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철곰 꼬리가 보이는 그림책 7
이기훈 글.그림 / 리잼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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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는 한 반에서 절반 정도가 달동네에 살았다. 친구의 집에 놀러갈 때마다 턱까지 찬 숨을 몰아쉬면서 나는 좁은 계단을 한참동안 올라야만 했었다. 이제는 그 골목은 사라졌다. 아파트숲으로 변해버린 그 동네에 나는 이제 아는 사람이 없다. 동네는 여전히 거기에 있지만 내 친구들도 없고, 좁다란 골목길을 달음박질 해 올라가던 내 유년도 이제 거기에는 없다.

*
이 책은 참 좋다. 이야기도 좋고 연출도 좋다. 그림까지 좋다. 더 좋은 점은 이 동화책을 정말로 공감할 수 있는 사람들은 어른들이란 사실이다. 영문 몰라하는 아이를 무릎에 앉혀놓고 동화책을 보여주던 엄마 혹은 아빠가 눈 끝을 찍어내게 만들, 그런 책이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내 추억에 슬퍼 한참을 울었다. 

*
서울은 나에게 거대한 곰 같은 곳이었다. 경북의 작은 읍을 떠나 처음 서울에 왔을 때 나는 그 크기에 한참동안 아빠 승용차의 창문에 입을 대고 우와우와를 연발했었다. 거대한 다리, 거대한 강, 거대한 아파트, 거대한 터널, 거대한 산, 거대한 타워, 거대한 빌딩. 지하철이 있다는 역이 나에겐 거대한 곰이 사는 굴처럼 느껴졌었다. 그리고 서울이라는 곰은 잔뜩 들떠서 골목탐방을 나선 여섯 살 여자아이의 자전거를 훔쳐가는 것으로 첫인사를 건네주었다. 그 자전거는 지금도 생각하면 속이 쓰리다. 너는 지금 어느 길을 달리고 있을까. 어쩌면 내가 점심 때 내가 급히 마신 포도맛 탄산 캔 음료가 너의 7번째 후생일지도 모르겠다. 내 자전거 가져 가고 좋았니, 서울이라는 곰아.
나는 이제 네가 자전거를 훔쳐갔던 그 길의 옆골목에서, 아직도 신촌을 시내라고 말하는, 곰을 닮은 남자와 산다.

어쨌건.

이 책은 우리 추억에 대한 이야기다. 내가 그곳에서 살았건, 살지 않았건 우리의 옛 기억엔 이런 곰이 있었다. 그 곰이 외로워 나는 울었다. 그 곰이 슬퍼서 나는 울었다. 마치 그런 느낌이었다. 어릴 적엔 전구 가는 것도, 자전거 고쳐주는 일도 뭐든지 척척 고쳐주던 수퍼맨 같은 우리 아버지가 예전보다 키가 작아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버린 그런 느낌. 철거되는 판자촌이 어릴 적 추억 속 거대한 곰으로 일어날 때의 정적과 그 짙은 외로움을 나는 안다. 결국 홀로 쓸쓸한 우리의 모습을 나는 익숙히 안다. 알아서, 아는 사람들에게 꼭 알려주고 싶은 책이다. 모른다면, 그 나름대로 그것도 재미있지 않을까. 응사와 응팔이 논란만큼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던 것처럼.

*

단칸방에서 다섯 가족이 옹기종기 어깨를 맞대고 자면서도 가족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던 친구는 지금보다 더 큰 도시로 이사가면서 자기 방이 생겼고 지금도 씩씩하게 잘 살고 있다. 나도 여전히 잘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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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용으로 구매했던 책. 국정원이라는 조직에 대해 살펴보기엔 나름 포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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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딩드레스
피에르 르메트르 지음, 임호경 옮김 / 다산책방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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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작’된 삶그 남자의 웨딩드레스

 

 

남자는 평생 자신의 어머니를 찾아다닌다는 속설이 있다통속적인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서 파생된 이야기일 테지만 아이러니하다이미 어머니와 관계가 없는 아들 자신의 연애에 어머니는 여러 가지 모습으로 개입한다따뜻하고 가정적이며요리를 잘하고 때로는 위로가 되어주는 여자를 바라는 마음 한편에는 (실재든상상이든언제나 어머니가 존재한다여자도 크게 다르지 않다든든하고멋지며어떤 일이건 이해해줄 수 있는 남자를 원하는 여자의 마음에는 아버지가 존재하는 것일는지 모른다.

어머니그리고 아버지.


가족을 꾸리며 살아가는 인간은 필연적으로 전 세대의 정신에 영향을 받고그것은 유산이 되어 다음 세대의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연애도관계 역시도 마찬가지다세상을 놀라게 한 흉악범죄자의 이면에 불우한 어린 시절이 존재하고성공한 사업가의 인생에 닮고 싶은 아버지나 어머니의 가르침이 존재하는 것은 우리에게 낯선 이야기가 아니다살아가며 우리는 때때로 우리의 행동에서 부모님의 그림자를 발견하고 놀라워한다사람을 대할 때에도 우리는 많은 부분을 우리 부모가 했던 방식에서 힌트를 얻는다호랑이가 지난 자리엔 가죽이 남고앞선 세대가 지나간 자리에는 우리가 남는다그것이 성격이건 생각이건 취향이건인생 그 자체이건 간에.

 

때문에 우리는 이따금 선택을 한다아니, ‘선택’ 된다어떤 드라마나 소설에서 죽은 부모의 복수를 위해 칼을 들고 총을 쥐는 그런 복수자로 우리는 선택되기도 한다자신이 아닌 부모를 위해 분노하고 복수의 칼을 가는 이야기는 어디에서건얼마든지 있다복수는 때때로 더 무서운 복수를 낳고이따금 어떤 것을 부정하기도 한다.

 

누군가의 부모로 인해 인생이 부정된다조작된다그렇게 삶을 빼앗긴다.

이 글은 그 빼앗긴 삶에 대한 이야기다.

 

 

그 순간 그녀는 느꼈다이 아이의 우주에 어른의 삶이 난폭하게 침입했으며그로 인해 이 아이 역시 기진맥진해 있다는 사실을. / 22

 

 

그 남자의 웨딩드레스는 연애 소설이 아니다적어도 내게는 그랬다또 추리소설도 아니었다거짓된 관계에서 출발했으니 엄밀히 말해 연애는 아니겠다. (물론 그것 또한 누군가의 애정 방식이라면이 소설은 훌륭한 연애소설이겠으나이 글은 단순히 남녀간의 이런저런 사정들을 보여주지 않는다아주 오래 전부터 복수를 꿈꾸며 준비해온 프란츠그 프란츠에 의해 인생을 송두리째 부정 당한 소피의 관계는 해석에 따라 연애로 보일 여지를 주지만 연애로 읽을 수 없는 코드가 곳곳에 존재한다프란츠의 욕망은 소피에게서 기인하는 것이 아니다소피를 원하는 것도그녀를 수렁에 몰아넣는 것도 모두 그녀를 향한 욕망과는 거리가 멀다오히려 그는 그녀를 완벽하게 증오하는 편에 가깝다완벽한 복수를 위해 모든 순간을 인내하고그토록 치밀하게 계획하고 준비하며 소피의 모든 인생을 송두리째 흔들지만 프란츠는 소피를 보는 것이 아니다프란츠가 보는 것은 소피가 아닌, ‘어머니자신이 사랑한자신을 사랑했다고 믿은그러나 자신이 지켜주고 돌봐줄 기회도 없이 자살해버린 어머니.

어머니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사람들에게 복수하기 위해 프란츠는 소피를 복수의 대상으로 선택하고그녀의 모든 인생을 조작한다본래부터 알고 있었던 것은 거짓이 되고거짓 정보들은 진실이었던 것처럼 스며들어 소피를 온통 뒤흔든다프란츠는 꼼꼼하게소피를 조작한다조종에 가까운 행위를 통해 소피는 남편과 시어머니를 죽음에 내몰고숱한 사람들을 죽인 연쇄 살인범이 되어 끝내 자신의 이름과 모든 정보들을 부정해야 하는 입장이 된다가짜 이름을 만들고가짜 서류로 가짜 남편을 만나 가짜 인생을 산다.

 

소피는 소피가 아니다우습게도 프란츠 역시 프란츠가 아니다소피는 프란츠에 의해 삶을 박탈당했다프란츠 역시 자신이 아닌오로지 어머니 그 하나만을 위한 복수를 꿈꾸는 프란츠에게도 인생은 없다둘 중 누구 하나 진짜가 없다그 남자의 웨딩드레스가 가진 아이러니는 거기에서 출발한다작가는 그 모든 아이러니를 프란츠가 가지고 있던 낡은 웨딩드레스를 통해 담담히 풀어낸다.

 

 

프란츠는 이 표현이 마음에 들지 않지만 참고 넘어간다그렇다그는 착한 남편이다. / 284

 

그에 대한 증오가 너무 강렬하여 때로 그녀는 더 이상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한다그럴 때 프란츠는 하나의 관념 같은 것이 된다어떤 개념그녀는 그를 죽일 것이다지금 그를 죽이고 있다. / 354

 

 

개인적으로 피에르 르메트르는 내게 썩 좋은 작가가 아니다알렉스를 읽을 때에도 애를 먹었고 (다 읽고도 아직 리뷰를 쓰지 못했다전 고백이번 그 남자의 웨딩드레스》 역시 읽는 내내 상당히 싸워야 했다취향의 문제겠지만가벼운 문장에 비해 잘 읽히지 않고 심리묘사에 치중한 전개 방식 때문에 끔찍하리만큼 지겨운 대목들도 더러 있다. (책은 물론이고 텍스트 그 자체에 엔간히 편견은 없으나사실 재미는 없다끔찍하게.) 그럼에도 불구하고그래도 어떻게든 피에르 르메트르의 책을 끝까지 읽게 되는 것은 (이 또한 아이러니지만그 심리묘사 덕분이다읽을 때엔 사족 같고 (리뷰를 쓰며 다시 돌이켜봐도 대체 이런 묘사가 왜 필요했던 건지 납득이 도저히 되지 않는 부분이 더러 있긴 하다지겨워서 발목이 몇 번이나 덜컥덜컥 잡히는데도어떻게든 읽게는 된다.

이것은 피에르 르메트르가 가진 힘이기도 하다그토록 지겨웠던 심리묘사는 어느 지점을 기해 놀랄 정도의 이입을 끌어내고캐릭터의 그 어떤 행동도 이해하고 납득하게 만드는 토양이 된다프란츠가또 소피가 왜 구태여 그런 선택을 하는 지에 대해서 작가는 충분한 설명을 소소한 행동이나 생각 등을 통해 충분히 배치를 해둔다. (이 점은 리뷰 전작인 알렉스가 절정이라고 생각하나이 부분은 알렉스 리뷰를 위해 패스한다.) 때문에 지겨웠던 이야기가 절정부에 접어들면오히려 그 지겨웠던 심리 묘사들로 인해 캐릭터를 이해하며 빠져드는 기폭제로 작용한다이야기의 결말에 (알렉스 또한 그러했지만의외로 충격을 받지 않았던 것은 그 때문인지도 모르겠다이것이 피에르 르메트르의 글이다프란츠를 이해하고 소피를 이해하는 것그리하여 그 아이러니마저도 우리 삶의 일부였노라고 납득하게 하는 그것.

 

 

 

그것은 그때까지 내가 하지 않을 수 없었던 모든 일들 중에서도 가장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이었다난 가까스로 그 일을 해냈지만그 일을 극복하고 다시 일어설 수 없을 것이다그 아이와 함께 내 안의 무언가가 죽어버린 것이다내 안의 무언가…… 그것은 그때까지 내 안에 아직 살아 있던 어떤 아이였다. / 256

 

 

 

결론을 말하자면프란츠는 끝내 성공하지 못했다프란츠의 복수는 온전히 프란츠의 것이 아니며그토록 해명 받고 싶어 했던 어머니의 과거는 오히려 그를 파국으로 내모는 기폭제가 되었다이런 상황을 두고 소위 멘붕이라 하던가문자 그대로 멘탈이 붕괴된 상황까지 내몰리고 난 후에야 프란츠는 소피에게서 그토록 바랐던 보살핌을 받게 된다증오가 강렬하여 오히려 어떤 것도 느끼지 못하게 된 소피는 죽어가는 프란츠를 묵묵히 돌봐주고그 장면은 우습게도 이 소설을 통틀어 가장 평화롭다그 모습이 어쩌면 진짜’ 둘의 삶이었는지도 모르겠다어떤 것을 생각하고 있었건그때 그곳에 있던 건 진짜 프란츠였고 소피였다모든 것이 밝혀진 후에야 그들은 비로소 진짜가 된다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하고서로가 서로를 온전히 바라보던 그때.

 

삶은 그제야 제 자리를 찾아간다.

그제야 삶이 된다진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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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바이 동물원 - 제17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강태식 지음 / 한겨레출판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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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여기는 굿바이 동물원입니다.

 

소설은 사람의 이야기다.

대학에 들어와 처음으로 들었던 이야기는 바로 그랬었다. 아주 어릴 때부터 글을 쓰며 사는 삶을 꿈꿔왔고, 그 때문에 별 망설임도 없이 문예창작과에 지원해 합격 통보를 받았을 때 나는 설레고 들떠있었지만 그만큼 모르는 것도 참 많았다. 내가 하고 싶어 했던 것의 본질조차 잘 몰랐던 나는 그때는 너무 어렸고, 실제 누군가가 소설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선뜻 대답하지 못하거나 답을 뭉뚱그리기 일쑤였을 것이다.

소설이 뭐라고 생각하니?

처음, 제대로 된 소설작법 수업을 시작했을 때 교수님은 수업 전에 우리에게 그렇게 물었다. 여러 대답이 나왔다. 인물, 사건, 배경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전형적인 고교 입시의 폐해다운) 답을 늘어놓는 학우가 있는가 하면 그저 단순히 이야기라고 답하는 학우도 있었다. 내가 어떤 답을 했었는지에 대해선 지금은 벌써 다 까먹었지만 교수님의 말만큼은 분명히 기억이 난다. 모든 학우들의 답을 꼼꼼하게 경청한 교수님은 칠판에 이렇게 적었었다.

 

소설은 사람이다.

소설은 인생이다.


소설은 사람의 이야기다
. 굿바이 동물원에 있는 것이 동물이 아니라 사람이듯.



사람들이 떠난 뒤에도 동물원은 그 자리에 남아 있다보이지 않는다고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 p.129 


굿바이 동물원의 배경은 제목 그대로 동물원이다. 하지만 그곳에는 동물이 없다. 동물원에 전시되어 밥을 먹고, 무심한 얼굴로 우리 안을 노닐며, 이따금씩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에 올라 가슴을 치거나 사람들이 내민 음식들을 받아 먹기도 하지만 그 모두는 동물이 아니다. 동물원은 동물원이다. 하지만 동물이 없다. 동물이 있지만 동물이 없기도 하다. 무슨 소리인가 싶지만, 간단한 얘기다. 굿바이 동물원의 동물들, 그 속에 있는 것은 사람이다. 사람이 동물이며, 동물이 곧 사람인 곳. 사람이 전시되어 동물이라는 탈을 쓰고 있는 곳. 굿바이 동물원은 그런 곳이다.


굿바이 동물원동물들에겐 사연도 참 많다. 주된 배경이 되는 고릴라 우리도 마찬가지다. 고릴라들에겐, 아니, 고릴라를 연기하는 사람들의 사연은 참으로 구구절절하다. 구조조정의 칼바람을 맞아 마늘까기와 인형눈알꿰기를 전전하던 주인공을 비롯하여, 몇 년째 공무원 시험을 준비중인 젊은 여자 고릴라 앤, 살기 위해 동료들을 저격하다 본인 역시 저격을 당해 쫓겨난 조풍년, 그리고 이념이 아닌 삶에 패배한 늙은 간첩 만딩고.

고릴라들은 각각의 사연을 가면 속에 감추고, 추가 수당을 위해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모형에 올라 가슴을 두드리고 버튼을 누르거나 바나나를 던지고 사람들에게 고함을 지른다. 그것이 그들에겐 이다. 이것 또한 (고릴라지만) ‘이고, 이곳 또한 (동물원이지만) 직장이기에 그들은 팀을 꾸려 서로를 돕기도 하고 남의 팀 이야기로 입방아를 찧어대며, 퇴근 후엔 남들처럼 소주 한 잔 나누면서 하루의 스트레스를 풀기도 한다. 참 우습고 재미있다. 서로를 과장이니 대리니 부르고 있는 고릴라들은 우스운데 슬프다. 소위 말해, 웃프다. 그건 그 동물원 창살 속에 감춰져 있는 삶 또한 그들이 살아온 삶과 별반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고릴라가 되었고, ‘고릴라의 인생을 연기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연기다. ‘고릴라인데도 고릴라의 삶이 아니다. 우습게도, 마지막 돌파구며 희망이라고 생각했던 굿바이 동물원역시도 그들이 살아온 삶과 크게 다르지 않다. 거기에 있는 것 또한 삶이고 인생이다. 내가 어떤 얼굴을 쓰고, 어떤 것을 연기하고 있건 간에.

 

사람은 사람이다. 고릴라는 고릴라다.

사람은 고릴라가 아니다.

그런데, 동물원은 동물원이 아니다. 우리의 인생이고, 우리의 전시장이다. 우리가 살아왔던 삶이, 또한 우리가 살아가는 그 모든 삶이 굿바이 동물원에 존재한다. 그 점에 나는 때때로 마음이 무거웠다. 책을 읽는동안, 내도록.

 

하지만 동물원은 달라. 사람 구실은 못하지만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곳이 동물원이야

 웃기지? 내가 그랬잖아. 사는 게 코미디라고.


/ p.214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
, <뉴욕 탄광>에는 비오는 날마다 동물원을 찾아가는 남자가 나온다. 남자가 비오는 날에 캔맥주를 들고 동물원에 가는 이유는 고릴라를 보기 위해서다. 폭우 때문에 짜증이 난 고릴라는 가슴을 두드리며 소리를 지르고 고함을 치고, ‘인간은 그것을 관람한다. 얼마 전 후속편이 나오며 큰 호평을 받았던 영화 <혹성탈출> 시리즈는 인간에게 반기를 들고, 역으로 인간을 지배하게 된 침팬지들이 가득한 미래의 지구를 그리고 있다. 영화는 당시에도, 또 팀 버튼에 의해 리메이크 되었던 2000년대 초반에도, 또 후속편이 개봉한 최근에도 공통적인 평을 받아왔다. 두려움, 공포. 언젠가 인간이 침팬지에게, 고릴라에게, 혹은 다른 동물들에게 지배를 당할지도 모른다는 것은 분명한 공포. 인간은 태초부터 약했으므로 언제나 다른 종을 경계해야했고, 절대적인 우위를 가르고 인간만을 특별하게 만들어야 하는 수단들을 언제나 강구해왔다.

그 과정에서 동물원이 탄생했다. 초기의 동물원은 현대판 콜로세움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지금은 수많은 노력들에 의해 동물원이 더 많은 종의 보존을 위한 공간으로 탈바꿈 하고 있지만, 처음 동물원은 인간을 위한오락의 공간에 지나지 않았다. 창살 속의 동물들을 보며 사람들은 즐거워했고, 한편으로는 갇혀있는동물들에게 안도했다. 갇혀있는 맹수들은 인간에게 더 이상 위협이 되지 않았고, 이는 인간과 동물 사이의 서열을 나누는 절대적인 상징이 되었다. 동물원이 존재하는 한, 인간과 동물은 다르다. 인간은 동물이 아니며, 인간에겐 인간의 법도가 있고 그리하여 인간은 특별했다.

 

그러나 인간은 그저 인간일 뿐이다.

고릴라는 고릴라고, 인간도 인간이며, 고릴라도 동물이고 인간도 동물이다.

우리의 인생이 동물원과 같지 않다고 말할 수 없는 것처럼.

 

이 나라에서 인간으로 산다는 게 얼마나 외롭고 힘든 일인지 아니?

/ p.183

 

때때로 우리는 동물의 삶을 부러워한다. 아무 걱정 없이 때가 되면 먹고, 때가 되면 자고, 필요할 때만 사냥을 하거나 채집을 하는 동물들이 우린 이제 때때로 부럽다. 우리는 삶을 즐기기엔 너무나 복잡하다. 떠난 만딩고의 아프리카가 대단한 유토피아가 될 수 있는 이유는 거기에는 단순한삶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먹고, 자고, 쉬다가, 일하고, 또 먹고, 잔다. 따지고 보면, 그건 인간이 인간 이전에 동물이기 때문에 당연히 그래야하는 삶이다. 당연히 그래야하는 삶을 우리는 복잡하고 어렵게 산다. 너무 많은 문제, 너무 많은 고민과 갈등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단순한삶은 그야말로 가장 큰 소망이다. 이걸 두고 현실도피라고 하던가. 전기도 안 통하고 전화도 안 터지는 곳에서 한 며칠만 푹 잠만 자고 쉬었으면 좋겠다는 소리를 입버릇처럼 늘어놓는 것이 비단 나뿐만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게 어렵다. 그 단순한 삶이 우리에겐 너무 어렵다. 돈을 벌어 더 큰 집을 사면, 연봉이 오르면 삶의 질은 나아지겠지만 행복하진 않다. 우린 좀 더 넓은 우리로 옮기고, 좀 더 많은 양의 먹이를 먹게 되었을 뿐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여전히 조잡한 빌딩 세트에 올라 가슴을 두드리고, 사람들이 던진 바나나에도 화를 참고, 얄미워 죽겠는 상사에게도 굽신거려야 한다. 퇴근 후에 소주 한 잔 하면서 직장 동료 욕을 하고, 몇 번씩 이놈의 회사 때려치운다고 말을 해대도 집으로 돌아가면 거기에선 또 이 나의 발목을 잡는다. 처녀 때보다 피부가 많이 상한 아내의 얼굴이, 지쳐 잠든 아이의 얼굴이, 또 책장에 꽂혀있는 온갖 수험서가, 오랜만에 걸려온 부모님의 전화나 고향에서 보내온 김치 한 단지가 또 한 번 우리를 그 자리에 붙들어 앉힌다. 다음 날이면 또 일어나 출근을 하고, 또 빌딩에 올라 가슴을 치고, 일하고, 야근하며, 몇 푼 안 되는 수당 하나에 목숨을 걸고, 퇴근 후엔 술 한 잔 마시면서 또 몇 번이나 그만둔다고 하고, 또 돌아오면 그 마음을 참아낸다.

 

우리는 그렇게 산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거대한 우리가, 이 삶이 우리에겐 커다란 동물원이다. 그래서 굿바이 동물원은 우리의 삶이다. 우리의 이야기다. 우리가 미처 헤어지지 못한, 우리의 인생이다.

 

사람이면 어떻고 고릴라면 어떤가. 사람이라고 해서 꼭 행복한 건 아니다

고릴라가 불행하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단 말인가.

/ p.2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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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별을 스치는 바람 1
이정명 지음 / 은행나무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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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밤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별을 스치는 바람〉
 
 

 
모든 변화는 글에서 시작되었다.  / 1권, 213쪽
 

이따금, 나는 한 섬에 대해 생각한다. 요즘 들어 부쩍 생각이 난다. 그건 비단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 섬을 떠올리고, 그 섬을 이야기한다. 예전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그 섬을 찾고, 더 많은 사람들이 그 섬을 위해 노력하고, 그 섬을 알리고 그 섬을 노래한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찾아주고 관심을 주는 데도 그 섬의 이름은 외롭다. 바다에 저 홀로 떠 있는 섬이라 이름마저 외로운 그 섬, 독도(獨島). 

 
2년 전, 나는 독도에 간 일이 있다. 나에게 외로울 ‘독’의 한자를 처음으로 읽고 쓰게 해주었던 동해의 그 작은 섬에 갔던 것은 순전히 일 때문이었다. 새벽 3시에 서울에서 출발해 한숨도 편히 자지 못한 채로 묵호, 울릉도, 또 독도까지 달려가는 제법 힘겨운 여정이었다. 공장 같은 식당에서 기계처럼 밥을 먹고, 울렁울렁 울렁대는 울릉도의 험한 바다를 뚫고, 나를 맞던 갈매기들에게 인사하며 독도로 가는 배에 올랐다. 유난히도 독했던 멀미약에 일행들 모두가 잠에 빠진 그 시간, 난 선실에서 행여 언제 나타날지 모를 그 섬의 첫 모습을 숨죽여 기다렸다. 파도는 높았지만 날은 맑았고, 선창은 이윽고 기다리던 그 섬의 모습을 내게 드러냈다.
거기에 있었다. 홀로 고고히 찬란하던 그 섬. 나는 그곳에서 고작 30분의 입도 시간으로는 다 헤아릴 수 없을 그 찬연한 고요함을 만났다. 깊고 푸른 동해에 감싸인 채, 세상 그 어떤 어둠에도 먹히지 않던 그 푸르디푸른 섬. 그래서 괜히 울컥했던, 괜스레 짠했던, 그리고 어쩐지 참 미안했던 그 작지만 아름다웠던 섬.
 
그때, 나는 어떤 시인에 대해 생각했다.
 
그 섬을 닮은 시인이 있었다. 망망대해와 다름없던 시대를 부유하면서도 저 홀로 고고하던, 저 홀로 찬란히 푸르던 그런 시인.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속의 별들을 헤던 그런 시인. 무에 그리 부끄러웠는지 시시때때로 마음의 볼을 붉히던 시인은 그 별을 다 헤지도 못하고 떠났다. 그리 하염없이 세던 별들을 한아름 남겨둔 채로. 
시대는 그를 히라누마 도주라고 불렀다. 그러나 우리는 그를 윤동주라 기억한다. 우리 가슴에 수많은 별을 남겼던, 하늘과 바람과 별의 시인, 윤동주. 


이 책은 그 시인에 대한 이야기다.
 
 
“네 시가 조선어건 일본어건 상관없어. 그건 조선어나 일본어가 아니라 너 자신의 언어니까.” / 1권, 272쪽
 
 
우리는 윤동주를 알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윤동주에 대해 잘 모른다. 한국 사람이라면 한 번 쯤은 〈서시〉, 〈별 헤는 밤〉, 〈쉽게 쓰여진 시〉를 낭송해본 기억이 있을 테다. 우린 그의 시를 읽었고, 그의 시를 배웠다. 하지만 우리는 윤동주의 생애에 대해 아는 것이 적다. 연희전문학교를 나왔던 그가 어떻게 일본으로 넘어갔고, 어떤 모습으로 생을 마감했는지는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이육사나 이상의 마지막 모습을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에 비한다면 더욱.
우리가 그의 시를 아는만큼 그의 생애에 대해서 알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윤동주가 어떻게 세상을 떠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오랫동안 ‘추측’과 ‘소문’으로만 존재했었다.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해방까지 반년을 남겨놓고 그는 세상을 떠났지만, 그 이유에 대해선 의견이 분분하다. 병을 얻었다더라, 강제 노역이 고되 죽었다더라, 고문을 당했다더라 등 그의 죽음에 대해선 수많은 추측들이 존재했다.

 
그중 가장 많이 따라 다녔던 소문은 ‘생체실험’, 즉 ‘마루타’로 이용되었다는 이야기였다. 말도 안 되는 죄목으로 형무소에 끌려가 정체 모를 주사를 맞고 심신이 쇠약해져 죽었다는 것. 그것은 이제 정설이다. 하지만 윤동주가 어떤 장소에서, 어떤 연유에서 죽음에 이르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누구도 알 수 없다. 윤동주는 대체 왜 생체실험의 대상자로 지목되었고, 그곳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졌던 걸까. 이런 의문을 해결하기에 역사가 주는 정보는 단편적이고 허술하다. 
역사의 빈 틈에 의문을 가질 때, 작가의 상상력이 발휘된다. 이를 두고 팩션(Faction)이라 하던가. 비어있는 틈새를 메우며 토대를 세우고 이야기는 새롭게 태어난다. 기존에 주어져 있는 단편적인 정보를 토대로 서사가 세워지며, 마침내 이야기는 사라져버린 윤동주의 생애 마지막 1년을 복원해낸다. 
 
 
증오는 두려움의 다른 이름이다. 모든 국가와 체제는 책을 두려워했고 책과 불화했다. 책 때문에 나라는 망하고 군주는 쫓겨났으며 귀족들은 망명했다. / 1권, 63쪽
 
 
이야기는 히라누마 도주, 즉 윤동주를 관찰하는 일본인 간수 와타나베 유이치의 시점으로 진행된다. 교토대 문과부 재학 중에 학도병으로 징집된 와타나베는 후쿠오카 형무소로 배속 되고, 소장의 직접 지시로 선임 간수였던 스기야마 도잔의 살해 사건을 조사하라는 임무를 받게 된다. 살해된 스기야마는 형무소로 전달되는 모든 문서, 죄수들의 서간 전반 등을 조사하던 검열관이었고 동시에 모든 조선죄수들이 치를 떨던 폭력 간수이기도 했다. 와타나베는 스기야마가 남긴 압수물 등을 조사하며 그의 죽음 주변에 존재하는 조선인 죄수들 몇몇을 면밀하게 관찰한다. 가장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되는 최치수는 조선인 죄수들 사이의 실질적 보스다. 그러나 와타나베의 관심을 끌었던 것은 이런 살인사건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그저 허약하고 파리해보이는 조선인 죄수였다. 수인 번호 645번, 히라누마 도주. 조선 이름 윤동주. 스기야마의 주머니 속에서 발견된 시를 쓴 그는 시인이었다.
 
 
“이름은 한 존재의 모든 것을 담은 상징이에요. 한 사람의 얼굴과 눈빛과 몸집과 행동뿐만 아니라 그의 기억과 꿈과 그리움,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모두 담겨 있죠. 하나의 단어가 수많은 느낌을 담고, 한 줄의 문장이 헤아릴 수 없는 의미를 담은 것처럼요.” / 1권 , 218쪽
 
 
와타나베는 히라누마를 향해 완강히 저항한다. 총 2권에 이르는 짧지 않은 분량의 글이 진행되는 내내 와타나베는 버티고, 저항하고, 끝내 무너지며 굴복한다. 첫 순간부터 와타나베는 히라누마를 격렬히 경계하지만 몇 겹으로 쌓아올렸던 방벽은 우스울 정도로 간단히 무너진다. 경계하고 감시하던 입장에 있던 와타나베는 스기야마의 죽음을 조사하고, 히라누마 도주를 알아가면서 점점 그와의 대화에 심취 되고 끌려간다. 와타나베는 조선인 죄수들이 부르는 〈히브리 노예의 합창〉을 듣고 싶다는 히라누마를 위해 의무조치 일정을 바꿔주고, 그를 히라누마 도주가 아닌 ‘윤동주’로 부르며, 끝내 스러진 그의 죽음에 아파하고 자책한다. 자신이 되짚어가던 스기야마 도잔처럼 와타나베 역시 불가항력처럼 윤동주에 매료되며 그에게 감화된다. 

윤동주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폭력을 쓴 것도, 회유책을 쓴 것도 아니었다. 겉으로는 치료를 가장하면서 실상은 그 몸에 피가 아닌 식염수를 주사하는 생체 실험을 하는 그런 거짓도 없었다. 나라를 위해서, 제국을 위해서, 혹은 이 시대를 위한 것이라는 명분도 없었다. 그는 시를 썼고, 책을 읽었으며, 이따금은 연을 날렸다. 그는 그저 시인이었다. 그뿐이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모든 활자는 영혼을 가지고 있고 그 영혼은 바이러스처럼 읽는 사람을 감염시킨다. 독서는 치명적인 중독이고 문장의 세례를 받은 자는 평생 그 속박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 2권, P. 65
 
 
이따금 사소한 것들이 많은 것들을 바꿀 때가 있다. 변화는 언제나 사소한 것에서 시작되었다. 아무 것도 아닐 글, 아무 것도 아닐 노래. 하지만 〈히브리 노예의 합창〉은 노래를 부르던 조선인 죄수들의 가슴에 잊지 못할 것들을 새겨넣었고, 윤동주의 시구는 그를 감시하며 지켜보던 일본인 간수의 마음까지 감화시킨다. 
따지고 보면 참 우스운 일이다. 사람을 죽이는 것도 살리는 것도 언제나 한 줄의 글이다. 와타나베를 전쟁으로 내몰았던 것도, 윤동주를 이 차가운 후쿠오카 형무소에 밀어 넣었던 것도 글이었다. 하지만 와타나베에게 잊었던 유년을 되돌이켜 주었던 것도, 폭력간수였던 스기야마가 피아노를 조율하고 시를 쓰게 했던 것도, 그 지독한 고통 속에서 윤동주를 지켜냈던 것도 결국엔 글이었다. 고작 글 몇 자, 고작 글 한 줄. 그 글로 글 속의 수많은 이들은 절망을 이겨낸다. 누구나 절망 앞에서는 똑같은 것처럼, 글로 절망을 견뎌내는 데에도 계급과 국경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간수도 죄수도, 또 전쟁을 일으킨 자도 침략을 당하는 자도 똑같이 절망하고 괴로워하며, 그 절망을 견뎌낼 희망을 간절하게 소원한다. 
스기야마, 와타나베, 또 윤동주. 세 사람은 어쩌면 모두 같은 상처를 안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시대가 안긴 생채기, 시대가 삭제했던 마음들. 그래서 그들은 읽고 싶었고, 말하고 싶었다. 시대는 그들에게 사소한 인사 한 마디도 건네지 못하도록 봉해버렸다. 아침 노을을 보면서도, 불어가는 실바람을 느끼면서도, 계절의 변화를 바라보면서도 좋다는 말 한 마디 못하던 시대. 새의 지저귐을 노래하지 못하고, 사랑의 기쁨을 나눌 수 없던 시절. 그래서, 그들에겐 ‘글’이 필요했다. 사랑해줄, 꿈꿔줄, 위로를 건네주며 이 헐벗은 영혼들을 매만져줄 그런 ‘글’.
 
시인은 시를 쓰지 않았다. 썼다 해도 그것은 기법적 의미의 ‘시’가 아니었을 것이다. 그는 그저 별을 헤아렸다. 밤이 지새도록 헤아리고 또 헤아린 별들은 이윽고 모든 상처 위에 쏟아졌다. 간수들의 상처에, 죄수들의 상처에 찬란히 쏟아지던 별. 그 별. 그가 그토록 온 마음을 다해 헤아렸던 별, 그 별, 고요히 빛나던 그 처연한 별.
 
그리고 그는 별이 되었다. 시가 되었다.
 


 
나는 그를 잃어야 하는 것이 분했다. 그를 잃어야 할 사람은 나만이 아니라 우리들 모두였다. 나는 친구를 잃어야 하겠지만 조선인 죄수들은 현명한 동료를, 간수장은 용서를 빌 대상을, 간수들은 온화한 모범수를 잃을 것이다. 태어나지 않은 조선인들은 위대한 스승을 잃을 것이고, 태어나지 않은 일본인들은 부끄러운 과거를 증언할 지식인을 잃을 것이다. 우리 모두는 지금까지 가지지 못했고 앞으로도 영원히 가지지 못할 순결한 시인을 잃어야 할 것이다. / 2권, 240쪽 

 
 
시대가 변했다. 윤동주가 떠난 때로부터 벌써 근 1세기가 흘렀고, 그 사이 우리는 광복을 맞았다. 광복의 기쁨을 채 누리기도 전에 나라가 반 토막이 났고, 절반이 된 국토에서 형제가 서로 총부리를 겨누고 싸웠고, 터널보다 컴컴했던 시절을 견뎌내며 밀레니엄을 넘어 지금에 이르렀다. 이름조차 생소한 동방의 작은 나라였던 우린 그 사이에 올림픽과 월드컵을 열었고, 세계 수많은 개발도상국들의 모델이 되기도 했다. 
 
그래도 여전히 우리를 둘러싼 바다는 시끄럽다. 내 땅, 내 나라라고 주장하는 것도 미안할 정도로 당연한 내 나라 섬을 두고 옆 나라에선 연일 분쟁을 걸어오고 이제 곧 재판소에 보낼 거라며 으름장을 놓는다. 과거청산도 뭐 하나 이뤄진 것이 없다. 사형을 기다리던 전범들은 종신형으로 감형되거나, 그마저도 흐지부지 되었고 자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편안히 숨을 거두고는 제 나라 사당에 이름을 걸어두고 신으로 대접받는다. 당연히 존재하는 역사적인 증거들과 피해자들을 두고도, ‘위안부는 자발적 징용의 증거였다’며 오리발을 내민다. 
물론 일본 내에서도 제법 시선이 달라지긴 했다. 자기 나라의 왜곡된 역사 교과서를 부끄러워하는 교수들의 모임이 생겨나고, 정신대 할머니들의 수요 집회에 초대 받아 아픔을 함께 노래하는 일본 밴드가 있으며, 이 나라에 아무 연고가 없으면서도 독도 활동에 조용히 도움을 보태는 일본인도 있다. 그렇게 생각하면 생각보다 사소하게, 조용히, 그러나 조금씩 세상이 변해가고 있음을 느낀다. 물론 당장 오늘 내일 해결되는 문제는 아니다. 10년 뒤가 될지, 100년 뒤가 될 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래도 언젠가는 그런 날도 올 것이다. 그때의 고통에 더 이상 아파하는 사람이 없게 되는 그런 날. 
 
그날을 위해 바다 위의 외로운 섬은 오늘도 고요히 바람을 맞는다. 그처럼 푸르렀던 시인처럼 고요히 그 바람을 안고 있을 것이다. 
그 바람을, 하늘을, 별을. 그리하여 이윽고 시(詩)를. 
별을 스치는 수많은 바람들을. 
우리의 염원들을.

 
 
싸움에서 이겼으니 이 연은 네가 가져도 좋아. 하지만 우리는 또 새 연을 만들 거란다. 내일 너의 푸른 연과 맞서기 위해서지. 우린 어쩌면 내일은 너의 푸른 연을 가질 수 있을 거야. 내일은 우리가 이길 거니까. 어쩌면 그 다음 날도 또 그 다음 날도. / 2권, 1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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