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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의 철학자들 - 철학은 어떻게 정치의 도구로 변질되는가?
이본 셰라트 지음, 김민수 옮김 / 여름언덕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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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져야 할 것은 따져 물어야 한다. 따져야 할 것을 제대로 따져 묻지 않은 우리 사회의 현실은 어떠한가? 불신과 반목과 거짓의 병폐가 넘치지 않은가? 흔히 우리에게 독일은 달랐다. 독일은 아무래도 따져야 할 것을 제대로 따져 물었다고 알았다. 하지만 이본 셰라트의 이 책을 보면 여전히 제대로 묻지 않은 문제들이 남아 있었다. 어쩌면 단호히 따져 묻기 어려운 문제였을지도 모르겠다. 철학이라는 것이 그런 종류의 문제다.

 

이본 셰라트는 히틀러의 범죄에 부역한 철학자들을 추적하여 아직 그들에 대해 따져 물어야 할 것을 제대로 따져 묻지 않았다고 강조한다. 그 중점에 하이데거와 슈미트가 있다. 이본 셰라트는 이들을 주 타깃으로 하는 듯 하다. 하이데거가 히틀러 정권에 부역했다는 의심은 대중적으로도 많이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 혐의가 어느 정도이고 그것으로 인해 하이데거가 어떠한 처벌을 받았는지는 그리 알려져 있지 않다. 이본 셰라트는 하이데거의 과오가 큰데 반해 그 행위에 대한 처벌은 거의 없었다고 말한다.

 

이 책의 부제는 "철학은 어떻게 정치의 도구로 변질되는가?"다. 그렇다면 하이데거의 철학이 어떻게 정치의 도구로 변질되었는가를 따져야 하지 않았을까? 이본 셰라트가 들고 있는 하이데거의 부역의 증거들은 그의 편지들, 그의 글들, 그의 침묵들(히틀러의 반인권적 반학문적 반철학적 박해들에 대한)에 지나지 않는다. 그의 철학이 어떻게 히틀러 정권에 이용되었는지를 묻고 따져야 하지 않았을까?

 

하이데거의 과오에 대한 처벌이 적절하지 못했다고 지적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금에 와서 부관참시라도 해야겠다고 나서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 아닌가? 이 책을 읽으면서 이본 셰라트가 오늘날 이 히틀러의 부역자 하이데거가 얻은 철학적 지성으로서의 전세계적 명성이 못마땅해 하는 느낌을 받았다. 그렇다고 하이데거가 남긴 그의 철학사상을 폐기해야 할까? 그의 책을 금서로 지적해야 하는 걸까? 그것은 또한 히틀러의 방법과 무엇이 다를까?

 

나는 이본 셰라트가 더 정확히 따져 물어야 했다고 본다. 이 책의 부제처럼 말이다. 하이데거의 철학이 히틀러에게 어떻게 도움이 되었고, 이용되었는지를 조목조목 따져서 밝혀야 했다고 본다. 그것이 인정되었을 때 그의 철학은 자연스레 폐기되고 말 것이 아닌가? 그것이 아니라면, 그의 철학은 철학대로 두어야만 했다. 이본 셰라트가 지적하고 있는 하이데거의 오점은 그의 철학이 아니라 처세에 있다. 그런 점에서 '히틀러의 슈퍼맨'이란 칭호가 하이데거에 적절한지는 의문이다.

 

해켈은 범유럽 차원의 '일원론자 동맹(Monist League)을 결성하고 인간이 생물학 법칙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고 강연했다. 인종의 순수성에 대한 해켈의 집착은 갈수록 커졌으며 아리안 인종의 힘을 보호하기 우해 우생학을 제시했다. 생물학을 따르지 않는 사회는 약한 사회가 될 것이라고 해켈은 역설했다. 그는 아픈 사람의 수명을 연장하기 위해 약을 쓰는 것은 자연선택을 방해하는 행위라고 주장했다. 하층민, 병자, 장애인, 걸인, 부랑자, 범죄자에게는 현대의학과 번식할 권리를 허용해서는 안 된다. 더구나 이들 약자는 인간을 오염시키고 인간의 생존을 위협한다. 따라서 해켈은 대량 안락사를 주장했다.

"악으로부터의 구원은 고통 없고 효과 빠른 독약에 의해 완수되어야 한다."(96~7쪽)

 

해켈의 이 말도 안되는 우생학은 "훗날 국가사회주의의 핵심 전제"가 되었다. 오늘날 이 우생학은 폐기되었다. 해켈의 사상은 히틀러의 인종청소, 유대인 박해에 핵심 전제가 되고 그것의 타당성을 뒷받침하는 사상이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해켈과 그의 사상의 히틀러와 함께 종료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하이데가의 사상 또한 그러한가? 그것에 대한, 즉 하이데거의 철학에 대한 문제점을 이본 셰라트의 이 책이 적절히 지적하고 있지는 못한 듯 하다.

 

이 책에서 읽은 만한 대목은 차라리 제2부에 묶인 '히틀러의 적들'이다. 발터 벤야민, 테오도어 아도르노, 한나 아렌트 등 오늘날 그 이름도 찬란한 이 철학자들에 대한 이야기에 오히려 더 빠져들었다. 개인적으로 이 책은 앞부분을 제외하고 '히틀러의 적들'이란 제목으로 이 철학자들에 대한 자료를 보강하여 펴내는 것이 더욱 좋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오히려 이들이 '히틀러의 철학자들'이 아닐까? 반어적, 역설적 의미에서 말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는 강만준이 생각났다. 강만준의 책만큼이나 주가 많이 달려있다. 다양한 자료를 찾았다는 이야기인데, 이것은 달리말하면 이본 셰라트가 하이데가 등의 철학적 문제, 즉 그의 철학이 어떻게 변질되었는지를 논박하지 못하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은 아닐까? 곳곳에 흩어져 있는 인물의 행적을 추적하고 자료를 정리하는 능력을 보여줄 뿐이다. 그러하기에 위에서 말한 것처럼 히틀러의 적들이 어떻게 고통받았는지를 보여주고 있는 부분이 돋보이게 된 것이 아닐까?

 

이 책은 다큐로서 의미가 있다. TV프로그램으로 만들어 지면 더욱 좋았을 뻔 했다. 소설적 묘사도 제1부와는 그다지 어울리지 못했다. 오히려 제2부와 어울려 보다 감동적으로 읽히게 만들 뿐이다. 아쉬운 부분이다. 그러나 더욱 아쉬운 것은, 아니 부러운 것은 독일의 문제에서 아직 제대로 따져 묻지 못한 것이 철학의 문제 정도라는 것이다. 우리 사회가 더욱 한심해 보이기만 하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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