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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동주
안소영 지음 / 창비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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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10년 전의 일이다. 한국영화사를 공부하던 나는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아마도 40년대 초반 영화였을텐데, 눈물 콧물 쥐어짜던 신파영화가 갑자기 모든 주인공들을 운동장으로 한데 불러모아 일장기를 향해 경례를 하는 것이다. 개연성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그 장면에서 누군가는 웃었고, 또 다른 누군가는 울었다. 말로 표현하기 힘든 감정이 뭉글뭉글 올라왔다. 나는 울지도 웃지도 못한 채, 한참을 멍-하니 있었던 것 같다. 어쨋든 영화는 그렇게 '황국신민만세!'를 외치며 끝나버렸다. 아, 그때의 허탈함이란.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아주 이해 안될일도 아니었다. 일제강점기에 영화를 만들었던 이들은 죄다 친일파였다는 사실 역시 낯설고, 또 인정하고 싶지도 않지만 그럴 수 밖에 없던 일이었다. 아, 얼마나 영화를 찍고 싶었으면 그렇게라도 해야했을까. 옳다고 생각한 모든 것을 저버리고 꿈만을 쫓은 그들의 삶에 대해 한참을 생각해보았으나, 답은 없었다.

앉은뱅이책상 위, 펜과 잉크 옆에 단정히 놓인 습작 노트를 새삼 펼쳐 보았다. 동주의 시작 첫 번째 과정은, 떠오르는 시상을 오랫동안 마음속에서 구상한 뒤 먼저 습작 노트에 펜으로 써 보는 것이었다. 그런 다음 생각날 때마다 펼쳐 보고 조금씩 고치다가 이만하면 되었다 싶을 때 정식으로 원고 노트에 옮겨 썼다. 중학 시절 '나의 습작기의 시 아닌 시'에 이어, 두 번째 원고 노트의 제목은 '창'이었다. 동주는 책꽂이 한 칸에 따로 정리되어 있는 몇 권의 습작 노트와 두 권의 노트를 마저 꺼냈다. 그러고는 방 한쪽에 놓인, 잘 쓰지 않는 잡동사니가 담긴 사과 궤짝에 넣고 뚜껑을 덮었다.
동주는 결심했다. 잘못된 전쟁을 지지하고 동포들의 고달픈 삶을 외면하는 것이 문학의 길이라면, 가지 않으리라. 감투와 명성을 탐하고 궤변으로 자신의 행동을 미화하는 자들이 문인이라면, 되지 않으리라. 하나의 시어를 찾기 위해 수없이 버리고 취하는 연마의 과정이 저렇게 쓰이는 것이라면, 더 이상 쓰지 않으리라. (안소영, 시인 동주, 127쪽)

안소영의 소설 <시인 동주>는 새삼 그때의 기억을 끄집어냈다. 나라를 잃고, 말도 잃고, 생각까지 잃어버린 시대에 청춘으로 산다는 것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보게 했다. 매일이 흐리고, 불확실한 나날들만이 계속되던 와중에도 윤동주와 그의 벗들의 청춘은 빛났다. 꼭 예쁘고 아름다운 것만이 빛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소설은 온 힘을 다해 보여주었다. 실로 동주의 고민은 한낱 청춘의 지나가는 무엇이 아니었다. 그는 식민의 땅에서 태어나 노예와 다를 바 없는 스스로의 처지를 직시하면서도, 제 나라 말로 꿈꾸고 글쓰기를 내려놓지 않았다. 그러한 절망의 시대, 사람들의 지성과 감성이 모두 무너진 폐허와도 같은 시대, 더 이상 아무도 시를 쓰려 하지 않는 시대에 동주의 시는 외려 새로이 움텄다. 문인이라는 빛나고 아름다운 이름은 더이상 그에게 중요치 않았다. 자신의 마음 깊숙한 곳을 들여다보고, 주변의 자연과 사물들도 그곳까지 데려가, 일렁이는 감성들을 충분히 무르익게 하는 것. 그리하여 마침내 정제되고 아름다운 우리말의 체에 걸러, 노트 위에 한 편의 시로 옮겨 적는 길고도 진실하고 순정한 시간이 있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소설이 그의 청춘을 오롯이 따라가고 있기 때문인지, 알고있던 그의 시도 매번 다르게 읽혔다. 때로 절망의 어두운 그늘 속에 놓여있는 것 같기도 했고, 또 때로는 슬픔의 웅덩이 깊은 곳에 맞닿아 있는 듯 하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맑고 고요한 순수함을 잃지 않았다는 것이 나는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

만 이십칠 년 이 개월이 채 못되는 삶. 윤동주가 태어날 때부터 조국은 이미 남의 나라 식민지였다. 단 한번도 근심없이 싱그럽게 웃어보지 못했고, 어떤 일을 마음껏 해 본적도 없었을 것이다. 길가다 순사나 헌병을 만나면 괜히 가슴이 두근거렸을 그의 청춘에, 감히 손내밀어 인사를 건네본다. 고맙다고. 온전히 속 터놓고 자신을 꺼내놓지도, 기대고 의지할 하늘도 없었을 때에- 그래도 펜과 노트를 내려놓지 않아주어 참으로 감사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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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크툽
파울로 코엘료 지음, 최정수 옮김, 황중환 그림 / 자음과모음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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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울로 코엘료의 신간이라고 해서, 책 소개도 읽지 않고 얼른 장바구니에 담았던 <마크툽>. 읽으려고 꺼내들어보니 한 권의 우화집이다. 짧은 에피소드들로 엮인 우화집이라는 걸 알았더라면, 아마도 나는 장바구니에서 이 책을 다시 뺐을 것이다. 어쨌거나 '파울로 코엘료'라는 이름 덕분에 정말이지 오랜만에(실은 거의 20여 년 만에) 우화집을, 이 동화 같은 이야기들을 읽게 되었다. 우화집답게, 책은 삶의 어느 조각을 떼어내어 낯선 시선으로 한참을 들여다본 후, 그 사이에서 하나의 빛을 발견하게 한다. 그것은 우리가 힘에 겨울 때, 길을 잃었을 때 하나의 나침반이 되어줄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화에 끊임없이 등장하는 신이며 현자는- 그럼에도 여전히 동화 같은 성격을 띠고 있어 '음, 역시 동화 같은 이야기군'하고 한걸음 떨어져 이야기를 관조하게 만들기도 한다. (내게 순수한 동심이나 믿음 따위는 없는건지'ㅁ;...)

책에 쓰인 179개의 이야기는 어디서 한 번쯤 들어본 듯하지만 다시금 무릎을 치게 만드는 이야기, 웃음을 머금게 하는 유머러스한 이야기들이다. 제목인 <마크툽Maktub>이 '그렇게 기록되어 있다'는 아랍어라는 것을 상기해본다면 이야기가 낯설지 않은 것은 일견 당연하다. 대부분의 이야기들이 내게 큰 깨달음을 주지 못한 채, 그저 짧은 동화처럼 훅훅 지나가 버렸지만- 그래도 책을 덮을 때쯤 하나의 깨달음을 얻었다. 그것은 '매일 글을 쓰는 것'. 코엘료는 이 책의 서문에서 잡지에 연재를 시작할 때는 의욕이 앞섰지만 전 세계를 돌아다니는 스케쥴 속에서도 글을 쓰는 일이 힘든 과정이었음을 밝히고 있다. 그럼에도 매일 글을 쓰는 과정 속에서 새롭게 글을 쓰는 힘을 터득하게 되었고, 자신의 글과 타인의 글을 포함하여 재발견하는 기쁨을 얻었다고 한다. 그로 인해 '영혼의 풍요'를 경험했다고.

여전히 첫 문장을 쓰는 일은 힘에 겹지만, 그래도 매일 읽고 쓰는 일을 게을리하지 말아야겠다고 다시금 생각한다. 아무도 이 글을 읽지 않는다 해도, 또는 내가 비밀로 간직하려 한 글을 결국 누군가가 읽는다 해도, 글을 통해 나의 영혼을 작동시키도록 애쓰기로 한다. 글을 쓰는 단순한 행위는 언제나 그렇듯 생각을 정리하고 주위의 일들을 명확하게 파악하도록 도와줄 테니까. 그러니까, 종이 한 장과 펜 한 자루가 가진 잠재적 가능성을 믿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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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엔 돌아오렴 - 240일간의 세월호 유가족 육성기록
416 세월호 참사 기록위원회 작가기록단 엮음 / 창비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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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 사회를 정확하게 또 날카롭게 그러면서도 따뜻하게 표현한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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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앗! 가야지가야지하고 한번도 못가봤던 서울국제도서전! 어떤 책들이 기다리고 있을지 너무 궁금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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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움받을 용기 (반양장) - 자유롭고 행복한 삶을 위한 아들러의 가르침 미움받을 용기 1
기시미 이치로 외 지음, 전경아 옮김, 김정운 감수 / 인플루엔셜(주)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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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한살 여름쯤, 친했던 친구들이 갑자기 쌩-하고 돌아섰다. 그 이유가 어떤 소문 때문이었다는건 한참 뒤에야 알았다. 내가 하지 않은 이야기들이, 어떤 이유에선지 내 이름과 함께 떠돌고 있었다. 처음에는 소문의 근원이 궁금했는데, 나중에는 그 이야기를 듣고 나를 찾아오지 않았던 친구들이 궁금했다. 친한 친구라고 생각했는데, 와서 내게 따지기라도 했으면 좋았을텐데-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그렇게 나는, 영문도 모른 채 대학시절 좋은 친구들을 잃었다.

 

그 일이 있고 몇 달동안, 나는 대인기피증 비슷한 것에 시달렸다. 자취방 밖으로는 조금도 나가기 싫고, 누구도 만나고 싶지 않은- 겨우 나를 일으켜 수업만 간신히 듣고, 또 집에 혼자 앉아 영화만 내리 봤다. 그랬던 시절도 있었다. 그 이유가 아마도 친구들을 한꺼번에 잃어서가 아닐까, 라고 생각했던건 훨씬 더 뒤의 일이었다.

 

그 일이, 내게 담담한 일이 되었을 때쯤에, 어쩌면 나는 깨달았던 것 같다. 모든 사람을 사랑하며 살 수 없고, 모든 사람들이 나를 사랑해줄 수도 없다는 것을. 이십년가까이 온몸으로 부정하려 했던 것을 서서히 받아들이게 되면서 나는 열병을 앓았다. 하지만, 열이 내렸을 때 나는 한결- 편해졌음에 분명하다. 그러니까, 미움받을 용기.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으려, 사랑받으려, 그들에게 속하려 나의 오늘들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나를 위해서, 나의 어떤 목적을 위해서 나의 오늘을 택해가는 것. 내가 옳고 너는 틀렸네, 그러니까 너는 나를 따라야하네- 등등의 권력투쟁을 내려놓고, 이 세상을- 그러니까 ‘나’와 ‘너’를 좀 더 수평적인 관계로 인지할 것.

  

책은, 마치 스물한살의 내가 대답을 구하는 듯 했다. 내게는 한번 지나간 열병이라 오늘의 나를 크게 자극하지는 않았지만, 철학자와 청년의 대화 속에서(더 정확히는 청년은 질문하고 철학자는 답하는 과정 속에서) 그냥, 아팠던 그날들이 떠올랐고- 그 어떤 날들에 이 책을 만났더라면, 참 좋았을걸-하는 생각을 했다. 그러니까, 꽤 이성적으로 쓰여진 위로의 문장들.

 

*  *  *

 

책은 재미있었고, 어떤 부분에서는 위로가 되기도 했고-

또 아들러심리학이라는 새로운 것에 대한 지적 호기심을 불어넣기도 했는데

이상하게도, 이 책이 좋은 책이라는 생각은 별로 들지 않았다. 

1. 이 책은 청년과 철학자의 대화 형식으로 구성되어있는데, 책을 읽어보면 대화의 느낌보다는 청년이 묻고 철학자가 대답하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다. 게다가 철학자의 문장들은 꽤 단호해서, 상대를 천천히 물가로 데려가는 느낌이라기보다는 ‘자, 여기 내가 물을 줄게. 마시든지 말든지, 그건 네 선택이지만’하는 조금은 차갑고, 도도하기도 하고, 그러면서도 고지식한 느낌을 주었다. (철학자의 주장이나 이론에 대부분 동의했지만, 그의 문장들은 내게 다른 의미의 폭력처럼 느껴졌다. 그것은 책의 디자인에서도 느껴졌다. 책은 간간히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문장들을 미리 밑줄쳐놓곤 했는데, 나는 그게- 독자의 역할을 빼앗은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니까, 중고등학생시절- 선생님이 여기다 별표 다섯 개 그리라고 했던 것 처럼.)

2. 이건 좀 민감한 문제일 수 있는데, 이 책의 논리는 어떤 부분에서는 사회의 문제까지 개인의 문제로 축소시키려 하고 있는 것 같다. 책은 “어떠한 경험도 그 자체는 성공의 원인도 실패의 원인도 아니다. 우리는 경험을 통해서 받은 충격-즉 트라우마-으로 고통받는 것이 아니라, 경험 안에서 목적에 맞는 수단을 찾아낸다. 경험에 의해 결정되는것이 아니라, 경험에 부여한 의미에 따라 자신을 결정하는 것이다”라고 쓰고 있는데- 과연 정말 그러한가, 라는 점이다. 물론, 책이 주장하는대로 과거의 어떤 사건이 앞으로의 삶을 결정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 영향력이라는 것, 어떤 경험 이후에 과거의 방식으로는 도저히 살 수가 없는 것. 그것까지 개인의 선택이라고 말하는건, 다소 무리가 있지 않을까. 어떤 삶을 살것인가는 개인의 범주안에 들어있지만, 개인은 결코 개인으로 살아갈 수 없음을 주지했을 때, 다소 억지스러움이 느껴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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