현대에 와서 불평등에 대한 우리의 관심이 부쩍 줄기 시작했다.(상대적 의미에서 ‘줄었다’라는 표현을 쓴 듯 하다.) “현대에 불평등에 대한 관심이 줄어든 데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으나, 이 원인들은 모두 어떤 방식으로든 생산이 증대했다는 사실과 관련돼 있다.(p.109)” 생산의 증대는 우리에게 ‘절대적 빈곤’에서 벗어나게끔 했으며, 부 자체가 특권으로 인식되지도 않는다. 오히려 지나친 부의 과시는 여러 사람의 뭇매를 맞기 십상이다. 대신 이미 습득한 재산을 ‘지키고자’ 하는 욕망이 생겨난다. 자신의 몫을 뺏길 여지가 있는 것들에 대한 ‘보장’에 대해 신경을 쓰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러한 “경제적 불안요소를 제거하는 데 앞장선 것은 당장 경영에 영향을 받을 가능성이 있는 기업들이었다. 이들의 불안의 최대원인은 경쟁과 예측할 수 없는 자유경쟁시장의 가격변동이었다. 기업가들은 이런 불안요소들을 제거하거나 완화하는 작업에 본격적으로 착수했다. 이들이 생각한 궁극적인 보장은 즉 한 회사가 공급과 가격 지배권을 장악하는 독점이었다. 카르텔과 법에 의한 가격 협정, 신규기업의 진입 제한, 관세와 쿼터제에 의한 보호”(p.113) 등은 이들의 몫에 대한 든든한 보험으로 작용한다.


결국 “현대에 와서 보장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것은 현대 경제생활에 존재하는 특별한 위험요소 때문이라는 통념의 주장은 잘못된 것이다. 그것은 오히려 부의 증대로 생겨난 결과다. 즉, 가진 것이 거의 없던 세상에서 지켜야 할 것들이 훨씬 늘어난 세상으로 옮겨온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불경기가 경제적 보장에 대한 관심을 자극하는 것은, 대형화재가 화재보험에 대한 관심을, 또는 홍수가 홍수예방에 대한 관심을 자극하는 것과 같다.”(p.121) 그러나 안타깝게도 “경제학자는 가격조작의 목적이 불안요소를 최소화하는 것보다는 이윤을 극대화하려는 데 있다고 보았다. 경제학자들은 이 문제만 생각했지, 불안요소에 영향을 받지 않으려고 자기방어에만 몰두하는 소극적인 기업가들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았다.”(p.114) 바로 이 지점에 경제학자들의 잘못된 통념이 숨어 있다. ‘빈곤의 시대’에 주목받았던 ‘이윤의 극대화’라는 생산에만 이목을 집중하고 있었던 것이다. 


존 갤브레이스는 과거 절대적 의미를 지녔던 ‘생산’이 풍요한 사회에 이른 지금까지도 ‘그 난공불락의 위상’을 여전히 과시하고 있다고 보았다. 이와 더불어 미국 특유의 ‘다위니즘적 진화론’이 더해져 이른바 상대적 빈곤층의 경제적 보장에 대해서는 눈을 감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고 비판한다. 이른바 충분한 부를 습득한 자들은 이미 예전부터 부의 손실에 대한 보험을 들어놓은 것에 반해 그렇지 못한 자들에 대해서는 경제적 보장 자체를 생산의 적으로 간주했던 것이다. “경제적 효율을 높이기 위해서는 금전적인 보상이라는 ‘당근’과 함께 개인의 경제적 재난이라는 ‘채찍’이 있어야 하며, 이 두 가지 모두가 꼭 필요한 요소라는 생각이었다. 경제적 보장이 늘어나면 채찍이 제거되므로 대중을 고무시키는 자극 역시 절반이 제거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경제적 불안요소들이 효율을 높이고 경제를 발전시키기 위해 꼭 필요한 요소라는 생각은 전적으로 큰 오산이었다. 경제사상의 역사에서 최대의 오산이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p.124)”

   

‘생산의 기득권’이 또 다시 합리화 되는 근거는 이른바 ‘소비자 수요’가 끊임없이 창출된다는 점이다. “옛날에는 생산증대가 굶주린 사람에게 식량을, 추운 사람에게 의복을, 집 없는 사람에게 집을 제공하는 것을 뜻했다. 그런데 오늘날 생산증대란 더 우아한 고급 자동차와 색다른 음식, 멋진 옷, 세련된 오락 등 한마디로 감각적이고 부도덕하고 파괴적인 현대의 모든 욕망을 충족시켜 주는 것을 뜻한다. 이런 욕망과 그 욕망을 충족시키는 생산을 옹호하는 경제이론은 통념에서 난공불락의 절대적인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데(그리고 놀라울 만큼 아무런 도전도 받고 있지 않는데), 이는 대단히 비논리적이며 저속한 것이고, 어떤 의미에서는 위험천만한 것이다.”(p.149)


왜냐하면, 이 소비자 욕구라는 것이 결코 소비자 개인의 소비심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외부환경에 의해서 ‘부추겨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자유롭게’ 소비한다고 여겨지는 행위를 잘 보라. 과연 이것이 진정 ‘자유로운가?’ 자의적인가? 아니면, 나도 모르게 타의에 의해 부추겨진 행위인가? 백화점을 쇼핑할 때 항상 생각했던 것보다 매번 ‘불필요’하게 많은 소비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정말 원해서 하는 선택인가? 아니면, 진열대의 디스플레이 된 ‘생산품’이 당신의 지갑을 열게 하였는가? 또는 가는 길목마다 위치한, TV를 켜면 으레 보게 되는 ‘광고’에 주목해 보라. 우리의 시선 어느 곳에도 항상 자리매김돼 있는 광고는 우리의 소비욕구를 부추긴다. 또, 보다 멋진 옷을 사는 이유가, 진정 자신이 멋지게 보이기 위해선가, 아니면 멋지게 보인다고 여겨지는 옷을 구매함으로써 얻게 되는 ‘지위’ 때문인가?

 

조금만 생각해 본다면, 우리의 소비는 결코 자유롭지 않으며, 생산자의 의도에, 광고자의 기획에, 사회의 시선에 포섭돼 있다. 그렇다면, “개인을 위해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욕구는 시급하다고 볼 수 없다. 생산이 욕구를 창조한다면, 생산이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이라고 변화할 여지가 없어진다.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재화를 생산하는 것이 도리어 욕구를 만들어낸다면, 또는 욕구가 생산과 병행하여 나타나는 것이라면 더 이상 욕구의 시급성이 생산의 시급성을 옹호하는 데 사용될 수 없다.(p.161-162)” 지금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욕망을 만드는 것. 생산을 통해서든, 광고를 통해서든, 상품의 진열에 의해서든....“욕망을 만드는 것. 욕구가 그것을 충족시키는 과정에 의존한다는 사실을 의존효과(Dependence Effect)라고 부르겠다.”


그리하여 요컨대 ‘생산’에 여전히 방점을 두고 있는 현재의 사회는 ‘풍요한 사회’일 뿐, 이 풍요가 사회 구성원 전체의 몫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생산에만 매진해 만들어진 풍요한 사회는 “부(富)가 만들어내는 차별을 인식하는 데는 인색했다.”(p.319) 그 결과 풍요가 만들어 낸 잘못된 효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풍요 속에 살게 된 우리는 그 혜택과 문화로부터 배제된 이들을 쉽게 잊어버리게 될 위험이 있다. 그리고 과거에 종종 그랬듯, 우리가 그들을 방치하는 것을 합리화할 이론을 개발해 낼 가능성도 있다. 풍요의 두 번째 효과는 계속 그 위험이 늘어나고 파괴능력이 커지는 무기생산을 위한 자원이 크나큰 번영에서 나온다는 사실이다.”(p.321)


갤브레이스는 이 책의 말미에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부탁을 남긴다. “하나는 이전에 그랬던 것처럼 가난한 사람들의 사회적 요구를 제한하거나 기각할 사회적 이념을 찾으려는 최근의 경향에 저항해 달라는 것이다. 그 대신 우리는 빈곤의 제거를 이 풍요한 사회의 사회적․정치적 의제의 중심에 놓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호소컨대, 이 지구를 잿더미로 만들려는 이들로부터 우리의 풍요를 지키자. 풍요한 사회에도 결함이 없지는 않다. 그러나 풍요한 사회 속에 있는 적대적․파괴적 경향으로부터 이 사회를 지킬 가치는 충분히 있다.”


그렇다. 이제 빈곤‘만’을 이야기 하는 시대는 지났다. 사회적 행동의 동기를 ‘빈곤’ 자체에서 찾으려는 노력은 잘못하면 현실과 동떨어진 이야기가 될 수 있다. 사회의 모습을 ‘풍요’로 보되, 그 진단의 동기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는 ’상대적 빈곤‘이라야 하겠다. 어찌보면 갤브레이스의 말은 ’이제 분배다‘라는 말로 압축될 수 있을 정도로 평범한 것인지 모른다. 그러나 그의 주장이 여전히 유효한 까닭은 우리가 ’생산중심주의‘에서 여전히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으며, 생산의 추동력은 ’경쟁‘에 의한 ’죽고 살기‘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생각을 견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풍요를 말할 때다. 분배를 말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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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말로 좋은 날
성석제 지음 / 문학동네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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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컨대 그는 유장한 다변가였고, 무심하게 쓰는 한편 연민으로 넘치는 사람이었다. 흥건한 말과 수다, 연민과 거리 의식이야말로 미천한 삶에 위대함을, 거대한 삶에 희극성을, 살벌한 '지역'의 풍경에 노스탤지어를 새겨넣을 수 있는 방법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의 소설은 우스꽝스럽지만 아름다웠고, 사소하면서도 위대했으며, 수다스러우면서도 숭고할 수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윤리적인 한편, 즐거운 것이었다.

  그런 그의 문체가 눈에 띄게 짧아졌고, 메말라졌다. 연민도 사라졌다. 작가는 더이상 웃(기)지 않는다. 우리도 웃지 못한다...."

    - 황호덕(문학평론가), 절단(을 절단)하는 이사람('참말로 좋은 날' 비평) 중에서

 내가 알던(그의 책을 꽤 많이 읽었으니 '안다'라는 말을 써도 되겠지? 소설가와의 만남은 작품 하나로 충분한 법) 성석제는 '웃긴' 작가다. 웃길 줄 아는 작가다. 그의 만든 캐릭터는 익살스럽고, 그의 문체는 맛깔스러우며, 그의 단어는 '언어 유희'로 가득차 있었다. 그의 푸짐한 인상처럼 그의 소설은 푸짐했다. 맛있었다.  

  그런 그가 간만에 내놓은 소설이니, 당장에 안 사볼 수가 없었다. 그러나 웬걸? 이제까지와의 그와 다르다. 이제까지 그가 써왔던 소설과 달리 '참말로 좋은 날'은 사납다. 무섭다. 씁쓸하다. 살풍경이 그가 그린 사회 도처에 널렸고, 소설 속 주인공들은 매번 좌절모드다. '참말로 좋은 날'은 지극히 반어적이었다.  

  끝까지 웃음을 잃지 않았던 그 전과는 달리, 이젠 지난하고 비루한 삶 앞에서 솔직해 지기로 작정한 모양이었다. 속수무책 당하기만 하는 밑둥들의 삶이야  매번 그러했던 것이다만, '풍요로운 사회' 아닌가. 풍요한 사회에서 나만 풍요하지 않아 느끼는 소외감은 원래 웃음과 친하지 않은 사이다. 게다가 이 풍요가 그 자식들에게 대물림되고, 나의 소외감은 내 자식에게 대물림되는 사회에서라면 더욱. 그래서인지, '참말로 좋은 날' 안의 여러 소설에서 부를 세습한 태평한 자들이 곳곳에 보인다.  

  그래서 성석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세상이 바뀌어도 사람은 그대로다. 그대로 있다는 기분이 든다. 생활과 방편이 바뀌어도 내가 아는 사람들 얼굴은 그대로다. 나아지는지 나빠지는지 알 수 없다. 빠른 건 언제나 같다. 내가 바뀐 것인가. 그럴지도 모른다. 바뀌는 게 당연한가. 그럴지도 모른다. 고마운 건 언제나 같다. 소설을 쓰게 해주는 존재들, 실재하는 또 실재하지 않는."(작가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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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경제 산책 - 정운영의 마지막 강의 Economic Discovery 시리즈 7
정운영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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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정운영 경제학 교수의 생전 글을 묶은 '자본주의 경제 산책'은 엄밀히 말해 21세기 대한민국형 자본주의의 앞날을 '조심스레' 예측하고 있는 글이다.

  이 책에서 그는 21세기 자본주의를 분석하는 데 가장 중요한 키워드로 '세계화'와 '투기자본'을 꼽았다. 세계화는 자본의 전방위적 진출을 가장 전략적인 목표로 설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지구촌 공동체'로 대표되는 지구화, 국제화와는 대비된다. 또한 정 교수가 지적하고 있는 투기자본은 초국적 거대 자본의 양도 차익에 집중하고 있다는 점에서 전근대적, 반봉건적 투기 형태와 구분된다.

   세계화는 1970년대 전세계적 - 사실 미국과 유럽 등의 선진국에서 먼저 나타난- 불황의 타개책으로 나온 신자유주의의 또 다른 언어 레토릭에 불과하다.  신자유주의, 혹은 세계화는 자본의 무한정한 확장을 위해 국가의 역할을 축소, 나아가 폐지시키려 하는 데 운용의 핵심이 숨어 있다. 이 책에서는 이러한 세계화가 "조지 소로스 마저 지적하듯이...(중략) 대다수 주민이 견디지 못할 정도의 불안정과 불안전을 초래하고, 마침내 체제의 재생산 능력을 파괴한다"(p.75)고 경고한다. 왜냐하면 "세계화 시대의 시장 분할과 통합은 그 대상이 기존의 상품과 자본은 물론, 용역, 기술, 노동, 환경, 거래 규칙으로 대거 확대될 뿐만 아니라 외세 개입을 규제하는 최소한의 안전장치도 존재하지 않"(p.73)기 때문이다.

   투기자본 역시 실물 거래를 매개로 하는 생산적 활동이 아닌, 도박 플레이에 가깝다는 점에서 21세기 자본주의의 미래를 어둡게 할 것이라고 본다. "통화, 주식, 채권, 파생 상품까지 양도 차익을 노리는 금융 투기가 외환 수요의 98퍼센트를 차지한다는 사실은 '카지노 자본주의'의 야유를 그대로 수긍하게 만든다."(p.83) 실제 우리나라에서는 97년 외환위기 이후 대거 유입된 국제적 투기 자본이 국내의 금융 자본은 물론, 국내의 저평가된 기업들을 잠식하고 있다. 국내 은행의 대부분이 80% 이상의 자본을 국제 자본에 기대고 있다는 점, 또한 칼 아이칸의 KT&G 인수 시도 등에서 보듯, 국가 경제가 국제 투기자본에 휘둘리기 십상인 게 현재 우리나라 경제의 현실이다.

   정 교수는 "과거의 제국주의와 자유주의가 각각 오늘의 세계화와 신자유주의로 대체"(p.149)되고 있다고 경고한다. 이러한 대체는 기존의 것과는 달리, 가시적인 폭력을 배제하고 더욱 교묘한 '착취' 메커니즘을 내재하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우려할만 하다.

   정 교수는 이러한 자본의 무차별적 난동에 저항하기 위해 '문화의 역할'이 필요하다고 본다. 경제는 이미 신자유주의적 구호 아래 정리돼 있으며, 정치 또한 아무 힘을 쓸 수 없는 상황에서 "창조를 향한 저항, 저항을 통한 창조는 세계화 시대의 문화가 담당할 가장 중요한 책무 중 하나"라고 본다. 보다 구체적으로 문화를 위시한 지역적 통합에 주목한다. 특히 우리나라에 관련해서는 새롭게 조명받고 있는 동아시아적 가치를 새롭게 재평가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이 책에서는 자본주의에 대한 경고 말고도, 지난 20세기에 일어났던 사건들에 대한 회고, 우리나라의 압축적 근대화 과정에서 성장했던 여러 대항 논리들에 대해 간략하게나마 볼 수 있다. 다만 아쉬운 점은 이 책 안에 있는 모든 글들이 정 교수가 생전에 두서없이 집필해 놓은 '초고'인 까닭에 정리가 덜 된 문장들이 곳곳에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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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이와 예술 그리고 상상력 - 유쾌한 미학자 진중권의 7가지 상상력 프로젝트
진중권 지음 / 휴머니스트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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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진중권의 변심(?)

  진중권. 그는 박정희의 “무덤에 침을 뱉”는 불경(?)한 행위를 통해 세간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를 발표할 당시만 하더라도 박정희 정권에 대한 비판은 대중들에게 그리 익숙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왜곡된 역사를 조롱하고, 잘못된 사회와 드잡이 하였다. 그래서 그에게 꼬리처럼 붙은 수식어, “싸움닭.” 그런 그가 미학을 전공했다는 사실은 사뭇 충격적이기까지 하다. 그는 어느 일간지와의 인터뷰 중 자신의 전공과 관련이 없어 보이는 사회비평활동에 대해 마뜩찮아 한 적이 있다. 자신의 영역으로 돌아가도 될만한 사회를 꿈꾼다는 말도 함께.

  그런 그가 1994년『미학오딧세이』발표 이후 오랜만에 자신의 영역으로 돌아왔다. 『놀이와 예술 그리고 상상력』을 통해서 말이다. 『놀이와 예술 그리고 상상력』은 방대한 세계역사 속에서 존재하였던 예술작품을 7가지 방식의 놀이로 분화하고, 그 예술과 놀이를 연결하는 끈이 인간의 상상력이었다고 설명한다. 그동안 사회에 대한 진중권식 독설에 익숙해 있던 독자들은 이 책을 통해 그의 박학다식함과 세상을 창조적으로 해석하는 방식에 놀라워할지도 모르겠다. 그가 책에서 소개하고 있는 수많은 예술작품의 방대함 때문에, 또 그것들 사이의 유사성을 발견하고 그것들을 통해 사회를 해석하는 방식 때문에 말이다.  

2. 나는 상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어린이로써.

  이 책은 이성에 기반한 현대의 사고패러다임이 변화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는 인간의 상상력으로 가능하다. 과학과 기술이 세상에 혁명처럼 오기 전, 인간의 상상력이 사회를 해석하는 도구였던 시기가 있었다. 우리가 ‘중세’라고 부르는 시기가 바로 그 때이다. 과학혁명과 정치․경제혁명 이후 인간의 이성은 ‘중세’를 ‘암흑의 시기’라고 폄하하였다. 중세의 종교, 미신, 예술 등은 이성의 이름으로 거부되었다. 결국 16세기 이후 이 세계는 이성의 패러다임으로 움직였다.

  진중권은 과학에 대한 맹신 등으로 대표되는 이성의 과신이 오히려 이 시대를 제약하고 있다고 말한다. 즉, 이성이 인간의 상상력을 제약하는 틀이 되어 버린 것이다. 이 틀 밖에서 유일하게 존재하였던 것이 예술이다. 예술은 어린이처럼 사고하기 때문이다. 며칠 전 보았던 TV의 한 프로그램은 어린이를 상대로 ‘말하는 토끼’에 대한 반응을 실험하였다. 이성으로는 이해될 수 없는 ‘말하는 토끼’는 쉽게 어린이들의 친구가 되었다. 그들의 상상력에서 토끼는 말을 할 수 있고, 친구도 될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진중권은 이와 같은 어린이의 상상력이 예술 속에서 존재하였다고 말한다. 그리고 탈근대 혹은 탈현대의 패러다임은 이와 같은 상상력에 의해 움직일 것이다.

  그러나, 탈현대에 복원될 상상력의 패러다임이 중세와 같은 것은 아니다. 중세의 상상력이 과학과 기술의 결여 때문에 기인한 것이라면, 탈현대의 상상력은 과학과 기술의 도움을 통해 더욱 창조적인 형태를 띠게 된다. 그리하여, 그동안 오랫동안 견고히 쌓여있던 이성의 틀은 상상력에 의해 깨지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이 시대를 ‘생각’하기에 ‘존재’하는 것으로 믿어왔다. ‘생각’은 수많은 이론을 낳았고, 우리는 ‘이론’ 때문에 죽살이치며 살았다. 이론, 사상 때문에 피로 덮였던 ‘광기의 시대’를 생각해 보라. 진중권은 이 사회가 상상력을 통한 ‘유희의 시대’가 되어야 한다고 강변한다. 상상력이 놀이가 되고, 놀이는 유희가 되고, 유희는 삶을 추동하는 시대. 어스름달 아래 검기울어져 가도록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를 즐기던 흥분 속에 ‘원숭이 엉덩이는 빨개, 빨개면 사과, 사과는 맛있어, 맛있으면 바나나, 바나나는 길어, 길으면 기차’를 타며 즐기는 여행같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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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의 국가·정체(政體) - 개정 증보판 헬라스 고전 출판 기획 시리즈 1
플라톤 지음, 박종현 옮김 / 서광사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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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을 더 올바르지 못하게 되는 쪽으로 인도하게 될 삶은 더 나쁜 것이라 하는 반면에, 혼을 더 올바르게 되는 쪽으로 인도하게 될 삶일 경우에는 더 나은 것이라 하면서 말일세. 그 밖의 모든 것에 대해서는 상관치도 않을 걸세. 살아서나 죽어서나 이게 최선의 선택임을 우리가 보았기 때문이네. 이 소신을 그야말로 금강석처럼 굳게 지니고서 저승(하데스)으로 가야 할 것이네. - 플라톤, 국가 p.6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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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1달여간을 지리하게 잡아온 플라톤의 '국가'를 다 읽은 후, 나는 잘짜여진 종교서적을 읽었다는 생각을 했다. 자연과 인간은 유기적으로 엮여 돌아가며, 따라서 자연의 원리 속에서 인간의 그것 역시 발견해야 한다는 그의 생각구조는 800여 페이지가 넘는 긴 분량을 통해 철저하게 유지되었다. 다른 것을 배제하더라도, 논리의 완결성만큼은 어느 누구도 함부로 깨기 어려울 듯 했다.
 
  특히, 후반부에 나오는 국가의 4가지 정체, 그 변화과정과 훗날 이것을 더욱 발전시켜 완결된 6정체론은 현재까지도 그 의의를 상실하지 않았다고 본다. 역사 속에서 가장 이상적인 정치체제로 평가받는 민주주의의 위험성, 그것으로 인해 참주정으로 타락할 수 있다는 그의 지적은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 이후의 히틀러체제를 완벽하게 설명해줄 뿐만 아니라, 요즘 유럽정치의 가장 위협적인 정치세력으로 주목받는 우파포퓰리즘의 대두까지도 예견하는 듯 하다.
 
  또한, 플라톤이 이상시하고 있는 철인통치를 위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 '교육'은 현재의 민주주의에서도 매우 중요한 요소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훗날,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장하는 혼합정치체에서 '중산계급의 원리'를 그 전제조건으로 삼은 것과 마찬가지로, 교육을 통한 이성의 확보는 민주주의가 후퇴하지 않기 위한 필수조건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학 1학년 시기 막연하게 품었던 이상정치체, 철인정치는 플라톤의 그 당시 생각으로도 실현불가능한 것임이 확인되었다. 플라톤 스스로도 이후 저작에서 그의 이론을 후퇴, 법치를 차선으로 선택한 것에서 볼 수 있듯 철인왕은 그의 천재적인 형이상학에서 나온 것에 불과하다.
 
  한편, 철인왕의 가장 필수적인 덕목이라 할 수 있는 이성(reason)의 지나친 강조는 훗날 인간우월주의, 유럽중심주의의 원흉이 되었다고 본다. 근대 이후 홉스에 의해 인간의 이성이 계산능력(capaciting avility)으로 평가절하되기는 하지만, 홉스 역시 자신의 사회계약론에서 인간의 이성에 의한 국가건설을 말하고 있는 것을 볼 때 플라톤의 과오는 재평가 받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제1권부터 시작된 정의논쟁 중의 질문, "정의로운 사람이 실제로 잘 사는 것이냐?"의 대답을 '혼'의 문제 내지는 사후세계로 돌려버린 것은 끝끝내 진한 아쉬움을 남긴다. '혼', '사후세계'는 그의 철인통치론과 더불어 그대로 중세 '기독교사상'으로 이어질 수 밖에 없었으며, 이것은 현재의 기독교근본주의까지 문제삼을 수 있다고 본다. 나의 정의에 관한 생각이 여전히 '트라시마코스'의 손을 들어줄 수 밖에 없는 결정적 원인이 되었다.
  그러나, 국가 전체를 통해 나타나고 있는 '이상주의'는 여전히 놓쳐서는 안되는 것이라는 생각은 한달동안의 노력 끝에 얻은 소중한 결실이다. '현상은 현실주의로, 이념은 이상주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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