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티 입은 늑대 6 - 크리스마스 호두까기 인형 팬티 입은 늑대 6
윌프리드 루파노 지음, 마야나 이토이즈 그림, 김보희 옮김 / 키위북스(어린이)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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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용 그림책이겠거니, 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열었는데 웬걸, 질문이 가득한 사회과학서에 가까운 그림책이었다. 크리스마스 선물로 받은 부엉이가 사실은 호두까기 인형처럼 생명이 있는 존재였고- 그를 따라가 '금지된 숲'을 만난다는 게 이 책의 부제 '크리스마스 호두까기 인형'인 이유. 그때부터 시작되는 진짜 이야기는 호두까기 인형과는 다른 모양새다. 



금지된 숲에는 군인들이 있다. 바오바브나무에 도토리나무를 접붙인 요상한 나무들이 끔찍한 영양제를 맞으며 자라고, 그 아래에서는 '잡담 금지'의 명을 받은 생쥐들이 쉴 틈 없이 도토리를 줍는다. 그 장면이 너무 이상한 늑대는 생쥐들을 탈출시켜주고 싶지만 군인들의 논리에 이미 속해버린 생쥐들에게 자유와 권리를 되찾는 일은 요원해만 보인다. 그럼에도 그들은 나아간다. 마법의 힘 약간, 용기 조금, 맞잡은 손의 힘이다.


늑대는 마술 색연필로 생쥐들을 칠해준다. 힘없고, 똑같아만 보이던 생쥐들에게 개성이라는 것이 생겼다. 서로를 보며 감탄할 수 있게 되었고, 나를 보며 감탄하는 타인을 보며 으쓱해지는 기분도 처음으로 느껴본다. 이렇게 해봐줄래? 해 보지 뭐! 하는 경쾌한 요청과 수락 속에서 마음이 가벼워지는 것이 느껴진다. 물론, 생쥐들이 개인으로 거듭났다고 해서 모든 것들이 한 번에 해결되지는 않는다. 그러니 그림책을 한번 열어보시길. 정말이지 토론하고 싶은 이야깃거리들이 우르르 쏟아지는 책이었다.


특히, 자본주의의 한 가운데 있는 줄 알았더니

이 돈 다 같이 나눠 가질 거라는 오색딱따구리 아저씨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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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를 그리는 마음 시간을 걷는 이야기 5
김종민 지음 / 키위북스(어린이)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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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잔, 어디선가 많이 봤다 싶은 그림이지요? 어린 시절 사진첩을 뒤적이다 보면 꼭 몇 장씩 끼어있게 마련인 '경주 여행'입니다. 언덕 같은 릉하며, 아주 오래된 석탑들, 박물관의 화려한 금관까지. 천 년 동안 한 나라의 도읍이었던 경주는 그야말로 곧 '신라의 역사'이며, 우리 문화의 보고입니다. 때문에 한국의 문화재! 하면 떠오르는 대표적인 장소들도 경주에 밀집되어 있어요. 이 그림책의 표지인 첨성대, 다보탑과 석가탑이 있는 불국사, 석굴암, 야경이 너무나도 아름다운 동굴과 월지까지 모두 경주에 있죠. 유네스코 세계 유산으로 지정된 유명한 곳들이 아니어도 누군가의 집 옆에 있는 동그란 무덤, 산길을 걷다 우연히 마주친 돌무더기, 지금은 무너지고 없는 절터조차 화려했던 신라의 이야기를 품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오래되고, 무너지고, 묻혀 있지만 그럼에도 경주의 곳곳은 그때처럼 지금도 우리 곁에 있어요. 그게, 문득 '경주 여행'을 가야겠다! 하고 우리를 움직이게 하는 것 같기도 하네요. 떠나기 전에, 그림책으로 경주를 먼저 만나볼까요?



 

 


이 그림책 <경주를 그리는 마음>은 경주 여행을 떠난 율이네 가족을 그리고 있어요. 경주의 랜드마크를 거의 다 방문하는데, 그림은 세밀하게 그려 보여주고 있으면서도 불국사가 어떤 곳인지, 석굴암은 세계 문화유산으로서 어떤 가치를 지니는지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습니다. 석굴암 본존불을 사진으로 남길 수 없듯, 그냥 가만히 눈으로 살피고, 느껴보기를 바란 작가님의 마음이 담긴 것 같아요. (하긴, 경주의 문화유산 이야기야 키워드만 검색해도 넘치게 알 수 있는 세상이니까요) 그래서인지 그림책의 텍스트는 간결하면서도 감상적입니다. 그림책의 화자인 율이 아빠는 경주의 시간들을 고스란히 느끼고 있는 것 같은데요. 어릴 때는 본인 스스로도 이것이 왜 훌륭한지, 우리가 왜 경주에 와야 했는지 몰랐기에 율이에게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는 것 같기도 합니다. 역사를 공부하고, 세상을 조금 더 알게 되면서 안 보였던 것들이 보이기도 하니까요. 어쨌거나 경주는 참 아름답습니다. 경주가 견뎌 온 오랜 시간은 오늘의 무거운 마음들을 조금은 견디게 해주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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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드리 씨의 이상한 여행
마르크 레비 지음, 이원희 옮김 / 작가정신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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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의 리뷰는 두 가지 측면에서 쓸 수밖에 없겠다. 먼저 사랑 이야기. 올여름은 내게 <킹더랜드> 와 <이번 생도 잘 부탁해>이기도 했는데, 두 드라마의 종영이 남긴 헛헛함을 앨리스와 달드리씨가 완벽하게 채워주었다. (다 알면서도 속아줬다, 이번에도)(달드리씨와 구원, 문서하는 어딘지 모르게 닮았지)(누구라도 한눈에 반할 외모와 뛰어난 직업 능력을 가진 앨리스도 천사랑과 반지음을 자꾸 떠올리게 하고) 맞다. 이 이야기는 유쾌하고도 완벽한 신데렐라 스토리였다. 우리는 꽤 초반부터 달드리씨의 마음을 읽을 수 있지만, 여느 신데렐라 스토리를 읽을 때처럼 또 한 번 모른 척 지나간다. (그쪽만 셔츠에 양복 차림으로 쫙 빼입고 나는 동네 카페에나 쫓아온 사람 같은 몰골인데, 어쩌고저쩌고 투정 부리는 앨리스에게 "당신처럼 매혹적인 여성이 초대를 받아준 것만으로도 감지덕지인 사람한테 무슨 그런 말을. 당신은 눈길만 줘도 남자들의 관심을 독차지할 수 있는데 어떤 인간이 시간 낭비하면서 당신 옷차림을 보고 있겠어요? 그런 걱정 같은 건 접어두고 제발 맛이나 음미해봐요."라고 말하는 플러팅 장인 달드리씨)



다른 하나는 이야기가 품고 있는 시대와 공간인데- 1950년 12월이라는 시간적 배경은 2023년 8월, 한국에서 살고 있는 우리에게 썩 와닿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계속해서 시간을 환기시킴으로써 그때 그들에게 남겨진 전후의 아픔을 맡도록 했다. 그것은 1915년, 150만명의 아르메니아인이 오스만 제국 정부에 의해 체계적으로 집단 살해된 일이다. (여전히 집단 학살로 인정되고 있지는 않다고 한다) (그땐 너무 어렸고, 그래서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앨리스가 그 일을 전혀 상상할 수 없었듯이, 내게도 그 일은 쓰나미처럼 덮쳐왔다. 그 사이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앨리스는 꿈속 장면인 줄로만 알았던 기억을 만나 자리에서 얼어붙는다.


물론, 그때 그 사건이 아니더라도 앨리스와 달드리의 사랑 이야기는 재미있다. 하지만 하필 광복절에 이 소설을 읽은 것은- 독립을 꿈꾸었던 아르메니아인들과 한반도의 독립을 위해 목숨까지 기꺼이 내놓았던 우리 선조들을 한 번 더 생각하라는 하늘의 뜻은 아닐까. (앨리스가 미심쩍은 점쟁이의 말을 내치지 못해 기어코 튀르키예로 가야 했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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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몰 트라우마 - 삶의 면역을 기르는 자기 돌봄의 심리학
멕 애럴 지음, 박슬라 옮김, 김현수 감수 / 갤리온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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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몰 트라우마'란 뭘까요? 흔히들 이야기하는 트라우마가 큼직큼직한 사건을 기반으로 하고 있으니(이를테면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 같은 것), '스몰 트라우마'는 그에 반대되는 개념일까요? 굉장히 직관적인 느낌이라 이 책에서 개념화한건가, 싶었지만 사실 스몰 트라우마는 정신장애 진단 및 통계 편람에서 공식적으로 사용하는 정신 장애 진단 분류체계라고 합니다.(진짜 빅 트라우마, 스몰 트라우마라는 말을 쓰는 거더라고요. 우리가 상상한 바로 그 개념으로요!) '스몰 트라우마'는 우울감, 무기력증, 고기능성 불안장애 등의 형태로 우리 에너지와 잠재력을 서서히 고갈시키는 일상 속의 작은 위협을 의미해요.



그러니까 이런 거죠. "우울하긴 해요, 하지만 우울증은 아니에요." 네, 바로 그게 스몰 트라우마였던 겁니다. 말로 늘어놓자니 이런 이야기를 하는 내가 너무 속 좁은 사람처럼 보이고, 그렇다고 아무 말 안하자니 내 속만 타들어가는 것. 그렇게 별것 아니면서, 별것인 일들은 내 안에 쌓여 나를 갉아먹어요.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볼까요? 책에서는 미세 공격 스몰 트라우마라며 이런 예시를 들더라고요. 



-하지만 정말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는데!


-네가 자란 배경을 생각하면 아주 잘하고 있는 거지.


-그렇군요. 근데 원래는 어디 출신이에요?


-와, 그런 상태인데도 -를 할 수 있다니 굉장하네요.


-남편분은 안 계시나요?


-난 피부색 같은 거 신경 안 써.



예시를 살펴보니 어떤 게 미세 공격 스몰 트라우마인지 알 것만 같죠? 상대는 그냥 지나가면서 가볍게 툭, 던진 말일지 몰라도 듣는 입장에서는 때때로 생각나 머릿속을 어지럽히는 바로 그 말들입니다. 이런 말들은 만성적인 불쾌감을 낳아요. 이 책 <스몰 트라우마>는 '덜 중요한 스몰 트라우마는 없다'라고 분명하게 이야기합니다. 중요한 건 그게 별말이었냐, 별말 아니었냐가 아니라 그 말이 나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고, 그에 대한 당시의 감정이 아직도 유효한가라고요. 여기서 중요한 건 오직 나의 감정뿐이라고 말하는 이 책이 고맙기도 하고, 위로도 되었어요.



내가 이제껏 안고 살아온 상흔들은 나의 내일에 기필코 영향을 미칩니다. 하지만 이렇게 찾아오는 불편한 기분, 불쾌한 감정은 병원에서 치료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죠. 건강한 몸을 위해 건강한 음식을 먹어야 하듯, 우리의 삶을 소중하게 만드는 것은 작고 일상적인 일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인식하게 되었어요. (쓰고 보니 너무 뻔한 말) 마음이 좀 더 쓰린 날에는 <스몰 트라우마>와 함께 배포된 워크북을 써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내용을 살펴보니 음, 이런 거- 끄덕끄덕하게 되는데, 막상 쓰려고 펜을 들면 쉽게 쓸 수 있는 문항들이 아니더라고요. 그만큼, 제 안에 쌓인 미세 공격 스몰 트라우마들이 많다는 걸까요? (흑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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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승 인간 - 좋아하는 마음에서 더 좋아하는 마음으로
한정현 지음 / 작가정신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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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글은 놀랍도록 나와 비슷해서 자꾸 표지를 다시 보게 된다거나, 책의 앞면, 옆면, 뒷면을 살피게 된다. (어디서 누가 나 보고 있는 거 아니야?) "살아있을 때 재미있으면 좋으니까 '여러 이름'을 뒤집어쓰고 '여러 존재'로 환승하며 살아봐야지."라는 저자의 생각은 이름을 바꿔쓰는 것 빼놓고 평소 내가 매일같이 하고 다니는 말과 완전히 같다. (나는 계속해서 '박찬선'이고 싶은데, 이때의 '박찬선'이 하나의 이미지로 고정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안고 산다. 세모 모양의 박찬선과 네모 모양의 박찬선, 타원형의 박찬선과 육각형의 박찬선이 있었으면 좋겠다) 재미와 의미가 삶의 1순위인 나는 재미x의미 지수가 떨어질 때마다 더 재미있는 일, 혹은 더 흥미 있는 일로 환승해왔는데- 어쩐지 세상 모든 일에 멍해지는 순간이라던가, 세상 모든 일이 재미있어 보일 때는 난감해져 갈피를 못 잡고 방황하기도 한다. (그런 지점 역시 저자와 비슷해서 흠칫. 저자는 이런 순간을 '흥미 대출 정지 구간'이라 불렀고- 그래서 그녀는 소설을 직접 썼다. 재밌는 소설을 발견하지 못해서 쓰는 소설이라니. 정말 내 스타일이야!) 뭐, 언제는 안 그랬냐마는 또 한 번 흔들리는 시기라- 아주 강력한 안정의 삶을 살아보고 싶다는 책의 마지막 문장에 색연필로 밑줄을 긋기도 했지만- 우리는 안다. 이것이 진심이 아니라는 것을. (푸하하핳)


결국 내가 생각하는 사랑의 최초이자 최후의 환승지는 자기 자신이다.


정말 좋은 사랑이라는 기준은 다 다르겠지만, 나의 경우는 온전한 ‘나’가 남는 것이다.


오롯이 나로 환승하는 것이다.


본문 중에서, 69쪽


+ 저자와 내가 비슷한 종류의 사람이라는 것을 반복해 확인하면서, 그가 골라 소개해 주는 책들 역시 읽고 싶어졌다. 로베르토 볼라뇨의 소설 <부적>, 이인성 작가의 <한없이 낮은 숨결>, 마틴 러드윅의 <지구의 깊은 역사>, 차이밍량 감독의 <안녕, 용문객잔>도 곧 마주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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