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 역사의 가장 위대한 수수께끼를 추적한 BBC 다큐멘터리
톰 라이트 지음, 이혜진 옮김 / 살림 / 2007년 2월
평점 :
절판


예수. 그는 누구인가? 새로운 약속은 이렇게 시작된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마태복음 1:1)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마가복음 1:1) 예수의 세계를 선포하는 이 새로운 약속(신약)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땅의 죄악된 영혼을 구원시킬 메시아, 구세주라는 것에 대한 절대적 믿음을 요구한다. 예수라는 이름에는 "그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은 필요치 않다. 다만 "그를 믿는가?"의 물음만이 필요했다. 누구도 그가 누구인가, 그가 누구이기에, 그가 무엇이기에, 그가 과연 어떠하기에 등의 물음을 가지는 것을 그리 달가워하지 않았다. 다만,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는 '믿음'의 대상일 뿐인것이다.

구약의 시작은 이렇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세기 1:1) 논리적으로 따지는 것을 원천봉쇄하고 있다. 어떻게 하나님이 이 천지를 창조할 수 있단 말인가? 하는 물음은 어리석다. 믿음이 부족한 것이다. 절대적 믿음을 첫장 첫구절에서 강요하고 있다. 이 시작을 받아들인다면, 성경 전체의 그 어떤 기사와 이적을 받아드리지 못하겠는가? 홍해를 가르는 기적은 '천지창조'에 비견될 바 못된다.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시고, 예수는 인간을 구원하신다.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고, 그 아들은 그 아버지와 동등하시다. 곧, 구약과 신약은 그 구조가 동일하다. 절대적 믿음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첫마디부터 내놓는다. 대단한 용기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이 잘못된 것이 아니다. 하나의 문학작품에서 첫장 첫구절의 시작은 무언가 강하게 다가오는 것이 효과적일 때가 많으니까 말이다. 성경을 찬찬히 읽어보면, 이해하지 못할바도 아니다. 그러나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이 기독교는 믿음을 강요했다. 성경의 독자에게 수많은 기사와 이적만을 보여주고, 그것을 아무런 거부감 없이 믿어야 구원받는단다.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한 논리적 이해(사실 이것이 쉬운 일이 아니지만)를 쓸데없는 것으로 곧잘 치부하곤 했다. 이것이 문제이다. 왜 하나님을, 왜 예수님을 이 땅의 신자들은 논리적으로 이해하고 따질 수 없는가? 신성모독에 해당하기 때문에? 그건 아니라고 본다. 차라리 신성 모독이라면, 신을 이해하는 것을 방해하는 것일 가능성이 더 높다.

나는 이 땅의 기독교가 예수에 대한 절대적 믿음만을 강요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진정한 믿음은 이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닐까? 예수가 보여주었던 그의 삶과 사상을 우리가 얼마든지 논리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본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이땅에 육화되어 온 것이 아닌가? 어리석은 인간들이 하나님을 알게하는 방법으로는, 인간적 방법인 논리적인 이해가 가장 적절한 것이다.

이 책 『예수』는 그런 논리적 이해를 가능하게 도와준다. 예수가 왜 이땅에 왔고, 그의 삶과 사상은 어떠하였으며, 성경의 내용을 충분히 따져보면 이해할 수 있어야한다고 말이다. 흔히들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기자가 단순히 손만을 움직였을뿐 그것은 하나님이 쓰신 것이기 때문에, 신께서 지으신, 무오류의 성스러운 책이라고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의 한 글자 빼서는 안되고, 어떤 의문이 있더라도 그것이 있는 그대로 믿어버려야만 한다고 말한다. 과연 그것이 올바른가?

난 아니라고 본다. 사복음서는 그 내용의 차이가 꽤나 많다. 그것을 우리는 대조해 보면서, 인간의 방법, 즉 역사적이고 실증적이며 논리적으로 따져보아야 한다. 그러다 보면, 각각의 복음서들에 저자들의 주과적 진술들이 보이게 된다. 마태가 신에 들려 저도 모르게 술술 써내려간 것이 마태복음이 아닌 것을 우리는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그럴 때에 진정한 예수에 대한 이해가 가능하다. 이러한 이해에 기반되었을 때 예수가 말하는 "반석위에 집을 짓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그로부터 나오는 것이 진정한 굳은 믿음이다.

이 책의 저자는 역사적 예수를 추적하면서, 당시의 시대상황과 역사적 요소들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인다. 또한 각 복음서의 집필자들이 그 복음서의 예상 독자들이 처해있던 상황들을 어떤 방식으로 고려하고 있었을까를 상정한다. 그럴 때에 복음서에 대한 적합한 이해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 얼마나 논리적이고 실증적인가? 과연 이 땅의 기독교는 예수를, 성경을 이렇게 이해하고 있었는가? 결코 아니다.

나는 이 책을 통해 우리의 예수에 대한 믿음의 방법이 달라져야 한다고 본다. 허무맹랑하게도 기사와 이적만을 보여주고 그걸 절대적으로 믿으면, 너희에게도 그런 기사와 이적이 이뤄질 것이라고 호도하는 이 종교가, 이제는 예수 '읽기'를 통해서 충분한 이해를 통해 반석위에 굳건한 믿음으로 세워져야 한다고 본다. 그렇게 이 책은 예수 '읽기'의 가능성을 열고 있다. 이것은 진정한 믿음의 가능성을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단숨에 읽고 깊이 음미해야 할 책, 이 책이 바로 그런 책이다.

* 사족
간혹 많은 분들이 내가 닉네임으로 쓰고 있는 '멜기세덱'이 무슨 뜻인지를 물어온다. 여기서 시원스레 알려드리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멜기세덱(Melchizedek) 구약에 잠깐 나타나는 아주 신비한 인물 중의 한 사람이다(창 14:18, 20; 시 110:4). 그러나 이 사람의 존재 속에는 오랜 세월 후에 이 땅에 오실 예수님의 모습이 선명하게 담겨 있다.
  아브라함은 조카 롯을 구하고 그돌라오멜과 여러 왕들을 물리치고 돌아오는 중에 그를 만났다. 그때 아브라함은 전쟁에서 얻은 노략물의 십일조를 그에게 바쳤다. 그때 멜기세덱은 아브라함에게 떡과 포도주를 주었다. 이것은 주님의 최후의 만찬과 예수님의 죽으심에 대한 상징이었다(창 14장 참조). 그 후 수천 년이 흐른 뒤 다윗은 오실 메시아에 대해서 예언하면서 멜기세덱을 다시 한 번 언급했다(시 110:4).

  예수님과 멜기세덱 :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님을 레위 지파나 아론의 자손이 아닌 '멜기세덱의 제사장'이라고 말했다(히 5:1-10; 6:20). 그리고 멜기세덱은 탄생, 아비, 어미, 족보, 죽음 등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는 아주 독특한 사람이라고 말했다(히 7:3). 이러한 면은 멜기세덱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멜기세덱의 신학적 평가
  신학자들은 멜기세덱을 놓고 오랫동안 씨름해 왔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멜기세덱을 역사적 인물이 아니라고 판정해 버리기도 했다. 그러나 멜기세덱에 대해 히브리서 기자가 초점을 맞추고 있는 부분은 그가 족보 없는 제사장이라는 사실이다. 1세기에 이 서신서를 읽었던 독자들은 인간의 족보에 대해 매우 큰 비중을 두고 있었다. 다시 말해 아론으로부터 내려온 완전한 족보가 없다면 그들은 아무도 제사장으로 인정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다른 종류의 제사장을 강조하면서 아론이나 레위 반열이 아닌 영원한 제사장 반열인 지극히 높은 제사장 멜기세덱을 바로 예수님의 반열이라고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히 7:4-10).
  또한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님은 제사장으로서 자신을 직접 희생 제물로 드려 더 이상 희생 제사가 필요 없게 만들었다고 설명한다(히 7:26-28).

이상 하용조 목사 편찬, 『비전성경사전』, 두란노, 371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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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07-03-17 08: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파울로 코엘료의 연금술사 앞부분에 멜기세덱이 잠깐 나와요. 분위기가 참 신비로웠어요^^

마늘빵 2007-03-17 14: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그런 의미군요. 음. 이 쪽 계열은 영 몰라서.

멜기세덱 2007-03-19 0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노아님> 전 코엘료를 읽지 않았거든요. 연금술사에 멜기세덱이 나온다? 신비롭다? 마노아님 때문에라도 읽어봐야 할려나....ㅎㅎ
아프락사스님> 제가 쓰이기에는 너무나 크죠! 이쪽 계열도 알고 보면 재밌을거 같아요..ㅎㅎ

Jeanne 2007-06-05 08: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은 '평신도 사역자양성' 이라고 해서 부지런히들 교육하고 있지 않나요?

흔히들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기자가 단순히 손만을 움직였을뿐 그것은 하나님이 쓰신 것이기 때문에, 신께서 지으신, 무오류의 성스러운 책이라고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의 한 글자 빼서는 안되고, 어떤 의문이 있더라도 그것이 있는 그대로 믿어버려야만 한다고 말한다.

이렇게 믿는 사람은 많지 않을 줄로 압니다... (전 학교에서 배웠지만요)
(태클 아니에요...;)

멜기세덱 2007-06-05 1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세요. '평신도 사역자양성'이 얼마나 성경해석의 다양성을 가능케 할런지는 의문이고요, 아직까지도 대부분의 평신도들은 성경의 '무오류'성을 곧이 곧대로 믿고있다고 판단이 됩니다. 성경 해석의 권위가 여전히 성직자들에게 있다는 것은 변함없는 사실입니다.