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모닝 에브리원
다이애나 피터프로인드 지음, 이소은 옮김 / 비채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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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8시 취침, 새벽 1시 30분 기상. 일어나자 마자 하는 것은 세 대의 TV를 켜 뉴스를 지켜보는 것.

한시도 블랙베리 폰을 몸에서 뗄 수가 없고, 새벽부터 득달같이 직장을 향해 달려가는 베키 풀러. 그녀의 직업은 아침 뉴스의 프로듀서다.

당연히 이런 생활 패턴을 맞추어줄 수 있는 남자가 흔히 나타날 리가 없다. 데이트보다는 취재가 훨씬 쉽다는 그녀는, 다니던 대학마저 그만두고 인턴으로 방송국에 입사한 뒤 자신이 맡은 프로그램을 위해 열정을 쏟으며 앞을 향해 달려왔다.

그리고 드디어.. 그녀의 노력이 빛을 발할 때가 온 것 같다. 인사부에서 들려오는 소문에 의하면 그녀가 이번에 책임 프로듀서로 승진할 것 같다고.

기대에 부풀어 상사에게 찾아간 그녀는 '맡겨만 주십시오!'라고 당당하게 새겨진 티셔츠를 활짝 펼쳐 믿음에 보답하리라 다짐하고 있는 순간 그녀에게 다가온 것은 해/고/명/령.

 

그렇게 하루아침에 실직자가 되어버린 베키는 그럼에도 자신의 생활 패턴을 바꾸는 게 쉽지가 않다. 방송국이란 방송국에 이력서를 다 넣어봤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미안'.

그러던 중 그녀에게 단 하나의 기회가 찾아온다ㅡ동시간대 최저의 시청률을 자랑하는 <데이브레이크>의 책임 프로듀서 자리. 아니, 이게 어딘가! 무려 '책임 프로듀서'다! 꿈에 부풀어 출근을 한 베키는, 그러나 첫날부터 큰 벽에 부딪혀버린다. 의욕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없는 남자 진행자 폴 맥비와 까칠한 여자 진행자 칼린 펙. 능글맞은 폴 맥비를 그 자리에서 당장 해고하면서 주변 스탭들이 '어쩌나 두고보자..'라고 하고 있을 때, 베키는 무려 어린 시절의 우상 마이크 포머로이를 아침 뉴스의 진행자로 섭외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메인 뉴스의 앵커로서의 자부심이 너무나도 강했던 포머로이는 프로그램의 구원투수가 되어주기는 커녕 최악의 선택이 될것만 같다. 순순히 <데이브레이크>에 협조를 해 주지 않는 것. 시청률은 갈수록 떨어지고 폐지 통보까지 받게 된 <데이브레이크>. 과연 베키는 이 프로그램을, 살려낼 수 있을까?

 

 

이미 동명으로 개봉한 영화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작가(난 소설 원작자가 동일한 줄 알았다-_-;)와 <노팅 힐> 제작진의 만남이라는 것에서부터 로맨틱 코미디를 즐겨보는 분들에게는 반가운 소식으로 들려오는 것 같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나는 그다지 로맨틱 코미디 영화나 칙릿 소설을 즐겨보지는 않는 편인데, 결국 너무 뻔한 이야기의 반복이라는 것이 주요한 이유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영화 예고를 보면서도 아이고 그렇구나~하고 그냥 은근슬쩍 넘어간다. 그래, 열심히 해 보세요. 결국 당신, 일과 thㅏ랑, thㅏ랑과 일 모두 성취할 거잖아요? 거기서 거기지 뭐.

 

친구랑 영화 이야기를 하면서도 시큰둥하게 넘어갔다. 하지만, 그래도 이렇게 펼친 책 속의 이야기는 꽤나 유쾌하고 재미가 있었다는 거다..

 

일단 캐릭터 간의 싱크로율이 굉장히 훌륭하다. 이미 영화를 염두에 두고 출간된 책이기 때문에 처음부터 표지에 영화 포스터가 떡하니 자리잡고 있고, 스치듯 지나간 예고편에서의 강렬한 이미지는 아이고.. 책을 읽는 내내 이미 그들의 캐릭터가 내 마음 속에 확고히 자리잡아, 잠깐 스치듯 지나갔던 등장인물들이 내 상상과 글 속에서 마구 움직이는 게 심상치 않았다. 보통 책을 읽기 전 등장인물들의 이미지가 머릿속에 들어와 버리면 좀 짜증이 나는 편인데 이 분들은 뭔가 원래의 제 옷을 입은 듯 상당히 자연스러운 것이, 영화에서도 이만큼 소화하고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무엇보다 새침한 진행자였던 칼린과 뉴스를 사랑해 자신의 프로그램을 지키고 싶었던 베키 그리고 그 스텝들의 의기투합과, 내내 뚱한 표정으로 고집을 세우며 프로그램이 점점 끝장(?)을 보고 있음에도 묵묵히 지켜만 보고 있던 포머로이와 베키의 기싸움 등이 주요 관전 포인트!

 

 

어차피 폐지 명령은 떨어졌을 뿐이고, 한가닥 남은 것은 시청률을 올리기 위한 발버둥. 그렇게 아침 뉴스 프로그램에서 매력적인 여성 진행자는 스모 선수와 스모를 하지를 않나, 엉뚱함으로 사랑받는 기상 캐스터는 롤러코스터에 탑승해 씨바아아아아아아아아아...하고 소리치지를 않나ㅡ'알'이 없으니 방송심의에 걸리지 않았다ㅡ그리고 평소 마냥 방긋방긋 웃으며 마냥 착하게만 보였던 두 진행자의 농반진반ㅡ농담 반 진담 반ㅡ의 투닥거림까지 솔직히 웃겨서 혼자 피식거리며 읽었다. 그렇게 생생하게 아침 뉴스의 현장감을 그려낸 것이 이 책의 가장 즐거운 점이 아니었나 싶다.

 

그리고 끝내, 프로그램에 '대박' 리포트를 안겨주는 포머로이까지! 생생한 캐릭터들이 들려주는 아침 뉴스 제작기(?)를 지켜보는 것은 정말 유쾌하고 즐거웠다.

 

'뉴스'에 대한 열정 하나만으로 딸리는 스펙에도 불구하고 결국 자신만의 프로그램을 살려내고 만 베키 풀러의 어디서 또 볼 수 있을 것 같은ㅡ물론 현실말고 영화ㅡ'성공담'이지만, 그녀의 뉴스에 대한 열정에 갈등과 사랑, 우정을 적절히 배합해 만들어낸 로맨틱 코미디 <굿모닝 에브리원>. 이제 베키는 누구에게나 웃으며 아침마다 굿모닝, 하고 인사를 하고 다니겠지. 그녀의 모습에 나 역시 힘이 나는 것, 부인할 수 없다.

 

오랜만에 가볍게 펼쳐서 읽기에는 즐거운 소설이었다. 종종 이런 식으로 로맨틱 코미디를 즐기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매 번 피튀기는 살인사건 말고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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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복 수사 제복경관 카와쿠보 시리즈 1
사사키 조 지음, 이기웅 옮김 / 북홀릭(bookholic)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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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력계 형사로서 어느 정도 경력을 쌓아 '베테랑'이라 할 수 있었던 카와쿠보 아츠시.

하지만 그는 경찰계에서 일어난 불미스러운 일로 인한 불합리한 인사이동으로 한적한 시골 마을 시모베츠 주재소에 단신부임하게 된다.

학업을 앞둔 딸들을 두고 부부만 부임을 하는 것도, 그렇다고 가족이 다 함께 움직이는 것 역시 내키지 않았던 것.

인구 6쳔 명의 작은 시골 마을이라 그런지 그다지 범죄 발생률이 높지도 않고, 아니 거의 없는 평온한 곳으로 보인다.

하지만 카와쿠보는 마을 안에서 일어나는 몇 개의 사건을 통해 심상치 않은 조짐을 느끼기 시작한다. 과연 이 평화로워 보이기만 했던 마을 속에 감춰져 있던 악의는 무엇이었을까?

 

사사키 조의 <경관의 피>에 등장하는 경관 세이지와 다미오는 덴노지 주재소의 경감으로 일하면서 주변의 주민들과 친분을 쌓아가며 그들의 치안을 돕는다.

이 작품 덕분에 우리나라에는 없는 '주재소 경관'이라는 존재가 상당히 친숙해졌는데, 그래서 그런지 <제복 수사>에 등장하는 카와쿠보 역시 금방 친숙해졌다.

 

마을 주재 경관은 기껏해야 2년이면 교대되지. 마을 일이라고는 하나도 파악 못하고 다음 근무자랑 교대된다고.

마을 일을 도통 모르니, 마을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국도에서 일어나는 일밖에 눈에 안 들어오는 거야.

결국 마을 뒤나 깊은 데서 벌어지는 추악한 일들 따위는 전혀 모르고 딴 데로 가게 돼.

-p.35, 「일탈」

 

주재소 경관의 업무는 주로 주민과의 교류 그리고 그들의 신고를 받으면 사건성에 따라 근처의 경찰서에 신고.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런 일을 미연에 방지하는 것이다.

그런 만큼 평소 제복을 입고 다니며 '여기 경찰이 있다'라는 것을 외부인 혹은 나쁜 범죄에 마음을 먹고 있는 이들에게 어필하고 주민들의 마음을 안심시켜주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다.

덕분에 신고식 겸 인사 겸 주재소로 찾아온 방범회장 등등의 노인들을 모질게 내쫓아버려 그들에게 미운털이 박히는 것 역시 현명한 처사는 아니다.

경관인 남편이 신고를 받고 현장에 출동하고, 주재소가 비워져있는 사이 부인은 전화기를 지키고ㅡ라는 주민들의 카와쿠보의 단신 부임에 대한 불만도 없는 것은 아니다.

 

"카와쿠보 씨, 당신은 주재 경관에게 가장 중요한 게 뭐라고 생각하시오?"

카와쿠보는 질문의 진의를 알 수가 없어 빤한 대답을 토했다.

"지역의 치안 유지겠죠."

"그게 구체적으로 뭘까?"라고 묻는 타케우치의 목소리에 다소 심술궂은 기운도 묻어났다.

카와쿠보는 말을 바꿔 대답했다.

"범죄 피해자를 만들지 않는 거겠죠."

"아냐." 콧방귀 뀌듯 타케우치가 고개를 저었다.

"피해자를 만들지 않는 게 아냐. 범죄자를 만들지 않는 거지. 그게 주재 경관으로서 가장 중요한 임무야."

-p.311, 「가장제

 

분명 카와쿠보가 부임하고 난 뒤 몇 년에 걸쳐 벌어진 다섯 건의 사건이지만, 단편 속에 등장하는 사건은 결코 사소하거나 조그만 일이 아니다.

또래 불량배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던 소년의 실종, 악의적으로 개가 죽임을 당하는 사건이 벌어진 뒤 개 주인과 경쟁관계에 있던 유력인사의 죽음까지는 그럴 수도 있었다 치자. 하지만 처음 유리가 깨진 곳을 시작으로 이리저리 깨진 유리창이 드러나듯 범죄들은 점차 악의를 띠고 더 잔혹해진다. 끝내 연속 방화사건이 일어나고 13년 전 소녀의 실종 이후 잠잠했던 큰 축제가 다시 부활해 또 다시 소녀가 실종되는 사건까지 벌어진다. 그리고 그 사건들은, 오래 전부터 조용히 감춰져 있던 마을 사람들의 악의가 드러나게 된 것이었다ㅡ.

 

사사키 조가 쓰고 있는 시리즈 두 편 중 한 편이라는 카와쿠보 시리즈의 시작이라 할 수 있는 <제복 수사>는 하지만 카와쿠보 경관의 활약이 담겨 있는 단편집이라고 하기에는 작품집 그 자체로서의 완성도가 상당히 뛰어나다.

각각의 단편에서 벌어진 사건들은 주재소 경관인 카와쿠보의 마음에서 쉽사리 떠나지를 않는다. 이 사건과 이어 이러이러한 일이 벌어졌다, 하는 식으로 잠자코 단편 하나에서 조용히 언급하고 넘어갔을 뿐이지만, 그 모든 일들이 엮여 마지막 단편인 「가장제」에 이르러서는 조그마한 시골 마을의 적은 인구의 사람들이 쉬쉬 숨겨왔던 일들이 모두 복선이 되어 한꺼번에 연결되어버리고, 덕분에 이 책은 단편집이 아닌 장편소설을 읽은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절묘하게 이어졌다.

 

이것이 주재소 경관으로서 카와쿠보의 활약뿐 아니라 그 이면을 훨씬 잘 그려낸 것 역시 마음에 든다.

경찰이지만 한없이 인간적이고 고뇌하는 카와쿠보의 모습. 각 부서의 베테랑들을 그저 겉으로만 '유착을 막는다'는 핑계로 무리한 인사이동을 시켜 사건의 해결에 베테랑을 투입하지 못해 흐지부지하게 넘어가버리는 홋카이도의 경찰에 대한 비판ㅡ물론 실제로 그러했는지 어땠는지는 모를 일이다ㅡ. 덕분에 강력계 베테랑 형사로서의 감을 발휘하는 카와쿠보의 활약 역시 놓치기에는 아쉽다. 또는 오래 전 사건으로 이어진 작은 마을 주민들 사이의 유대감과 경찰에 대한 불신 때문에 이어지는 비협조적인 사람들의 태도 등은 작은 마을 어디에나 한두명 씩은 꼭 있을 법한 불량배들의 괴롭힘보다 훨씬 더 악의적이다.

또 시골 마을의 유력자들이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비리, 겉으로 '평화로운 마을'로 비치길 바랐던 사람들의 의도적인 행동 등, 이들이 한없이 고즈넉하고 권태로워보이기만 했던 시골 마을에서 벌어진 일들이다.

 

시골의 작은 마을인지라 그 주민들 사이의 유대감은 훨씬 더 강할지도 모른다. 그저 아무 일도 없이 평화로워 보이기만 했던 마을이지만, 그만큼 소문은 빠르다. 덕분에 마을에서 제대로 살아가지 못해 도망치듯 마을을 떠나야 했던 사람들과 그들에게 벌어진 불미스러운 일은 은밀히 감춘다. 그리고 겉으로는 평화롭고 살기 좋은 마을을 보여준다.

 

조용한 시골 마을이라고 어찌 마냥 평화롭겠구나, 하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조용히 잠들어있던 추악한 모습들을 그려낸 <제복 수사>.

실제로 사사키 조는 첫 번째 단편 「일탈」을 끝으로 카와쿠보 주재 경관을 주인공으로 하는 작품을 쓸 계획은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인구 6,000명의 홋카이도 주재 경관을 주인공으로 삼았다고.

그런데 시리즈화가 결정되었고, 작은 시골 마을에서 벌어질 수 있는 범죄의 종류가 한정되어있다보니 상당히 곤란해졌다, 경시청을 배경으로 쓸걸 하고 후회했지만 이미 늦었다, 라고 사사키 조는 블로그에 토로했다고 한다(역자 후기 참고).

하지만 그 곤란함 치고는 상당히 완성도, 재미, 이면의 즐거움의 측면에서 모두 상당히 만족스러운 작품이다. 역시 이런 사사키 조의 진가 덕분에 그의 작품이 국내에도 속속 소개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나 역시, 갈수록 사사키 조의 작품이 더 좋아지고 있다. 또 출간될 카와쿠보 시리즈의 두 번째, <폭설권> 역시 상당히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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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실격 외 세계문학의 숲 5
다자이 오사무 지음, 양윤옥 옮김 / 시공사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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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공사 세계 문학의 숲 시리즈 다섯 번째에 해당하는 작품은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

사실 나에게 일본소설은 상당히 친숙하건만 그것은 미스터리라는 큰 장르에 속한 것이고, 그 밖에는 에쿠니 가오리, 요시모토 바나나, 무라카미 하루키 정도. 심지어 이들의 작품도 그다지 많이 읽은 것은 없다.

 

그런 걸 생각하면 일본의 '근대'의 문학은 이 <인간실격>이 처음인데, 당시 우리 문학은 '암흑기'였고 그나마 저항 문학이 주류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어떤 차이가 있을까 싶었다.

솔직히 말하면 반감이 더 앞서는데, 전쟁으로 피폐해진 인간의 모습..이라고 하면 그건 그것대로, 그렇다고 그것과 그다지 상관이 없을 법한 이야기를 하고 있으면 또 그건 그것대로, 어쨌든 결국 당시의 일본을 생각을 하면 마음에 안 들었다는 얘기다.

 

그럼에도 '다자이 오사무..' 처음에는 아톰을 탄생시킨 만화가 데즈카 오사무인가, 하고 살짝 착각을 해 고개를 갸우뚱거리기도 했지만 그래도 다자이 오사무라는 이름은 일본 문학사에 있어서 꽤나 영향을 미쳐온 것은 확실한듯하다. 전혀 모르는 나도 「달려라 메로스」라는 제목만 몇 번 들어봤으니.

그렇다면 그의 『인간실격』은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담고있을지, 그리고 함께 실려있는 그의 다른 단편들은 또 어떠한지, 궁금해지기는 했다.

 

꽤나 귀여운 외모에 얼핏 보기에는 사랑스러운 소년의 사진이 있다. 하지만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남들이 웃는 것에 비해 소년의 얼굴은 웃는다기보다는 얼굴을 찡그려 웃는 표정을 만들어낸 것에 불과하다. 또 다른 사진은 소년이 나이가 조금 더 든 뒤의 사진인데, 상당히 매력적으로 생겼음에도 불구하고 웃음은 역시 부자연스럽다. 그냥 가볍게 미소를 만들어낸 듯한 표정. 그리고 마지막 사진은 나이를 도무지 짐작할 수 없는 사진으로 젊은이라고 하기에도, 노인이라고 하기에도 애매한 얼굴이다. 그러나 가장 어색한 것은 살아있는 사람의 표정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사진 속 인물의 얼굴이다. 도대체 그는 어떤 사람인가. 어떻게 이런 이상한 얼굴을 가지게 된 것인가ㅡ.

 

이 얼굴의 주인공인 요조의 수기 세 편으로 이루어진 『인간실격』. 요조의 수기에는 남들이 보기에는 '인간으로서 실격'일 수 밖에 없었던 그의 삶이 담겨 있었다.

남들과의 분쟁 혹은 대립, 그리고 그곳에서 '인간에 대한 공포'까지 느끼는 요조는 자신의 본성을 가족에게까지 철저히 숨기며 '광대'로서의 삶을 살아왔다.

여자들의 집을 전전하며 늘 인간에 대한 공포를 필사적으로 숨기며 살았던 요조. 끝내 미친 사람이 되어 정신병원으로 보내진다. 남들이 보기에는 그야말로 '인간실격'이었던 것이다.

 

아뇨, 결단코 나는 미치지 않았습니다. 단 한 순간이라도 미쳤던 적은 없습니다.

하지만, 아아, 미친 사람은 모두들 그렇게 말한다는군요. 그러니까 이 병원에 들어온 사람은 미친 사람이고 이 병원에 들어오지 않은 사람은 정상인인 모양입니다.

신께 묻습니다. 무저항은 죄인가요?

(중략)

인간실격.

이제 나는 완전하게, 인간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p.132

 

마지막 다자이 오사무의 생애와 이 『인간실격』에 대한 해설을 읽어보면 이것은 다자이 오사무 필사의 역작이라 할 수 있을 듯하다.

항상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남들에게 즐거움을 주기 위한 글을 썼던 다자이 오사무가 정신병원에 들어가 「HUMAN LOST」라는 산문시를 써낸 것이 원형이 되어 써낸 소설로, 이 작품과 <앵두>를 마지막으로 집필한 뒤 스스로 목숨을 끊었기 때문이다.

실제 요조의 삶과 다자이 오사무의 삶 역시 상당히 흡사했는데, 자신의 이야기를 써냈다는 점에서일까, 이 <인간실격>은 다자이 오사무가 자기 자신을 위한 문학활동으로 써낸 작품이라고.

 

그렇지만 그런 이야기를 하기에 나는 이 작가가 너무 낯설었고, 실제로 그런 문학적인 성취 혹은 평가에 대해서도 상당히 무지하다. 나는 그저 '인간으로서 실격'된 요조의 삶에 공감 그리고 동정만을 느꼈고 그 이상도 그 이하도, 다른 요소들은 그다지 눈에 들어오질 않았다.

냉혹하고 이기적이고 탐욕스러운 자신의 본성을 위선으로 치장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공포를 느낀 요조의 모습에 세상 사람들은 그에게 '광인' 그리고 '인간실격'이라는 딱지를 붙였다.

의문이 생긴다. 그러면 인간의 자격은 무엇인가? 다른 인간들의 무엇이 요조를 인간으로서 실격이라고 판단한 것인가?

 

다자이 오사무 역시 스스로 정신병원에 들어갔던 체험에서 우러난 것이겠지만 이런 사람들에게 공포를 느끼는 '나약함'은 누구나 가지고 있는 면모일 것이다. 그래서 나는 심히 공감을 할 수 밖에 없었는데, 요조보다는 조금 더 비겁하고 덜 순수하고 위선이라는 갑옷이 그저 조금 더 견고할 뿐이었다.  요조는 그 나약함이 극대화된 상징이었던 것이다.

 

실제로 나의 생활을 되돌아보면, 철없던 초등학교 시절에는 할 말 다 하다 크게 싸움이 난 적도 있지만, 어느샌가 누군가와 대립을 하는 것이 불편하고 싫어서 슬그머니 대립과 논쟁이 일어나는 곳에서 한 걸음 물러서 그 모습을 관망하기만 하고 있었다. 겉모습은 친절하지만 결국 자기잇속을 채우기 위한 교묘한 움직임, 아무렇지도 않게 시치미를 뚝 떼는 모습.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 듯한 모습이 가끔은 진저리쳐지고, 더 싫은 것은 나 역시 그런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것이 요조의 모습과 다른 것이 무엇일까? 요조에게 '인간실격'이라고 판단을 내린 이들은 과연 요조의 모습을 자신에게서 조금이라도 찾아볼 수 없었던 것일까? 다자이 오사무는 그런 부류의 인간들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를 그려낸 것이 아니었을까?

 

책을 읽는동안 이런저런 생각이 많이 들었다. 생각을 정리하기가 상당히 힘들어 이야기 참 두서가 없어졌는데, 그래서 이 <인간실격>이라는 문학작품의 힘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일본이라는 나라도, 당시의 시대적 배경도 어느샌가 잊고 '인간'이라는 모습 그 자체에만 몰입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면서 그렇게 보편적인 '나약함'을 그렸다는 것, 그리고 그로부터 공감을 이끌어냈다는 것이 정말 대단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결국 죽음이라는 안타까운 결말로 나타났지만 역시 다른 작품들에 비해 '스스로를 위한' 작품이었기에 시간을 넘어 여전히 사랑받는 작품을 써낼 수 있었던 게 아닐까?

 

그 밖에 이 책에 실려 있는 또 다른 단편들 「물고기비늘 옷」,「로마네스크」,「새잎 돋은 벚나무와 마술 휘파람」,「개 이야기」,「화폐」는 다자이 오사무의 문학 활동의 또다른 일면을 엿볼 수 있는 작품들이다. 조곤조곤 옛날 이야기를 들려주는 듯한 「물고기비늘 옷」,「로마네스크」, 그리고 아버지와 두 자매의 아름다운 이야기「새잎 돋은 벚나무와 마술 휘파람」, 『인간 실격』과 비슷한 듯 다르면서 왠지 기억은 안 나지만 예전에 읽었던 한국의 단편 소설ㅡ분위기가 흡사했는데 제목이 도저히 생각이 안 난다ㅡ이 떠오르는 「개 이야기」, 그리고 화폐의 눈으로 당시 일본 사회상이 살아있는 「화폐」까지. 하지만 이후 읽은 해설 때문일까 이 작품들은 모두 자신이 아닌 남들을 위해 썼다는 작품이라는 생각이 계속 뇌리에 박혀있다.

 

그래도 역시, 이 책의 정수는 <인간 실격>. 꽤나 어려워 머리를 싸매면서도 공감을 할 수 밖에 없었던, 멋진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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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온다 리쿠 지음, 박수지 옮김 / 노블마인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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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어째서죠? 어째서 다들 이런 무서운 집에서 살 수 있죠?

당신은 벌써 몇 년이나 살고 있잖아요. 믿을 수가 없어요. 이런 유령의 집에서.

-p.13

 

 

어릴 때 그림을 그리면서 집을 그리라고 하면 나는 꼭 이랬다.

 

일단 자그마한 동산(혹은 언덕)이 있고 그 곳은 모두 파릇파릇 막 돋아난 풀로 덮여있다.

등학생이 그리는 그림 주제에 무슨 디테일이 있을까, 풀색도 다양하다는 건 신경도 안쓰고 그저 '연두색' '초록색' 혹은 '풀색'이라 적혀있는 크레파스를 꺼내 슥슥 칠하고 말았겠지.

풀이 무성한 것도 아닐 거라고 생각했던 것 보면 그 곳이 모두 아마 잔다로 뒤덮였을 것이다. 그 잘 꾸며놓은 언덕 같은데 만들어 놓은 것처럼.

 

그 다음에는 꼭 그 꼭대기에 집을 한 채 세운다.

반드시 지붕은 빨간색이고 노란색 집 본체(?)에 주로 갈색을 이용한 문.  지붕은 또 '주로' 세모 아니면 사다리꼴 모양.

그리고 그 위에는 집 몸통이랑 똑같은 색의 굴뚝이 있다. 굴뚝이 있으면 집안에 벽난로가 있어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올라야 하는 법.

회색으로 연기를 그리는 것 까지 잊지 않고, 지붕은 물고기 비늘 모양의 기와가 쌓인건지 어쨌든 꼭 그런 둥실둥실한 물결무늬가 있다.

창문도 있어야 하는데, 창문은 어떤 형태일것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않은 채 그냥 반드시 전(田)자 모양.

투명한 유리로 만들어졌으니 집 내부가 보여야 할텐데 그런 거 없이 하늘색으로 쓱쓱 그린다.

 

집을 완성했으니 이제 배경을 그려야지.

하늘색 창문과 꼭 맞아떨어지는 색이 있으니 그것은 '하늘'이 아니라 '구름'이다. 하늘색 바탕에 흰 색 구름이 떠 있어야 하건만 왜 나는 흰색 하늘에 하늘색 구름이 몽실몽실 떠 있는 것인지.

그리고 꼭 해는 둥그런데서 빛이 뿜어져나온다. 빨간색으로. 하늘 중간에 떠 있던게 나이를 먹어 한 초등학교 3학년 정도 되었을 땐 도화지의 한 귀퉁이로 비켜서고 크기는 4분의 1로 끄트머리를 채운 뒤 세모 모양으로 햇살을 그렸다.

 

그리고 또 하나, 절대로 빠질 수가 없는 것이 바로 집 옆에 서 있는 나무다.

무슨 나무인지는 모르겠지만 갈색으로 삐죽삐죽 뿌리와 가지를 꼭 세 개(!) 그리고 초록색으로 역시나 구름 모양인데 가지를 다 둘러싸게끔 뭉게뭉게 잎들을 그리고, 가끔 디테일을 살린답시고 나무 등걸에 옹이 구멍을 만들어주곤 했다.

또 묘한 불문율이 있는 것이 집이 있으면 왼쪽은 창문, 오른쪽은 문, 그리고 나무는 집의 왼쪽에 꼭 서있다.

마지막으로, 이제 동산에 구불구불 노란색 오솔길을 만들어 집 문 앞에 딱 도착하도록 만들어 주면 완성!

 

이 모든 그림은 사실 나만 이렇게 그린 게 아닐 것이다. 꼬마들이 다 비슷비슷하게 그리는 법이다. 특히 미술에 재능이 없었던 결국 친구들 거 보면서 비슷비슷한 레퍼토리를 따라가며 그림 그렸다는 소리다. 그렇다면 왜 그럼 이렇게 그림이 비슷비슷하게 그려진걸까? 모르긴 몰라도 누구나 '집'에 대한 비슷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꼭 전원주택이라고 하면 요즘 펜션촌에 많이 세워져있는 유럽의 동화 속에나 등장할 법한 예쁜 집에 대한 로망을 주로 키우곤 한다. 언덕 위에 세워진 예쁜 집ㅡ.

 

 

 

온다 리쿠의 <우리 집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이렇게 상상 속에서 그려봤을 법한 집을 무대의 배경으로 만들어 그 집에서 일어난 사건들을 그려낸 연작 소설집이다.

한 소설가가 친척의 집을 인수하면서 언덕 위에서 살고 있지만, 그 집에서는 온갖 소문이 끊이지 않는다. '유령이 출몰하는 집'이라는 것으로, 수많은 호러 매니아들이 집을 찾아온다. 그들이 들려주는, 혹은 그들이 겪었던, 그리고 소설가가 이사오기 전에 얽혀 있었던 일들을 다양한 화자와 서술 방식을 내세워 짧지만 강렬한 환상(?)을 그려낸 것이다.

 

사과 파이를 구으며 감자를 깎다 서로를 찔러 죽인 자매의 이야기, 노인의 시중인이 동네 아이들을 죽여 그들의 신체 일부로 마리네를 만들어 보관하고 그 고기를 노인에게 먹인 이야기, 부엌 마루 밑 저장고에 갇혀 있던 소녀의 이야기와 그 곳의 소녀 유령의 곁에 가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소년의 이야기 등등.

 

어차피 인간은 자기가 뭔가를 보고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제대로 보지 않으니까요.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보고 싶지 않은 것은 안 보죠.

아닌가요?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세요?

-p.153

 

온다 리쿠의 특징이라고 하려고 하기엔 온다 리쿠의 스타일은 너무나도 다양해서 단정짓기는 힘들지만, 그럼에도 이 <우리 집에서는~>에서도 '온다 리쿠스러운' 분위기가 가득하다.

분명 유령 이야기인데 그다지 유령 이야기라서 무섭게 느껴지기보다는 '옛날에~'로 시작되어 '~했단다'로 끝나는 옛날 이야기를 듣는 기분. 그것은 아마 온다 리쿠가 다정한 구어체로 이야기를 풀어가는 단편이 많기 때문일 것이다. 혹은 두 사람의 대화만으로 이야기를 이끌어 가거나. 그리고 분위기 자체도 '호러'보다는 '환상'에 더 초점을 맞추고 이야기를 써내려간 듯한데 그래서 상당히 두루뭉술한 느낌이 드는 것은 사실이다. '매우 재밌다' 혹은 '재미없다'라고 이야기하기 보다는 그냥 '온다 리쿠스러움'을 만끽할 수 있었다.

 

세상은 점점 더 겹겹이 쌓이고 있어요. 우리들은 끝없이 쌓여갈 거예요.

세상은 모두 우리들이 되고, 세상은 모두 유령이 될 거예요. 이제 곧 세상은 우리들의 시대가 되죠.

우리 집에 잘 오셨어요.

많은 기억들이 쌓인, 우리들의 집에.

-p.202

 

이 연작소설집의 주된 테마는 '기시감(Deja Vu)'이다. 연작소설답게 앞에서 등장인물들의 대화에 등장했던 이야기를 확대시켜 그 한 편의 이야기를 새로 만들어내기도 하고, '이런이런 이야기가 있었어. 그 다음에는~' 이라는 식으로 이어지는 듯한 이야기가 등장하기도 하고. 이런 식으로 단편을 한 편 한 편 읽어나가다 보면 그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또다른 이야기가 어디서 본 듯해 '어? 무슨 단편에 있었던 이야기였지?' 하며 계속해서 책의 앞쪽을 뒤적거리게 된다.

 

기시감은 어떻게 느껴지는 감정일까? 어딘가를 스쳐 지나가고 있을 때 분명 처음 오는 곳임에도 '어라.. 왠지 낯익어..' 혹은 분명 처음 맞닥뜨리는 상황임에도 '어라, 이런 일이 전에도 있었는데'라고 생각하는 것이 기시감이다. 아마도 끝을 알 수 없을 인간의 뇌라는 것이 다양하고 풍부한 활동으로 작용해낸 결과이겠지만, 어쨌든 이것은 굉장히 묘하게 다가오는 것은 사실이다.

 

온다 리쿠는 이 기시감을 유령을 소재로 그녀만의 해석으로 만들어냈다. 오랜 세월을 지난 언덕 위의 아름다운 집에서, 아니 집이 생기기 이전의 오랜 세월 동안 그 장소에서는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태어났다 죽어갔고, 그 곳에서 울며 웃으며 살아갔다. 그 모든 추억들이 쌓이고 쌓여, 그 세상은 모두 유령이 되고 '우리들'이 되는 것이 아닐까.

그 집에서 벌어진 수많은, 기묘한 이야기들은 바로 이렇게 쌓여진 수많은 기억과 이야기와 추억이 아니었을까.

 

우리 집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단지 추억들이 쌓여 유령들이 그 추억을 회상하며 살아가고 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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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의관 -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1-1 케이 스카페타 시리즈 1
퍼트리샤 콘웰 지음, 유소영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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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죽은 사람이 무서운 적은 없다. 내가 두려운 것은 살아 있는 사람이다.

-p.40

 

퍼트리샤 콘웰의 스카페타 시리즈 중 첫 번째인 <법의관>은 2004년 번역되어 출간되었다 올해 다시 개정판으로 출간되었다고 한다. 역시 그만큼 많은 사랑을 받았다는 뜻일까.

항상 그렇지만 나는 '이제서야' 알게 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번에도 역시 그렇다. 그래서 뭐 예전에 이미 시리즈가 출간되었든 그렇지 않든, 어쨌든 스카페타 이모(?)와 이렇게 첫 만남을 가지게 되었다..

 

아마 대부분이 이 책을 읽고 떠올렸을 드라마 CSI 시리즈. 책의 표지에만 해도 '<CSI>보다 리얼하다'라는 말이 있으니 말 다 했다.

CSI의 가장 큰 매력은, 셜록 홈즈나 에르퀼 푸아로가 이리저리 의뢰인의 이야기를 듣고 '아, 그렇군요..'하고 적당히 맞장구쳐주다 혼자서 온갖 추리를 다 하고 나서는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둥 불친절하게도 결말만 떡하니 던져놓고서는, 뒤늦게서야 옆에서 우리와 함게 어리둥절해하고 있던 왓슨 박사 혹은 헤이스팅스 대위를 위해 '사실 이러저러했어'하고 설명을 해주면 그렇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이는 대신 함께 '과학적인 수사'를 통해 증거를 찾아본다는 데 있다ㅡ물론 우리가 증거를 찾을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아무래도 그렇게 사랑을 듬뿍 받고 있는 CSI의 원조격이 이 스카페타 시리즈가 아닌가 싶다. 무려 처음 출간되었을 때가 1990년이니 말 다 했다. 그 당시 스릴러가 어느 정도의 흐름을 유지하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마 '여성 법의관'을 내세워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것은 거의 처음이 아닐까? '여성'을 주체로 내세우는 게 그 당시에는 아마 굉장히 파격적이었을 것 같은데.

 

그래서 스카페타 이모는 법의관이다. 이모에게 지금 골치를 썩히는 사건이 하나 있다. 세 건의 여성 살인사건. 세 명의 피해자 모두 어떤 공통점도 없이 무작정 살해된 것 같다. 게다가 살해방식이 잔인해 버지니아 주의 언론들은 하나같이 이 연쇄살인사건에 초점을 맞추고 집중을 하고 있다. 그리고 네 번째 살인사건이 발생한다! 젊은 레지던트 여성 의사로, 남편이 집을 비운 사이에 잠그는 걸 깜빡한 창문을 통해 들어온 범인에 의해 잔인하게 살해당한 것. 사건을 맡은 마리노 형사는 남편이 범인일 것이라 몰고가지만, 스카페타는 석연치가 않다. 이 살인마는 분명, 동일범의 무작위 살인인 것이다! 그러나 범인의 정체를 나타내는 단서라고는 '비분비형' 체액과 희생자의 몸에 붙어 있는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는 '반짝이는 물질' 그리고 피해자의 남편이 맡았다는 범인의 독특한 체취 뿐이다. 설상가상으로 네 번째 피해자는 경찰의 부주의로 인해 막을 수 있는 살인을 막지 못한 것으로 드러나고, 스카페타 국장의 컴퓨터가 해킹을 당해 정보가 새어나가는 일이 발생한다! 남자들로 우글거리는 세계에서 스카페타 국장은 그들에게도 맞서야 하는 케이 스카페타. 과연 그녀는 법의국장이라는 직함을 지키는 데 성공할 수 있을까?

 

부검을 통해 시체의 사인을 밝히고, 시체 주변에 있는 조그만 단서 하나 놓치지 않고 꼼꼼히 따져보는 것은 정말 CSI 속 수사원들의 모습 그 자체다. 꽤나 매력적인 독신 여성을 그 중대한 임무, '법의국장'이라는 자리에 앉히고 그녀를 내세워 이야기를 풀어가는 <법의관>. 실제로 버지니아 법의국에서 컴퓨터 분석을 하는 직업을 바탕으로 꽤나 법의국에서 하는 일들에 대한 지식을 많이 쌓았다는 작가 퍼트리샤 콘웰은 그래서 굉장히 생생하고 전문적인 지식이 녹아있는 시리즈를 탄생시켰다.

그래서 법의국에서 이용하곤 하는 다양한 도구와 방법 뿐만 아니라, 컴퓨터 앞에 앉아 있어야 했던 그녀의 특기를 내세어 '법의국장의 컴퓨터 해킹'이라는 상황까지 만들어 이를 추적해보는 에피소드도 담겨 있다. 꽤나 전문적이라 컴퓨터에 관한 부분은 설렁설렁 읽긴 했지만 어쨌든 작가의 방대한 지식에 혀를 내두른 건 사실이다ㅡ.

 

작가, 라고 쓰려니 참 스카페타와 헷갈린다. 누가 퍼트리샤 콘웰이고 누가 케이 스카페타인지. 작가님의 소설 속 주인공에 대한 싱크로율이 꽤나 잘 맞아 오히려 더 몰입이 잘 되었던 것 같다. 어디선가 분명 법의국장으로 사건을 분석하다 시간 여유가 생기면ㅡ과연 생길까?ㅡ그 일을 소설로 옮겨쓰곤 하는. 물론 불가능한 일이지만 그만큼 생생한 상황과 캐릭터를 만들어냈다는 이야기라 할 수 있겠다. 이 모든 것이 그냥 지금 어디선가 벌어지고 있는 일이라고 생각될 만큼 '옛날 소설'의 흔적은 찾기가 힘들다.

 

하지만 찾을 수 있긴 하다. 그것도 꽤나 초반에. 바로 '플로피 디스크'의 존재였다.. 소설 속에서 자료를 모아놓은 플로피 디스크가 어쩌고-라는 대목에서 아련한 향수가 느껴질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러고 보니 옛날엔 고작 몇 MB의 디스크에 파일을 집어넣곤 했었는데 이젠 그건 꿈도 못 꿀 일이다. 확실히 빠른 시간 안에 뭐가 많이 생기긴 했구나ㅡ하고, 책을 읽으면서 잠시 다른 길로 생각이 새어버리기도 했으니까.

 

어쨌든 굉장한 흡입력으로 꽤 두꺼운 두께에 책 크기도 커 한 페이지에 줄 수가 꽤나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빠른 시간 안에 읽을 수 있었다. 매력적인 시리즈를 만나게 되어 참 반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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