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에 너무 파고들면 지치는 법이다. 결국은 알게 모르게 피로가 쌓여 나를 덮친다. 아무리 신나는 일이라도, 엔돌핀이 퐁퐁 솟아오르는 일이라도, 역시 피로는 알게 모르게 천천히 누적되어 왔을 것이다. 그래도 무려 2년이 조금 못 되는 동안 내 마음의 무언가를 어마어마하게 쏟아부었더랬다. 2017년을 맞이하며 문득 그 피로가 한꺼번에 밀려오는 것을 느꼈다. 이 피로를 이겨내려고 억지로 억지로 막아보기보다는, 잠시 쉬어가면서 마음을 다잡아보기로 한다. 140자에 우겨넣은 수많은 사람들의 말의 파도 속에 너무 깊게 나를 몰아넣어 지치게 하기 보다는 멀리서 관망하며 조금은 가늘지언정 좋은 감정을 오래 유지할 수 있는 돌파구를 찾아보기로 한다.
그리고 그 돌파구는 역시 소설의 바다로 향하는 것이다. 물론 내 삶에서 책을 아예 안 읽고 방치한 세월은 보름을 채 넘지 않았으니 작년에도 나름대로 꾸준히 책은 읽어왔지만, 기록을 게을리하기 시작하니 뭘 어떻게 해야할 지 모르겠고, 그래서 2017년의 한 달이 지난 이 시점에서, 2017년 1월의 기록이라도 남겨본다. 어덕행덕, 어차피 하는 덕질 행복하게 덕질해야지 지치면 잠시 쉴 때도 필요하다. 그 대상이 무엇이었든 간에.
그 와중에 책은 야금야금 산 게 제일 어이없는 부분인데, 일단 집에 있는 책이나 좀 읽을 것을. 집에 있는 책을 읽어치우고, 공간이 없어 다시 읽지 않을 것 같은 책은 알라딘에 팔고, 야금야금 산 책은 언젠가 또 펼치겠지라는 마음으로 나를 기다리고 있다. 이 순환의 고리는 가늘고 길게 책을 읽기 위한 나 나름의 장치다. 책은 결코 배신하지 않음을 알고 있으니 이 고리가 문득 현재의 나를 갑자기 덮쳐 질식시킬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01. 코난 도일을 읽는 밤 _ 마이클 더다 _ 을유문화사 _ 276쪽
셜로키언을 넘어선 도일리언들이 들려주는 풍부한 코난 도일의 세계. 생각보다 그의 스펙트럼이 다양하다.
02. 팬티 인문학 _ 요네하라 마리 _ 마음산책 _ 272쪽
속옷의 고찰을 통한 다양한 인류 문화의 발전상을 엿볼 수 잇는 에세이. 문득 궁금해했지만 깊이 생각해보진 않았던 질문들에 대한 고찰이 담겨있어 흥미롭지만, 역시 일본 속옷 문화에 대한 고찰이 많아 조금 공감가지 않는 부분도 있다. 여사님이 더 고찰하고 다듬어 내놓을 시간이 주어졌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아쉬움은 모두에게나 같겠지.
03. 백만 광년의 고독 _ 김보영 외 6명 _ 오멜라스 _ 296쪽
세계 천문의 해를 맞이해 선보였던 우주의 이야기들. 벌써 2009년의 일이다. 더할 나위 없는 김보영씨의 [지구의 하늘에는 별이 빛나고 있다]와 표제작인 박성환씨의 [백만 광년의 고독] 두 작품만으로도 충분히 즐거웠던 독서. 덧붙여서 [백만 광년의 고독]은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그래비티] 속 고독이 느껴지는 도입부가 매우 좋다.
04. 얼어붙은 섬 _ 곤도 후미에 _ 시작 _ 256쪽
[얼어붙은 섬]의 화자가 담담히 서술하는 인간의 감정에 어느 정도 공감하며 읽다 맞이한 결말에서, 나는 무슨 생각을 했던가.
05. 사요나라 사요나라 _ 요시다 슈이치 _ 노블마인 _ 230쪽
요시다 슈이치의 작품을 읽을 때 [사요나라 사요나라]와 [악인]은 둘 중 하나만 읽어도 좋다고 생각한다. 그냥 그렇다고.
06. 에마 _ 제인 오스틴 _ 민음사 _ 728쪽
에마 우드하우스양의 오지랖에 진저리치며 도중하차한 뒤 몇 년 만에 다시 펼쳐 만난 에마 우드하우스양은 매우 사랑스럽다. 그 때의 나는 왜 그렇게 속이 좁았던 걸까.
07. 밤의 첼로 _ 이응준 _ 민음사 _ 276쪽
이응준씨가 용기 있게 신경숙 작가의 표절을 고발한 뒤, 처음으로 만난 작품. [밤의 첼로]에서 느껴지는 문학에 대한 고독한 구도(求道)가, 나에게는 사실 조금 어렵게 느껴진다. 여전히 한국문학에 섣불리 다가가기 힘들다고 생각하는 2017년의 나.
08. 러시안 윈터 _ 대프니 캘로테이 _ 시작 _ 512쪽
읽고나서 알라딘 중고서점에 넘겨야지, 하고 가볍게 시작한 책이 뜻밖의 보석임을 발견했을 때의 환희.
09. 하루살이 上 _ 미야베 미유키 _ 북스피어 _ 376쪽
10. 하루살이 下 _ 미야베 미유키 _ 북스피어 _ 384쪽
상권을 사 놓은 시기는 에도 시리즈 컬렉팅의 과정에서 아주 초창기였으나 이제서야 [얼간이]를 읽고 [하루살이]를 읽었다. 두 작품 모두 연작 단편인듯 시작한 이야기가 마지막에 이르러 한데 어우러져 사건 해결의 클라이막스로 달려가는 과정이 아주 일품. [진상] 역시 [하루살이]에 여전히 남아있는 한가지 불씨를 되살린 이야기가 아닐까 싶어 빠른 시일 내에 구입하여 읽을 예정.
11. 상심증후군 _ 제스 로덴버그 _ 비채 _ 436쪽
죽음을 통해 맞이한 이별을 극복하는 방법. 엄청 유치하겠거니 하고 펼쳤으나 꽤 사랑스러운 이야기.
12. J. 하버쿡 젭슨의 진술 _ 아서 코난 도일 _ 북스피어 _ 216쪽
[코난 도일을 읽는 밤]에서 만난 작품이 떡하니 책장에 꽂혀 있어 매우 황당했으나 잽싸게 읽었다. 이 책에서 느껴지는 도일은 셜록 홈즈 보다는 에드거 앨런 포에 가깝다. 어디서나 느껴지는 거장의 그림자.
13. 롤리타 _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_ 문학동네 _ 560쪽
English is not my first language! 그래서 가능했던 걸까, 나보코프의 언어유희는. 미국스러운 소설을 쓰고자 했던 나보코프의 [롤리타]를 한 번 읽었을 때, 롤리타는 '미국의 모텔들'이다. 한없이 펼쳐진 도로 위에 낮게 서 있는 건물과, 네온사인.
14. 활자 잔혹극 _ 루스 렌들 _ 북스피어 _ 264쪽
달드리 감독의 [더 리더]를 읽고 돌아와서 펼친 책이 [활자 잔혹극]이었던 것은 '활자'라는 단어와 강렬한 이 책의 첫 번째 문장을 기억하고 있던 나의 의식이 향했기 때문이 아닐까. 그리고 책을 읽는 동안 계속해서 '한나'가 떠오른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책 읽어주는 남자]를 다시 읽을 것!
15. 섀도우 _ 미치오 슈스케 _ 노블마인 _ 332쪽
야쿠마루 가쿠의 [허몽]과 미치오 슈스케의 [섀도우] 중 먼저 나온 작품은 [섀도우]였던가. 다른 이야기가 비슷한 결말로 향한다. 그래도 개인적으로는 [섀도우] 승.
16. 구적초 _ 미야베 미유키 _ 북스피어 _ 352쪽
[비둘기피리꽃]이라는 제목으로 예쁜 표지로 재출간되었던데, 작품을 읽어봐도 굳이 '구적초'로 번역한 이유를 잘 모르겠다. (개정판에서는 소설 속에서도 '비둘기피리꽃'이라 지칭하는걸까?) 어쨌든 도서정가제가 시행되기 전 리퍼브도서를 인터넷으로 구매한 책을, 개정판이 나온 이 시점에서야, 읽었다. 미야베 미유키는 초능력을 생각보다 엄청 좋아하는군. 다음 번 고모가 방문하셨을 때 추천해 드리고 나는 개정판을 살테야.
17. 우리 집에 놀러 오세요 _ 우타노 쇼고 _ 블루엘리펀트 _ 388쪽
설 연휴에 정말 시간 때우기 용으로 읽었고, 그 정도의 작품집이다. '집'이라는 공간의 의외성을 그리려는 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