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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혁명은 왜 불가능한가 - 모두가 똑같고 모두가 고립된 세상에서 ㅣ 한병철 라이브러리
한병철 지음, 전대호 옮김 / 김영사 / 2024년 1월
평점 :
지난 8월 24일 일본 도쿄전력은 후쿠시마 제1원전 내 오염수를 기어코 바다에 방류하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다섯 달이 지났다. 그 사이 국내외의 뜨거웠던 논란은 일단락된 것 같다. 방류된 ‘처리수’가 인체를 비롯한 생태계에 안전한 것인지 아닌지는 아직 알 길이 없다. 도쿄전력에서 하고 있다는 ‘과학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처리 과정에 대해서도 우리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일본 정부와 국제원자력기구는 그 말을 있는 그대로 믿어줬다. 그 모든 것은 ‘과학’이라는 이름 아래 (무엇에 대한 전문가일지는 몰라도) ‘전문가’와 함께 진행되었다. 우리는 지난 두 번의 토론을 통해서 여기서 말하는 과학이 ‘어떤 과학’이며, ‘무엇’을 위한, 또 ‘누구’를 위한 과학인가 하고 되물었다. 그리고 그 사이, 비단 과학뿐만 아니라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모든 세계가 오염수가 방류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작동되고 있었던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되었다.
정면 돌격이 사라진 세계
한병철의 신간 <오늘날 혁명은 왜 불가능한가>는 혁명을 꿈꿀 수 없고, 할 수도 없는 현대 사회를 조망한다. 히스테리적으로 죽음을 거부하면서 미용 지상주의를 추구하는 ‘보톡스 좀비’나 ‘피트니스 좀비’를 지적하며 설 죽은 삶의 모습들이라 말한다. 여기에 더해 이제는 낯설지 않은 질문을 다시 한번 던진다. 과연 우리의 소비 행태, 가족 상황, 직업, 취향, 거주 형태가 ‘우리가 선택한 것’이라고 할 수 있냐는 것이다. 우리가 하는 모든 클릭이 저장된다는 메시지가 더 이상 놀랍지 않은 세계에서, 빅브라더인 거대 IT기업이 우리를 대신해 생각한다는 것도 더는 낯선 주장이 아니다.
신자유주의 지배 체제는 왜 이토록 안정적일까? 그 체제에 맞선 저항은 왜 이토록 적을까? 왜 저항들은 모두 이토록 빠르게 물거품으로 돌아갈까? 부자와 빈자의 격차가 점점 더 커짐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혁명은 어찌하여 더는 불가능할까? (8)
‘구글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이야기보다 1987년 독일에서 인구조사에 맞서 (바리케이드까지 설치할 정도로) 격렬하게 저항했다는 이야기가 새롭다. 독일 정부가 알아내려 한 정보들은 그다지 대수로운 것들도 아니었다. 직업이나 학력, 가족상황, 출근 거리 같은 것들이었다. 하지만 이에 당시 독일인들은 무섭게 분노했다. 폭탄이 터지고, 대규모 시위가 곳곳에서 벌어졌다. 오늘날 우리라면 간단하게 체크박스에 ’동의‘하고 말 일이다. (실로 우리는 더한 정보도 쉽게 공유하고 있지 않나. 은행이 아닌 포털사이트도 우리의 ’자산 내역‘을 소상하게 알고 있다) 우리는 왜 누군가가 폭탄을 던질 일에 쉽게 동의하고 마는 것일까. 우리에게는 왜 그런 분노가 일지 않는가. 혹은 왜 우리의 분노나 저항은 모두 이토록 빠르게 물거품이 되고 마는 것일까.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가 ’처리수‘로 이름을 바꾸는 사이, 과학자는 입을 다물었다. 오염수가 안전하다는 데 모두 동의해서만은 아니다. ’어떤‘ 위험이 있는지, 아직 ’확실하지‘ 않기 때문이다. 확실하지 않은 것이라면 확실해질 때까지 보류하는 게 좋을 것이라고 말하는 게 그들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하지만 정치는 ’언젠가‘ 밝혀질 과학적 진실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빠른 결정은 정치의 중요한 능력 중 하나니까. 그렇게 방류되는 오염수를 보면서 우리는 우리 사회를 뒤덮은 ’불확실성‘과 ’불안’을 마주한다. (‘확실하지 않은 것은 말하지 말라’는 이야기는 꼭 과학자가 아닌 우리도 종종 듣고 커 왔지 않나) 그러나 확실한 것은 그 어디에도 없다. 인류는 아주 오랜 시간 ‘확실한’ 것, 그러니까 진리를 찾아 헤매왔지만 결코 찾아낼 수 없었다. (그저 공통된 감각을 위해 ‘표준’을 약속하고, 그를 지키기를 모두에게 요구했을 뿐) 게다가 현대사회의 능력주의와 유동성은 그 불확실함을 개인에게로 돌렸다. 더 이상 불안함은 이웃과 공유되지 않는다. 나의 불안은 오롯이 나의 몫이며, 내가 책임지지 않으면 그 누구도 돌봐주지 않는다. 그것이 모두를 괴롭게 하는 방식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사회는 부러 안전망을 설치하지 않는다. 그것이 더 효율적이고 생산적인 사회를 만드는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포르노의 시각적 영향력은 지각 자체를 장악하여 포르노적으로 만든다. 오늘날 우리는 느린 것, 긴 것, 조용한 것을 견디지 못한다. 끝없는 결합들과 상황 전환들에 빠져드는 길고 느린 이야기를 위한 참을성이 더는 없다. 대세는 유혹과 에로티시즘 없이 신속하게 실사로 직행하려는 포르노적 강박이다. 유혹적인 것은 감정적인 것에 밀려난다. 직접 전염을 위하여 암시가 기피된다. (87)
우리는 철저히 생산을 지향하는 사회, 철저히 긍정성을 지향하는 사회에 산다. 이 사회는 생산과 소비의 순환을 가속하기 위해 타인 혹은 이방인의 부정성을 없앤다. 오로지 소비 가능한 차이들만 허용한다. 다름을 빼앗긴 타인을 사랑할 수는 없다. 단지 소비할 수만 있다. 때문에 우리의 불안은 초조를 낳는다. 뭔가를 계속 해야겠는데, 불안한 마음이 집중을 어렵게 한다. 무의미한 바쁨만 반복해서 생산된다. ‘시성비’가 올해의 트렌드인 것도 같은 맥락일테다. 영화나 드라마는 물론이고 뉴스도 해석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아, 그렇구나’에 덧대어 ‘와우!’면 충분하다. 해석하기를 원하지 않고, 해석되기를 기다리지 않는 세계에서는 어떤 결합도, 변화도 일어날 수 없다. 그저 흐르는 대로 흘러가는 것이다. 집회도 없고, 권력자의 결정도 없는데 일은 계속 진행된다. 전문 지식은 과연 정치적 결정을 대체할만 한가. 추락하는 정당의 지위와 우리의 무력함은 내일을 어떤 세계로 이끌 것인가.
디지털과 연결된 투명성은 총체적 예측 가능성을 추구하죠. 모든 것이 예측 가능해야 해요. 하지만 예측 가능한 행위는 없습니다. 행위가 예측 가능하다면, 그것은 행위가 아니라 계산일 거예요. 행위는 항상 예측 불가능한 영역으로, 미래로 뻗어나갑니다. 바꿔 말해, 투명사회는미래가 없는 사회예요. 미래란 완전한 타자의 시간적 차원이니까요. 오늘날 미래는 다름 아니라 최적화된 현재예요.(150)
시간을 두고 익어야 할 것들이 있다. 그리고 사회는 결과가 정해져 있지 않는 실험공동체여야 한다. 실험이 이루어지는 동안에는 그 결과를 알 수 없을 뿐더러, 같은 실험은 반복해서 일어날 수 없다. 실험의 조건들이 계속해서 변화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지금-여기’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단 한번밖에 할 수 없는 실험의 참여자라는 책임감이 필요하다. 2024년의 한국을 살고 있는 사람은 미래에 다시 오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