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Interview with 상복의 랑데뷰 님
Q. 추리소설을 읽는 이유/추리소설 읽는 즐거움은?
A. 어렸을 때 선물로 받은 해문출판사의 팬더추리문고를 읽으면서부터 입니다. 그 때를 돌이켜보면 명탐정의 초인적인 활약에 감탄하면서 읽기 시작했던 것 같습니다. 추리소설에 등장하는 탐정이 저에게는 마치 미국의 DC/마블 코믹스의 히어로와 같은 느낌이었다고 할까요? 나이가 들면서는 하드보일드를 좋아하게 되었는데, 부패한 사회와 그 부패함을 헤치고 정의를 구현하기 위해 걸어가는 고독한 탐정들의 냉소. 그러나 겉으로는 나약하고 따뜻한 마음씨, 그리고 블루 칼라 특유의 전문가주의. 이 모든 것이 제 가치관과 일치하더군요. 그래서 지금까지 읽고 있습니다.
결론지어 이야기하자면, 추리소설은 범인을 잡는 고도의 이성활동이자 사회상을 반영하는 거울이며, 주인공의 자의식을 오롯이 보여주는 일기, 모두입니다. 어찌 좋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Q. '내 인생의 추리소설' 5권을 꼽는다면?
A.
1) <셜록 홈즈 전집>, 아서 코난 도일 지음
아서 코난 도일의 가장 큰 업적 두 가지를 들자면, 첫째, 추리소설이라는 장르가 대중에게 사랑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최초로 증명했다는 점과 둘째, 지금까지도 가장 사랑받는 불멸의 캐릭터 셜록 홈즈를 탄생시켰다는 점일 것입니다. 대부분 비슷하겠지만, 어린 나이에 처음으로 접한 셜록 홈즈는 지금까지도 최고의 영웅입니다. 그의 이분법적이고 관찰지향적인 추리는 세월이 지나서 이제는 빛이 바랜 느낌이지만, 아직도 괴팍한 홈즈와 약간 어리숙한 왓슨 콤비의 활약은 흥미진진합
니다. 약간 과장해서 수십 번이 넘게 읽었지만 재미있습니다아직도 추리소설이 잘 안 읽히거나 스트레스를 받으면 셜록 홈즈가 나오는 아무 단편이나 꺼내서 읽곤 합니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전부 다 읽는 제 자신을 발견하고 놀라곤 합니다. 혹시라도 지금 읽기 시작하시는 분들에게는 부러운 마음이 듭니다. 제가 처음 읽었을 때의 그 감동을 지금 맛보실 수 있을 테니까요.
2) <상복의 랑데뷰>, 윌리엄 아이리시(코넬 울리치) 지음
가장 좋아하는 작가 윌리엄 아이리시, 혹은 코넬 울리치의 대표작입니다. <환상의 여인>이라는 작품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죠. 팬더추리문고의 영향으로 아이리시는 언제나 가장 좋아하는 작가 중에 하나였습니다만, 이 작품을 읽고는 가장 좋아하는 작가가 되었습니다.(그 감동 때문에 블로그의 닉네임도 이 책 제목을 따서 쓰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애인을 잃어버린 조니 마의 치정어린 복수극인데, 작가 윌리엄 아이리시의 매력과 한계가 가장 잘 드러난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도시와, 그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 군상들에 대한 섬세한 (심리)묘사, 우울한 분위기, 서스펜스를 잘 살린 문체, 액자소설의 느낌이 강하게 드는 챕터별 전개, 그리고 약간 황당무계한 트릭까지 아이리시의 모든 것이 다 들어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뛰어난 추리소설이자, 격렬한 애정소설입니다. 주인공 조니 마의 슬프면서도 기괴한 순정, 그리고 우울한 복수극에 동참하다 보면 사랑하지 않을 수 밖에 없는 추리소설입니다.
3) <심판은 내가 한다>, 미키 스필레인 지음
최초로 접한 하드보일드 소설입니다. 보통은 밑에서 언급한 세 거장의 작품으로 하드보일드를 접하시는 분들이 많은데, 저는 이 작품을 통해 하드보일드의 세계에 입문했습니다. 중고등학교 때 읽은 소수의 추리소설이라서 더욱 애착이 가는 소설입니다. 우연히 중학교 특별활동 시간에 표지 없는 책이 보이기에 호기심에 읽기 시작했는데, 마이크 해머가 펼치는 자극적인 폭력과 성적인 묘사에-그 당시의 느낌입니다.-시간 가는 줄 모르고 흠뻑 빠져 읽었습니다. 지금 읽기에는 많이 낡
은 작품이고, 특유의 폭력과 성적인 묘사 때문에 여성독자 분들에게는 원성을 사고 있는 작품입니다만 시대적인 낡음을 고려하고 읽으면, 혹은 그렇지 않아도 충분히 가치있고 재미있는 작품입니다. 또한 추리소설의 시장적 기틀이라고 할 수 있는 페이퍼백 시장을 개척한 추리문학사적 가치를 지닌 중요한 작품이기도 합니다.
4) <기나긴 이별>, 레이먼드 챈들러 지음
미국에서 등장한 하드 보일드는 더쉴 해미트, 레이먼드 챈들러, 로스 맥도날드라는 세 명의 거장들의 손으로 완성되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레이먼드 챈들러의 필립 말로 시리즈는 하드보일드를 넘어 미국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걸작입니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레이먼드 카버와 함께 Two Raymond라고 부르며 존경심을 표하는 작가이기도 합니다.) 국내 출간된 모든 작품이 주옥같지만, 특히 가장 마지막 작품인 기나긴 이별을 읽었을 때의 충격은 지금도 생생합니다. 챈들러
작품 중에서 가장 길지만 흥미진진하며, 고통스럽지만 충분히 동참할 가치가 있는 여행입니다. 늙고 지친 말로가 자신을 둘러싼 진실을 깨닫는 순간, 세상에 대한 환멸과 말로에 대한 무한한 동정심이 동시에 솟아오르는 걸작입니다. 그리고 이 책은 책 자체의 완성도가 대단히 만족스럽습니다. 추리소설을 잘 아는 기획자에 의한 기획, 그리고 고풍스러운 책 디자인과 깔끔한 번역, 마지막으로 책의 소장가치를 높히는 훌륭한 해설까지 모든 것이 만족스럽습니다.
5) <제 5열>, 김성종 지음
한국추리소설에 대한 언급이 없다면 아쉽겠죠? 한국 추리소설계의 거두이신 김성종 선생님의 대표작이자 가장 좋아하는 한국추리소설입니다. 부끄럽게도 선생님의 작품을 많이 읽어보지는 못했지만, 이 작품만은 최고입니다. (제 나이 또래의 분들에게는 이영하 / 한진희 주연의 미니시리즈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프레드릭 포사이스나 존 르 카레의 작품과 비교해 보아도 결코 뒤지지 않는 한국형 스파이/정치 스릴러의 가능성을 보여준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쫓고 쫓기는 자의 숨바꼭질, 정치적 음모를 진행시키려는 집단과 이를 막기 위해 처절한 투쟁을 벌이는 주인공의 분투, 그리고 현실적인 설득력을 지니고 있는 상황까지 모든 것이 만족스럽습니다. 이 글을 쓰면서 생각해 보니, 작품에서 묘사되는 한반도 주변의 정치적 상황은 아직도 일부 현재진행이라는 점이 흥미롭네요.
Q. '올해 여름, 필독을 권하는 추리소설'이 있다면?
A.
1) <그로테스크>, 기리노 나쓰오 지음
호오가 뚜렷이 갈리지만, 작품성만큼은 누구나 인정하는 기리노 나쓰오의 대표작입니다. 이 작품은 사연이 있습니다. 이 책을 구입한 뒤에 우연히 푸켓에 갈 기회가 생겼고, 들고 가서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도저히 책을 손에서 놀 수가 없더군요. 고등학교 동창들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처절한 삶의 아우라를 거대한 벽화를 연상케 하는 세밀함을 통해 ‘그로테스크’하게 표현한 멋진 작품이었습니다. 게다가 극한까지 몰아붙이는 기리노 나쓰오 여사 특유의 필력과 상상을 뛰어넘
는 결말을 접했을 때에는 '모골이 송연'해진다는 표현을 몸으로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마지막 장을 덮고 갑자기 주위가 싸늘해졌던 느낌은 지금도 선명합니다. 미스터리적 요소가 좀 부족하다는 점이 걸리긴 하지만, 여름의 무더위를 잊게 해주는데에는 이 작품보다 더 유용한 작품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2) <화이트 아웃>, 신포 유이치 지음
시원한 이야기를 읽는 것도 여름을 이기는 좋은 방법 중에 하나입니다. 그 시원한 이야기 중에서 가장 먼저 꼽을 수 있는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오다 유지 주연의 영화로 더 알려져 있지만, 영화를 보신 분이 이 책을 읽는다면, 어떻게 이런 내용으로 그런 영화를 만들었을까 싶을 정도입니다. (참고로 영화는 이 책에서 묘사되는 지형을 시각적으로 이해하는데에 도움을 줍니다.) 눈이 뒤덮인 산을 배경으로 악당들과 고독한 사투를 벌이는 주인공의 활약과 그에 못지 않은 장쾌한 설원
묘사를 읽다보면 무더위를 어느 정도 날려 버릴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3) <흥분>, 딕 프랜시스 지음
딕 프랜시스는 특이하게도 일생 동안 ‘경마’라는 주제만 가지고 추리소설을 쓴 작가입니다. 더 놀라운 것은 국내에 소개된 모든 작품이 평균 이상의 작품성과 재미를 보장한다는 점입니다. 흔히 그래서 에드 멕베인과 함께 추리소설 애호가들 사이에서는 타율왕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그의 초기 대표작 중 하나로 영국의 경마업계의 부정을 조사하기 위해 비밀리에 잠입한 젊은 호주의 목장주 대니얼 로크의 모험담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벌어지는 사랑, 모험, 배신
, 우정.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경마장으로 간 007’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스릴이 넘치고 읽는 이의 ‘흥분’을 자아냅니다.
4) <살육에 이르는 병>, 아비코 다케마루 지음
성도착증 환자의 ‘죄와 벌’이라고 감히 부를 수 있는 작품입니다. 90년대 이후 일본의 미스터리계를 강타했던 ‘신본격 무브먼트’의 수준과 기백, 그리고 한계를 맛볼 수 있는 수작입니다. 놀라운 트릭과 ‘공정함’을 지키기 위해 작품 전체에 단서를 뿌려놓는 자신감-이 작품의 진정한 묘미는 다시 읽으면서 제공된 단서들을 재규합하는 데에 있습니다.-, 자극적인 소재를 지극히 자극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서술함으로써 공포감을 자극하고, 등장인물-살인하는 자, 추적하는 자, 바라보는 자-간의 심리가 서로 맞물리면서 몰입감을 증폭하는 솜씨는 초기작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훌륭합니다. 살육에 ‘이르는’ 과정과 해결에 ‘이르는’ 과정을 음미하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5) <블랙 달리아>, 제임스 엘로이 지음
영화 LA 컨피덴셜로 유명한 제임스 엘로이의 대표작입니다. 실재 있었던 살인사건을 바탕으로 자신의 고통스러운 경험담과 성실한 조사를 더해 재구성한 걸작입니다. 겉으로는 풍요로움이 가득한 도시의 허상이 살인사건을 통해 낱낱이 폭로되는 과정은 카타르시스마져 느껴집니다. 별 볼일 없는 사건 속에 얼마나 많은 죄가 감추어져 있는가를 보여주는 흡입력 가득한 전개와 강렬한 몰입감은 이 작품의 가장 큰 장점입니다. 죄의식에 가득찬 채로 살인사건을 조사하는 두 형사는 여러분
을 추악하고 비루한 욕망이 우글거리는 로스앤젤레스로 안내할 것입니다.
Q. 내 인생의 '첫' 추리소설은?
A. 해문출판사에서 나온 팬더추리문고가 '첫' 추리소설 독서의 시작입니다. 홈즈, 뤼팽, 크리스티를 주축으로 영미권의 다양한 작품을 많이 소개했습니다. 아동용이지만, 내용을 비교적 충실히 축약하여서 추리소설의 즐거움에 흠뻑 빠질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가장 좋아하는 윌리엄 아이리시의 작품들을 다수 번역해서 더욱 좋았구요.(심야의 추적, 환상의 여인, 공포의 검은 커튼 등등) 그리고 이 문고에서만 읽을 수 있는 작품들이 일부 있기도 합니다. 다수의 아이리시의 작품들,
존 딕슨 카의 장님이발사의 비밀, 메리 라인하트의 나선계단의 비밀, 엘러리 퀸의 수수께끼의 038사건, 제임스 힐튼의 삼각살인 등을 들 수 있습니다. 그리고 구체적인 작품과 작가를 든다면 거의 비슷한 대답일거라고 보는데, 아서 코난 도일의 셜록홈즈 단편들입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앞에서도 언급했으니 생략하겠습니다.
Q. 재출간을 바라거나, 국내에 본격적으로 소개되길 바라는 추리소설/작가가 있다면?
A. 요즘은 좋은 작품이 많이 출간이 되었기 때문에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어려워진다는 것이 대단히 즐겁습니다. 일본작품의 경우 많이 출간되고 있기 때문에, 불야성의 작가 하세 세이슈의 작품과 사노 요의 완전범죄연구 외에는 그다지 생각나는 작품이 없습니다. 그러나 영미권에서는 초창기 거장들-코넬 울리치(윌리엄 아이리시)와 더쉴 해미트-의 작품들이 많이 소개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특히 코넬 울리치는 해문에서 출간되었던 <공포의 검은 커튼>, <새벽의 데드라인>, <보이지 않는 살인범>이 완역되었으면 좋겠고, 대표작으로 알려진 <밤은 천개의 눈을 가지고 있다>도 출간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 외에 더쉴 해미트의 미출간작인 <데인가의 저주>와 <유리 열쇠> 등도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앞에서도 소개한 제임스 엘로이의 LA 4부작의 다른 편도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 자기 소개
넓게는 독서를 좁게는 추리소설과 무협소설을 좋아하는 평범한 30대입니다. 자발적 실업이었다가 구조적 실업이 되버린 현재 상태를 해결하는 것이 가장 큰 목표이구요. 앞으로도 알라딘을 통해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추리소설 많이 읽고 사랑해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