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련 전차 창비시선 264
손택수 지음 / 창비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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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작년 여름, 학교 구내서점엘 놀러 갔다가『목련전차』란 시집을 보고 집어 들었다. ‘목련’과 ‘전차(電車)’의 생소한 합성에서 오는 낯섦 때문이었을 것이다. 오늘날 ‘전차(電車)’란 낱말은 지하에 숨어버려 꼬부랑 어르신네들께서나 부르실 뿐이지, 요즘 사람들에게 ‘전차’라 하면 우선 전차(戰車)를 떠올리기 십상이다. 내가 먼저 떠올린 것이 이 전차(戰車)다. ‘이상도 하지!’ ‘목련’과 ‘전차’의 결합은 다분히 시적이면서도 뭔가 어울릴 법하지 못하다. 이 시집을 집어 들고 나와서는 꽤 오래 묵혀 두었다가 며칠 전에야 펼쳤다. 오래 묵혀둔 탓일까, 울림은 사뭇 커다랗다.


2.

  『장자』의 <응제왕>편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남해의 제왕은 숙(儵)이고, 북해의 제왕은 홀(忽)이며, 중앙의 제왕은 혼돈(混沌)이었다. 숙과 홀이 마침 혼돈의 나라에서 만나게 되었는데 혼돈은 그들을 극진하게 대접했다. 숙과 홀은 혼돈의 후의에 보답하고자 상의하기를, “사람들은 모두 7개 구멍이 있어 보고 듣고 먹고 숨쉬는데 혼돈만이 없다. 우리가 뚫어줄까 봐.” 하루에 구멍 하나씩 뚫어주었는데 일곱째 날에 혼돈은 죽고 말았다.(강조 필자, 우리말 번역은 이인호,『장자 30구』, 89쪽에서 가져 옴.)



  이 우언(우화)은 “인간의 이지(理智)가 깨이게 되면 오히려 이지의 속박을 받게 된다는 것”(이인호, 위의 책)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사람들은 모두 7개 구멍이 있어 보고 듣고 먹고 숨쉬”고 있다는 구절에 주목하려는 것이다. 여기서의 ‘구멍’은 생명을 지속시키는 하나의 수단이며 통로로써 인식된다. 우리 옛말에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할 때의 ‘구멍’도 속되긴 하지만 이런 ‘생명의 통로’란 인식과 다르지 않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란 속담에서의 ‘구멍’은 넓은 의미에 ‘생명’ 유지의 통로이겠다. 이렇듯 우리의 언습(言習)에서 ‘구멍’은 질긴 삶과 인생의 의미를 서민적으로 담고 있는 것이다.


화엄이란 구멍이 많다

구례 화엄사에 가서 보았다


절집 기둥 기둥마다

처마 처마마다

얼금 송송

구멍이 뚫려 있는 것을


  (…)


화엄은 피부호흡을 하는구나

들숨 날숨 온몸이 폐가 되어

환하게 뚫려 있구나    -「화엄 일박」부분.(강조 필자)


  홍용희는 <해설>에서 손택수의 시세계를 두고 ‘화엄의 견성’이란 말을 썼다. 견성(見性)이란 “모든 망념과 미혹을 버리고 자기 본래의 성품인 자성을 깨달아 앎”을 말한다. 견성성불(見性成佛), 곧 견성의 경지에 이르면 부처가 되는 것이다(成佛). 홍용희의 말처럼 “화엄 사상의 종지를 깨닫고 있는 것”이면서 “삼라만상의 우주적 존재원리를 체득하고 구현하는 화엄의 노래로 귀착되고 있”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구멍’이 “환하게 뚫려 있”음을 통해서 “들숨 날숨 온몸이 폐가 되어” 호흡할 수 있는, 즉 ‘살아 있음’, 생명의 존속이 가능하다는 것, 이것이 손택수에게 있어 ‘구멍’의 중요성이랄 수 있다. 손택수는 그 ‘구멍’ 있음으로 호흡하고 박동(搏動)하는 삶의 제(諸)모습들에 천착할 수 있는 것이다. 삶의 근원, 생명 유지의 가장 원초적 역할을 하는 ‘구멍’은 그의 시적 방향을 제시하면서, 이 시집에서 중요한 키워드로 기능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스윽, 제비 한마리가,

집을 관통했다.


  (…)


집이 잠시 어안이 벙벙

그야말로 무방비로

앞뒤로 뻥

뚫려버린 순간,


제비 아랫배처럼 하얗고 서늘한 바람이 사립문을 빠져 나가는 게 보였다 내 몸의 숨구멍이란 숨구멍을 모두 확 열어젖히고  -「放心」부분.


  ‘숨구멍’이 “확 열어젖”혀진 시적 화자를 떠올릴 때 우리는 그에게 삶의 활기를 되찾고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손택수에게 ‘구멍’의 열림은 생의 열림과 동일한 의미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작용은 ‘방심(放心)’함으로 가능한 것이다. 마음을 굳게 닫혀 있음은 ‘구멍’의 막혀있음에 다름 아니다. ‘구멍’이 막혀있다는 것은 호흡 불능, 소통 불능으로 이어질 터이다. 따라서 ‘방심’은 곧 마음의 ‘구멍’을 뚫는, 생명유지의 필수적 과정인 것이다.

  「혼쥐 이야기」에서는 ‘할머니’의 “사람의 콧구멍 속에” 사는 ‘쥐 두 마리’ 이야기가 나온다. 시인은 할머니의 옛이야기를 시속에 끌어 오면서 ‘구멍’의 이런 생명 유지의 수단의 기능이 옛이야기처럼 오랜 우리 삶의 지혜와 사상임을 강조하는 것일 수도 있다. “들숨 날숨 따라 들”고 나가는 쥐처럼 삶의 ‘구멍’은 어떤 조력자들이 있어야 뚫려질 수 있다.


3.

  앞에서 살펴 본 「放心」에서 ‘구멍’을 뚫리게 한 도우미는 ‘제비’다. 이 ‘제비’가 얼마나 고마웠을까? 시인은 ‘제비’에게 집을 빌려준다.(「제비에게 세를 주다」) ‘제비’는 어쩌면 “아무도 들어오려 하지 않는” 외로운 사람에게 유일한 소통의 존재일 수 있다. 세상의 고된 삶 속에서 ‘방심’은 불가능하고, 답답하고 꽉 막히는 현실에서 벗어나 ‘제비’와 소통할 때 ‘구멍’은 ‘뻥’ 뚫리고 삶의 호흡은 유지되는 것이랄 수 있다. 그래서 진정한 삶의 지속과 생명의 유지는 자연과의 호흡/소통/교류를 통해서 가능해 지는 것이다. 그의 시편들에서 이런 자연의 여러 모습들과 “구체적인 살림살이의 성정과 표정”(홍용희)들이 뒤섞이는 것은 이런 의미에서가 아닐까?


강이 휘어진다 乙, 乙, 乙 강이 휘어지는 아픔으로 등굽은 아낙 하나 아기를 업고 밭을 맨다


호밋날 끝에 돌 부딪는 소리, 강이 들을 껴안는다 한 굽이 두 굽이 살이 패는 아픔으로 저문 들을 품는다


乙, 乙, 乙 물새떼가 강을 들어올린다 천마리 만마리 천리 만리 소쿠라지는 울음소리―


까딱하면, 저 속으로 첨벙 뛰어들겠다  -「강이 날아오른다」전문.


  ‘강’과 ‘물새’와 ‘아낙’은 모두 乙의 모습으로 하나가 된다. 동일시되는 것이다. ‘들을 품는’ ‘강’의 아픔이나 “아기를 업고 밭을 매”는 아낙의 아픔은 다르지 않다. 이 모든 것을 ‘들어올’리는 ‘물새떼’는 세상의 아픔을 저 높은 하늘로 ‘들어올’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 시 속에서처럼 자연과의 교감은 ‘아낙’의 궂은 삶의 아픔을 가지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숨구멍’을 트이게 해주는 유일한 통로(구멍)이겠다. “나는 잠시 청둥오리 몸속에 있다 청둥오리 몸속 가장 깊은 곳에 닿았다 떨어진다”(「청둥오리떼 파다닥 멀어지기 직전」)는 이런 ‘구멍’ 뚫림은 한 방법인 것이다.


4.

  우리 인간들은 왜 이런 자연만물과 교감해야 할까? 세상적인 것에서 우리의 ‘숨구멍’을 뚫을 수는 없는 것일까? 인간은 7개의 구멍이 뚫려 세상에 나와 살아가면서, 천천히(어쩌면 무척 빠르게) 막혀간다. 우리가 태어난 날은 곧 죽음의 시작일 것이다. 세상은 그 구멍들을 서서히 막아가는 것이다. 죽음의 막힘을 세상의 여러 질곡(桎梏)을 통해 얻는 인간은 세상에서는 이런 ‘구멍’ 뚫림의 생명적 경험을 구할 수가 없는 것이다. “아무도 들어오려 하지 않는 단칸집”(「제비에게 세를 주다」)에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가난과 외로움의 막힘만이 있을 뿐이다.


스무살 무렵 나 안마시술소에서 일할 때, 현관 보이로 어서 옵쇼, 손님들 구두닦이로 밥 먹고 살 때


맹인 안마사들도 아가씨들도 다 비번을 내서 고향에 가고, 그날은 나와 새로 온 김양 누나만 가게를 지키고 있었는데


이런 날도 손님이 있겠어 누나 간판불 끄고 탕수육이나 시켜먹자, 그렇게 재차 졸라대고만 있었는데


그 말이 무슨 화근이라도 되었던가 그날따라 웬 손님이 그렇게나 많았는지, 상한 구두코에 광을 내는 동안 퉤, 퉤 신세 한판을 하며 구두를 닦는 동안


누나는 술 취한 사내들을 혼자서 다 받아내었습니다 전표에 찍힌 스물셋 어디로도 귀향하지 못한 철새들을 하룻밤에 혼자서 다 받아주었습니다


날이 샜을 무렵엔 비틀비틀 분화장 범벅이 된 얼굴로 내 어깨에 기대어 흐느껴 울던 추석달   -「추석달」전문.


  세상에서는 ‘신세 한탄’을 할밖에 “어디로도 귀향”할 우리의 안식처는 없는 것이다. 세상살이의 힘겨움을 보여주는 투사물로써 시인의 ‘구두’를 제시하기도 한다. “한쪽에 초라하게 낡은 한 켤레/…/상할 대로 상해 알아볼 수조차 없었습니다/뒷굽은 닳을 대로 닳았고 반짝이던 코는 무참히 깨어져 있었습니다”(「매제의 구두」) 이런 ‘구두’의 모습은 곧 우리들 자신의 모습일 것이다. 시인은 이런 우리의 삶, 곧 우리의 ‘구두’는 “죽음만이 벗겨줄 수 있네/죽음까지 껴 신고 가야 한다”(「살가죽구두」)는 사실을 명확히 인식하고 있다. 이런 삶에서 어떻게 진정한 생명의 ‘구멍’을 찾을 수가 있겠는가?

  시인에게 ‘좋은 세상’, 곧 진정한 생명의 ‘구멍’이 존재하는 세상은 “젊으나 젊은것들이 불알 두 쪽만 갖고도 연애를 걸 수 있는 세상”(「자전거의 연애학」)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그런 삶은 세상에 허락되지 않는 것이다.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은 “혼자서 살”수밖에 도리가 없다.


5.

  손택수의 시편들은 다분히 서정적이다. 생명의 근원인 ‘구멍’을 온 세상에 뚫고 다니는 그에게 가족과 세상 사람들과 산과 바다와 하늘의 모든 것들을 사랑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것이다. 내 주위 사람들의 막힌 구멍을 바라볼 때에 서글픔은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의 시편들에 짙게 깔린 애잔함은 그의 시를 깊은 서정으로 침전하게 하는 것이다.


아내의 빤스에 구멍이 난 걸 알게 된 건

단풍나무 때문이다

단풍나무가 아내의 꽃무늬 빤스를 입고

볼을 붉혔기 때문이다


열어놓은 베란다 창문을 넘어

아파트 화단 아래 떨어진

아내의 속옷,

나뭇가지에 척 걸쳐져 속옷 한 벌 사준 적 없는

속없는 지아비를 빤히 올려다보는 빤스


누가 볼까 얼른 한달음에 뛰어내려가

단풍나무를 기어올랐다 나는

첫날밤처럼 구멍 난 단풍나무 빤스를 벗기며 내내

볼이 화끈거렸다


그 이후부터다, 단풍나무만 보면

단풍보다 내 볼이 더 바알개지는 것은  -「단풍나무 빤스」전문.


  “아내의 빤스에 구멍이 난” 건 분명 세상의 가난 탓이리라. 이 시를 읽어내면서는 웃음짓게 하지만, 그 웃음은 다분히 씁쓸하다. “볼이 더 바알개지는 것은” 그런 가난의 질곡으로부터 오는 애잔한 슬픔이고 미안함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서정은 짙다. 그러나 그것은 깊은 감상의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는 것은 유머가 있어서이다. 쓰라림과 고통과 아픔과 슬픔을 유머로 풀어나가는 손택수의 재치에서 우리는 짙은 서정과 함께 언뜻 지나치는 웃음을 통해서 하나의 희망의 ‘구멍’을 뚫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시집에서는 시인의 뛰어난 시적 감수성과 재치, 그리고 친근한 옛이야기와 솔직한 고백, 다양한 소재로부터의 깨달음 등이 뒤섞이면서 그의 시편들을 아름답게 꽃피우게 한다. 할머니, 할아버지, 아내, 매제, ‘홀아비로 사는 내 늙은 선생님’ 등의 친근한 가족과 이웃에서부터, 하늘과 바다와 산과 강과 멀고 먼 우주에까지, 그리고 자연 속에 거하는 ‘물새떼’, ‘제비’, ‘청둥오리떼’, ‘메주’, ‘홍어’, ‘명태’ 등 많은 생명들이 담겨져 이 한 권의 시집으로 탄생되었다.


버스를 기다리던 할머니가 손주의 고추를 잡고 가로수 밑에서 오줌을 뉜다 마음처럼 시원하게 나오질 않는지 쉬―, 쉬―, 하고 이어지는 할머니의 오줌 뉘는 소리


화장실에 갔다가 오줌이 나오질 않아 머쓱해질 때가 있다 시가 반짝 떠올라 책상 앞에 앉았는데 한 구절도 씌어지지 않아 애를 태울 때가 많다 그때마다 떠오르는 할머니의 오줌 뉘는 소리


무슨 주술처럼 시―, 시―, 아득한 기억 저편에서 노루오줌꽃이 터져나오듯 망울망울 남은 한 방울까지 탈탈 털어주며 따로 노는 몸과 마음을 한데 이어주는 소리  -「오줌 뉘는 소리」전문.(강조 필자)


  그의 시는 이렇듯 세상 모든 것들, 자연의 모든 만물들을 ‘한데 이어주는’ 대소통의 ‘구멍’이 되고자 하는 것이다. 분명 이 시집의 시편들은 내 마음에 커다란 울림 ‘구멍’을 뚫어 놓고 말았다.


6.

나뭇가지에 코일처럼 감기는 햇살,

저 햇살을 따라가면

나무 어딘가에 숨은 전동기가 보일는지 모른다

전차바퀴 기념물 하나만 달랑 남은 전차기지터

레일은 사라졌어도, 사라지지 않는

생명의 레일을 따라

바퀴를 굴리는 힘을 만날 수 있을는지 모른다  -「목련 전차」부분.


  꽃놀이 철이 언제 왔는지 모르게 끝물을 맞고 있다. 아! 이 봄엔 꽃놀이 한번 못가 보는구나! 전차는 전차(電車)임이 분명해졌다. 전차(電車)는 ‘레일’을 잃어버려 더 이상 달리지 못한다. 막혀있는 것이다. 하지만 ‘생명의 레일’이 있어 그 길 따라 ‘목련 전차’, ‘꽃전차’ 타고 꽃놀이 가고 싶어진다. 가슴 깊은 ‘구멍’으로 꽃내음 깊게 들이마시면서 우리 생명 깊게 호흡하면서.

  손택수 시인은 1998년 『한국일보』신춘문예에 「언덕 위의 붉은 벽돌집」등이 당선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단다. 그의 첫 시집 『호랑이 발자국』을 최근 냉큼 구입했다. 이 시집을 읽고 난 후의 울림이 작용한 것이다. 내쳐 읊어볼 작정이다.

  알고 보니, 『목련 전차』를 내기 몇 달 전, 『바다를 품은 책 자산어보』(아이세움, 2006.)를 냈다. 유난히 바다 시편들이 많은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바닷가에서 오래 산 시인은 어떻게 바다와 ‘구멍’을 뚫어 호흡하는지 『바다를 품은 책 자산어보』의 머리말을 보면 훔쳐볼 수 있다.


한번은 거제도 앞바다까지 배를 타고 나가 낚시도 잊은 채 오르내리는 파도의 리듬에 몸을 맡긴 뒤 실컷 잠만 자고 온 적도 있다. 그때 내가 만난 파도의 리듬은 어머니 배에 배를 맞대고 젖을 빠는 아이처럼 근원적인 휴식감과 세계에 대한 밀착감을 선물해 주었던 것 같다.


  손택수라는 멋진 시인을 만날 수 있어서 행복하다. 요즘 같은 답답한 세상에서 손택수의 시편들은 우리를 숨 쉬게 하기에 충분할 것만 같다. 사람은 7개의 구멍이 뻥 뚫려 있어야 살 수가 있다. 우리 온몸의 생명 ‘구멍’들, 마음 ‘구멍’들을 ‘환하게 뚫’어야 이 험한 세상, 답답한 세상, 살맛나게 살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삶을 원하는 이들에게 손택수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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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7-04-13 09: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공하시는 분답게 시를 어쩜 이리 세밀하게 맛보시고 안내해주시는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